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처럼-255화 (255/287)

< [61화-3] 고대의 일면 >

‘여기에 사는 거 맞나…?’

‘무일. 지구보다 이곳 바다가 더 깊어서 그런 거 아닐까?’

그렇다면 안 보이는 것도 수긍이 간다.

하지만 엘퍼러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있나. 바다가 아무리 넓고 깊다 한들, 바다의 폭군(暴君)이라고 불리는 문팽이도 이에 못지 않은 덩치를 자랑한다.

“...아! 그럼 그렇지!”

역시 있었다.

바닷속에 등껍질까지 완벽히 잠겨있는 바람에 단번에 못 찾았던 것뿐. 악명을 떨쳤던 심술 고약한 야수답게 침입자에 반응하여 즉각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 덩치는….

‘애가 왜 이리 못 먹고 못 컸다냐….’

크긴 컸다. 하지만 지구에 있는 우량아(?)를 떠올리자니 상대적으로 너무나 작았다.

지구의 문팽이가 덤프트럭이라면?

이 녀석은 어린이용 세발자전거 수준이었다.

당연한 걸까?

아르테르 행성에서 2번째로 강한 나라, 오르페온 마도제국에서 ‘전설적인 마수(魔手)’로 등극해있는 ‘까루나 막찌몬쓰’와 비교하는 건 어불성설(語不成說)이리라.

이놈은 기껏해야 소왕국을 괴롭히는 끄나풀(?)에 지나지 않았다.

산을 떠난 호랑이의 자리를 차지한 여우.

여우도 과한 평가 같지만.

“빨리 끝내자. 달팽이.”

이 일대 해안의 터주라고 하기에 뭔가 한가락 할 줄 알았다.

하지만 이건 뭐….

중력장을 가볍게 무시하고 깊숙이 파고든 엘퍼러는 초면에 일검(一劍)! 전초전이나 심리전 따위는 일절 없었다.

크기로 비교하자면 코끼리를 바늘로 찌르는 수준에도 못 미치리라!

하지만 그 한 점을 기점으로 심장까지, 에쏘드의 칼날에 깃든 ‘대마법사의 관통속성 마법’이 일직선으로 쭉 꿰뚫었다.

“쿠워어어어!”

달팽이의 포효가 바다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마법을 수백, 수천 발 맞아도 멀쩡했던 두꺼운 등껍질에 구멍이 뚫리고, 무엇이든 압사시키는 고밀도 속살도 부질없이 갈라졌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상대는 마신도 베어버린 인간(?)인 것을.

전승되온 전설이나 소문은 무성한 모양이지만, 신(神)은커녕 한 해역의 해적 두목급인 야수가 감당하기에는 지나치게 상대가 좋지 못했다.

‘물러.’

베는 손맛이 없다고 엘퍼러는 문뜩 생각했다.

이건 ‘회귀본능’이 없는 탓이리라.

그 미치도록 사기적인 재생력과 생존력을 잃은 괴수는, 더는 괴수가 아니었다. 그저 커다란 짐승에 지나지 않았다.

이곳 사람들의 말처럼 길들어지지 않은 야수.

그런 녀석들이 차원을 넘는 순간, 첨단무기도 씹어먹는 괴수로 돌변하니 그저 기가 막힐 따름이다.

“으음…?”

뽀글뽀글 가라앉는 문팽이 시체와 결별한 엘퍼러는 멀리서 누군가 자신을 관찰하는 것 같다는 시선을 느꼈다.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굳이 콕 찍어서 말하자면 저 하늘, 우주라고 할까.

하지만 당장은 적대적인 것도 아니고 [예감]도 잠잠했기 때문에 신경 끄기로 했다. 무언가 하나에 골머리를 앓기에는 해야 할 일들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앞으로 사냥해야 할 야수만 스무 마리.

이제 겨우 하나를 처리했으니…. 사냥하는 시간보다 이동과 숨바꼭질에 소모되는 노력이 더 크리라 짐작된다.

‘아니, 그보다 먼저.’

해결해야 할 사항이 있다.

시치미 뚝 떼고 기억상실, 피해자인 척하는 중인 ‘백만마녀’를 끄집어내야 한다. 그리하여 온갖 패악을 뿌리고 다니는 하인들을 관리하도록….

그러면서도 슬쩍 긴장했다.

바로 곁에 있으면서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으니까.

그 얘기는 간단하다.

『우위』

검술도 그렇지만, 상대가 자신보다 고수(高手)면 알아볼 수 없다. 그게 미세한 차이가 아니라 많이! 상당히 많은 격차가 있을 때만 그렇다.

이게 무슨 말이냐?

영혼석으로 이미 상당한 마법 실력을 갖춘 엘퍼러로서도 ‘백만마녀 슬라리스’의 역량을 가늠할 수 없다는 뜻이다.

물론, 종합적인 능력은 별개다.

순수한 마법만 따졌을 때 그렇다는 얘기.

에쏘드와 뱀페스트, 가더발트. 이렇게 셋의 콤비만으로도 이미 마법에 대한 절대적인 내성뿐 아니라 초월적인 전투력 상승 폭을 가져온다.

