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처럼-244화 (244/287)

< [58화-4] 신들의 전쟁 >

‘오오….’

쏠비얀의 집이라고 할까, 성이라고 할까….

도시 규모를 생각하면 대단히 소박한 크기였다. 그리고 그 안의 가구와 소품들도 여성스럽고 아기자기한 편이었다.

하지만 그건 한 일면일 뿐.

다른 한편에는 동물(괴수) 박제가 한가득했다.

지구에서는 괴수 시체를 아무리 방부처리 해도 ‘회귀본능’ 탓에 금방 썩어버려서 할 수 없던 작업.

하지만 역시 현지랄까?

괴수 박제가 평범한 동물처럼 가능했다.

“침대 빼고 편한 곳에 앉아요. 송곳니만 안 빼면 해치지 않을 테니…. 일단은요.”

일단이란 말이 대단히 의미심장하다.

슬쩍 주위를 둘러보니….

박제 중에는 인간도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인간처럼 생긴….

‘...난 괜찮을 거야! 그래, 괜찮겠지!’

한유일은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저 미모로 그런 짓을…. 할 것 같긴 했지만, 그래도 무한한 긍정론으로 넘어가 버렸다!

게다가 대접도 썩 나쁘지 않았다.

마실 꿀차도 내주고 말이다.

“자아! 흡혈귀 씨. 당신에 대해 말해보세요.”

과연, 최강의 마녀라는 걸까?

보통은 ‘하렘의 왕’이 뿜어내는 페로몬(?)에 끌리기 마련인데, 쏠비얀은 멀쩡했다. 그렇다고 선지혜나 유키나 미나미처럼 ‘한무일’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다.

일정한 거리.

지구의 ‘한무일 여자’들과 다른 무언가가 그의 접근을 저지했다.

그게, 한유일을 더욱 갈증 나게 했다.

“그러니까….”

한유일은 아는 걸 줄줄이 설명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최대한 느리게 풀어갔다.

쏠비얀과 조금이라도 더 오랫동안 대화하고 싶다는 마음도 있지만, 최소한의 위기의식도 갖고 있던 덕분이다.

싸울 생각은 없지만, 싸운다면 필패!

자신의 부주의로 혼자만 죽는다면 상관없지만, 자신을 믿고 깊은 수면에 빠진 숙주에게 뭐라고 변명한단 말인가?

게다가 시끄럽기도 했다.

<전하! 정신 차리십시오!>

<망할 흡혈귀야! 이 목숨이 너 하나만 걸린 줄 알아!>

<시, 싫어…. 또 죽는 건….>

<나를 쓰러트린 주제에 마녀 따위에게 죽으면 가만 안 둘 테다!>

영혼석 내에서 온갖 지방방송이 쏟아졌다.

이미 죽은 자들이 왜?

한 번 죽고 나니 더욱 삶에 애착이 가고 집착하게 된 탓이다. 죽으면 편해질 거란 기대를 송두리째 무너트린 영겁의 감옥!

아직 가보지 못한 저승이란 곳이 편할 거란 보장이 없다. 그러니 모르는 저승보다는 그래도 지금이 낮지 않을까?

더구나 홍길동처럼 ‘석방’ 및 ‘부활’의 가능성에 기대하는 자들도 은근히 많았다.

그런데 한유일이 죽어버리면?

다 끝장이다!

‘거참! 시끄럽네!’

하지만 그 덕분에 ‘시간을 끈다.’는 기특한 생각을 할 수 있었다.

한유일은 이것저것 조금씩 설명했다.

그건 생각보다 이 ‘공극의 마녀’에게 잘 먹혀들었다. 호기심 왕성한 그녀는 다그치지 않고 차분히 경청하는 편이었고, 한유일은 할 말이 많았다.

꼭 자신에 대한 얘기가 아니더라도,

“지구도 꽤 발전했군요.”

뛰어난 기사를 선점하기 위해 수시로 확인하지만, 그래도 현지인에게 듣는 것만큼 생동감 있진 않았다.

쏠비얀은 솔직하게 감탄했다.

그 나약한 지구인들이, 몸도 비실비실하고 마법도 못 쓰는 인류가 동물(이야기 속의 괴물)들을 누르고 잠깐이나마 행성을 지배했다는 사실이.

한유일은 그녀의 말투에서 한 가지를 알 수 있었다.

확신은 금물이지만,

‘상상 이상으로 나이가 많을지도…?’

나이에 연연할 생각은 없지만, 살짝 아쉬운 건 사실이다.

세상에 나온 지 얼마 안 된 새끼고양이 같은, 저 초롱초롱 빛나는 눈동자만 보면 풋풋한 소녀이거늘!

...인펠리아 황비도 그랬지만, 마녀들의 감은 좋았다.

쏠비얀이 눈을 가늘게 떴다.

“무례한 생각을 한 것 같은데요, 흡혈귀 씨.”

“그럴 리가! 안 했다!”

“...그런가요? 흠. 어디까지 얘기했었죠? 아! 당신이 숙주의 몸에서 깨어났다는 부분이었던가요?”

