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화-4] 해를 품은 달팽이 >
이미 마법의 주체이자 촉매인 ‘영혼석’을 갖고 있지만, 다다익선(多多益善) 아니던가?
...꼭 갖고 싶다는 건 아니다.
그래도 있으면 세계 평화에 좀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라는 매우 기특한 생각을 했을 뿐. 여기에 사심은 없다. 아마도.
엘퍼러는 그런 마음은 깊숙이 묻어뒀다.
방심은 금물!
여자를 버릴 만큼 상식을 뛰어넘는 자다. 그러니 전투방식이나 모략, 속셈 등을 함부로 어림짐작해선 안 된다.
“내게 칼을 들이민 걸 후회하게 해주겠다!”
“제법….”
까다로웠다.
알몸일 때는 별거 아니었던 놈이었지만, 지팡이와 갑옷으로 무장한 남자의 전투력과 방어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게임으로 치자면 ‘천’ 쪼가리 대신 튼튼한 ‘판금’ 계열의 의상을 입은 전투마법사. 그것도 대마법사!
그런 주제에 대단히 민첩했다.
장비는 급수로 따지면 ‘전설’이라고 칭해도 무리가 없을 고품질.
하지만….
“이놈! 동귀어진할 생각이냐!”
남자는 깜짝 놀랐다.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
강력한 마법을 막으며 차분히 대응하던 엘퍼러가 갑자기 방어를 포기하고 날카로운 공격을 해온 까닭이다.
가소롭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갑옷의 단단함에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여 무리수를 던진 게 분명하다고….
그는 그렇게 판단했다.
‘부질없는 발악임을 가르쳐주마! 어…. 어어? 헉?!’
하지만 또 한 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마법을 성실히 막기에 당연히 ‘위협’으로 간주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게 전부 속임수임을 아주 뒤늦게 깨달았다.
저자는….
괴물이었다. 다른 표현이 없다.
맨몸으로 ‘최고위 마법’을 맞아도 끄떡없는 인간이라니!
물론, 평범한 인간은 아니다.
흡혈귀.
그 기생충이 들어간 숙주의 생명력이 높다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지만, 저 정도는 아니다. 흡혈귀 따위는 자신의 마법에 스치기만 해도 소멸이니까.
까앙-!
에쏘드가 황금 갑주의 허벅지에 박혔다.
평범한 ‘용사의 검’이 아니다. 수천 명의 ‘영혼의 힘’이 깃든 마법으로 강화와 증폭을 거듭한 일격이었다.
그럼에도 가르지 못했다.
하지만 그 충격은 고스란히 착용자에게 전해졌다.
“쿨럭!”
내장이 뭉개지며 피를 토해냈다.
생포하겠다는 엘퍼러의 의도치고는 대단히 진지한 일격이었지만, 이 정도로는 죽지 않을 거란 [예감]도 한몫했다.
게다가 에쏘드는 한 자루가 아니다.
왼손의 짧은 단검(한유나 집?)이 남자의 오른손 손목을 찔렀다. 명백히 지팡이를 빼앗아 무력화시키겠다는 의도.
이에 남자는 대응은커녕 반응조차 하지 못했지만, 지팡이 내부에 새겨진 마법들이 강력한 보호막을 발생시켰다.
그건 상상 이상이었다.
‘마법을 무효화 하지 못했다고…?’
엘퍼러는 눈을 가늘게 떴다.
저 지팡이…. 갈수록 마음에 드는-, 흠흠. 대단히 위협적인 물건이다!
충격에서 여전히 헤어나오지 못하는 이때가 기회. 엘퍼러는 망설이지 않고 무릎을 쳐올려 남자의 안면을 후려쳤다.
역시라고 할까?
투구 대신 머리를 보호해주는 ‘보이지 않는 벽’에 가로막혀 가벼운(?) 저항이 있었다.
파직-!
하지만 그것도 한순간뿐, 단번에 부서지며 무릎이 얼굴에 박혔다. 그리고 남자의 머리가 뒤로 휙 젖혀졌다.
그 흔한 비명조차 없이 단번에 정신을 놓고 말았다.
그렇게 해서, 연 끊긴 실처럼 날아간 남자는 지면을 구르다가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치명적인 마법의 향연 때문에 접근하지 못하던 기사들이 움직인 것도 그때였다. 다른 건 몰라도 ‘남자’가 ‘마법’을 쓰지 않았던가?
그 비밀이 ‘남자의 지팡이’에 있을 거라고 믿었다.
“저게 있으면 나도 마법을?”
“어쩌면 정말로….”
“절대 망상이 아니야!”
물론, 잽싸게 몰려든 그들은 헛물만 캐야 했다.
프로사냥꾼, 한무일.
그가 사냥물을 놓칠 리 없었다. 하물며 노력과 수고에 대한 보상을 받는 거라면 거절할 이유가 하등 없었다.