아무것도 모르는 당사자는 현재 무얼 하고 있을까?

“후아암~! 으읏~차!”

통칭 ‘이브’로 통하는 그녀의 일과는 단순했다.

잠에서 깨어나면 일단 주위에 누군가 있는지 마법으로 확인한다. 이후에 감시카메라에 마법을 걸어서 바보로 만든다.

이걸로 준비는 끝.

기지개를 켠다. 그리고 종합비타민제를 소환해서 냉큼 삼킨다. 너무나 오랫동안 잠들어있으면서 영양이 살짝 불균형해진 까닭이다.

가슴 크기가 줄었다던가? 피부가 탱탱하지 않다던가?

섬세하지 못한 ‘왕자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런저런 문제를 몰래, 아무도 모르게 스스로 해결하고 있는 그녀였다.

여기까지 다 끝나면?

다시 잔다. 왕자님이 깨우러 와줄 때까지.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리며 들어왔다.

저렇게 예의를 차리는 인물이 왕자님이었다면 좋았겠으나, 안타깝게도 같은 여성!

이브는 계속 자는 척했다.

“화장실 갈 시간이에요.”

일단은 생리활동에 관해서는 위대한 마녀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먹었으면 싸야 하고, 졸리면 자야 한다.

심장이 두근거리면….

사랑을 찾아가야 하고 말이다.

‘왕자님이 올 때가 됐는데….’

이것 하나는 수천 년을 살아온 슬라리스도 감탄하는 중이다.

어떻게 시간을 이리 철저하게 지키는 걸까?

자기관리가 철저하다는 말로 다 형용할 수 없다. 이쯤 되면 결벽증이 아닐까. 듣기로는 서른 넘도록 여태 동정이라고 한다.

무려 숫총각.

숫처녀보다 희귀한 종이었다.

“지금부터 산책할 거예요. 따라오세요, 이브.”

자신에게 지시를 내리는 여자의 이름은 ‘페이 링’이라고 한다.

지구인답게 마법을 쓸 줄 모르며, 그 때문에 남자에게 의존해야 하는 비운의 존재. 그래서 늘 치장에 힘쓰고 있다.

조금이라도 더 그에게 아름답게 보이려고.

슬라리스가 보기에는, 적당히 여성스러운 가슴과 허리둘레를 매일 관리하는 것보다 ‘마술’에 입문해서 경쟁자를 무찌르는 편이 더 현실성 있을 것 같지만….

관여하지 않기로 했다.

“펭펭. 어디가, 예요?”

“...제 이름은 펭펭이 아니라 페이 링이에요, 미나미.”

“하잇~ 하잇~. 그래서 어디가, 예요?”

“산책 중이었어요. 함께 가실래요?”

“아니. 거절할래, 예요. 곧 카레 짱이 올 시간이거든, 예요.”

이번에도 여자다.

산책 중에 만난 이 여인의 이름은 ‘유키나 미나미’라고, 이웃하는 섬나라 출신인데 사정이 있어서 쭉 이곳에 무전취식 중이란 모양이다.

그런 주제에 노골적으로 ‘왕비’ 자리를 노린다.

‘망명 온 공주이니 일단은 넘어갈까?’

이웃 섬나라의 왕족 피가 흐른다는 것 같다.

자신의 첫 입맞춤을 훔쳐간 왕자님을 노리는 경쟁 상대로써 신분은 합격이라고 해두자. 정말 아무것도 아닌 여자도 있으니까.

정원에 심어진 나무 수보다 여자(괴수 포함)가 더 많은 성(시청사)에서 산책을 쭉 마치고 돌아오니, 왕자님의 양녀가 보인다.

지구인이지만….

마녀가 될 재능이 있다. 그것도 ‘사제(司祭)’라고 불리는 희귀한 마녀. 이름이…. ‘최은비’라고 했었나...?

정령의 사랑을 받고 있다.

“아줌마! 저, 학교 다녀왔어요.”

“언니라고 부르…. 에휴…. 됐어요. 오늘도 재미있었나요?”

“네. 그런데 아저씨는요?”

“시간을 철저히 지키시는 분이니 곧 오실 거에요.”

뚫린 차원이동문을 통해 아르테르 행성에서 지구로 넘어온 ‘강력한 정령’은 여태까지 파악하기로 총 셋이었다.

슬라리스는 그 별명들을 떠올렸다. 오랫동안 잠만 자는 바람에 가물가물하긴 했지만, 워낙 유명한 정령들이라 잊지 않았다.

어찌 안 그럴까?

마신과 신수처럼 이름에 ‘신(神)’이 붙는 존재들 다음으로 경계해야 할 녀석들인데.

『삭풍(朔風)의 악동, 헤르메스(엘로엘)』

『열사(熱砂)의 백작, 오시리스(이즈헬)』

『광토(曠土)의 광군, 해모수(올란드)』

자신을 포함한 수많은 마녀의 구애를 거절한 최상급 정령들. 그런데 이런 머나먼 타지(他地)에서 계약자를 찾았으니 그저 기가 막힐 따름이다.

