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처럼-257화 (257/287)

< [61화-5] 고대의 일면 >

수많은 차원이 한 여인의 결정으로 인해 완전히 변했다고 한다면 몇 명이나 믿을까?

이런 설명은 뭔가 막연할 것이다.

그럼, 수천억 명이 죽었다고 한다면?

마찬가지로 잘 상상이 가지 거다. 시야 한가득 담을 수 있는 머릿수라고 해봐야 끽해야 수천 명쯤 될 테니까.

그만큼 터무니없다.

“정말….”

기존의 생태계에 있지도 않던 포식자의 예고 없는 등장으로, 억울하게 죽는 사람들이 셀 수 없이 많다.

그게 한 여인의 소행이라면?

유원지에서 대책 없이 ‘호랑이 우리’를 열어준 사육사에게 죄가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엘퍼러는 뭐라 형용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일이 이렇게 커질 줄은 몰랐는데요.”

슬라리스는 이마를 문지르며 대답했다.

엄살떨면서 동정표를 얻고 싶은 모양이지만, 이미 마법으로 말끔히 치료했음을 이 자리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과거의 잘잘못을 따져서도 끝도 없다.

엘퍼러는 그런 시간 낭비를 원치 않았다.

“차원을 못 넘도록 할 방법이 있습니까?”

엘퍼러가 언제 침공해올지 모른다는 경각심에 사로잡힌 몬스터월드의 나라들. 덕분에 괴수들이 도시를 공격하는 횟수도 뜸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사라진 것도 아니며, 언젠가 다시 침공해올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다.

엘퍼러는 완전히 그걸 차단하길 원했다.

슬라리스는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대답했다.

“나의 왕자님. 이미 당신의 마법은 저와 동급. 당신이 무리라고 판단한 대부분이 저로서도 무리랍니다.”

“그 왕자님이랑 호칭은 좀….”

“흐응~. 그럼 폐하 쪽이 더 익숙하신가요.”

지금처럼 어영부영 시간을 보낼 순 없었다.

이 마녀의 유희를 깨운 것도 지금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아니던가. 이미 나라들은 한계에 봉착했다.

중국은 많이 나은 편이지만, 대부분 국가가 이 1년을 못 견디고 무너질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끊임없는 소모전이었으니까.

도시로 침공해오는 수많은 고위괴수를 막는 건 전부 수호자.

그 수호자가 죽으면 다시 보충하기가 대단히 어렵다. 엘퍼러 같은 ‘강압’적인 수단이 없고서는 기나긴 시간과 운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로군요.”

“나라들을 하나씩 점령 중이시라고요?”

“네.”

“마신 라그나뢰크도 쓰러트리셨고.”

“네.”

“저와 결혼해 주세요.”

“거절합니다.”

“치~.”

슬라리스는 돌아갈 마음이 전혀 없는 것 같았다.

그녀만 돌아가 줘도 마신들이 좀 더 잠잠해질 뿐만 아니라 오만무도한 하인들도 얌전해질 터인데, 이 대마녀는 꿈쩍도 안 했다.

이유를 물어보면 ‘다 아시면서 짓궂으시긴.’ 같은 애교스러운 답변 뿐.

또 물어서 같은 양상을 보였다간 선지혜가 폭발할 것 같아서 권하는 건 자재 중이었다.

‘이 여자가….’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지구의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아니, 운명을 완전히 뒤바꿔놓은 ‘괴수침공’이 모두 이 여자의 소행이었다는 것을.

어디 그뿐이랴?

마녀들의 권익을 살리기 위해, 마법으로 동식물에 ‘본능’을 심음으로써, 계약자가 탄생할 수 있었다.

만약, 계약자가 없었다면?

지구에 인간은 거의 남아있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원시 부족 수준으로 전락하던가 아예 멸족했을지도 모른다.

맨몸의 인간은 그만큼 나약하니까.

원흉

슬라리스가 있었기에 모든 사건이 시작됐다.

