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화-2] 고대의 일면 >
카르쉘은 빠르게 처분됐다.
선처라면 고통 없이 신속하게 영혼석으로.
공범이라고 할 수 있는 집사장(두목) 외에도 주방장(선배), 하인2(동기), 하인3(후배) 등이 더 있다는 정보를 추가로 입수할 수 있었다.
거품 빼고 본 카르쉘의 지위는 영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 정도라…?’
게임으로 치자면 ‘템빨’이란 거지만, 그래도 좋은 마법 지팡이와 갑옷으로 제국의 황비를 압도했다는 게 중요하다.
벌거벗고 있을 때는 그야 허점투성이다. 하지만 그걸 몰라서 황비 ‘리트멜 데모 인펠리아’가 계속 당해주진 않았으리라.
동료가 많다.
이게 다 무슨 말이냐면….
황비가 몸을 주던 남자는 카르쉘 하나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비밀을 알고 있는 남자가 어디 그 하나뿐이겠는가?
“뭐라고 위로해줄 말이 안 떠오르네.”
“다 지나간 일이에요.”
당시에는 몰랐다고 하지만, 마신으로부터 인류를 지키던 백만마녀를 기습해서 반사상태로 만들었다는 죄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대단히 억울할 텐데도 황비는 차분했다.
물론, 불쌍하다는 건 아니다. 그걸 또 이용해서 ‘정적(政敵)’에 가까운 마녀들의 힘을 줄이려고 했으니까.
자신을 남자의 노리개로 추락시킨 백만마녀가 죽어버리면 더 좋고!
엘퍼러의 페로몬(?)에 전부 무산되긴 했지만….
“...여긴 여름이군.”
문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구는 한창 겨울.
새해를 맞이할 정신은 없지만,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고 유수처럼 흘러갔다. 특무대 부하들도 하나둘 결혼하고 아이가 생겨났다.
그건 마법이라고 해도 좋았다.
여인의 저 가녀린 몸에서 새 생명이 태어난다는 것이.
‘뭐냐, 무일. 갑자기 궁상맞게.’
‘시끄러워.’
당장 지구로 돌아가서 이브…. 아니, 백만마녀 ‘슬라리스’와 담판 짓고 싶지만, 곧바로 움직일 수 없었다.
이곳의 문제도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인펠리아 제국이야 더는 지구를 적대하지 않겠지만, 그밖에 수많은 나라가 지구를 노리며 끊임없이 사역마를 보내고 있었다.
어찌해야 좋은가?
이미 이곳 상황은 주변국들에 퍼졌다.
황제가 죽고 황비가 섭정을 시작한 지 며칠 만에 새 황제가 옹립됐다. 그것도 평화적인 방식이 아닌 무력으로.
절대로 좋게 비칠 리 없다.
하물며 외계인!
그 유전자가 전염병처럼 퍼지는 걸 경계하지 않을 리 없다.
“현재, 인펠리아 제국의 영향력을 강하게 받는 나라들은?”
“행성 전체 면적의 13%에 해당해요.”
“흠…. 절대로 적은 건 아닌데….”
그 면적만으로도 벌써 바다를 합친 지구 땅덩어리의 수십 배에 해당하는 영토였다.
하지만 퍼센트로 보자니 영….
엘퍼러는 길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이미 지구는 침략을 받은 상황. 이 순간에도 지구 어딘가에서는 사람이 죽고 있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
『병합(倂合)』
무력으로 나라들을 통합하는 것이다.
뻔한 침략행위였지만, 엘퍼러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사람이 얼마나 죽던 신경 쓰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전쟁으로 심화시킬 생각이 없는 까닭이다.
인펠리아 제국에서 써먹은 방식과 비슷하다.
『머리를 친다!』
황비와 왕비를 비롯한 주요인물만 제압하면 된다.
나라 운영이 뭐 그리 허술하냐고 의아할 수 있겠지만, 몬스터월드의 ‘정치인’은 지구의 ‘똥배 아저씨, 아줌마’들과 다르다.
개개인이 전략무기 수준이다.
목소리 크기로 싸우는 게 아니라 실질적인 마법으로.
암살당할 염려가 없다. 그건 ‘공극의 마녀’의 너무나 무방비한 침실과 경각심 없는 태도만 봐도 알 수 있다.
누가 마녀를 공격한단 말인가?
남자가 덮친다는 건 꿈에도 생각 못 할 짓이고, 멀리서 저격하려 해도 기본적으로 몸에 두르고 있는 마법이 차단해준다.
그러나,
‘그 방심이 화를 부르지.’
