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화-1] 관광객은 아닙니다만. >
파르나르 장편소설
괴수처럼 30
[59화] 관광객은 아닙니다만.
학명: 어비스트(심연의 야수)
서식지: 어둠
특징: 무엇이든 빨아들인다.
위험도: 8종 보통
비고: 깊은 무언가가 궁금하다면….
***
무방비했다.
최강의 마녀라는 위명이 무색하게 깊은 잠에 빠져있다. 바로 앞에 사내가 있음에도 눈을 뜰 기미는커녕 배꼽까지 내놓고 새근새근.
숙녀의 방에 무단침입한 남자는 생각했다.
‘이젠 어쩐다?’
이 거리에서 이 마녀를 제압할 방법은 수십 가지쯤 됐다.
죽이는 선택지라면 더 많고.
하지만 동거자(?)가 후자만은 절대로 안 된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죽인다.’는 방법은 일단 보류하기로 했다.
미녀를 죽이면 꿈자리가 뒤숭숭하긴 하겠지….
꼭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무작정 ‘적’이 될 필요는 없다. 가능하다면 평화적으로. 한발 더 나아가 ‘동맹’도 좋다.
‘무일. 내가 잘 말해놨다!’
‘글쎄….’
그건 친분을 다졌다기보다는….
하지만 엘퍼러는 이 부분에 대해선 따지지 않기로 했다. 이미 반쯤 의기소침해진 한유일을 이 이상 풀이 죽게 할 순 없는 까닭이다.
괜한 오지랖이 아니라….
필살기 ‘마기나로크’를 쓴 직후의 ‘보험’이나 다름없는 그의 컨디션이 안 좋으면 생존에 크나큰 위협이 된다.
그러니 지금은 자신감을 살려주는 방향으로 가자.
어떤 식으로?
쏠비얀과 ‘동맹’하면 어찌어찌 될 것 같다.
당장 친분은 무리더라도 서로의 이해관계를 일치시킬 순 있진 않을까?
“흠흠. 실례합니다.”
“음…. 음? 어멋?!”
잠결에 환청을 들었나 싶어서 눈을 살짝 떴던 쏠비얀. 하지만 이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깜찍한 교성을 질렀다.
하지만 이후에 허둥대는 모습을 보이진 않았다.
그만한 연륜이 쌓였다기보다는….
남자에 대한 내성이 아니라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자신의 잠든 모습을 외간남자에게 보여주지 말아야 한다는 개념 자체가 없다고 할까.
좋게 말하면 ‘내숭’이 없는 거고, 나쁘게 말하면…. 놀리는 재미가 없다?
“싸울 의도는 없습니다. 편안히 대화하고 싶습니다.”
숙녀의 방에 무단으로 침입해놓고 편안히?
안타깝게도 한무일은 그런 상식적인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보다는 이곳을 ‘적진(敵陣)’의 일부로 봤다.
하지만 그건 쏠비얀도 마찬가지였다.
상대를 ‘남자’가 아닌 ‘수컷’으로 본 까닭이다!
애완동물이 우리(?)에서 탈출하는 바람에 살짝 놀라는 정도. 그녀는 무방비하게 드러난 속살을 가리는 대신, 의젓하게 대꾸했다.
“빠져나올 줄은 미처 몰랐는데요? 흡혈귀 씨를 과소평가했어요.”
“그거 다행이군요.”
“음…?”
쏠비얀은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상대의 표정과 말투가….
어째선지 그 남자다운 분위기 때문에 점점 부끄러워졌다. 그래서 뒤늦게 팔로 가슴께를 가리고 허벅지를 오므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엘퍼러는 계속 말했다.
평소처럼 단도직입적인 화법으로.
“귀국(貴國)이 지구를 침공 중인지부터 묻고 싶습니다.”
“어머! 흡혈귀 씨. 질문은 제가 하던 중이었는데요.”
“......”
“......”
남녀의 오묘한 관계처럼 흘러가려던 분위기가 단숨에 무거워졌다.
한유일이 ‘안 돼~!’를 외치거나 말거나,
“제가 왜 당신을 깨웠으리라 생각합니까?”
“그건….”
너무나 자연스럽고 태평한 바람에 ‘사역마(애완동물)’로 착각했다.
하지만 이 흡혈귀는 자신의 아무것도 아니다.
쏠비얀에게는 수많은 사역마가 있지만, 주인을 해코지할 위협이 농후한 애완동물을 키울 만큼 조심성 없진 않다.
『어째서 자신을 깨웠을까?』
암살할 의도였으면 깨울 필요 없었다.
그냥 송곳니를 들이밀었으면 끝이었다. 물론, 아무리 잠든 상태였더라도 마법으로 온몸을 보호 중인 그녀는 자신의 안전을 확신했다.
