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화-2] 세계의 나무 >
콰광! 쾅!
파괴의 행렬이 계속됐다.
라그나뢰크 클론들은 앞서 도망치고 있는 존재를 맹렬하게 추적하고 있었다. 당연히 그 앞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전부 부수며 나아갔다.
게다가 슬슬 포위망도 좁혀지고 있었다.
그 틈새로 끼어든 엘퍼러는 클론들을 앞질러서 단숨에 그 목표물에 접근했다.
“여자…?”
평범한 여성은 아니었다.
저 뒤에서 맹렬히 추적 중인 클론들처럼 에테르 날개를 달고 있었다. 차이가 있다면 남성이 아닌 유일한 여성이란 점.
하지만 느낌이 비슷했다. 머리카락과 피부, 눈동자 색깔 등이 남매처럼 일치했다. 심지어 이목구비도 턱선이 더 갸름하다는 걸 제외하면 비슷했다.
“아!”
마찬가지로 엘퍼러를 발견한 여인은 망설이지 않고 쭉 돌진했다.
공격…?
칼자루에 손을 뻗으려던 엘퍼러는 멈칫했다. 적의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걸 증명하듯 여인은 그의 품에 폭 안긴 후에 움직임을 멈췄다. 하지만 남자의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미세한 떨림은 계속됐다.
두서(頭緖)없는 결과였지만, 엘퍼러의 행동은 정해져 있었다.
이 여자가 흉악범이고 저들이 착할 가능성?
있더라도 무작정 말도 없이 공격해오는 저 클론 무리에게 선의를 베풀 이유는 없었다.
‘과연….’
하나일 때는 몰랐지만, 여럿이니 무척 까다로웠다.
애초에 엘퍼러는 마신 라그나뢰크의 ‘흡수’ 능력으로부터 자유로웠다. 그렇기에 차라리 그 능력에 의존하지 않고 숫자로 밀어붙이는 저들이 더 상대하기 힘들었다.
엘퍼러의 눈이 가늘게 떠졌다.
클론이란?
원래, 오리지널보다 약한 게 상식이다. 아니, 이조차도 편견일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엘퍼러는 그래야 정상이라고 생각했다.
이들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됐으니까.
실전경험이 신생아 수준으로 턱없이 부족해야 맞다.
“네놈들은…?”
전투 중에 말을 잘 안 하는 엘퍼러였지만, 의문을 담아 한마디 안 할 수 없었다.
이들의 움직임은 엘퍼러의 예상을 아득히 넘어섰다.
절대 초보가 아니다!
노련한 사냥꾼처럼 어느 하나 부족한 구석이 없었다.
검술이면 검술, 기교라면 기교….
모든 면에서 ‘엘퍼러’를 뛰어넘고 있었다.
살짝 뒤늦게 [예감]이 맹렬히 경고하기 시작했다. 아니, 저들이 본격적으로 그를 ‘적대(敵對)’하고 ‘경계’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렇게 된 것이다.
“죽어라.”
“방해하면 죽일 뿐.”
심지어 말도 할 줄 알았다.
한마디만 반복하는 꼭두각시 느낌이 아니라 너무나 자연스러운 발음.
이걸로 명백해졌다.
‘이건 정밀하게 프로그래밍 된 클론이다!’
가상현실세계의 주민에게 ‘설정’을 삽입하여 1초 전에 창조됐어도 수십 년을 살아온 노련한 인물처럼 보이게 하듯이.
이 클론들도 마찬가지였다.
완벽한 기억을 주입함으로써 완벽한 생명체가 되었다. 단순히 대량생산된 모조품으로 취급할 수 없는 고품질.
그 증거가 싸움의 양상으로 드러났다.
“쏠비얀! 이 여자를-!”
품에 안고 있는 여자를 계속 끌어안고 싸울 수 없었다. 그만큼 클론들은 강했다!
하나씩 덤볐다면 이길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여럿이, 그것도 수백이 오랫동안 손발을 맞춰온 것처럼 연계하니 답이 안 보였다.
아직 하나도 쓰러트리지 못했다는 게 그 증거.
너무나 상식을 파괴한 전투 양상에, 끼어들지도 못하고 있던 쏠비얀은 엘퍼러의 지시대로 여자를 공간이동 하여 인계받았다.
하지만 그게 좋은 선택인 건 아니었다.
공극의 마녀도 클론들의 표적이 되었던 까닭!
“크아앙!”
주인의 위기에 반응한 사역마 ‘어비스트’가 공간을 넘어 그녀의 앞에 당당히 섰다.
하지만 그 공간을 지배하는 ‘8종 사자’는 ‘3초’에 지나지 않았다.
마신 라그나뢰크 클론들이 창으로 어비스트를 난도질하기까지 걸린 시간! 하지만 그 3초가 마녀의 목숨을 구했다.
