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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1화-4] 고대의 일면 >
“선배, 늦지 않았네.”
“어서 오세요, 주인님.”
“카레 짱. 이야기를 들려줘.”
체력이 무한하지 않았다면 진즉 과로사하지 않았을까…?
날마다 지구에 출석 도장 찍고, 아르테르 행성으로 출근하는 엘퍼러의 일과는 바쁘다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주로 하는 일은 토벌.
무혈합병 조건으로는 썩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몬스터월드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짐에 따라, 욕구불만인 여자들의 ‘놀아줘!’라는 독촉도 덩달아 늘어났다.
『행복한 고민이다?』
그녀들 중 하나라도 삐치면 지구가 위태로워지는데 그럴 리가!
위험순위로 따지면 선지혜가 부동의 1위! 대량살상무기라고 할 수 있는 도끼토끼(당근이 지구를 지킨다!)를 시작으로 8종 괴수들이 그 뒤를 따른다.
그래서 사명감으로 이 여난(女難)에 임하는 중이다.
『가능한 일인가?』
한둘도 아니고 수십이다. 그리고 덜 위험한 여자들까지 합치면 수백에 달한다.
사람의 몸은 하나인데 이게 가당키나 할까?
...용사는 가능했다.
아니, 동정(童貞)이기에 무리 없이 소화해낼 수 있었다. 공평하게 상대해주려면 딱 여기까지가 최선이다.
하지만 이 ‘자연의 균형(?)’이 깨지는 순간?
걷잡을 수 없는 해일이 몰아치리라!
“흠. 초능력자들은?”
시치미 뚝 떼고 여전히 꼭두각시 인형(人形) 행세 중인 백만마녀 ‘슬라리스’를 힐끔 한 번 본 무일.
일단은 보편적인 업무 얘기부터 했다.
절세가인들이 반기고 환영해주는 만큼 기뻐하며 안부를 물어봐 줘도 좋으련만, 엘퍼러의 ‘매일 보는데 왜…?’라는 사고방식에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부부생활에 질려버린 남편 같다고 할까!
‘흐응~, 역시나 그대로네.’
그런 소소한 불만은 있지만, 선지혜는 순순히 따랐다.
일일이 소송(?)을 걸기에는 엘퍼러를 무조건 편드는 여자들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특히 ‘여성형 괴수’들이 그랬다.
아니, 순수한 인간도 믿을 수 없다.
결정적인 순간에 배신할 확률이 대단히 높았기 때문이다. 일단, 기회가 주어진다면 선지혜가 그럴 생각이었으니까!
자기가 생각한 일을 저 여우들이 모를 리 없다.
“무리 없이 격리수용 하고 있어.”
패배하긴 했지만, 초능력자들의 생존율은 대단히 높았다.
본인의 능력이 뛰어났다기보다는,
귀환석.
죽을 위기에 처하면 곧바로 사용한다. 그 즉시, 시공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미리 정해놓은 위치로 순간이동 된다.
예기치 못한 죽음을 맞이하거나 전투 도중에 귀환석이 부서지는 불상사만 없으면 99% 생존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문제를 일으키는 녀석들은?”
“총원 842명. 그중에 반기를 들었던 45명을 제외하고는 고분고분 따르는 편이야.”
초능력자는 반푼이다.
탱커는 전투력이 변변찮고, 딜러는 방어에 취약하다. 힐러는 아예 무해(無害)하고. 한 가지 능력에 특화된 그들은 뭉쳐야 제힘을 발휘할 수 있다.
하지만 전부 따로 수용해놓으니 그리 힘든 상대가 아니었다.
특히, 힐러는 병원으로.
장비 없이 치료하는 기적 외에는 민간인과 다를 게 없는 그들은 대단히 유용한 존재다.
‘사냥에 따라다닌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언제 다칠지도 모르는 탱커와 딜러를 주치의(主治醫)처럼 졸졸 쫓아다니는 건 대단히 비효율적이다.
힐러 하나가 병원보다 우수하다.
치료비 걷는 사람만 두고 한 자리에 고정적으로 있으면 거의 병원 서너 개의 일을 혼자서 해낼 수 있다.
그것이 힐러.
튼튼한 탱커와 강력한 딜러는 얼마든지 대처할 수 있다. 하지만 순식간에 치료해내는 기적은 첨단과학으로도 불가능하다.
“탱커와 딜러가 문제인데….”
여러 나라에서 앞다투어 보내달라고 아우성인 힐러와 달리, 탱커와 딜러는 그다지 쓸모가 없었다.
물론, 다양한 방책이 나왔다.
그중에서도 탱커를 미끼로 쓰자는 얘기가 가장 힘을 받는 중이다. 어떤 괴수는 영악하게도 자신의 함정에 걸려들 때만 모습을 드러내니까.