그랬을 터인데….
‘안 보여…? 갑자기 왜…?’
흡혈귀의 정보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업보]는 괴수 외에는 볼 수 없지만, 괴수가 아닌 인간인 쏠비얀은 ‘마법’으로 보는 중이었다.
하지만 엘퍼러는 대마법사!
마법을 공부한 세월은 지극히 짧긴 해도, 그걸 뒤집을 ‘무지막지한 촉매(영혼석)’와 ‘괴수의 본능(뱀페스트)’ 그리고 ‘뛰어난 보조자(에필로드 프롤로드)’가 있다.
그러니 마법에 대한 내성도 강하다.
에쏘드를 소지하고 있지 않더라도 말이다. 그런데 여기에 에쏘드마저 첨가되니 ‘최강의 마녀’라 할지라도 침범하지 못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겠습니다. 쏠비얀 양. 대화를 원합니다.”
깨어날 때까지 기다려준다는 선택지도 분명 있었다.
하지만 이미 너무나 지체된 상황이었다.
『귀환』
잠든 사이에 선지혜와 약속한 ‘매일 출석’을 이미 어기고 말았다.
조금 전에 ‘조금 늦을 예정’이라고, 차원을 뛰어넘는 마법 통신으로 연락을 보내놓긴 했지만, 안심할 수 없다.
선지혜가 엄한 곳에 화풀이만 해도 도시 한두 개쯤은 그냥 증발한다.
문팽이는 좋다고 호응하겠지….
지구로 귀환했다가 바로 되돌아오는 건?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이곳에서 벌어질지 모른다.
‘마신이 쓰러졌으니….’
몬스터월드에서 무언가 극단의 조치가 취해질 것이다.
지구의 강함을 인정하고 평화적으로 진행된다면 좋겠지만, 위협으로 간주하여 ‘멸망’ 시킨다는 방향으로도 갈 수도 있다.
그리고 ‘판타이탄 바이러스’라는 치졸한 방식을 쓴 걸로 봐서는….
후자일 확률이 대단히 높다.
그러니 마신 ‘라그나뢰크’가 쓰러졌다는 소식이 널리 퍼지기 전에 발 빠르게 외교적인 이득을 취해야 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한유일이 ‘최강의 마녀’를 물었다.
『공극의 마녀』
공간을 자유자재로 여닫는 사기적인 마법을 다루는 절세가인.
그 미모만큼이나 능력도 사기적이다.
아군, 하다못해 중립으로만 끌어들일 수 있어도 큰 소득이리라.
“...당신은 흡혈귀 씨가 아니군요. 그렇다면 숙주?”
한유일이 이름도 가르쳐줬지만, 기억나진 않는다.
호기심 때문에 잠깐 살려둔 동물의 이름을 기억해줄 만큼 그녀는 한가하지 않다. 그래서 ‘흡혈귀 씨’라고 칭했고 그건 현재도 마찬가지다.
『숙주(宿主)』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흡혈귀가 기생한 인간이 이렇게 정신을 멀쩡히 유지하고 있다니?
그뿐만이 아니다.
‘강해! 나와 동급! 아니면 그 이상!’
쏠비얀은 마법을 써본 후에 확신했다. 자신의 ‘색적(索敵) 마법’을 튕겨낼 정도로 강한 내성을 가졌다.
그게 시사하는 바는 대단히 크다.
별로 상상하고 싶지 않지만,
『마녀의 천적』
아르테르 행성에서 이자를 해코지할 마녀와 마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게 얼마나 마녀에게 두려운 일인지는 말할 것도 없다.
마법이 통하지 않는 사내!
늘 남자를 무시해오긴 했지만, 남자와 육탄전을 벌여서 이길 여자는 없다. 그리고 그런 남자는 여태까지 ‘마신’뿐이었다.
전부는 아니고 인간의 모습을 한 마신.
『라그나뢰크』
그런데 그런 존재가 또 튀어나왔다.
설상가상으로 그 출신도 불안하게 하는 요소.
지구!
행성 ‘아르테르’는 ‘지구’와 전쟁 중이다. 적극적인 건 아니지만, 강력한 사역마를 다수 보냈으니 심심풀이라고 말하긴 힘들다.
그러니 뻔하지 않은가?
이 흡혈귀가 고향 행성에서 이곳으로 넘어온 이유는 고민할 것도 없다.
『역습!』
최강의 마녀라고 불리는 자신과 만난 것도 우연이 아니라면? 방심시키기 위해서라면?
물끄러미 자신을 내려다보는 사내를 올려다보며….
쏠비얀은 후회했다.
‘그냥 바로 죽였어야 했는데, 이놈의 호기심이….’