자연스럽게 지팡이를 줍고 완전히 실신한 남자를 마법으로 들어-, 올리려다가 여전히 주인을 보호하는 황금 갑옷 때문에 무산됐다.
‘저것도…. 은근히 대단하군.’
다른 누구도 아닌 엘퍼러의 일격을 어찌 됐든 막아냈다, 겉보기에는.
남자를 어깨에 짊어지고 차원이동 했다. 심문이든 고문이든 그런 잡다한 일은 목포의 수많은 인재에게 맡겨도 전혀 문제가 없으니까.
엘퍼러는 할 일이 많다.
아직 끝나지 않은 슈퍼월드 문제도 아직 마무리하지 않은 상태에서 돌아다니는 거라 더욱 그랬다. 게임과 달리 현실은 퀘스트가 기다려주지 않기 때문이다.
“인펠리아 제국의 새 황제 폐하! 이쪽으로.”
하지만 그 계획은 누군가의 참견으로 무산됐다.
인펠리아 제국의 황비 ‘리트멜 데모 인펠리아’는 명령(핀잔)대로 옷을 입은 후에 공손히 대답했다.
하지만 본인이 얼굴로 황비가 된 게 아니란 걸 증명하듯 그 뒤편은 정말 대단했다. 엘퍼러와 남자가 싸우는 동안 기사들을 정리한 것이다.
믿었던 황비마저 자신들을 적대하는 바람에 우왕좌왕하던 기사들은 속수무책으로 밀려나 현재는 뒤늦게 합류한 마녀들에게 붙잡힌 상태였다.
엘퍼러만 빼고 보면….
체제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킨 남자들을 여자가 제압한 모양새!
엘퍼러는 굳이 그 감상을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흠. 그러면 이 남자의 무장해제를. 덤으로 본인 대신 소개를 부탁하지.”
“명을 따르겠습니다.”
거대한 제국을 날로 먹었다. 탈 나지 않을까, 걱정되긴 했지만, 계속 침묵을 고수하며 얌전히 있는 수호신 ‘인펠리아’의 태도가 대답이었다.
제국의 지도자로 인정한다는 뜻!
애초에 제국을 지탱하는 군사력 대부분을 차지하던 마녀들이 절대적인 지지를 보내던 중이었으니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소란은 엘퍼러가 ‘진짜’ 황제가 되는 걸로 마무리됐다.
지구의 모든 대륙 땅덩어리를 합친 것보다 2배쯤 큰 제국을 꿀꺽하는 걸로.
(인증이 완료됐습니다.)
정치와 경제 부분도 크게 손 델 게 없었다.
지구에서는 외모 가꾸기 바쁜 실세(미녀)들 대신 잡다한 문제를 해결하던 남자들이 있었다. 늘 골치를 썩히는 정치인이란 생물….
하지만 몬스터월드는 달랐다.
인공지능은 아니지만, 모든 일을 객관적으로 처리하는 컴퓨터가 제국의 전반적인 정치와 경제를 관리 및 손보고 있었다.
엘퍼러가 할 일은 새로운 황제로 등록하는 것뿐.
수호신 인펠리아의 승인과 황비의 인정으로 그 과정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무일. 이 행성의 모든 나라가 이럴까?’
‘...그렇겠지.’
‘그럼, 각국의 황비와 왕비만 전부 깨물면 행성 전체를 지배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뭐…? 하하! 이론상으로는 그렇겠지.’
한유일의 과감한 의견에 무일은 웃음으로 대답했다.
뭐든 많으면 탈 나는 법.
정치와 경제를 관리하는 컴퓨터는 ‘완벽’을 추구한다. 하지만 인간미가 너무 없어서 끊임없이 조율이 필요하다.
그 역할이 황제.
실세는 황비지만, 힘들고 복잡한 일은 황제와 남자들 몫이었다. 하지만 남자들이 전부 저 모양이니 앞으로는 무일이 해야 할 일이었다.
자주는 아니더라도 가끔.
‘지구에서 관리자를 파견하는 건?’
‘...암살될걸.’
심하면 반란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지구의 유전자가 섞이는 걸 경계해서, 납치해온 기사들은 예외 없이 전원 거세시킨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물론, 지구에는 ‘복원수술’이란 훌륭한 기술이 있지만….
마녀들은 그조차도 원치 않는다. 물리적인 수술보다 빠르고 안전한 ‘마법’이란 게 있으니. 수술만으로도 안심하지 못한다.
각서나 맹세?
그게 얼마나 부질없는지는 역사가 말해준다.
“지구에 가있는 모든 사역마를 회군시키도록.”
“네, 나의 폐하.”
“...모든 외교는 방어적으로. 주변국들의 도발에 주의하며 파괴된 시설과 인명피해 복구에 전력을 다하도록.”
“그 또한 곧바로 실행하겠습니다.”
지금의 황비는….
대단히 수동적이었다. 흡혈귀의 지배에 불만은 품은 황비의 마지막 발버둥처럼.
헌신적이긴 하지만, 생각을 깊게 하진 않는다.