엘퍼러는 다르다.
지구에서뿐만 아니라 몬스터월드에서도 통용되는 그의 가공할 무력 앞에, 상식과 불가능이란 단어는 먹히지 않았다.
시간이 그리 많지 않으니까.
이미 몬스터월드를 공격함으로써 앞으로의 행보를 예고했다. 엘퍼러 개인의 독단적인 판단과 행동에 가까웠지만, 애초의 지구 전력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그이니,
『엘퍼러 = 지구』
...라고 해도 절대 과언이 아니다!
꼭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달력이 다른 이곳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지구는 연말과 신년행사가 대단히 많다. 당장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할 건 다 해야 한다는 주의.
그건 엘퍼러도 마찬가지다.
정말 싫은 아들이 생겼느니, 너무나 예쁜 딸을 마누라가 낳아줬느니…. 와서 축복해달라는 지인들이 발에 차일 만큼 많았다.
장례식을 제외한 온갖 행사가 줄줄이…!
“일단은….”
복속의사부터 묻기로 했다.
이미 인펠리아 제국이란 선례가 있으니 잔뜩 경계할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일찌감치 항복해올 수도 있다.
다름 아닌 ‘마신을 토벌한 자’이지 않은가!
넷에서 셋으로 줄어든 마신.
수백, 수천에서 하나가 줄어드는 거와는 의미부터 다르다. 특히, 라그나뢰크의 주요 활동지역이었던 이곳은 이전보다 안전해질 것이다.
지켜낼 수 있다면.
비어버린 땅을 ‘나머지 세 마신’이 가만히 놔둔다면 말이다.
“폐하.”
“음.”
“밤이 깊었으니 소녀의 수청(守廳)을 허락해주세요.”
“그건 앞으로 논외.”
고민해볼 것도 없이 곧바로 거절했다.
지구를 멸망시킬 순 없으니까!
“예? 하, 하지만…. 저는 황비고…. 네. 알겠어요.”
황비가 황제와 몸을 안 섞어서야 어찌 황비를 자처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당혹감을 지우지 못했지만, 그녀는 무조건 따랐다.
그것이 흡혈귀 각인의 힘!
절대복종, 순종, 헌신은 여전히 유효했으니까.
하지만 체력이 무한한 엘퍼러도 공무에만 집중할 순 없었다. 중간에 한유일의 자유시간이 왔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극락(極樂)의 온천욕을 보내며 시간을 허비할 수밖에 없었다.
‘자자, 인상 좀 펴. 무일! 나까지 불안해진다!’
‘하지만 심했어.’
주지육림(酒池肉林)이 그 온천욕보다는 훨씬 건전하리라!
벌거벗은 수백의 절세가인(마녀)과 함께 뜨거운 땅에서 몸을 씻고 마사지를 받는 등의 호사는 아무리 생각해도….
하지만 한유일은 당당했다.
일말의 불안감은 당연히 있었지만,
‘나는 하렘의 왕이다!’
정말 자칭대로 하렘이긴 했다.
지구의 안위보다 본능과 의무에 충실한 이 기생충에게 뭐라고 해야 좋을까?
무일로서는 알 수 없었다.
...간접체험이긴 했지만, 썩 나쁘지 않았다고는 절대로 말할 수 없다. 아니었다면 진심을 담아서 막 뭐라고 했으리라.
결과적으로, 마녀들의 충성심은 MAX가 됐다.
그게 ‘한유일’이 아닌 ‘한무일’을 향한 마음이긴 했지만, 그녀들은 거기까지 따지지 않았다.
한무일이 좋지만, 한유일 때만 무방비하다고 할까!
‘...다 좋은데, 신체접촉은 자제해라.’
그 근거리에서 혹시라도 공격받으면 죽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한유일은 시큰둥했다.
마녀들이 한무일을 따르는 것 이상으로 사모하면서도 한유일 주위로 몰려드는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 같은 게 없어서!
가까이서 말을 걸기 어려운 중압감, 몸을 만지면 혼날 것 같은 분위기, 다가가면 정신이 혼미해지는 매력 등이 한유일에게는 없다.
이걸 칭찬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무튼, 그런 이유로 이상한 삼각관계가 완성된 가운데.
“폐하. 14개 국가에서 항복하겠다는 의사를 보내왔어요.”
“다 주변국이겠지?”
“송구하게도 그렇습니다.”
잠시 시간을 내서, 찔리는 게 있어서! 지구에 도장을 찍고 돌아온 엘퍼러를 기다리고 있는 건 수많은 친필 서한이었다.
전부 각국의 수장이 보내온 공식문서.