계약자가 출동하면 꼭꼭 숨는다. 그러다가 허탕만 치고 돌아가면 다시 활동을 계시! 단독행동하는 사냥꾼의 천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괴수들에게.
웬만한 공격에는 생채기도 안 생기고, 그마저도 눈 깜빡할 사이에 회복되는 탱커만큼 이 일에 적합한 존재도 없으리라.
“돌격대가 신설될 예정이야. 파견 형식으로 운영될 거고.”
초능력자를 상대로 인체실험을 하고 싶어하는 나라가 대단히 많다.
어쩌면 이미 자행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전투에서 살아남은 거의 모든 초능력자를 생포해두고 있지만, 분명 떨어져 있던 자들도 있을 것이다.
다른 나라에 침투해있는 식으로.
엘퍼러는 조만간 이 문제도 해결할 생각이다.
‘안될 말이지.’
승리는 지구가 한 게 아니다.
명백히 엘퍼러 개인이 이룩한 것이다.
그런데 그 승리에 편승해서 비윤리적인 짓을 하도록 놔둘 순 없다. 어느 나라인지는 대강이나마 파악도 끝났다.
어떻게?
지구를 배신한 자들을 용서해준 나라들!
한 번 배신한 자는 또 배신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은 슈퍼월드가 대패(大敗)하자마자 자수하고, 자신이 숨겨주고 있던 초능력자들을 넘겼다.
아주 간단한 공식.
초능력자의 한계를 잘 아는 강대국들은 안 그렇지만, 힘에 굶주린 중소국가들이 주로 여기에 해당했다.
“돌격대라…. 탱커인가.”
“응. 우리가 계속 데리고 있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서. 괜히 이런 쓸모없는 돌멩이들 때문에 독점이니 어쩌니 소리 들으면 억울한걸.”
슈퍼월드에서도 엄선된 최정예 탱커들.
어쩌면 8종 괴수에게 얻어맞아도 끄떡없을 존재들이 순식간에 ‘길가의 돌멩이’로 전락했다. 하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최강의 계약자’가 한 말이었다.
9종 괴수 ‘문팽이’의 계약자.
무패(無敗)의 괴수 ‘배틀씹’을 추종자로 두기도 했으며, 그 밖에도 바다의 강호(强豪)들이 여걸(女傑)의 명성을 듣고 하나둘 주위로 몰려들고 있었다.
문팽이의 현재 영토는?
자랑하고 다니지 않아서 그럴 뿐, 가속도가 붙기 시작한 영토확장은 대한민국의 해안을 기점으로 북극해와 태평양의 하와이 열도까지 집어삼킨 상태였다.
『문팽이의 수완?』
아니라고 부정할 순 없지만, 그런 문팽이를 길러낸(?) 것이 선지혜였다. 정신감응을 통해 최적의 왕으로 재탄생시킨 것이리라!
그런 여인이 한 말이기에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선지혜가 탱커를 돌멩이라고 한다면, 돌멩이가 아니어도 앞으로는 돌멩이다.
“괜찮네. 딜러는?”
“정신교육 후에 사냥꾼으로 재활용하자는 것이 자문단의 의견. 사냥꾼의 몸은 원래 허약했는걸~. 딜러와 똑같지.”
사냥꾼의 생존능력은 [예감]에서 비롯된다.
괴수보다 한발 앞서 행동하여 위기를 모면하는 방식.
그런데 딜러에게 [예감]을 준다?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격이리라!
하지만 문제없을 거란 것이 선지혜 자문단의 생각이었다. 그 어떤 ‘날개 달린 호랑이’가 활개 친들,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사냥의 신(神)’을 이길 순 없으니까.
“흠. 초능력자 관리에 대해선 일임(一任)할게.”
“그래? 알았어.”
마음 같아서는 몽땅 생지옥으로!
그 잘난 초능력으로도 해결 안 되는 절망 앞에서 허우적거리며 천천히 말라죽는 모습을 보고 싶다.
아니면 건전하게(?) 투기장을 운영하던가.
가상현실게임이 막히면서 오락과 유흥이 간절히 필요해진 지구인들에게, 판타지의 마법사와 기사 같은 딜러와 탱커는 충분히 매력적일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게 불구경과 싸움구경이라지 않던가?
하지만 꾹 참았다.
내 용사님에게는 언제까지나 ‘지모(智模)를 겸비한 여인’이어야 한다. 그것이 한창 사랑 중인 여자들의 공통된 마음일 것이다.
“그러면 보고는 끝난 건가.”
“거의. 특별관리처분해야 할 애들만 끝내면.”
“갱생의 여지가 있다고 들었는데.”
그 어떤 고문에도 굴하지 않는 정신력으로 무장한 전사!
이런 인간은 이야기 속에나 등장하는 ‘허구’다.
『판타지(fantasy)!』
만약, 그런 인간이 실존한다면 고문을 가한 인간의 실수가 99.9%다. 아프게만 한다고 뛰어난 고문기술자가 아니다.
