소설리스트

괴수처럼-260화 (260/287)

< [62화-3] 세계의 나무 >

‘...이상한데?’

한유일은 슬라리스의 질문에 답할 정신이 아니었다.

진심으로 좋아하게 된 ‘공극의 마녀’ 쏠비얀이 안 물어봐 줘서 그런 게 아니라!

한무일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다!

평소, 잠든 와중에도 강렬했던 숙주(宿主)의 존재감에 비하자면 이건, 아예 없는 취급 해도 될 만큼 미미했다.

변화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늘 시끌벅적했던 영혼석도 잠잠했다.

아니. 이건…?

『단절』

여전히 이마에 박혀있긴 했지만, 한 몸이란 기분은 들지 않았다.

억지로 붙어있는 것 같다고 할까?

그런 찜찜함과 이질감을 뒤로하고, 한유일은 백만마녀 슬라리스가 열어준 차원이동통로를 이용해서 함께 지구로 돌아왔다.

처음에는 모두 그러려니 했다.

선지혜를 포함한 여인들의 태도는 ‘또 쟤야?’라는 시큰둥한 반응. 하지만 그게 하루가 지나고 이틀, 닷새가 되면서 서서히 분위기가 급변했다.

“어떻게 된 거야, 예요!”

가장 먼저 폭발한 건 뜻밖에도 선지혜가 아닌 ‘유키나 미나미’였다.

수호자 ‘엑시리얼 온드미온’의 부재가 길어짐에 따라, 늘 불안감을 안고 살던 그녀는, 마지막 버팀목이나 다름없던 한무일의 감감무소식에 가장 먼저 무너지고 말았다.

필살기 후유증이 길어도 너무 길다!

에쏘드에 틀어박힌 한세리와 한유나도 반응이 없고.

그 ‘용사의 정령’들은 말했었다. 용사가 마기나로크를 ‘최대출력’으로 쓰더라도 며칠씩 탈진하는 경우는 없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이게 무슨 상황일까?

해명해줘야 할 정령들마저 침묵시위 중이니 환장할 노릇이다.

“그, 글쎄…?”

여자에 강한 ‘하렘의 왕’이었지만, 유키나 미나미의 박력과 처절함에 압도되어 뒷걸음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눈을 가늘게 뜨고 팔짱을 낀 채 자신을 노려보는 선지혜가 무섭다!

멀리 떨어진 거리에서 이곳을 주시하고 있을 문팽이와 배틀씹 때문에?

아니다.

가까이서 호위하는 고위괴수들 때문에!

최고의 방어력을 자랑하는 8종 괴수 쉬임프 수준은 아니지만, 소형이면서도 전투력은 7종쯤 되는 친위대가 어느 날부터 그녀를 졸졸 쫓아다니기 시작했다.

그 어느 날이란?

한유일이 ‘지구로 돌아온 날’이었다.

“거머리가 드디어 사고 친 걸까나~♬”

유키나 미나미보다 차분한 게 아니었다.

벌써 살짝 미쳐있었다.

선지혜는 진즉부터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수호자 문팽이를 통해 전해 들었다. 그저 실낱같은 희망을 안고 인내하고 있었을 뿐.

달팽이 왕은 말했다.

『요정의 왕이 죽었다.』

...라고 말이다.

흡혈귀 왕에게 완전히 흡수되어 영혼이 사라졌노라고.

뱀페스트에 감염되고도 정신을 멀쩡히 유지할 수 있도록 해주던 [혼돈]은, 한국의 8종 용신 ‘와이츠’가 개발한 신약(神藥)이다.

이 [혼돈]은 정신방어막 외에도 부차적인 효험이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이중계약!

그 최초는 ‘카르 4세’가 선보인 ‘에쏘드+가더발트’ 콤비였고, 이후에 본격적으로 에쏘스트가 활성화되며 ‘에쏘드+뱀페스트’가 당연시됐다.

여기에 유일무이한 신기록을 세운 한무일은...

삼중계약을 넘어 사중계약(에쏘드+가더발트+뱀페스트+듀크마)을 하며,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을 증명했다!

하지만 이 모든 근간이 되었던,

[혼돈]

이 약의 효과가 다하면서 파국(破局)에 치달았다.

한무일이 아무리 강력한 정신력으로 무장했더라도 기생한 존재도 만만치 않다.

무려 왕(王)!

세상에 단 하나뿐인 뱀페스트 왕이다.

지금까지는 에쏘드와 신약의 보조로 간단히 버틸 수 있었지만, 그 균형이 깨지면서 단번에 무너진 것이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

아니, 한유일은 짐작되는 부분이 있었다.

‘엉덩이에 박혔던 주삿바늘!’

무슨 성분으로 만들어졌는지는 모르지만, 할 일은 마친 주사는 수증기처럼 증발하여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탓에 환각으로 치부했다.

하지만 수상한 일이라면 오직 그뿐.

그 주사로 주입된 성분이, 몸속의 [혼돈]을 중화했던가 억제한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았다면 숙주가….

