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화-3] 해를 품은 달팽이 >
무언가 관계가 있다. 이 세계의 비밀과 관련하여.
엘퍼러의 오랜 ‘감’이 놓치면 피곤해진다고 뒤늦게 속삭였다.
남자를 먼저 제압했어야 했을까?
하지만 그리되면 황비가 마법을 썼을 것이고, 이 황궁에서 또 한 번 크게 싸움이 벌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다.
추종하는 무리.
그 마녀들이 죽는 건 원치 않는다. 멋대로 충성하는 거지만, 엘퍼러는 그렇게까지 매정하게 선을 딱 긋지는 못했다.
무엇보다도,
‘안 돼! 백성들이 다친다!’
...하렘의 왕이 반대하고 말이다.
그러니 나쁜 선택이라고 단정할 순 없다. 하지만 그게 놓치겠다는 의미도 아니다. 우선순위에서 밀려났을 뿐.
황비에게 이자의 정체를 물어보면 알 수 있겠지만,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이왕이면 당사자에게 직접 물어보는 편이 좋지 않겠는가?
하지만 남자도 계속 ‘밑’만 잡고 있던 건 아니었다.
열애 중인 미녀를 뺏긴 사내들이 다 그러하듯 분개할…. 줄 알았는데 도주?!
“너-!”
이렇게 기가 막힐 수가!
남자는 굉장히 잽싸게 몸을 뺐다. 하지만 그건 물리적인 도주가 아니었다. 좀 더 고차원적인 차원이동!
마법으로 방해해도 소용없었다.
그대로 뚫고 떠나버리는 것 아닌가!
하지만 이대로 놓칠 엘퍼러가 아니었다. 도망치려는 녀석의 ‘차원 통로’를 찢고 거기서 도로 끄집어냈다.
그자의 얼굴은 경악 그 자체!
하기야 완전히 떠난 배를 육지로 끌어낸 셈이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
분명, 번역마법을 돌리고 있을 터인데 들리지 않았다.
엘퍼러는 살짝 눈살을 찌푸리면서 남자의 팔다리를 노렸다. 죽으면 영혼석 내에서 천천히 심문해도 되지만, 영혼석에 흡수된다는 보장이 없었다.
그러니 생포.
하지만 팔다리는 굳이 없어도 된다.
뭐, 본인 입장에서는 황당하긴 할 것이다. 한창 열애 중이었는데 갑자기 남자가 들이닥쳐서 다짜고짜 마법을 쏘고 칼을 휘두르면.
‘...어째, 파렴치한 인간이 된 것 같군.’
‘신경 쓰지 마라, 무일.’
한유일의 성의 없는 위로를 들으며 계속 공격했다.
정말 놀라운 자였다. 차원이동을 통해 도망치는 건 실패했지만, 맨몸으로 엘퍼러의 공격을 피해낸다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아니, 이미 기적의 영역 아닐까?
엘퍼러의 [예감]과 [예지]를 조금씩 엇나가게 행동한다. 그리하여 ‘명중률 100%’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회피하고 있다.
...그 회피라는 게 팔다리 안 잘리는 정도지만. 자잘하다고 하기에는 좀 깊은 상처가 빠르게 늘어났다.
하지만 제압은 안 되는 상황!
엘퍼러의 이마 주름이 깊게 파일 때였다.
쾅!
황비의 침실 문이 거칠게 열렸다.
끝내 들키고 만 것이다.
어쩔 수 없다고 판단한 남자가 요란스럽게 벽을 부수며 구조요청(?)을 보낸 결과. 저 단단한 벽을 맨몸으로 돌격해서 부수다니….
점점 알몸을 보여주는 사내가 늘어나는 가운데, 목숨이 경각이 달린 와중에도 부끄럽다는 듯이 얼굴을 붉힌 그는 ‘마법’을 썼다.
그랬다! 마법!
엘퍼러처럼 ‘촉매’를 갖고 쓰는 게 아니라 스스로 힘으로 쓴 마법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언어에, 마법을 쓰는 남자라…?’
반드시 잡아야 한다고 느꼈다.
하지만,
“이놈!”
입구에 정신지배 해둔 두 기사는 순식간에 제압됐다.
폴리검을 엘퍼러에게 뺏기며 사실상 무장해제 됐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지나치게 짧았다.
황궁에 거주하는 기사들이 전부 몰려온 게 아닐까?
‘...어째서 마녀들은 안 움직이는 거지?’
제국 내에서 엘퍼러를 지지하는 무리. 무시무시한 마신을 쓰러트린 ‘훌륭한 남성’인 엘퍼러를 사모하지 않으면 몸에 문제가 있는 것이리라!
그러니 도움이 되든 아니든 ‘사모하는 임’을 만나러 올 법도 한데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지난번에 왔을 때는 기사들처럼 우르르 몰려왔었는데….