성공적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지구로 보내지는 사역마의 숫자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는 사실이 고무적이다.
이 나라의 구도는 대단히 편리하다.
컴퓨터가 전부 처리하니 인간이 할 건 최종판결뿐.
대다수 마녀의 일과(日課)만 봐도 알 수 있다.
『낮잠 or 쇼핑!』
차원이 달라도 여자란 생물은 쇼핑을 좋아한다는 게 확실시됐다. 지구와 다른 점이 있다면 점원이 전원 남성이란 정도?
무시무시한 마녀들이 왜 이렇게 비싸냐고 따질 때마다, 근육질 사내들이 넓은 어깨를 움츠리며 쩔쩔매는 모습이 조금 안쓰러웠다.
그렇다고 마녀들이 놀기만 하는 건 아니다.
『마신』
아니, 꼭 마신이 아니더라도 ‘신수’ 혹은 ‘마수’라고 불리는 초대형 생명체가 이 몬스터월드에는 적지 않게 산다.
그들 중에는 인간에게, 마녀에게 호의적인 부류도 있지만, 강하면 강할수록 그러한 성향은 옅어진다.
이유?
백만마녀가 유전자에 새긴 ‘본능’이 본연의 힘에 밀리기 때문이다.
물론, 지구의 문팽이와 배틀씹처럼 정말 마음에 드는 계약자를 만나면 얘기가 다르겠지만, 이곳 아르테르 행성은 그런 개념이 없다.
『수호자? 헹! 사역마!』
지배하려고만 한다. 그러니 타협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사역마가 아닌 동식물들이 마신을 대신하여 평소에 종종 공격해온다. 물론, 정말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마녀들에게 몰살당하지만.
하지만 그게 힘들 경우에는?
살짝 밀리는 정도라면 괜찮지만, 심하면 나라가 멸망한다. 아니면 일찌감치 주변의 강대국에 빌붙어 살던가.
인펠리아 제국은 당연히 후자다.
그 강대국.
아예, 위협적인 신수(神獸)가 수호신으로서 나라를 보호해준다.
하지만 이건 정말 드문 사례고, 대다수 국가가 마녀의 전력에 의존한다. 그래서 평소의 유희를 묵인할 뿐만 아니라 세금으로 월급도 주는 것이다.
갑자기 이런 얘기를 하는 이유?
“그리고 17개 국가에서 조건을 걸었어요.”
“토벌이겠지?”
“네. 자신들의 영토를 위협하는 야수를 제거해주면 복속하겠다고 합니다.”
병합되면 어련히 알아서 처리해줄 것을!
그럼에도 이런 구차한 조건을 거는 이유는 뻔했다.
“시험이로군.”
“...건방지게도 그런 것 같아요.”
살짝 분개하는 황비와 달리 엘퍼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다.
자기들끼리 동맹 맺고 전쟁하려 들지 않은 것만 해도 어딘가? 그러면 얼마나 많은 인명피해, 물적 피해가 발생할지 상상할 수 없다.
그때 마신이라도 쳐들어온다면?
라그나뢰크 때처럼 요행을 바랄 순 없다. 당시에는 최소한의 피해로 마무리됐지만, 또 그런 운이 따르리라고는 장담하기 어렵다.
그런 계산 끝에, 엘퍼러는 조금 손해 보는 샘치고 들어주기로 했다.
나쁜 것도 아니다.
‘미리 치우나, 나중에 치우나.’
그 차이일 뿐이다.
예쁜 마녀(백성)들이랑 싸우지 않아도 된다는 얘기에 한유일은 무조건 찬성. 한무일의 의사가 곧 지구의 뜻이니 사전협의 같은 것도 필요 없다.
마음이 가는 대로.
대단히 위험한 발상이지만, 당장은 별문제 없을 것 같다. 게다가 [예감]과 [예지]가 장식품도 아니고 말이다.
행동파에 해당하는 엘퍼러는 곧바로 움직였다.
그 첫 상대는 9종 괴수 문팽이.
지구의 문팽이 ‘까루나 막찌몬쓰’가 아니라 이곳, 몬스터월드 본고장의 슈퍼달팽이였다.
대륙의 서쪽 해안의 터주라는데….
공간이동으로 단숨에 그 서식지까지 이동한 무일을 할 말을 잃었다.
저것이 본토의 문팽이…!
“...는 어디에 있는 거지…?”
그 덩치로 바다에 잠수는 무리일 텐데?
어째서인지 등껍질 끄트머리조차 보이지 않았다.
< [61화-2] 고대의 일면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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