그래서는 자칫 독기만 남거나 정신이 아예 망가져 버린다.
정말 뛰어난 고문기술자는 밀고 당기며 상대를 농락하며 차츰차츰 항복시킨다. 때려서 말 듣게 하는 건 하수다. 들짐승도 안 그런다.
각설하고….
현대과학에는 무수히 많은 고문법이 존재한다.
강철 같은 신념을 지녔던 ‘아담’을, 중화인민공화국 협객으로 갱생(?)시킨 가상현실게임도 넓은 의미로 보자면 고문의 한 종류였다.
“반기를 든 45명은 별거 아니야.”
“그럼?”“쓸모없는 애들이 있어. 지나치게 강해서 쓸 수 없다고 보는 편이 맞으려나?”
눈높이가 대기권을 찢고, 평가가 소금보다 짠 선지혜가 ‘강하다.’고 할 정도.
그건 일반상식을 넘어섰다는 뜻이다.
그렇게 많은 수는 아니다. 게다가 너무나 강한 탓에 혼자서는 능력을 쓸 수 없는 ‘반푼이’이기도 했다.
그 대표주자가 ‘성예린’과 ‘윤미라’였다.
현재는 사라지고 없는 ‘아임 이레귤러’ 공격대의 ‘대장 마누라’와 ‘부대장’이란 직책에 있는 만큼 능력도 출중….
하지만 대장 ‘서세진’의 ‘반사’ 초능력 도움 없이 능력을 쓰면 자신마저 해친다는 치명적인 약점을 달고 있었다. 주변은 말할 것도 없고.
“...그 문제는 잠시 보류.”
엘퍼러는 고개를 내저었다.
당장은 괜찮다. 무전취식쯤이야~.
남편이 죽었다는 말에도 무덤덤한 아내 ‘성예린’과 달리, 부대장 ‘윤미라’는 폭주할 위험성이 다분하다는….
선지혜의 설명에도 고개만 끄덕였다.
폭주의 위험성은 10년 전부터 달고 살아왔기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뭐랄까….
폭주하면 가장 위험할 여자가 ‘이 여자가 폭주하면 큰일이야.’라고 말하니, 기가 막혀서 ‘너나 잘하세요.’라고 한마디 해주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 말은 목구멍 아래로 삼켰다.
세계평화와 안녕을 위해!
오늘도 엘퍼러는 지구를 지켜내고 있었다.
“그러면?”
“더 큰 분란의 씨앗이 있거든. 이브. 이리 와.”
“......”
말없이 다가온 이계의 공주님에게.
진부한 드라마 같은 구구절절한 설명은 필요 없다!
엘퍼러는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어 유심히 그녀의 눈빛을 살펴본 후에, 기습적으로 손을 움직여 그녀의 이마에 꿀밤을 먹였다.
탁!
손가락이 튕기고 이마에 닿는 소리가 요란했다.
아픈 건 둘째치고 뇌가 울리지 않을까?
두개골이 부서지지 않을 만큼 [예지]까지 동원해서 힘 조절을 했다지만, 다름 아닌 엘퍼러가 날린 꿀밤이었다.
사람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하는 법.
그건 수천 년을 살아온 백만마녀 ‘슬라리스’도 예외가 아니었다.
당장에라도 진한 키스를 해줄 것 같아서 잔뜩 기대하고 있었는데 대뜸 꿀밤! 너무나 무방비 상태에서 얻어맞은 고통에 그만,
“꺄앗!”
깜찍한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너무나 생동감 넘치게.
머리가 윙윙 울리고 어질어질해서 아무런 생각도 못 했다. 그저 본능대로 아픈 이마를 손으로 문지르고 찔끔한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한참 뒤에야 깨달았다.
주저앉은 자신의 주위를 둘러싸고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시선들을.
“아…. 저, 들킨 건가요…?”
수많은 괴수를 여러 차원에 날려보낸 대마녀(大魔女)의 입에서 나온 첫마디.
아르테르 행성의 온갖 전설에 등장하는,
『지고(至高)의 마녀, 슬라리스』
백만 가지의 마법을, 모르고 못 하는 마법이 없다 하여 그 이름도 찬란한 ‘백만마녀’. 하지만 그 실제 모습은 이랬다.
살짝 나사가 풀린 것 같은 표정으로…. 위엄 따위는 없었다.
끝까지 무고한, 순진무구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본다.
“당신의 하인이 불었습니다.”
“아! 그 멍청이들이 결국 사고 칠 줄 알았어요! 꺅?!”
손뼉을 탁! 치며 활짝 웃던 백만마녀.
하지만 꿀밤을 또 맞고 울상으로 변했다.
무시무시한 손가락을 거둔 엘퍼러는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사고는 당신이 쳤습니다. 슬라리스.”
< [61화-4] 고대의 일면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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