‘여자는 치장에 시간이 걸리는 법이다.’
한유일이 그것도 모르느냐는 듯이 핀잔줬다.
기가 막혀 입을 쫙 벌린 무일은 반론을 제기하지 못했다. 제법 그럴싸한 이유라고 생각됐을 뿐만 아니라 말할 정신이 아니었던 탓.
악착같이 덤벼드는 기사들은 ‘광기(狂氣)’마저 엿보였다.
무슨 정신계통 마법에 걸린 건 아니었다.
이건 말하자면, 자신들과 같은 남자이면서 ‘다른 삶’을 사는 그를 질투 이상으로 증오하는 것이리라.
수컷 괴수들의 태도와 비슷했다.
“죽어라!”
“용납할 수 없다!”
“괴물! 쓰러져라!”
지구인 ‘한무일’은 이해할 수 없었다. 저들이 저렇게까지 광분하는 이유를. 지구에서도 부럽다는 사람은 있어도 저렇게 살의를 갖는 경우는 없었다.
뭐…. 그가 약했다면 암살당했겠지만, 그는 강했다. 그리고 그건 이 몬스터월드에서도 ‘최강의 강자’로 통했다.
하지만 이 몬스터월드의 기준으로 ‘엘퍼러’는 대단히 불합리한 존재였다. 마신 이상으로.
마녀들의 사랑을 받았다던 전설적인 용사….
인펠리아 건국황제도 저 정도는 아니었으리라!
쿠웅-!
한 박자 늦게, 이 제국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인펠리아’가 등장했다. 거대한 캥거루. 그 위용은…. 그냥 거대한 캥거루였다.
하지만 저 주머니에서 튀어나오는 물건들이 하나같이 기상천외하다.
“......”
역시나 인펠리아는 말이 없다. 대화도 안 되지만.
하지만 눈만은 동그랗게 뜨여있었다. 명백하게 놀랐다는 뜻이라.
그것이 엘퍼러 때문인지, 알몸의 사내 때문인지는 명확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직후, 전설적인 캥거루는 행동으로 답을 대신했다.
주머니를 끄적이더니 대구경 벌컨포를 꺼냈다.
작았다면 코웃음 쳤겠지만, 그 크기가 정말 무지막지했다.
“피, 피해!”
“수호신이 어째서 저 괴물 편을?!”
유서 깊은 황궁이 부서지든 말든 인펠리아는 가차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어차피 마법으로 뚝딱 고칠 수 있으니까.
인펠리아 기준으로 ‘인명피해’는 그다지 문제가 아니었다. 일단, 황궁의 거주하는 마녀들이라면 이 정도로 죽지 않기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기사’를 겨냥한 공격!
그녀는 ‘주인’에게 적대하는 세력을 적으로 간주했다. 자신을 신앙처럼 떠받들고 있던 자들이란 건 둘째였다.
퍼엉-!
인펠리아의 지원사격으로 여유가 생겼다.
같은 남자랍시고 ‘알몸의 사내’를 감싸주는 기사들의 장벽이 드디어 허물어진 것이다. 솔직히 장벽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툭 건드리면 무너질 만큼 미약한 저항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잠깐이 문제였다.
다시 차원도약을 시도할 만큼의 시간은 아니었지만, 그 ‘수상한 남자’가 무장을 갖추기에는 충분했던 모양이다.
당연히 마법으로….
그 순간만은 기사들도 경악했다.
“뭐야, 이 자식?!”
“우리와 같은 남자인데 마법을 쓰잖아!”
“괴물이랑 같은 종속이었단 건가!”
도와달라고 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말하는 듯한 표정으로 좌중을 쓱 훑으며 피식 웃은 남자의 시선에는 명백한 ‘경멸(輕蔑)’이 담겨 있었다.
고결한 귀족이 지저분한 서민을 내려다보듯이.
황금과 보석으로 치장한 전신 갑주를 걸친 모습은 그야말로 ‘황제’의 풍모. 옷이 날개라는 말이 이처럼 잘 어울릴 수 없었다.
알몸일 때는 여자 후리고 다니는 제비족 같더니만….
“너는 누구냐?”
아르테르 행성의 공용어로 아주 뒤늦게 묻는 남자였다.
그보다 먼저 물어봤던 황비 ‘리트멜 데모 인펠리아’는 완전히 엘퍼러의 노예가 되어, 방금까지 몸을 섞었던 남자를 적대적인 시선으로 쳐다봤다.
물론, 마법도 주인을 위해 썼다.
하지만 기사들에게는 통해도 이자에게는 먹혀들지 않았다.
‘에쏘드…?’
거기까지 생각하던 무일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 성질은 비슷했지만, 저건 명백한 ‘갑옷’이었다. 지구의 ‘괴수 백과사전’에는 없는 형태의 장비형 괴수.