“맞다!”

여성 앞에서 늘 유연한 태도와 말투로 일관되던 하렘의 왕.

하지만 현재는 나무토막처럼 딱딱했다.

백성 앞에서 긴장하는 왕이라니! 난생처음으로 ‘나는 왕으로서 실격 아닐까?’라는 자신감 없는 생각을 한 한유일이었다.

그래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아름다운 여인과 대화를 오래 끌면서 ‘한무일’이 깨어나길 기다렸다.

얼마나 걸릴까?

기대 반 불안 반으로 이어가길 몇 시간,

“후암…. 어머! 실례. 흡혈귀 씨의 대화가 지루해서 그런 건 아니에요. 그냥 잠이 많은 편이지요. 흐음. 이걸 어쩐다?”

쏠비얀은 졸린 눈을 비비며 흡혈귀를 힐끔 봤다.

최강의 마녀라 할지라도, 잠든 사이에는 아무래도 무방비할 수밖에 없다. 침대의 안전장치만 믿었다가 어찌 될 줄 알고?

몇 번을 확인했던 ‘기록’을 다시 훑었다.

괴수들만이 볼 수 있는 정보. 지구에서 [업보]라고 부르는….

하지만 ‘마법’ 앞에는 불가능이 없었다.

‘정말 이상한 일이군요. 수백의 암컷을 거느리다니…. 지구는 흡혈귀의 지배를 받는 걸까요? 그럴 리가 없는데…. 그렇다고 안 믿을 수도 없고.’

가장 신빙성 높은 건 ‘흡혈’이다.

한 번 물은 여성을 자신의 지배 아래에 놓는 권능!

마법으로도 가능하긴 하지만, 난해하다. 그런데 그걸 너무나 손쉽게 하는 종족. 그래서 마녀들이 최대한 박멸한 생명체.

멸종위기종이라고 해도 틀린 표현이 아니다.

“미안하지만, 허튼짓 못 하도록 흡혈귀 씨를 가둬두도록 하겠어요.”

“구, 굳이 그럴 필요는…!”

깨어난 한무일이 뭐라고 할지 벌써 선했다.

이곳으로 끌려오자마자 폴리검은 물론이고 두 자루의 에쏘드마저 빼앗겼다. 심지어 영혼석에도 무언가 조치를 당한 것 같다.

그런데….

무장해제로 모자라서 감금?

“저는 동물을 좋아하지만, 동물을 믿진 않아요.”

“자, 잠깐-!”

뭐라고 항변할 틈도 없었다.

앉아 있던 자리의 공간이 쫙 벌어지며 한유일을 집어삼켰다! 그리고 한없이 어두컴컴한 곳에서 계속 떨어졌다.

서둘러 날개를 펼쳐보지만,

찰칵!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수갑과 족쇄가 팔다리를 묶다니 밑으로 잡아끌었다.

너무나 갑작스럽고 황당한 상황!

하지만 여기에 반응할 새도 없이 단단한 바닥에 처박혔다.

“크으….”

흡혈귀의 재생력 덕분에 피해라고 할 건 없었지만, 완전히 묶이고 말았다. 심지어 어디로 끌려왔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근처에 미소녀가 없던 덕분에 ‘하렘의 왕’은 조금 냉철해질 수 있었다. 이제야 위기의식을 느껴서 어쩌자는 건지는 모르지만.

한유일은 먼저 수갑과 족쇄를 풀어보는 방향을 생각했다.

...생각은 무슨! 힘으로!

끼이익-.

하지만 쇠사슬은 팽팽하게 당겨질 뿐, 숙주의 육체를 수백 배로 보강해주는 흡혈귀의 힘으로도 끊어지지 않았다.

그러니 이젠 어쩐다? 혼자 힘으로는 무리라고 판단한 한유일은 원군을 불렀다.

<에필로드 프롤로드! 듣고 있으면 힘을 보태라!>

<...못 해. 싹 다 봉인됐어. 히히! 진짜 망했다~!>

<이 상황에서도 잘도 웃음이 나오는구나! 얼른 방법을 찾아봐!>

<그냥 마음 편히 숙주가 깨어나길 기다려.>

손발 다 묶인 상황에서 ‘한무일’이라고 별수 있을까?

다 끝난 상황이거늘!

극적인 순간은 다 지나고 완전히 무력해진 이때, 휴식시간을 꽉 채우며 피로를 말끔히 회복한 한무일이 드디어 깨어났다.

물론, 상쾌한 기분은 결코 아니었다.

짤랑~!

...손발에 매달린 이게 뭐래?

눈을 뜨자마자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음을 어렵지 않게 깨달은 엘퍼러.

늘 몸에 붙이고 있던 에쏘드도 없다는데 기가 막혔다.

하지만 묻진 않았다.

그저 조용히, 몸을 공유하는 흡혈귀의 기억을 훑으며 대략적인 상황을 빠르게 이해했다. 그리고는 고개를 끄떡였다.

운이 안 좋았다고….