쏠비얀은 여자를 데리고 그곳에서 사라졌다.
침착하던 클론들도 이 순간만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눈살을 찌푸리며 일이 뜻대로 안 풀렸음을 표현했다.
오리지널과 마찬가지로 ‘마법’은 쓸 수 없는 것이리라.
하지만,
“네 녀석만큼은 놓치지 않겠다.”
“곱게 죽을 생각은 포기해라.”
육체적인 능력은 마신 라그나뢰크와 동급. 설상가상으로 그 육체를 다루는 숙련도와 기교는 오리지널보다 몇 수 위였다.
이것이 프로그래밍 된 완벽한 지식이전의 결과.
서서히 밀리고 있다.
놈들은 단순히 주입된 정보대로 움직이는 게 아니었다. 이 순간에도 괴수처럼 고속으로 학습하고 있었다.
그건 엘퍼러도 마찬가지.
하지만 똑같이 ‘성장’하면 쪽수가 많은 쪽이 압도적으로 유리할 수밖에 없다.
이미 [예감]은 그 어느 때보다도 맹렬히 울리는 상태. 그나마 이게 아니었다면 진즉 꼬치구이가 됐으리라.
이것만큼은 클론들도 못 따라잡아서 다행이다.
‘방도를 찾아야 해!’
후퇴는 있을 수 없다.
마신 라그나뢰크처럼 마법에 대한 내성이 강한 이런 괴물들이 쳐들어가면 버틸 수 있는 나라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마신의 죽음이 이런 일을 초래할 줄이야!
엘퍼러가 밀리고 있기 때문일까?
교도소장이 젖가슴을 괴롭힐 때를 제외하고는 유유자적하던 ‘영혼석의 마녀’들이 머리를 맞대고 빠르게 의견을 주고받았다.
그가 죽으면 자신들의 운명도 장담할 수 없으니까.
결론을 내린 마녀가 외쳤다.
<이대로는 져요!>
<최초의 마신, 위그드라실. 이 세상의 그 어떤 생명체보다도 지혜로운 신. 뛰어난 책사에게 강력한 군사가 생긴 이상, 승산이 없어요.>
<후퇴해야 해요! 엘퍼러!>
수많은 상처와 피해가 누적되고 있었다.
치부를 가리는 용도에 지나지 않긴 했지만, 그래도 수백억에 달하는 값비싼 옷은 이미 종잇장처럼 찢어지고 없었다.
그렇게 드러난 엘퍼러의 알몸.
평소의 그 탄탄한 근육질 체형이 아니었다.
마치 괴수처럼….
피해가 누적됨에 따라 몸이 쪼그라들고 있었다.
치명적인 공격으로 떨어져 나간 신체 부위만큼 축소되어 육체가 재구성되는 것이다.
‘무일!’
초조감을 감추지 못하고 한유일이 외쳤다.
최근에 이랬던 적이 있던가?
회귀본능이 제대로 적용되고 있음을 깨닫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만약, 회귀본능이 없었다면 진즉 죽었으리라.
흡혈귀의 생존력으로 버티기에는 클론들의 창술은 지독할 정도로 매서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젠 회귀본능으로도 어쩔 수 없는 단계에 접어들고 있었다.
후퇴?
놈들은 몸을 뺄 틈을 주지 않았다. 공간이동이나 차원이동을 할 최소한의 시간도 허락하지 않았다.
엘퍼러를 위해 희생할 괴수도 없고.
어떻게든 이 자리에서 끝장을 봐야 했다.
‘질질 끌수록 불리하겠군.’
‘도시로 가자! 마녀들이 합세하면 시간을 벌 수 있다!’
‘유일. 진심으로 하는 소리냐?’
‘죽는다! 미소녀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죽게 생겼다!’
마신 라그나뢰크도 수월하게 쓰러트렸던 엘퍼러.
그 때문일까?
슬슬 몬스터월드도 만만하게 보고 있던 게 사실이다. 그래서 도움 요청에 순순히 응했고, 마신 위그드라실의 준동에 참견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자만에 빠진 건가.’
사냥꾼에게 자만은 독.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슬슬 과다출혈로 정신마저 혼미해졌다. 머리나 심장을 얻어맞고 즉사하지 않은 게 용하다고 할 정도였다.
마신 위그드라실이 저들에게 전해준 ‘최고급 창술’과 ‘능수능란한 기교’ 등을 빠르게 훔쳐 익히고 있지만, 클론들은 숫자가 많았다.
엘퍼러가 ‘다섯’을 배울 때, 저들이 ‘하나’씩만 배워도 감당이 안 되는 것이다.
“네가 그 이계의 황제로군.”
“마신 라그나뢰크를 쓰러트렸다는 존재.”
“네 덕분에 아슬아슬했던 힘의 균형이 깨졌다.”
“아무도 나를, 우리를 막지 못한다. 이 위그드라실을.”