이럴 때는 역시 ‘홍길동’을 득달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놀랍게도,
<저, 전혀 모르겠습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황비급의 마법을 그냥 맞아도 되는 갑옷이 있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됩니다!>
<저기 있잖아?>
<그게 말이 안 된다는 겁니다! 저런 게 진즉부터 있었다면 아르테르 행성의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굽실거렸겠습니까!>
<그것도 말 되네.>
홍길동을 다그치길 포기했을 때였다.
영혼석 내의 여자기숙사 내에서 폭소가 터졌다.
기숙사라고 해도 교도소(남자들이 사는 독방과 미로)보다 예쁘게 꾸며놓고 복지를 좀 더 향상해둔 것에 지나지 않지만.
그 여자기숙사의 ‘2번’ 방에서 난 소리였다.
여기에는?
이 영혼석의 원래 주인이었던 8종 괴수 듀크마가 산다. 변질을 일으킨 2종 괴수 가더발트 ‘에필로드 프롤로드’에게 주권을 찬탈당한 비운의 정령.
그녀가 외쳤다.
<창조주께서 살아계셨다니! 아아! 창조주여! 나의 어버이여! 저를 이곳에서 해방해주소서! 지난 모든 과오(過誤)를 뉘우치고 있사옵니다!>
<저자가 네 창조주?>
늘 웃음을 잃지 않던 ‘에필로드 프롤로드’가 진지한 얼굴로 질문했다.
물론, 듀크마의 젖가슴을 주무르는 건 잊지 않았지만.
<흐읏…! 아니다! 저자는 비루한 하인에 지나지 않는다! 창조주께서 만드신 무구(武具)를 입은 하찮은 존재다! 큭! 이년! 그, 그만 만져라!>
<그 창조주가 죽어서 독립한 걸지도 모르지.>
<헛소리! 저 방대한 마력을 마녀도 아닌 남자에게 공급해줄 수 있는 존재는 그분뿐이다!>
<그래서, 그 창조주가 누군데?>
<모른다! 수많은 창조물 중 하나인 내가 그분을 제대로 알 리 없잖-, 아읏…!>
...더는 유익한 정보가 나오지 않았다.
교도소장의 나쁜 손버릇 탓에 듀크마가 침묵시위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래도 상관없다.
지금부터 그 당사자에게 물어볼 생각이니까.
“그러는 넌 누구지?”
“하찮은 인간에게 알려줄 이름 따윈 없다.”
“유감이군.”
처음부터 이름을 알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이미 필요한 정보는 거의 다 모았다. 이젠, 발끈한 놈이 집으로 도망치거나 원군을 부르도록 유도하면 된다.
놈은 ‘꼬리’였으니까.
사령탑인 ‘머리’를 잡으려면 꼬리는 놔줘야 한다.
물론, 무작정 놔줄 마음은 없다. 흡혈귀로 만들어서 머리에 든 정보를 전부 토해내도록 하는 방법도 있기 때문이다.
그린피스 수장 ‘다윙 밀리언’ 때처럼 또 실수할 순 없다.
“헌신적으로 돕겠습니다, 주인님.”
“...넌 옷부터 입어.”
“어머!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드렸습니다.”
완전히 180도 달라진 인물로 재탄생한 황비는 ‘엘퍼러의 첩’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사근사근 태도로 일관했다.
마녀들이 흡혈귀를 멸족시키려 한 이유를 알 것 같다고 할까.
하지만 당장은 도움이 안 됐다.
저 갑옷….
마법이 전혀 통하지 않았다.
어떤 소재인지 알 수 없지만, 진검승부만이 돌파구임은 명백했다.
‘마기나로크는…. 안 될 말이지.’
믿을 수 있는 노예 ‘리트멜 데모 인펠리아’가 철통같이 한유일을 보호할 테지만, 저번처럼 운이 따른다는 보장이 없다.
탈진했을 때를 노릴 ‘미지의 존재’가 있을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공극의 마녀 때처럼 운을 바랄 순 없다.
“허! 흡혈귀였나. 계집의 목덜미에 환장한.”
“입이 좀 거친 자로군.”
“야만적인 놈! 내가 말하는 중인데 공격하다니!”
우왕좌왕하는 기사들을 쳐내며 ‘이름 모르는 자’에게 돌진한 엘퍼러는 상대의 불만을 무시한 채 [예감]을 끌어올렸다.
위기는 아니지만, 위화감은 있다.
이번에도 마법이 발동됐다. 하지만 불덩이를 날리는 화려한 마법은 아니었다. 이자가 쓴 마법은 소환.
유명한 대마법사가 쓸 법한 지팡이가 나타났다.
“...좋은 걸 많이 갖고 있군.”
< [60화-3] 해를 품은 달팽이 > 끝
ⓒ 파르나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