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처럼-250화 (250/287)

< [60화-2] 해를 품은 달팽이 >

맨몸뚱이나 다름없는 서세진은 암담한 심정이었다.

초능력은 건재하지만, 공격수단이 딱 그 ‘반사’뿐이 없는 상황이었던 까닭. 게다가 정신적으로 피로가 많이 누적되었다.

‘이래서는 얼마 못 버티- 헛!’

서세진은 시간을 가름하다가 말고 숨을 들이켰다.

이자는 계속 대화할 마음이 없었다! 다시 만났다는 첫마디 이후에 곧바로 지척에서 칼을 휘두르는 게 아닌가!

인간의 눈으로 그 움직임을 쫓기란 무리였다.

하지만 그보다 더 어처구니없는 건 상대의 공격방식이었다.

“무, 무모한…!”

공격이 반사되면 다시 힘으로 ‘반사된 힘’을 밀어낸다.

자연스레 생긴 자잘한 상처는 무시한 채, 신중한 눈으로 계속 자신에게 칼을 휘두르는 태도가 섬뜩했다.

육식동물의 시선이 저러할까?

서세진은 그 냉철함을 계속 구경하며 비웃어줄 틈이 없었다. 부질없는 헛짓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타격이 컸기 때문이다.

당장에라도 뇌가 폭발할 것만 같았다.

공방이 시작된 지는 겨우 10초 남짓이었지만, 서세진이 느낀 시간 10분은 더 된 것처럼 끔찍한 순간이었다.

“튼튼하군.”

엘퍼러의 감상은 그 정도였다.

파괴불가 속성을 가진 에쏘드가 아니었다면 수천 번은 부러졌을 테지만, 의심 없이 믿고 휘둘렀다.

상대의 능력은 과연 사기적이라고 할만했다. 만약,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 ‘서세진’과 붙었다면 무조건 피해야 했을 것이다.

그만큼 그의 ‘반사 한계치’는 대단히 높았다.

거기다 회귀본능까지!

하지만 엘퍼러의 전투력은 그 한계치를 한참 벗어나 있었다. 현재는 신중하게 조금씩 힘을 올리며 서세진의 한계를 가름하는 중.

『뜸들이는 이유?』

적을 농락하기 위함이 아니다.

그저 신중하게 싸울 뿐. 만약, 서세진이 최대공격을 ‘반사’하면 위험하니까. 반사돼도 감당할 수 있는 선에서 힘을 조금씩 올리는 것이다.

하지만 슬슬 그 측정도 끝나갔다.

세계에서 2번째로 큰 괴수, 문팽이에게 깔린 후유증으로 정신이 넝마가 된 서세진은 당장에라도 무너질 것처럼 위태로웠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악착같이 버티는 건 다름이 아니라,

“이대로 끝날 순 없어!”

세상에 미련이 많은 까닭이다.

부와 명예, 여자 전부를 가진 서세진은 이대로 죽고 싶은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래서 이미 자신의 한계마저 뛰어넘는 초능력을 발휘 중. 하지만 그런 노력과 의지로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였다.

그건 한순간이었다.

최대출력으로 유지되던 초능력 ‘반사’가 단번에 뚝 끊겼다.

서걱!

단말마의 비명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 단단함을 자랑하던 서세진은 평범한 인간처럼 허리가 간단히 양단되며 죽음을 맞이했다. 물론, 완전한 죽음은 아니었다.

그의 영혼은 엘퍼러의 이마에 박힌 보석에 흡수됐으니까.

하지만 육신은 짚단처럼 쓰러졌다. 사실상, 현실에서 퇴장한 셈이다.

(선배. 여기도 상황 끝났는걸.)

문팽이 위에서 대륙을 내려다보던 선지혜가 말했다.

이어서 ‘부산’에서도 연락이 왔다.

(나의 왕이시여. 폐하의 지시대로 전부 생포했습니다.)

실력은 생존력과 비례한다는 얘기가 있다.

문팽이의 중력법칙(?)에 끌려갔던 ‘아임 이레귤러’ 공격대의 상당수가 ‘귀환석’을 사용하여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물론, 별 기대는 안 하고 사용했다.

바로 뒤편에 귀환지점, 차원이동문이 있는데 귀환석을 써서 어쩌란 말인가?

하지만 준비시간이 많이 필요한 차원이동문이 ‘우연히’ 열려있다면 탈출할 수 있다는 막연한 희망으로 사용했다.

그 도박은 절반만 성공이었다.

이동하자마자 흡혈귀들에게 붙잡혔으니까.

“...다 끝난 건가.”

생존자를 찾고 말고 할 것 없이 싹 밀어버렸으니 다 끝났다고 할 수 있다.

몸을 투명하게 하는 초능력자도 있다고 들었는데….

