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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수처럼-253화 (253/287)

< [61화-1] 고대의 일면 >

파르나르 장편소설

괴수처럼 31

[61화] 고대의 일면

학명: 이즈헬(모래와 유적의 지배자)

서식지: 사막

특징: 대적하면 묻힐 뿐.

위험도: 9종 특수

비고: 고대의 신이 아닐까?

***

지금은 ‘계약자’를 당연시하지만, 100년 전에는 정말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괴수가 순결한 미녀를 찾는 이유가 뭘까?

이 의문에 명쾌한 해답을 주는 사람이 없었다.

세상의 모든 괴수가 수컷인 것도 아닌데, 여인의 순결과 미모, 몸가짐(업보) 등에 집착하는 이유를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설렁설렁 넘어갔다.

아무리 고민해도 답이 나오지 않으니까.

“호오….”

하지만 엘퍼러는, 어쩌면 ‘인류 최초’로 그 이유에 근접할 수 있었다.

이건 아득히 오래전 이야기.

최강의 마신 ‘크로마티온’이 개입하기 전, 한적한 시골에서 살아가던 마녀 ‘슬라리스’가 이룩한 기적이 있었다.

다시는 못할 궁극의 마법.

실수였냐고 묻는다면 대성공이었던,

“사역마를 거느리는 건 마녀들의 마법만으로 불가능합니다.”

그 마녀의 하인 ‘카르셀’이 담백하게 단언했다.

아르테르 행성에서 여자가 남자를 누르고 위에 선 세월은 고작(?) 5,000년뿐이 안 됐다. 그 이전까지는 남성중심사회.

여자들이 마법은 천천히 강해지는 반면, 남자들의 육체는 사춘기 때부터 전성기를 맞이하며 여자를 압도적으로 찍어 누를 수 있었던 까닭이다.

나중은 중요하지 않다.

어릴 때부터 남자에게 복종하도록 길들어진 여자들은 ‘날지 않는 독수리’와 다를 게 없었다. 강력한 마법이 있어도 대항 자체를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그 공식을,

“사역마가 뒤집어놨군….”

“그렇습니다.”

초반에 약한 마녀들을 지켜주는 강력한 동식물이 등장했다.

일명, 사역마(使役魔).

세상의 모든 마법을 쓸 줄 안다고 유명세를 타기 이전부터 이미 ‘백만마녀’는 엄청난 일을 해냈다.

여자와 동식물의 유대(紐帶).

세상(몬스터월드)에 사는 모든 동식물이 ‘순결한 여인’에 짙은 호감을 품도록 유전자에, 마법으로 본능을 심었다.

“어째서 처녀만이지?”

“당시의 사회적인 분위기는, 처녀가 아닌 마녀는 예외 없이 남자에게 길들어진 노예였습니다. 그래서 까다로운 조건을 단 것이지요.”

마녀를 위한 사역마가 남자를 위해 쓰이질 않길 원했다.

그게 대마녀 ‘슬라리스’의 의지.

아직 남자에게 몸을 주지 않았다는 건, 무슨 이유든 간에 노예가 아닌 한 명의 여인으로서 자주적인 생각을 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야기의 구도가 어째….

점점 ‘남자 vs 여자’가 돼가고 있었지만, 엘퍼러는 따지지 않고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아름다운 건?”

“그건 마법과 별개입니다. 추한 것보다 아름다운 게 좋은 건 만물의 진리입니다.”

“뭐…. 그렇지.”

이렇게 해서 ‘사역마’가 탄생했다.

초창기에는 지구처럼 ‘수호자’ 개념이었지만, 지구의 여인들과 달리 강력한 마법을 쓸 줄 아는 마녀들은 그 구속력을 강화했다.

좀 더 본인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그리하여, 사내들보다 강한 사역마의 보호로 무사히 유년기를 넘긴 마녀들은 남자들을 밀어내고 세계의 패권을 쥘 수 있었다.

하지만,

“마신들이 눈을 떴습니다.”

자신에게 위협적인 생명체가 없을 때는 괜찮다.

동식물들은 한계가 있었고 그건 인간들도 마찬가지.

그러나 이전까지 없었던 ‘마녀(魔女)’라는 개념의 인간 암컷들은 마신들에게 경각심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남자들의 억압에서 해방된 여자들의 마법은, 고대부터 신(神)으로 추앙받던 ‘무서운 존재’들에게도 통한 것이다.

그걸 최초로 증명한 인물이 백만마녀.

하지만 마신들의 준동으로 세상은 늘 공포에 떨어야만 했다.

“그래서 자신의 위업을 감췄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마녀께서는 이 일의 책임을 느끼고 수천 년 동안 마신들과 싸웠습니다.”

그렇게 쌓인 명성의 결과가 ‘백만마녀’란 칭호.

