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화-3] 신들의 전쟁 >
근처에 미소녀가 안 보인다는 사실에 살짝 좌절해보는 하렘의 왕.
그렇다고 가만히 있는 건 아니었다. 나중에 한무일의 잔소리와 핀잔을 듣지 않기 위해서라도 뭔가 해야만 했다.
그래서 숙주의 사냥꾼 지식을 바탕으로 현지탐사에 들어갔다.
‘...미소녀가 안 사는 숲이네.’
조사는 무슨! 10분도 안 돼서 포기했다.
대신, 쉬운 방법을 택했다.
<홍길동. 불어. 여기가 어딘지.>
<그, 글쎄요. 인펠리아 제국이 아닌 건 확실한데….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이렇게 나무만 봐서는 누구라도 모를 겁니다!>
다른 사내들처럼 미로에 처박히면 끝장이다.
지금처럼 ‘홍길동’이란 하나의 인격체로 받아들여져야 석방의 가능성이 높아진다. 남들처럼 ‘수컷 죄수1’로 불린다면 영영….
꿈도 희망도 없다.
그렇기에 홍길동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생각했다.
<멀었어? 저기에 높은 산도 하나 보이는데.>
<높은 산…? 아! 알 것 같습니다! 여긴, 모르베토 왕국 아니면 오르페온 마도제국입니다. 저 산을 경계로 나뉜 두 강국입니다.>
<그래서 어딘데?>
<아르테르 행성 반대편으로 왔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 긴박한 상황 속에서, 한 번도 안 와본 곳으로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오다니?
이런 마법은 오르페온 마도제국이 자랑하는 ‘공극(孔隙)의 마녀’도 무리일 거라고, 홍길동은 어림짐작했다.
하기야 그 마신을 단신으로 쓰러트린 인간이 어련할까.
...거기까지 생각하며 흠칫했다.
정말로 ‘최악의 마신, 라그나뢰크’가 쓰러지다니?
그 마신이 여기로 끌려온 광경을 보지 못했다면 아직도 믿지 못했을 것이다.
‘앞으로의 정세가 어떻게 되려는지….’
마신의 죽음.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는 것처럼. 네 마신은 아르테르 행성의 주민이라면 누구나 당연하게 여겨온 존재였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거의 자연물, 자연재해 취급이었다.
그런데 이들 중 하나가 정말 허망하게 사라졌다! 그렇다! 허망하게! 이 강력한 마신이 또 사라질 수도 있다는 걸 암시하다.
이건 대단한 사건이다.
저 하늘에 뜬 2개의 달이 사라진다는 가정 이상으로!
“산 밑에 도시가 있단 말이지?”
한유일은 날개를 활짝 펼쳤다. 그리고 하늘 높이 비상-!
...하려다가 ‘헉!’ 같은 한심한 소리를 냈다. 온갖 잡다한 괴수들에게 포위된 까닭이다.
그럴 수밖에….
현재, 엘퍼러의 주체는 ‘한무일’이 아니라 ‘한유일’이었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괴수의 눈에만 보이는 [업보]에는 ‘한무일’은 있어도 ‘한유일’은 없다.
사냥 업적이라고 할 게 없으니….
괴수들의 눈에 비친 한유일은 ‘만만한 흡혈귀’에 지나지 않았다.
<왕이시여! 본때를 보여주십시오!>
점수 좀 딸 생각으로, 홍길동이 영혼 없는 응원을 했다.
하지만 한유일은 거기에 호응할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자신을 한무일처럼 답도 없이 강하리라 추측했다면 대단한 오산이다.
하렘이 왕이 믿는 건 ‘폴리검’ 하나뿐.
하지만 이 동네는 검과 방패만 믿고 안심하기에는 지나치게 강한 동식물이 널리고 널렸다.
심지어 땅에 박힌 나무 한 그루도 베기 힘든 실정!
“내가 미쳤어? 저것들이랑 싸우게!”
마신마저 쓰러트린 위대한 육신이 등을 보인 채 도주를 시작했다.
한무일이 깨어나려면 아직 멀었다. 그래서 공짜 자유시간이 생겼다고 좋아하던 한유일의 마음은 이미 저만치 사라지고 없었다.
‘이런 자유시간은 원치 않았다!’
외계의 미소녀들과 달콤한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그런데 이게 뭐란 말인가!
덤벼드는 숫자가 한둘이 아니었다. 한무일이었다면 전부 [반격]으로 쓸어버렸겠지만, 한유일은 그런 재주가 없었다.
백이면 백! 전부 일일이 진지하게 상대해줘야 한다.
공장의 컨테이너 벨트처럼 괴수들을 시체로 교환(?)해줄 수 없다.