인간의 뜀박질로 문팽이의 진격을 벗어났을 거라고는 보기 힘들다. 애초에 문팽이는 초능력자가 몇 명이고 얼마나 강한지는 안중에도 없었지만.

그냥 지나갔을 뿐이다.

초능력자들은 그 앞에 서성거리고 있었던 거고.

운이 없었던 것처럼.

‘무일! 이제 다시 쏠비얀을 만나러 가는 거냐?’

‘...아니.’

‘왜?!’

‘시간이 없으니까. 최우선순위는 인펠리아 제국. 공극의 마녀도 옮기질 못하는 문팽이와 배틀씹 등이 누구의 마법으로 차원을 넘었는지 알아봐야 해.’

만약, 적이라면 대비해야 한다.

무일의 현재 마법으로도 ‘무리’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는 덩치들. 100년 사이에 저만큼 컸다고 하기에는 어폐가 있었다.

쏠비얀이 말하지 않았던가?

문팽이와 배틀씹은 100년 전부터 유명했었다고.

그렇다면 원래부터 옮기기 불가능한 덩치였다는 얘기!

“부산 상황도 궁금하긴 하지만….”

전부 생포했다는 보고는 받았지만, 그래도 불안했다. 뱀페스트에게 전부 맡기기에는 아무래도 불안하달까.

이건 신뢰의 문제 이전에 성향과 사고의 차이.

그럼에도 엘퍼러는 과감하게 차원이동 했다. 혼자서 전부를 짊어질 순 없으니까. 게다가 일의 우선순위로 따지면 이건 대단히 중대한 사안이었다.

『그는 누구인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100년 전에 대규모 차원이동을 실행한 인간 혹은 단체. 그 힘으로 도망쳐온 ‘이브’에게 물어봐도 영 시원찮았던 흑막.

지구의 인류를 한 번 멸망 직전까지 몰아갔던 ‘존재’가 있다. 전에는 단순한 촌극으로 취급했었지만, 이젠 아니다.

마신이란 강력한 ‘생명체’도 보았다.

솔직히 말해, 2년 전의 자신이었다면 문팽이만 봐도 세계 종말을 예견했을 것이다.

“흐음…. 여긴 그다지 달라진 게 없네.”

차원이동으로 단번에 날아온 인펠리아 제국.

마신의 침공을 받았고, 그 마신이 죽은 것치고는 지극히 평온한 나날을 구가하고 있었다.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마무리하지 못한 황비가 걱정이다. 겁먹었다면 다행인데, 또 다른 흉계를 꾸미고 있다면….

잔뜩 경계하고 있을 그녀를 쉽게 쓰러트릴 수 있을지 의문이다.

‘무일! 어려울 게 뭐 있어?’

제국 전체가 달려들어도 숙주를 이길 수 없다!

하지만 무일은 고개를 저었다.

후딱 정리하고 ‘쏠비얀’을 만나고 싶은 모양이지만, 바로 그 ‘공극의 마녀’의 얘기를 듣고 생각이 변했다.

괴수들이 차원을 넘도록 길을 열어준 원흉.

찾아서 그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지구의 수많은 생명을 죽음과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죗값을.

‘...황궁 분위기는 묘하군.’

만능이나 다름없는 마법으로 이미 복구를 마친 수도는 이전과 다를 바 없었지만, 그 중추에 있는 황궁은 달랐다.

물론, 겉보기에는 역시나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프로사냥꾼의 예리한 눈썰미에서 벗어나진 못했다.

양극화라고 할까.

황비에게 집중되어있던 권력이 나뉜 것 같다.

“흐음…. 내 추종세력인가?”

그런 것 같다.

아무래도 지난 전투의 엘퍼러에게 감명(?)받은 여인들이 황비에게 반기를 든 모양이다. 겉으로는 평화롭지만, 누가 건드리는 순간 펑! 터질 일촉즉발의 상황!

그 원흉이라고 할 수 있는 엘퍼러는 머리를 긁적일 수밖에 없었다. 황비의 적극적인 협조를 받아내긴 힘들지 않을까?

아니면 지저분한 협상을 시도하던가.

‘그냥 노예로 만들자!’

‘...여성을 강제로 하는 건 좀 그렇지만 어쩔 수 없나.’

이번에는 한유일의 의견에 편승하기로 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리트멜 데모 인펠리아’가 순순히 가르쳐줄 것 같지 않았다. 엉뚱한 정보를 가르쳐 주던가.

무일은 침입을 시도했다.

만들지도 않은 세력이 저절로 생겼다는 점이 대단히 고무적인 일이지만, 그 힘으로 전쟁을 일으킬 생각은 없다.

충성심이야 뭐….

어쩐지 절대적일 것 같다는 [예감]이 들어서 고민 안 하기로 했다.

‘경비가 삼엄하군.’