하지만 마신들을 쓰러트릴 순 없었고, 간신히 막아내는 수준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그 고작 덕분에 인류는 멸족하지 않을 수 있었다.

마신들은 ‘부상’을 경계했다.

인간의 나라를 공격해서 멸망시키는 건 어렵지 않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완전히 무사할 순 없다. 나라에 소속된 강력한 마녀들은 장식품이 아니니까.

그때, 백만마녀가 기습해온다면?

마신이라고 해도 목숨을 장담하기 힘들어진다.

“그래서 늘 적당히 치고 빠지는 거군.”

이상하긴 했었다.

지구에서는 문팽이를 비롯한 고위괴수들이 목표를 정하면, 의미 그대로 나라든 도시든 군대든 멈추지 않고 ‘쑥!’ 밀어버린다.

하지만 몬스터월드의 마신들은 그러지 않는다.

찔끔찔끔!

공격보다는 슬쩍 건드려보는 수준이다. 물론, 그 건드리는 수준만으로도 위협적인 건 사실이지만, 총체적인 능력만 보자면 정말 왜 왔나 싶다.

그랬는데 역시나!

마신들만의 고충(?)이 있었다.

<헛소리! 그까짓 계집, 언제든 죽일 수 있다!>

영혼석 내에서 모든 대화를 경청 중이던 라그나뢰크가 반박했다.

하기야….

한쪽 말만 완전히 신뢰할 순 없는 법이다.

지금까지 피해자(?) 얘기를 들어보았으니, 공평하게 이번에는 가해자(?) 측의 주장을 한 번 들어보기로 했다.

판사(?) 한유일이 질문했다.

하지만 표정이나 말투는 조금도 호의적이지 않았다.

백만마녀 ‘슬라리스’는 미소녀라고 이미 100% 단정한 ‘하렘의 왕’의 입장에선, 그런 천연기념물을 죽이니 어쩌니 떠드는 라그나뢰크가 좋게 보일 리 만무했으니까.

<왜 안 죽였는데?>

<나머지 세 녀석이 가만 안 있을 테니!>

그렇다. 마신은 하나가 아니다.

역량 차이는 다소 있지만, 인류의 총공세를 받은 직후의 마신을 죽이지 못할 정도로 격차가 심한 건 아니다.

게다가 자존심 강한 그들은 협력하지 않는다. 그래서 함께 힘을 합쳐 인류를 멸망시킨다는 선택지는 애초에 고려사항에 없다.

한다면 자신의 손으로 직접!

인류 입장에서는 참 다행(多幸)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죽은 소감은?>

<최악이다! 내가 이 쓰레기들에게 패해 이런 굴욕-, 크악!>

<일단은 좀 맞자.>

더는 대화가 힘들 것 같으니 가해자의 반론 시간은 여기서 끝.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아니, 최근의 사건으로 넘어왔다. 최근이라고 해도 100년 전의 일이지만, 수천 년 동안 이어져 온 힘의 균형이 깨지는 사건이 있었다.

수많은 동식물이 다른 차원으로 넘어간 대사건이.

“대마녀께서 지치셨습니다.”

거창한 이유가 아니다.

그저 세월의 힘 앞에 그 위대한 마녀조차 무릎 꿇고 만 것이다.

자신의 과오(過誤)를 덮기 위해 마신들과 싸워오긴 했지만, 수천 년이란 시간은 한마디로 끝내기엔 지나치게 긴 시간이었다.

수십 년, 수백 년, 수천 년, 수만 년….

말로 뱉어내는 건 쉽다.

하지만 정작 그 시간을 보낸 당사자는 그렇지 않다.

“힘들어서 잠들었단 건가.”

“잠든 건 그분의 의지가 아니었습니다. 대마녀께서 바라신 건, 평범한 삶. 평범이라고 해도…. 시골소녀 출신이었던 그분은 황족을 동경했습니다.”

“그 나이에?”

“제가 그렇게 질문했다가 죽을 뻔했습니다.”

“......”

슬라리스는 진짜 신분을 감추고 ‘진짜 공주’가 되기로 했다.

당연히 그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수많은 뒷공작과 뒷거래가 오간 끝에야 ‘친부(親父)라는 설정’인 황제조차 모르는 딸이 될 수 있었다.

그 황제가 외쳤다.

나름 피해자일 것이다.

<역시! 내가 술김에 여자를 건드려서 임신시켰을 리 없지!>

<...폐하. 거짓말은 적당히 해주십시오.>

<폐하의 평소 행실 때문에 다른 나라의 황제들을 제치고 저희, 인펠리아 제국이 당첨된 것입니다….>

<부끄러우니 조용히 계셔주십시오.>

하지만 백만마녀의 유희(遊戱)는 순탄하지 않았다.

아니, 본인이 자초했다!