그녀가 지구로 피난 왔기 때문에 ‘2차 괴수침공’도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괴수가 더 늘어난 것뿐이라고 쉽게 생각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가상현실게임이 막히면서 사람들은 ‘100년 전 이후로 최악의 암흑기!’라고 한다. 겨우 게임 좀 못하는 걸로 거참!

아무튼, 그런 여자.

모든 일의 시간과 발단이 된 존재.

그 백만마녀 슬라리스는 집에 안 돌아간다고 버티는 중이었다.

“하인들이라도 단속해주십시오.”

“아! 그거라면 어렵지 않아요. 그들의 몸에 안전장치를 심어뒀거든요.”

“흐음…. 폭탄 같은 겁니까?”

“말을 안 들으면 고통에 시달리는 마법입니다. 견디기 대단히 힘들죠. 거기를 망치를 후려친 것 같은 고통이라고 합니다.”

“......”

“저는 남자가 아니라서 그 고통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지만요.”

생각보다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하지만….

모든 일이 뜻대로 되는 건 아니다. 아니, 이번 경우에는 시작부터 막혔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신호만 보낼 수 있을 만큼 약간 차원을 연, 차원의 틈새로 마법 신호를 전송하던 슬라리스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엘퍼러가 눈을 가늘게 뜨며 채근했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네. 그…. 하인들이 풀어버린 것 같아요. 흠. 아니, 보물창고에 있던 갑옷으로 신호를 차단했다는 게 더 맞을까요.”

“아!”

마법에 대한 저항력이 대단히 강했던 황금 갑주.

제국에서 가장 강력한 마법 실력을 보유한 황비의 마법마저 통하지 않는 그 무지막지한 갑주를 입었다면 그럴 만도 하다.

슬라리스도 살짝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하니, 그 멍청한 하인들이 감히, 감히 자신의 보물창고를 건드릴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이건 반란이에요! 멍청이들 주제에!”

“...그걸 이제야 아셨습니까?”

“하지만 말이 안 돼요. 그들은 하인들인걸요. 으으…. 너무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걸지도 모르겠네요.”

“그럼…?”

“아니요. 그래도 안 돌아갈래요. 엉망진창이 된 집을 보고 싶지 않아요. 아얏?!”

“어린애처럼 투정부리지 마시고 가십시오.”

아프다고 칭얼대던 슬라리스를 설득하는 데 살짝 애를 먹었다.

결국, 그녀의 목적은 ‘왕자님과 데이트 약속 잡기’ 같은…. 어느 3류 드라마나 동화에 나올 법한 것이었다.

그 목적을 성취한 후에야 빠릿빠릿하게 움직였다.

이제야 좀 ‘지고의 마녀’ 같다고 할까.

눈빛도 신중해지고 조금은, 아주 조금은 위엄과 지혜마저 엿보였다.

“카르쉘의 잘못은 주인인 제가 관여할 이유가 없군요. 하인들의 반란과 독단적인 행동. 묵인할 마법은 없지만, 이에 대한 책임을 제가 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흐음….”

“저도 피해자입니다. 물론, 방심하다가 당한 제 잘못도 일부 있음을 부정할 순 없지만, 하찮은 하인들에게 당한 마녀에게 보상해줄 이유도, 의리도 없다고 봅니다.”

남자에게 당한 여자가 바보!

여자가 사내들보다 우월하다고 굳게 믿는 마녀다운 발언이었다.

개미에게 물리고 징징 짜지 말라는 말투.

그 개미들이 ‘사기적인 아이템’으로 무장했다는 부분만 쏙 빼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런 부분을 일일이 따지지 않았다.

당장은 하인들을 정리하는 것부터가 우선이니까.

“어서 가시지요.”

“...아니요. 그것도 여기서 해결하겠어요. 만약, 하인들이 전원 갑옷을 착용 중이라면 ‘자폭’ 시키면 그만이거든요.”