<...왕이시여. 이 후퇴도 작전입니까? 모아서 한꺼번에 쓸어버리겠다는…?>
어째선지 괴수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그렇게 자신이 미울까?
이 숲에 사는 생명체란 생명체는 전부 달려드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리고 홍길동의 기대를 저버리듯 한유일은 멈추지 않았다.
<히히히! 투명화 마법을 걸어줄게.>
영혼석의 지원을 받았다.
곧바로 몸이 투명해지며 괴수들의 시야에서 모습을 감출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뿐.
괴수 중에 ‘탐지’ 능력이 있거나 [예지]가 극도로 높은 종이 복병이었다. 이 많은 숫자 중에 그런 녀석 한둘쯤 없겠는가?
그렇게 위치를 들키며 추격전이 재개됐다.
“망할…!”
평소에 험한 말을 쓰는 법이 없던 하렘의 왕. 하지만 왕의 품위고 뭐고 현재는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변신으로 스텔스기능까지 동원해도 불통, 물속으로 잠수했더니 해양 괴수들이 또 기다렸다는 듯이 덤벼드는 것 아닌가?
이유라도 안다면 이리 억울하진 않을 텐데!
하지만 한유일의 질문에 친절하게 답해줄 괴수들이 아니었다. 멈추면 곧바로 저 ‘괴수 해일’에 파묻혀서 끊임없는 생사대결을 벌여야 하리라!
물론, 안 죽을 자신은 있다.
하지만 몸의 어딘가 고장 날 때마다 안 아플 리 없었다.
<쭉 가면 도시가 나옵니다. 과연! 왕이십니다! 이 괴수들을 유인해서 도시를 쓸어버리겠다는 의도! 이 홍길동은 전하의 계략에 감탄했습니다.>
<도시…?>
<그렇습니다. 모르베토 왕국과 국경을 맞닿는 오르페온 마도제국의 군사도시가 나옵니다. 제국의 최강전력인 ‘공극의 마녀’가 다스리는 곳이기도 하지요.>
그런 부차적인 설명이 중요한 게 아니다.
앞에 도시가 있다니?
미소녀들이 바글바글할 그곳에 이 흉측한 괴수 대군을 이끌고 갈 순 없다. 백성을 죽이는 왕이란 게 있을 턱이 있겠는가!
후퇴하거나 우회할 방법이 없는 한유일로서는 뭔가 수를 써야 했다.
하지만….
등 뒤에서 맹렬히 쫓아오는 저것들만 쳐다봐도 전의를 상실하고 만다. 한둘이라면 어찌해보겠는데, 어림잡아도 수십만은 될 것 같았다.
“나와 무슨 원한이 있다고…!”
“원한은 없지만, 유감은 많지요. 흡혈귀 씨.”
“음?!”
너무나 자연스럽고 갑작스럽게, 바로 옆에서 들린 목소리 때문에 놀란 게 아니다.
그 미모.
한무일이 봤다면 시큰둥하게 ‘절세미녀 하나 추가요. 옵션은 외계인.’이라고 했겠지만, 한유일은 그럴 수 없었다.
취향을 저격했다고 할까?
등허리까지 덮은 검은 생머리와 검은 눈동자, 창백한 피부와 순백의 드레스가 대조되며 그 미모를 더욱 부각해줬다.
하지만 그뿐이라면 ‘흑발흑안(黑髮黑眼)’인 선지혜도 만만치 않다.
나이는….
이쪽도 겉보기에는 10대 후반이니 넘어가더라도,
『분위기』
표정부터 생김새, 사소한 몸짓 하나까지 전체적인 조화와 균형이란 게 있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고대의 미인도(美人圖)라고 할까.
손에 넣고 싶어도 닿지 않는 머나먼 존재, 망상의 집결체.
그런 오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미녀였다.
<설마…? 전하! 눈앞에서 둥둥 떠다니는 저 여자가 바로 공극의 마녀 ‘쏠비얀’입니다! 공간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세계에서 가장 강한 마녀입니다!>
홍길동이 눈을 크게 뜨며 외쳤다.
이젠 그도 알았다!
한무일과 한유일 사이에는, 같은 몸을 공유해도 메꿔지지 않는 절대적인 전력차이가 있음을.
전자가 ‘마신(魔神)’마저 씹어먹을 진짜 괴물이라면….
후자는 인간이 아닌 흡혈귀인 주제에 더 인간적인 강함의 소유자였다.
‘필패! 죽을 수도 있겠어!’
보아하니 ‘하렘의 왕’의 실력은 로열기사보다 조금 나은 수준.
눈물이 다 나올 정도로 서민적이다!