그녀들의 무엇이 정령의 마음을 사로잡은 걸까?

그 답을 이미 어림짐작 중이지만, 그래도 확실히 하기 위해 슬라리스는 늘 주의 깊게 살펴보는 중이었다. 특히나 마지막.

정령 중의 정령, 고대의 마신, 대원소(大元素)로 불리는 ‘해모수’는 건드리면 정말 위험하기에 늘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있다.

그 해모수가….

저기, 저 어린 소녀를 몰래 따라다니는 이유는 여전히 모르겠다.

미래에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현재는 젖가슴도 빈약하고 영 별로인데….

“수상한걸~.”

“......”

너무 빤히 쳐다본 걸까?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하는 ‘불쌍한 공주님’이란 설정에서 살짝 어긋난 행동을 무의식적으로 하고 말았다.

그 결과, 이 성과 영지의 주인이 ‘오늘도’ 자신을 의심했다.

가장 이해하기 쉬웠던 여자.

그래서 가장 소름 돋았던 여자!

모든 언행(言行)이 ‘마신(魔神)’과 유사했기 때문이다.

마신과 싸우며 수천 년을 살아온 백만마녀 슬라리스는, 목포의 영주 ‘선지혜’를 ‘마신의 환생’이라고 근거 없는 추측까지 했을 정도였다.

그만큼 판박이였다.

그 증거가 계약한 두 생명체.

‘아무리 궁합이 잘 맞는 천생연분(天生緣分)이라고 해도…. 어떻게 저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는 전설 급들과 계약할 수 있었는지….’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둘씩이나!

여기서는 각각 ‘문팽이’와 ‘배틀씹’이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이름이야 뭐라고 부르든 간에….

슬라리스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100년 전의 그 둘이 아니었다.

고향에 있을 때부터 우량종, 돌연변이 같은 무지막지한 덩치와 강함을 자랑하긴 했지만, 저 정도로 크진 않았었다.

이미 수천 년 전에 성체에 도달했을 놈들이 더 커지다니….

그 특유의 종족 취약점만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면 이미 ‘마신’이라고 불러도 전혀 손색없었다.

...두 마신이 따르는 여인이라?

혹시라도 죽으면 이런 조그만 행성이 사라지는 건 시간문제다.

(지고한 마녀여. 언제까지 이곳에 있을 것인가?)

중후한 정령의 음성이 그녀의 영혼을 톡톡 자극했다.

바다에 사는 탓에 일면식이 전혀 없는 두 마수(魔獸)와 달리, 땅을 지배하는 정령하고는 싫어도 마주칠 수밖에 없다.

슬라리스는 ‘광토의 광군’에게 대답했다.

주위에 들키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왕자님의 마음을 얻을 때까지.)

(엘퍼러…. 요정의 지배자 말인가. 인간인 너에게 괜한 참견은 하고 싶지 않지만, 내가 점찍은 아이의 주변에서 얼쩡거리는 게 마음에 안 들어서 한마디 해두겠다.)

(경청하지요.)

(무리다.)

(......)

(그자의 영혼은 금강석처럼 단단하다. 그 견고함이 무뎌지려면 족히 수백 년은 걸릴 터. 하지만 나는 마녀와 한 자리에서 수천 년을 함께할 생각이 전혀 없다.)

명백한 축객령이었다.

이렇게 신사적인 대화가 가능하다는 것 자체가 기적 아닐까?

수틀리면 말없이 나라조차 땅에 묻어버리는 광군(狂君) 해모수가 대화라니! 오래 살고 볼 일이라고 솔라리스는 생각했다.

아마, 계약자의 영향을 받은 것이리라.

좋은 방향으로.

물론, 늘 좋기만 한 건 아니다.

“생각을 전혀~ 못 한다는 계집애가 어딜 보는 걸까나~?”

“......”

빤히 쳐다보는 선지혜 때문에 솔라리스는 부동심이 깨질 뻔했다.

바로 얼마 전에서는 ‘정말인지 시험해볼까?’라면서 자신의 가슴에 해괴한 짓을 했으며, 심지어 옷을 벗겨놓고 굴욕적인 사진마저 찍었다.

그야말로 악녀(惡女)!

다행히 들키지 않았지만, 이 여자는 자신을 눈엣가시로 알던 ‘리트멜 데모 인펠리아’보다 상대하기가 더욱 힘들었다.

몸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다는 건 둘째.

그냥 상대하기가 힘들다.

‘어서 돌아오세요, 나의 왕자님!’

영원한 잠에 빠진 저를 뜨거운(?) 입맞춤으로 깨워주셨을 때처럼.

이 사악한 마녀(?)로부터 저를 지켜주세요.

그리고 마침내, 그 시간이 왔다.

간절한 바람이 하늘에 닿은 건 아니고, 그냥 올 때가 돼서 왔다. 새벽에 출근했다가 밤늦게 조용히 귀가하는 남편처럼.

바로 어제와 달리 ‘여자의 비밀’을 알고 있는 엘퍼러의 귀환이었다.

< [61화-3] 고대의 일면 > 끝

ⓒ 파르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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