“자폭….”

“보험이죠. 제 보물창고가 누군가에게 털렸을 경우를 대비한. 마법과 물리 저항이 그렇게 높은 갑주는 저에게도 조금은 부담스러우니까요.”

엘퍼러의 마법마저 밀어낼 정도로 대단하긴 했다.

그렇다면 슬라리스의 마법에도 내성이 있다고 보는 편이 맞으리라.

그건 대단히 위협적이다.

엘퍼러는 마법 외에도 믿을 만한 육탄공세와 검술이 남았고, 실제로 그 방법으로 카르쉘은 제압했지만, 마녀인 슬라리스는?

오직 마법으로만 상대해야 한다.

그러니 당연히, 자신의 작품을 빼앗겼을 경우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빨리하십시오.”

“기다려주세요. 현재 아르테르 행성은 밤이랍니다. 남녀가 옷을 벗고 뜨거운 시간을 보낼 때에요.”

“......”

“또, 또 꿀밤 때릴 것처럼 노려보지 마세요! 하인들이야 죽어도 상관없지만, 그들의 발작에 마녀들이 휘말려서 죽을 수도 있다고요.”

마녀가 아무리 강해도 그건 마법에 국한된 얘기.

육체는 지구와 다를 게 없는 나약한 여인이다.

남자가 억세게 손목을 비틀면 비명을 지르고 눈물을 흐릴 수밖에 없다. 그리고 고통에 익숙하지 않은 대부분 마녀는 그런 상태에서 마법을 쓸 수 없다.

하인들의 발작에 속수무책으로 휘말릴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흐음….”

“그래도 조치는 했어요. 만약 갑옷은 벗고 있다면 지금쯤 숨이 막힐 것 같은 고통에 시달리고 있을 거예요.”

“미리 갑주를 파괴할 수도 있잖습니까.”

“...그러면 안 죽잖아요. 일일이 찾아다니며 죽이는 건 대단히…. 어머! 방금 발언은 잊어주세요. 저는 파리도 못 죽여요.”

“......”

인제 와서 뭔 내숭?

하지만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았다.

그저 맥이 빠질 뿐.

엘퍼러가 ‘마신 라그나뢰크’를 쓰러트렸다는 사실을 알고부터 백만마녀 슬라리스는 대단히 여유로워졌다.

여름방학이 시작된 아이처럼.

아니, 퇴직금을 받고 일찍 은퇴한 아가씨 같다고 할까.

“제 세계를 부탁해요.”

“여보세요. 슬라리스 양. 떠넘길 게 따로 있지, 지구의 400배나 되는 행성을 떠넘기면 어쩌자는 겁니까.”

“...저는 지쳤어요. 수천 년 동안 외면해온 남자의 단단한 가슴에, 넓은 어깨에 몸을 기대고 싶을 만큼.”

사람뿐 아니라 모든 생물이 그럴 것이다.

어쩔 수 없을 때는 정말 아무 생각 없이 하다가, 다른 방도가 생기면 딴생각을 품게 된다. 그리고 긴장감이 탁 풀리며 그동안 묵혀둔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온다.

늘 중압감에 시달려야만 했던 백만마녀.

마녀들에게 ‘사역마’를 전해준 자신의 판단이 잘못됐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로 인해 준동한 마신들에 대한 책임은 늘 느끼고 있었다.

그 책임감 하나로 버텨온 세월이 물경 수천 년.

이제 날짜를 세는 것조차 무의미할 정도의 시간이 흘러 현재에 도달했다.

그리고 마침내!

많이 무책임할 수 있지만, 맡겨둘 사람을 만나게 됐다.

‘후계자는 마녀가 될 줄 알았는데….’

놀랍게도 남자였다. 그것도 남자. 심지어 괴력조차 없는 외계인이었다.

기생 중인 거머리와 이마에 박힌 보석이 전부.