질투에 눈이 먼 괴수들로부터 도망치는 와중에, 마신 다음 가는 ‘최강의 마녀’를 만났으니 어쩔 수 없었으리라.

호기롭게 싸웠다면?

진즉 죽었을지도 모른다.

‘유일. 잘했다. 너는 할 만큼 했어.’

‘...미안하다.’

‘됐어. 뒷일은 나에게 맡겨.’

꽤 암울한 상황이지만, 그건 한유일이 몸을 움직였을 때의 얘기! 한무일이 몸을 움직이니 성능이 달랐다.

가장 먼저, 꿈쩍도 안 하던 쇠사슬이 휘어지며 비명을 내질렀다.

쏠비얀에게 한유일이 말하지 않아서 천만다행이다.

‘이건 원래 가더발트지!’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변질한 ‘장비형 괴수’를, 누가 가르쳐주지 않고 단시간에 파악하는 건 ‘최강의 마녀’라도 무리다.

뱀페스트가 증폭한 힘을 또 한 번 증폭하면…?

그 강력한 마신 ‘라그나뢰크’마저 육탄전으로 밀어붙였던 괴력이 탄생한다!

다만, 그보다 앞서 육체가 버티지 못했다.

우득-!

오른손이 탈골되는가 싶더니 끝내 살과 근육이 뜯겨나갔다.

대단히 고통스러웠지만, 한무일은 눈썹을 한 번 꿈틀하는 걸로 표현을 대신했다. 이까짓 일로 죽지 않는다는 걸 안다.

그 증거가 바로 괴수와 같은 ‘은색’ 피! 여기에 ‘회귀본능’이 곁들어지니 고통 빼면 딱히 손해라고 할 것도 없었다.

바닥에 떨어진 오른손도 붕 날아와서 손목에 도로 붙었다.

“에쏘드가 없으니 허전하군.”

이까짓 쇠사슬은 단번에 베어낼 수 있을 터인데.

아쉬움을 달래며 왼팔과 두 다리의 수갑과 족쇄도 분리했다. 시작이 어려웠을 뿐, 자유로운 오른팔 덕분에 나머지는 일사천리였다.

그렇게 몸의 자유를 얻은 엘퍼러는 정신을 집중했다.

『봉인』

이젠 이걸 풀 차례였다.

에쏘드를 빼앗긴 이상, 믿을 거라고는 이 튼튼한 육신과 마법뿐.

최강의 마녀란 명성에 걸맞게 봉인도 제법 단단했지만, 영혼석에 깃든 수천에 달하는 영혼의 힘은 그 이상이었다.

거기다 촉매의 질도 급상승했다.

<크억-! 네놈! 감히 나를 뭐로 알고!>

마신 ‘라그나뢰크’가 고통의 분노를 담아 일갈했다. 눈물을 찔끔하는 바람에 썩 모양새는 좋지 않았지만.

영혼이라고 다 똑같을 리가!

마신의 영혼은 그릇부터 남달랐기에 마법의 촉매로는 더할 나위 없이 뛰어났다. 그리고 이러한 힘이 합쳐지며 간단히, 너무나 간단히 봉인을 풀어버렸다.

마법도 되찾았고, 이제 남은 건…?

“한세리와 한유나는 저기에 있나.”

괜히 계약자가 아니다.

현재, 어딘지 알 수 없는 공간에 갇히고 말았지만, 그래도 한무일의 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이미 어디에 있는지 알기 때문이다.

쏠비얀이 상식인의 범주에 들어간다면, 획득한 ‘용사의 검’을 쓰레기통 같은 곳에 버려두진 않을 것이다.

보물창고까지는 아니더라도 무기고쯤….

‘굳이 걸어갈 필요는 없지.’

위치는 대충 감을 잡았다.

공간이동 한 육신이 벽이나 가구 같은 것과 겹치는 대형참사가 벌어질 수도 있지만, 그래도 과감하게 행동했다.

흡혈귀의 재생력과 회귀본능을 믿는 것이다.

거기다가 이렇게 보란 듯이 탈출했는데, 마녀가 모를 리 없다. 명색에 최강이란 마녀가 그리 허술할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래야 맞는데?

무기고는 아니고 대충 방치된 에쏘드와 폴리검을 회수한 무일은 어리둥절했다.

뭐가 이리 허술하단 말인가!

성에서 일하는 하녀들은 집주인따라 숙면 중이고, 기사들도 성 밖으로만 순찰했다.

‘목포와 똑같군….’

지나치게 강해서 생긴 무방비.

시청사 문을 24시간 개방해도 그 흔한 좀도둑 하나 없다.

여기도 비슷했다.

『공극의 마녀』

단단히 미쳤거나, 마신(魔神)이 아니면 그녀의 집에 쳐들어올 존재는 없다.

그 덕분에 수월하게 탈출할 수 있었지만….

찜찜했다.

말없이 떠나는 불손한 손님 같다고 할까!

“집주인을 깨워야 하려나…?”

< [58화-4] 신들의 전쟁 > 끝

ⓒ 파르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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