지구에서 넘어왔다는 말을 듣자마자 제거했어야 했다.
그런데 ‘수백 마리의 암컷’을 거느린 흡혈귀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지, 그게 너무나 궁금해서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머지는 한숨 자고 내일 물어볼 생각이었는데….
이 사달이 나고 말았다.
“다시 소개하겠습니다. 지구에서 온 한무일이라고 합니다. 별명으로는 엘퍼러. 주로 후자로 불리고 있습니다.”
“...당신이?”
어렴풋이 들어본 적이 있던 것 같다.
조국(祖國), 오르페온 마도제국과 어깨를 견주는 인펠리아 제국의 수호신 ‘인펠리아’를 쓰러트렸다는 지구의 황제.
지루한 제국 정규회의 때, 어렴풋이 들었던 걸 기억한다.
“흠. 유일이 용케도 그건 말 안 했군요.”
했다면 살아남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비밀 아닌 비밀로 한 덕분에 이 자리에 무일은 설 수 있었다.
‘전투경험은 많지 않군.’
그녀는 마신 ‘라그나뢰크’와 비슷했다.
보유한 능력이 지나치게 뛰어난 탓에 전투경험을 올릴 시간이 없던 것이다. 아니면 경각심이 부족하던가.
그런 시선.
자신을 세밀하게 관찰하는 그윽한(?) 눈빛!
쏠비얀은 어째선지 심장이 두근두근 뛰는 걸 느꼈다.
‘머, 뭘까요…? 이 미지의 감각은!’
대화는 자연히 한무일이 주도하게 됐다.
강함의 척도뿐 아니라 ‘말하세요. 저는 혼자 좀 생각할 게 있어서.’라며 쏠비얀이 계속 발을 뺀 덕분이다.
하지만 그게 꼭 좋은 건 아니다.
“듣고 계십니까?”
“...네? 뭐라고 하셨죠?”
“그러니까….”
무일은 계속 국제적인 정세에 관해 얘기 중이었다.
하지만 머릿속이 분홍색과 하트로 장식되기 시작한 그녀에게는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계속 윙윙거리는 느낌.
통역마법은 아무래도 상관없고, 그저 목소리와 말투, 표정을 하나라도 놓칠세라 계속 머릿속에 담아뒀다.
그러니 뭔 말이 들리겠는가?
한유일의 심미안에 ‘쏠비얀’이 직격이었다면, 쏠비얀에게는 ‘한무일’이 치명타였다. 이건 엘퍼러의 고유능력하고는 별개였다.
첫눈에 반했다고 할까.
복잡하고 귀찮은 동맹 어쩌고에 관해서는 그냥 ‘네. 그렇지요.’라는 짧은 단답형으로 대답하며 훌러덩 넘어가 버린 마녀.
쏠비얀은 마지막에 딱 하나만 질문했다.
“또 오실 건가요?”
한유일이 ‘이건 말도 안 돼! 신의 농간이다!’라고 시끄럽게 떠드는 바람에 더는 대화를 진행하기 힘들어진 무일.
그래서 일찍 대화를 마치고 떠날 준비를 했다.
뭔가…. 대단히 앞뒤가 맞지 않은 어정쩡한 진행이었지만, 결과가 괜찮으니 일단은 넘어가기로 했다.
동맹 건을 구두약속(口頭約束)으로 얼렁뚱땅 넘어가서 조금 불안하긴 했지만….
손바닥 뒤집듯 어길 만큼 신의(信義) 없는 여자 같지는 않았다.
“문제가 생기면.”
무일은 짧게 답했다.
또 만나고 싶어하는 한유일과 달리, 그는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 이건 어디까지나 인류의 평화와 안녕을 위한 만남이었다.
이제 슬슬 지구로 돌아가야 할 때.
몬스터월드는 조금 진전을 보이기 시작했지만, 슈퍼월드는 정체된 상태다. 아니, 판타이탄 바이러스로 혼란에 휩싸인 이때를 노릴 게 틀림없다.
‘벌써 침공해온 건 아니겠지?’
차원이동을 하려는 순간이었다.
덥석! 엘퍼러의 손목을 잡는 섬섬옥수(纖纖玉手).
그 손의 주인, 쏠비얀이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눈을 반달처럼 휘게 웃으며 말했다. 그건, 꽤 도전적이면서도 야릿한 노랫말처럼 들렸다.
“그러면 다음에는 ‘문제’를 갖고 다시 만나요. 저는 ‘공극(孔隙)의 마녀’ 쏠비얀. 제가 못 가는 세상은 없답니다.”
“...문제를 직접 만들진 마십시오.”
“잘 가세요.”
< [59화-1] 관광객은 아닙니다만. > 끝
ⓒ 파르나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