하지만 그것뿐인 남자가 세상을 바꾸고 마신을 쓰러트렸으며, 자신의 입술을 빼앗고 심장을 두근두근하게 했다.

은퇴하기 전에 후계자는….

직접 낳아서 기르는 편이 좋겠다고 슬라리스는 생각했다.

역시, 씨를 받을 남자라면 최고로 강해야 좋겠지요?

마신보다 강하다면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다. 가녀린(?) 여자에게 주먹(!)을 휘두르는 점은 살짝 못마땅했지만.

“그런데…. 왕자님.”

“또 뭡니까?”“저를 때릴 생각만 하지 마시고 제대로 된 대화를 해요. 서로에 대해 차근차근 알아가는 유익한 시간이요. 몸으로 하면 대환영이고.”

“당신이 일을 떠넘기는 바람에 여유 부릴 틈이 없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좀 더 강압적으로 해야 했을까?

하지만 상대는 ‘흡혈귀 각인’도 통하지 않는 대마녀였다. 하기야 괴수들에게 ‘여자를 좋아해!’라는 본능을 심을 정도의 비상식적인 존재니까.

목덜미가 좀 따끔했다고 노예로 전락한다는 게 더 말이 안 된다.

“모든 마신을 쓰러트리면 되잖아요.”

“...그럴 마음이 없습니다.”

“어째서죠?”

“위협이 사라지면 딴마음을 품게 되니까요. 몬스터월드…. 아르테르 행성의 역사를 훑어보면 국가전(國家戰)이 대단히 적습니다. 그 이유를 아시겠지요?”

“마신 때문이죠.”

“네. 맞습니다. 공통된 적이 인류를 하나로 똘똘 묶어놨습니다.”

모두가 행복한 세상이란 천국(天國)은 없다.

행복은 상대적이니까.

마신이란 위협적인 존재가 도사리고 있기에 힘을 합치고 있지만, 사라지는 순간, 인류는 탐욕을 드러낼 것이다.

천국이 성립될 수 없는 이유는….

인간은 만족을 모르기 때문이다. 남의 집, 배우자, 돈, 권위 등을 가지고 싶다는 마음은 영원히 따라다닌다.

“그래서 놔둔다고요?”

“정말 싸워야 할 때가 오기 전까지는. 굳이 먼저 찾아가서 죽이니 어쩌니 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마신들도 바보가 아니라면 함부로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아마도….

이미 라그나뢰크가 당했으니까.

그 다음 날.

백만마녀 슬라리스는 조용히 마법을 사용했다.

일명, 자폭코드.

지구로 침공해오던 고위괴수가 절반 이하로 대폭 줄어들었다. 여전히 가상현실게임을 불통이었지만, 소모전으로 말라죽기 직전이었던 나라들은 숨통이 트였다.

‘주인을 죽이려 했다는 건가.’

노골적으로 지구에 고위괴수를 보낸 이유는 뻔했다.

무슨 수를 썼는지 모르지만, 하인들은 황비에게 그랬던 마녀들을 조종해서 사역마를 지구로 보냈다.

주인을 죽이기 위해.

아마, 이 자폭코드를 경계한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젠 끝.

공극의 마녀가 갑작스럽게 찾아오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안녕하세요? 어머! 할망구께서는 여전히 정정하시네요. 어째서 여기에 계시는지는 굳이 안 물을게요. 발정기죠?”

“공극 계집애! 한 대 맞을…. 호호! 아무것도 아니에요, 왕자님.”

뭔가…. 대단히 정신없었다.

두 마녀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정보는 덤.

공극의 마녀 ‘쏠비얀’이 백만마녀와 눈싸움을 멈추고 엘퍼러를 쳐다봤다. 화사한 얼굴로.

하지만 그녀의 입술에 나온 말은 전혀 희소식이 아니었다.

“마신 ‘위그드라실’이 움직였어요.”

< [61화-5] 고대의 일면 > 끝

ⓒ 파르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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