한무일이 죽을 리 없다.

죽여도 죽지 않을 것 같은 그 인간이 이리도 허무하게….

“...재미없어졌어. 이 세상.”

선지혜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그녀만이 아니다. 이 목포 시청사에 머물고 있던 ‘여성형 괴수’들의 분위기가 급변하며 그 전부가, 엘퍼러를 따랐던 추종자들이 살의(殺意)를 드러냈다.

누구에게?

다름 아닌 선지혜와 문팽이를 향하여!

생존을 최우선으로 하는 괴수들에게 있어서, 이 둘의 목적은 타협의 여지가 조금도 없었기 때문이다.

『세계멸망』

닷새면 아주 오래 버틴 것이다!

선지혜나 괴수들이나.

전조는 있었다.

그런 마음을 품고 있는 선지혜를 보호하고 있던 ‘문팽이 추종자’들! 이전에는 없었던 그 존재들이 밤새 그녀의 주위를 경계했다.

계속 ‘엘퍼러 추종자’들이 은연중에 그녀를 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선지혜가 죽으면?

배틀씹도 더는 문팽이를 돕지 않을 테니까!

역으로 적대할 것이다. 계약자를 지키지 못한 ‘무능한 왕’을 향한 보복조치로.

‘크, 큰일이다! 어쩌지?!’

한유일도 은근히 바라던 상황이긴 했다.

강력한 숙주가 죽고, 육신을 6시간이 아닌 24시간 자유롭게 자신이 조종하는 순간을!

하지만 이런 결말을 바란 건 아니다.

여기서 이 많은 ‘무서운 여자’가 충돌하면 대한민국만이 아니라 지구 전체가 초토화될 게 자명했으니까.

갈망하던 ‘하렘 왕국’은커녕 목숨조차 장담하기 힘들어진다.

무언가, 무언가 수를 써야 해!

그러나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본의 아니게 ‘죄인’이 된 그가 무슨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한유일이 체념하고 눈을 질끈 감았을 때였다.

“아저씨는 안 죽었어요!”

소녀의 외침이 끼어들었다.

최은비.

슬슬 숙녀가 돼가고 있는 어린 생명의 근거 없는 발언에, 고운 눈썹을 찌푸린 8종 용신 아쿠버스 ‘산드라미아 레미’가 차갑게 응수했다.

논리정연한 근거를 추구하는 용신으로서는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빠끔. 우리의 왕은 죽었노라.”

“안 죽었어요!”

“빠끔. 우리와 이어져 있던 끈도 완전히 끊어졌노라. 이건 명백히-,”

“아저씨는 안 죽었다고요!”

“...빠끔. 억지를 부린다고 현실이 바뀌진 않는다.”

흡혈귀에게 완전히 먹혔다.

에쏘드가 더는 저 육신을 따르지 않는다는 점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녀들이 따르는 대상은 ‘용사’니까.

완전히 ‘흡혈귀’가 된 한무일의 육체는, 에쏘드가 따지는 ‘용사의 조건’ 중 하나인 ‘인간 수컷’에서 동떨어져 있었다.

이 이상 검증이 필요할까?

그럼에도 최은비는 지지 않고 다시 한 번 외쳤다.

옆에서 페이 링이 어떻게든 말려보려고 해도, 이 ‘황제의 양녀(養女)’는 양부 못지않게 근거 없는 억지를 잘 부렸다.

딸이 안 좋은 점만 닮았네!

...그렇게 따지고 싶어도 들어줄 남자가 없다는 것이.

페이 링은 울고 싶어졌다.

“아저씨가 저를 책임져준다고 했어요!”

“빠끔. 그건 살아있을 때나 지킬 수 있는 약속이노라.”

“아저씨는 단 한 번도 약속을 어긴 적이 없어요!”

“......”

최은비의 마지막 반격에, 어리숙한 계집애의 투정을 찍어누르는 냉혹한 어른처럼 곧이곧대로 응수하던 용신도 말문이 막혀버렸다.

논리적이진 않지만, 어째선지 설득력은 있었던 까닭이다.

왕을 잃은 슬픔?

유감스럽게도 그런 감정은 ‘여성형 괴수’들에게 없었다.

맨 꼭대기에 자리한 9종 다미호 여왕부터 저 아래 2종 윈드걸스까지, 그녀들이 엘퍼러에게 품고 있던 감정은 ‘강한 수컷을 바라보는 암컷’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죽었다면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수컷일 뿐!

엘퍼러가 살아있을 때는 그 영향력 때문에 더한 감정으로 바라보았지만, 현재는 ‘괜찮은 수컷이었는데 아쉽네.’ 정도밖에 안 됐다.

“거참, 시끄럽네!”

쫑알쫑알 억지 부리는 계집애의 말을 들어주기 질린 선지혜가 드디어 폭발했다!

안 그래도 마음에 안 들던 참이었다.

최은비가? 아니.

힘들고 난해한 문제를 전부 선배에게 떠넘기고, 그걸로 모자라서 계속 일을 만들어내기만 하던 지구의 인류(人類)가!