그녀가 아는 공주는 ‘제멋대로 행동해도 예쁘니까 괜찮아!’ 식으로 용서되는 지위였다. 그래서 이대로 솔선수범했다.

그 결과!

백만마녀를 나름 잘 안다고 자부하던 하인 카르쉘마저 경악할 정도로, 인펠리아 제국의 황녀로 둔갑한 그녀는 천방지축 왈가닥이었다.

황비를 비롯한 모두의 속을 부글부글 끓게 할 정도로.

그 여주인공은?

『유라 솔리넬 인펠리아』

지구에서는 ‘이브’라고 불리며, 현재는 깍두기,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치 못하는 외계인 여성. 그녀가 하는 일이라고는 엘퍼러의 말만 고분고분 따르는 게 전부다.

첫인상은 고결함, 성스러움, 매혹적….

하지만 나날이 갈수록?

귀찮아!

손이 정말 많이 간다.

하나부터 열까지 엘퍼러가 신경 써줘야 하는 까닭이다. 그 탓에, 선지혜의 인내심을 매일 시험하게 하는 ‘죄 많은 황녀님’.

알고 보니 거짓 신분이었단다.

동화 속 공주를 동경한 시골(?) 소녀의 만행!

“...온몸에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저주들은?”

“아무리 강력한 마녀라도 기습에는 속수무책인 법입니다. 황비와 황녀들의 마법에 당해 쓰러지기 전까지도, 공주의 수난이니 어쩌니 태평한 소리를 하셨던 분입니다….”

카르쉘이 피곤한 어조로 답했다.

게다가 이게 끝이 아니었다.

이건 운이 안 좋았다고밖에 할 수 없으리라.

자칭(!) 인펠리아 제국에서 가장 아름답고 고결한 황녀 ‘유라 솔리넬 인펠리아’가 기습당한 시기는 무척 공교로웠다.

마신의 침공과 겹쳤기 때문이다.

그것도 명실공히 ‘최강’이 분명한 마신 ‘크로마티온’이 인펠리아 제국을 공격해왔다.

『최강의 마신 - 마법의 정점, 크로마티온』

이 마신을 부를 때마다 따라붙는 호칭.

마법의 정점(頂點)!

인펠리아 제국의 황녀 ‘유라 솔리넬 인펠리아’로 신분상승(?) 한 백만마녀 ‘슬라리스’를 이 마신이 못 알아봤을까?

세계에서 가장 마법을 잘 다루는 존재가…?

절대로 우연일 리 없다.

“그래서?”

“결단이 필요했습니다.”

백만마녀는 죽지 않기 위해 가진 모든 힘을 쥐어짰다.

목적은 탈출!

하지만 마신 크로마티온의 눈을 피하려면 평범한 방식으로는 무리였다.

그래서 뭔 짓을 했느냐면….

“행성 전체에 걸쳐 구멍을 뻥뻥 뚫었다는 거군.”

“네. 차원이동 한 행선지를 감추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게 벌써 100년 전의 사건. 마신뿐만 아니라 저희도 최근에서야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럴 것이다.

백만마녀를 웨일풍 안에서 발견한 사람이 바로 한무일이니까.

그때 못 찾았다면 더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마신 크로마티온이 지구에 올 가능성은?”

“...없진 않지만, 전면전보다 중상모략을 즐기는 크로마티온이 그런 극단적인 방식을 쓸 가능성은 낮습니다.”“무슨 근거로?”

“이 카르쉘. 오랫동안 백만마녀를 보필해온 몸입니다. 마신에 관해서는 그분과 집사장 다음으로 해박하다고 자부합니다.”

...저렇게까지 말하니 일단은 안심.

이번에는 보편적인 질문으로 넘어갔다.

순수한 호기심이다.

“너는 제국에 왜 온 거지? 백만마녀가 없는 제국에는 볼일이 없을 텐데.”

“그, 그건….”

당황하는 카르쉘.

다그쳐도 말을 잇지 못하는 그를 대신하여, 잠자코 있던 인펠리아 제국의 황비 ‘리트멜 데모 인펠리아’가 대답했다.

그 말투는 냉랭한 눈보라를 연상케 했는데….

들어보니 그럴 만했다.

“백만마녀를 공격한 죄를 비밀로 붙어주는 대가로 제 몸을 요구했습니다. 쭉…. 무려 100년 동안이나.”

“몹쓸 놈이군.”

집주인이 없다고 물건을 함부로 쓰는 것도 모자라서….

성심성의껏 대답해준 점은 고마우나 도저히 용서가 안 되는 작자였다.

5종 괴수 ‘울프남’보다 더한 사내.

엘퍼러가 카르쉘에게 내릴 판결은 한 가지뿐이었다.

“서, 선처를…!”

“그건 나중에.”

< [61화-1] 고대의 일면 > 끝

ⓒ 파르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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