나쁘게 표현하면….
아둔하지만 착하고 성실한 아내?
황제가 바뀌었음을 제국 전체에 알렸음에도 그 흔한 불만 하나 안 나왔다. 무관심한 것과는 달리 이미 내부적으로 ‘새 황제를 옹립’할 준비가 끝나있던 덕분이다.
『마신을 쓰러트린 남자』
이보다 더 나은 황제의 재목(材木)이 있을까?
아르테르 행성에서 최강의 존재로서 신처럼 군림 중인 네 마신 중 하나인 라그나뢰크.
그 존재를 영원히 침묵시킨 건 대단한 업적이다. 그 어느 역사서를 다 뒤져도 없는 위업으로서 이런 건 건국황제도 하지 못했다.
내가 최고란 증거가 있어야 말이지!
그 어떤 건국신화를 미화시키더라도 늘 마신은 ‘쓰러트릴 수 없는 존재’로 있었다. 명백히 살아있는 존재를 죽였다고 거짓말할 순 없으니까.
하지만 죽었다.
최악(最惡)의 마신이라고 불리는 라그나뢰크가.
인펠리아 제국에서 ‘엘퍼러’가 황제로 오르는 걸 반대할 무리는 질투에 눈이 먼 기사들뿐이었다. 그조차도 황궁 내에서만.
지방에서는 그러려니 하는 추세다.
아무튼, 유서 깊은 인펠리아 제국이 단 3시간 만에 외국인(?)의 손에 떨어졌다.
“강인한 전사는 못 되는 양반이군.”
엘퍼러가 콧등을 긁적이며 쓴웃음을 지었다.
튼튼한 갑옷을 뺏기고 다시 알몸으로 돌아간 남자의 정신력은 그리 뛰어나지 못했다. 큰소리칠 때의 자신감과 자존심은 전부 사라지고 없었다.
고문하지 말라고 질질 짜는 꼴이란….
이 부분에 대해서는 그를 욕하거나 비웃지 않았다.
대부분 사람이 이 정도니까.
딱 민간인.
아프면 울고 힘들면 포기하는 사람들. 그 자연스러운 본능을 억제하고 통제하는 것이 전사라는 무리다.
하지만 이자는 그렇지 않았다.
마신 라그나뢰크 이상으로 그런 각오가 부족했다.
“소인의 이름은 ‘카르쉘’이라고 합니다.”
“직책은?”
“영면(永眠) 중인 대마녀(大魔女) ‘슬라리스’가 고용한 하인입니다. 그분이 영원한 수면에 들어가신 이후에 이렇게….”
“살림살이를 털어서 까불었다?”
“...그렇습니다.”
마녀라는 족속들은 원래 이렇게 무방비한 걸까?
특히, 강하면 강할수록 그러한 성향이 짙어지는 것 같았다. 남도 아닌 자기 안전에 대한 주의가 부족해진다.
이자가 밝힌 ‘슬라리스’는 다름 아니라,
『백만마녀(百萬魔女)』
백만 가지, 모든 마법을 할 수 있다고 전해지는 전설적인 마녀.
죄인을 가두는 영원한 감옥 ‘영혼석’을 창조한 위업(偉業) 겸 악업(惡業)을 남긴 걸 비롯하여 온갖 기행과 전설을 뿌리고 다닌 여걸이다.
아주 오래된 사람이다.
지국에서 ‘고대인’이라고 불리는 족속들은 명함도 못 내미는 진짜 고대인.
살아있는 역사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 백만마녀는 죽지 않았던 건가?”
최강의 마신 ‘크로마티온’에게 패배하여 죽음을 맞이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고?
그렇다고 해도 자그마치 수천 년 전의 인물이다. 아무리 영원한 생명과 젊음을 사는 마녀라도 버틸 수 없는 시간.
진짜 ‘평범한 하인’처럼 바닥에 바짝 엎드린 카르쉘이 답했다.
“죽을 뻔했습니다.”
“...그렇군.”
엘퍼러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살아서 돌아온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힘들지 잘 안다. 더구나 상대는 마신 중에서 가장 강하다는 ‘크로마티온’이었으니까.
부상을 회복했다면 분명 무시 못 할 상대일 게 분명하다.
게다가 이 영혼석의 원래 주인이기도 하고.
‘내가 모르는 안전장치를 걸어뒀을지도.’
암호를 말하면 영혼석이 파괴된다는 식으로?
백만마녀는 영혼석의 창조주이기에 충분히 있을 법한 가정이다.
엘퍼러 전력의 50%쯤 차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영혼석이 사라지면 당연히 치명타다. 무엇보다도 지구로 귀환이 불투명해진다.
귀환이 늦어지면?
지구가 무시무시한 여자들의 폭주로 멸망할지도 모른다.
과장이 아니라 정말로!
“어째서 갑자기 잠든 거지?”
“그건, 100년 전에….”
< [60화-4] 해를 품은 달팽이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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