어쩌다 이런 악몽이 찾아왔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이 쓰레기폐기물 같은 지구의 인간들이, 끊임없이 선배의 발목을 잡은 것이 ‘죽음’에 일조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몬스터월드에 왜 혼자 가야 했는데!’

지구인들이 무능하고 무관심했으며 이기적이었기 때문이다.

선지혜도 나름대로 노력했다.

이 지구의 머저리들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하며 끊임없이 독촉했다. 지구에서 더는 문제가 안 생기도록 힘써달라고.

엘퍼러에게 도움은 못 되더라도 최소한 발목은 잡진 말라는 뜻으로.

그러나 지구인들은 그렇지 못했다.

물론, 선지혜 본인도 잘못한 점이 있긴 했다. 엘퍼러에게 매일 출석도장을 찍으라고 억지를 부렸으니까.

하지만 그만큼 불안했기 때문이다.

이계에서 잘못되면 어쩌나 하고.

구우우우-.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벌레들을 짓밟고 유유자적 돌아온 이후, 목포 앞바다에서 꿈쩍 않고 있던 문팽이가 육지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엘퍼러의 추종자였던 괴수’들도 움직였다.

살기 위해!

이대로는 필패(必敗)이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문팽이와 배틀씹의 동맹관계를 끊어놔야 했다.

그 방법은?

『계약자 선지혜의 죽음!』

물론, 총력(總力)으로 따지면 문팽이와 배틀씹이 힘을 합치더라도 그녀들이 우세했다. 8종이 어디 한둘인가?

하지만 그건 ‘구심점(왕)’이 있었을 때의 얘기.

현재는 전부 따로였다.

바로 얼마 전까지 함께 싸웠던 사실이 거짓말처럼. 아쿠버스, 도끼토끼, 오니오프, 사요나락, 쉬임프 등의 고위괴수를 포함한 모든 ‘여성형 괴수’들이 전부 독립된 세력이었다.

임시협력조차 없다.

그녀들은 괴수.

전부(全部) 아니면 전무(全無).

왕과 계약자가 둘 다 없는 그녀들은 야생괴수나 다름없다.

쿠구구구…!

하지만 그때였다.

아쿠버스의 뿔에서 전기가 튀기고, 도끼토끼의 눈에서 빛이 번뜩였으며, 오니오프의 화염이 일대를 덮으려는 순간...!

한 박자 빠르게 전부를 집어삼킨 이적(異蹟)이 있었다.

“세상에….”

오직 ‘뱀페스트 왕의 계약자’란 명패만 단 채, ‘계약자가 아닌 평범한 여자’의 삶을, 제2의 삶을 만끽하고 있던 ‘최은설’은 창문 밖을 내다보고 할 말을 잃었다.

하늘이 사라졌다!

흙벽으로 완전히 뒤덮인 목포.

한 번 움직이면 멈추는 법이 없는 문팽이도 어쩔 수 없이 제자리에 설 수밖에 없었다.

선지혜가 생매장될 수도 있으니까!

새장처럼 도시를 감싼 저 흙이 한꺼번에 쏟아지면 괴수는 몰라도 평범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 계약자는 생사를 장담하기 힘들어진다.

이런 짓을 벌인 원흉은?

문팽이는 오랜만에 통역사 ‘판판 소’를 이용하여 분노를 표출했다.

“...비열한 정령이여! 대지의 아들이여! 감히, 짐의 행사를 방해하고도 무사할 줄 아느냐!”

그러자 대답이 있었다.

목포 시청사의 콘크리트 바닥을 뚫고 나온 흙 기둥에서. 그 솟구친 흙 일부로 빚어진 ‘20대 초반의 건장한 청년’의 형태를 한 인형이 말했다.

그 목소리는 동굴 속의 메아리처럼 옅은 울림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맑고 뚜렷했으며 감정마저 느껴졌다.

갑자기 참견한 ‘대지의 정령’은 단호했다.

“질긴 악우(惡友)여. 나의 ‘보석(寶石)’이 이 분쟁을 원치 않는다는데, 이 이상 무슨 이유가 더 필요하단 말인가?”

“...저런 미숙아의 어디가 좋단 말인가!”

“두고 봐라. 너의 저 정신 나간 보석보다 더욱 찬란한 빛을 뿜어낼 날도 멀지 않았으니.”

잠자코 상황의 추이를 지켜보던 여인들이 있었다.

그중 둘이 대표처럼 중얼거렸다. 목포를 흙으로 뒤덮고 문팽이의 진격을 막은 ‘정령의 정체’에 대해.

인펠리아 제국의 황녀, 흑발마녀 ‘에르티나 페르시 인펠리아’.

전(前) 북해빙궁 궁주, 웨딩풍 계약자 ‘아이밍 리’.

각자 사는 차원의 언어로 말이다.

“광군(狂君) 해모수!?”

“토신(土神) 올란드….”

< [62화-3] 세계의 나무 > 끝

ⓒ 파르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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