‘못 뚫을 건 아니잖아.’

‘너무 보채지 마.’

쓴웃음을 지으며 하나하나 돌파해갔다. 이번에는 홍길동의 도움 없이 ‘기억하고 있는 황궁 지도’를 떠올리며 쑥쑥!

멀뚱멀뚱 서서 ‘투명한 침입자’를 그냥 통과시켜주는 기사들을 쭉 지나쳤다. 본인들도 어쩔 수 없었으리라.

뭐가 보여야 말이지! 소리라도 나던가!

나중에 일 끝나고 억울할 테지만, 거기까지 챙겨줄 이유는 없었다. 그리고 엘퍼러는 계속 들어가서 마침내 보았다.

그리고 본 광경.

“아응!”

“흐음….”

여자의 교성과 남자의 신음이 들렸다. 여기에 생살이 맞닿는 소리가 방음벽 너머로 엘퍼러의 귀에 속속 들어왔다!

이번에는 마사지가 절대 아니었다.

쾌락에 젖은 여자의 목소리는 확실히 귀에 익었다.

‘황비인데….’

영혼석 내에서도 심문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황제 ‘코란 돌 인펠리아’는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지구에서였다면 불륜이니 어쩌니 했을 테지만, 참으로 담담한 태도가 확실히 ‘외계인’이었다.

그저 순수하게 파트너가 누구인지 궁금할 뿐.

<즉, 모른다?>

<몇 번을 말해야 알겠는가! 내가 아내의, 황비의 사생활을 모르는 건 당연하다!>

알면 좀 안 되느냐고 따지자, ‘오래 살고 싶다.’고 담백하게 고백하는 황제.

이래저래 도움이 안 됐다.

엘퍼러는 3번쯤 망설인 후에 돌격하기로 했다!

둘의 사생활에는 관심 없다. 하지만 ‘마신’이 죽고 ‘남편(황제)’이 죽은 지 며칠도 안 돼서 딴 남자와 관계를 갖는다는 건 역시 수상했다.

이곳 문화가 어떻든 간에 말이다.

몬스터월드에서도 마녀가 아닌 여성들의 경우에는 ‘일부다처(一夫多妻)’를 살기도 하는 모양이다. 물론, 남성의 능력이 자신의 마법보다 뛰어나야 하겠지만.

<사랑은?>

<정략혼에 무슨 사랑인가. 제국에서 가장 강한 마녀를 황비로 삼는다. 그뿐이다.>

<...그건 그렇다고 치자. 그런데….>

<고하라.>

<죄수 주제에 말이 짧다?>

이마에서 어떤 부조리가 오가는지 넘어가고, 엘퍼러는 침실 문을 지키는 두 기사에게서 폴리검을 빼앗았다. 너무나 간단히. 주인이 물건을 찾아가듯이!

기사들이 ‘어?’하는 사이에 몸이 마법으로 마비됐다. 폴리검을 빼앗기면서 마법에 대한 저항력을 상실했기에 그들은 속수무책이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수시로 순찰하는 자들이 있으니까.

엘퍼러는 두 기사에게 ‘정신지배’ 계통의 마법도 걸었다.

“...어렵군. 초능력은 뚝딱 하던데.”

특화된 능력이란 이래서 대단한 것 같다.

하지만 ‘순수한 대마법사’에게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게다가 겨우 둘. 기사답게 정신력은 제법이었지만, 순식간에 제압됐다.

그리하여 순조롭게 방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당연히,

“누구냐!”

“헛?!”

남녀의 역할이 뒤집혔다.

황비는 갑작스러운 침입자를 보고도 알몸을 활짝 드러낸 채 침착하게 반응하는 반면, 남자는 깜짝 놀라며 아랫도리 가리기 급급했다.

엘퍼러는 대답하는 대신 신속하게 움직였다. 황비가 마법을 쓸 때까지 시간을 줄 이유가 없는 까닭이다.

상황판단이 느린 남자는 무시했다. 그리고 황비를 낚아챘다.

가녀린 손목을 잡아당겨 품까지 끌어들인 후에 벌어진 일은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아…!”

한유일은 실패했었지만, 한무일은 그렇지 않았다.

황비가 본능에 따라 펼친 마법 장벽을 간단히 부수고 목에 송곳니를 박았다. 이건 마법저항력이고 뭐고 없었다.

그녀는 뛰어난 마녀(魔女)지만, 그렇기에 여자(女子)였다.

흡혈귀의 각인은 예외 없이 ‘리트멜 데모 인펠리아’의 몸과 마음을 잠식했다. 그리하여 맹목적으로 왕을 모시는 노예로 탈바꿈시켰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정말 한순간.

하지만 엘퍼러는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저자를 잡아야….’

< [60화-2] 해를 품은 달팽이 > 끝

ⓒ 파르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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