마신 위그드라실이 빙의된 클론들이 선언했다.
그 삼류악당 같은 대사에도 엘퍼러는 대꾸할 틈이 없었다. 녀석의 발언처럼 막을 방도가 없었고 슬슬 한계에 접어든 까닭이다.
이젠….
쓸 수밖에 없었다.
『마기나로크』
클론들을 여기서 제거한다고 해도 또 불어날 것이다.
하지만 엘퍼러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이것이 마신….’
자신의 힘만 믿고 무작정 날뛰던 ‘마신 라그나뢰크’ 같은 녀석도 있지만, 이렇게 지능적으로 싸우는 존재도 있었다.
아마, 순수한 무력 면에서는 위그드라실이 라그나뢰크보다 약했을 것이다.
그 어떤 뛰어난 클론을 만들어내더라도 ‘라그나뢰크의 손’을 당해낼 수 없었을 테니까. 빛마저 빨아들이는 힘을 상대로 뭘 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 존재가 죽었다.
심지어 육신의 파편도 남긴 채.
마신 위그드라실은 이 천금 같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우웅-!
에쏘드가 빛나기 시작했다. 준비된 마신을 상대로 더는 망설일 수 없었다.
이 뒤는 [예지]로도 읽어낼 수 없었다. 그런 부차적인 능력에 할애할 만큼의 ‘괴수의 피’도 남아있지 않았으니까.
뒷일은 모른다.
엘퍼러는 정말 오랜만에 ‘사냥꾼’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그때는 항상 이랬다. 위험천만한 괴수에게 무작정 돌진하고 보던 자신. 안 좋은 [예감]에도 불구하고 그 위기로 뛰어들곤 했었다.
대책 없었다고 할까?
되짚어보면, 그때 살아남은 게 참으로 용하다.
‘불길하게 주마등 따위는 하지 마라! 무일!’
‘...최대출력으로 간다! 이 일대에 나를 제외한 그 무엇도 남지 않도록! 그러니 유일. 내가 깨어날 때까지만 버텨줘.’
‘킁. 또 어려운 일을 떠넘기는군.’
한유일이 없으면 이런 시도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새삼 고마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본인은 ‘실수투성이’라고 자책하지만, 저 클론들처럼 처음부터 프로그래밍 된 게 아니라 ‘신생아’ 수준부터 차근차근 배워간 그는 정말 잘해주고 있었다.
이제 겨우 1년을 넘어 2년을 향해가는 중이다.
훗날, 이 시간이 쌓이고 쌓여 100년, 200년이 된다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파트너’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너무 걱정하지 마. 원군이 멀리서 대기하고 있으니.’
‘원군?’
‘백만마녀.’
‘아! 지구에 있던 거 아니었어?’
‘하지만 마신의 일. 무책임하게 다 떠넘길 순 없었던 거겠지.’
엘퍼러가 탈진한 직후에, 슬라리스가 발 빠르게 구출해줄 것이다.
이 전투에 가담하지 않은 점에 대해선 추궁할 생각이 없다. 그가 제삼자 입장에서 이 전투를 보았다면 도저히 끼어들 엄두가 안 났을 테니까.
마신마저 쓰러트린 존재가 속수무책으로 밀리는 전투.
무턱대고 끼어들어 봐야 개죽음이다.
물론, 사역마 ‘어비스트’의 희생은 ‘3초’를 벌어 주인을 탈출시켰다는 점에서 나름의 값어치가 있었지만.
보험까지 이중으로 되어있다.
한유일, 슬라리스.
더는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마기나로크-!”
웅장함이나 비장함, 처절함 따위는 일절 없었다.
낙서한 공책을 지우개로 지우듯이 무미건조한 결과만 남을 뿐.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기세등등하던 클론들. 그리고 그 뒤에 도사리고 있을 ‘마신 위그드라실’은 그냥 필름이 끊긴 기분이리라.
그냥 사라졌으니까!
지우개로 박박 지우면 종이가 너덜너덜해지는 것처럼, 깔끔히 밀어버리진 못했지만, 적어도 이 근처에 적대적인 생명체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제….
졸음이 쏟아진다.
한무일에서 한유일로 전환되려 한다.
사실, 가장 취약한 시기는 이때일 것이다.
“이건…?”
그래서 반응하지 못했다. 아예 보질 못했다.
저 하늘에서 쏘아진 무언가를.
약물투과용 주삿바늘처럼 생긴 그것은 정확히, 엘퍼러의 엉덩이에 박혀있었다.
“왕자님. 괜찮으신가요?”
슬라리스의 음성이 멀게 느껴졌다.
이에 답해주기는커녕 끝까지 듣지도 못한 한무일은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마기나로크를 쓴 직후에 늘 그랬듯이.
하지만 이전의 탈진하고는 무언가 달랐다.
< [62화-2] 세계의 나무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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