남자치고 그 정도면 대견하다고, 훌륭하다고 해야겠지만, 한무일의 그림자가 너무나 강렬해서 상대적으로 너무나 초라해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반신(半神) 급인 ‘인펠리아’를 쓰러트린 거랑 다르다.
무려 마신이다! 마신!
재채기만으로 기사 나부랭이들을 쓸어버릴 수 있는….
“어떻게 그 많은 암컷을 거느릴 수 있는지 물어보면 천박하려나요?”
“그건….”
“그건?”
한유일은 그로서 드물게 미소녀 앞에서 말을 망설였다.
공극이든 뭐든 정말로 마음에 드는 여자였기 때문에 말 한마디도 신중해질 수밖에 없었다. 너무나도 백성으로 삼고 싶었다.
이런 기분은 진정 처음….
그래서 한유일은 모양새 안 나게 도망치는 와중에도 호기롭게 외쳤다.
“나는 하렘의 왕이다!”
“과, 과연…! 흡혈귀다운 대답이로군요!”
살짝 어처구니없어하면서도 ‘공극의 마녀’ 쏠비얀은 이해했다.
마녀들에게 미움받기 딱 좋은 사고방식.
그래서 멸족 직전까지 몰린 생명체, 흡혈귀.
어릴 적부터 결혼이나 남자보다 자연과학을 훨씬 사랑했던 그녀는 호기심에 동했다. 이까짓 들짐승들이 도시에 접근하지 전에 처리하는 건 간단하다.
하지만 어째서 이 많은 들짐승이, 수컷들이 광분하며 쫓아오는 걸까?
‘황제를 질시하는 사역마는 없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제국이든 왕국이든 간에, 국내에서 가장 많은 여인을 둔 남자를 꼽으라면 황제와 국왕을 들 수 있다.
가장 뛰어난 씨를 가진 수컷이 바로 황제와 국왕인 까닭이다. 강한 후손을 남겨 마신에 대항할 뛰어난 마녀를 낳는 것이 최종목표!
뛰어난 기사들도 두셋의 부인을 두긴 하지만….
줘도 못 먹는 고자들이니 넘어가자!
아무튼, 인간 암컷을 많이 거느렸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미움받는 수컷은 여태까지 없었다.
“내 잘못이 아니야! 숙주가 나쁜 거야!”
“숙주가…?”
흡혈귀가 차지한 저 몸뚱이의 원주인을 뜻하는 걸까.
하지만 그 숙주는 인간일 터.
자연과학을 깊게 공부한 쏠비얀이지만, 이 흡혈귀의 말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호기심이 들었다.
좀 더 알아보고 싶다고.
‘죽이는 건 보류하도록 할까요?’
흡혈귀 주제에 ‘기사의 검’에 ‘용사의 검’마저 보유하고 있다는 점도 신기하다.
물론, 쉬운 방법도 있다.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인 이 흡혈귀만 제거하면 들짐승들도 뿔뿔이 흩어져서 살던 서식지로 돌아갈 것이다.
하지만 호기심이 동했다.
최강의 마녀에게 사유로는 이거면 충분했다.
동물들이야 죽으면 죽은 만큼 또 어딘가에서 태어나서 유입되지 않겠는가?
끼이이익--.
유리를 긁는 것 같은, 소름 돋는 소리가 들렸다.
공간이 강제로 벌려지며 발생한 현상!
마신 ‘라그나뢰크’의 왼손처럼 빨아들이는 기능은 없지만, 바로 코앞에 커다란 구멍이 뻥 뚫려있다면 어찌 되겠는가?
그대로 골인!
바로 멈추지 못하고 그 안에 제 발로, 제 날개로 들어가게 되어있다.
그 뒤는 더욱 간단했다.
쿠웅-!
거대한 성문이 닫히듯, 강제로 열렸던 공간이 순식간에 닫혔다.
그리고 그 안에 들어간 생명체는 다시 나오지 못했다.
너무나 순식간에 벌어진 사태!
한유일을 쫓던 그 많은 괴수 중 상당수가 제대로 된 비명이나 발악 한 번 못해보고 세상에서 사라졌다.
이것이 바로, 아르테르 행성에서 2번째로 강한 나라 ‘오르페온’이 자랑하는 ‘공극의 마녀’ 쏠비얀의 힘.
살아남은 괴수들은 그녀의 간단한 마법에 쓸려버렸다.
심지어 그 단단한 수풀마저도.
“아…….”
도망치는 걸 멈춘 한유일은 입을 쫙 벌린 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인펠리아 제국의 ‘황비’ 코란 돌 인펠리아도 분명 강하겠지만, 명실공히 세계 최강이라고 불리는 마녀에 비할 바는 아니리라.
한유일은 생각했다.
『지구인 선지혜 = 외계인 쏠비얀』
간단한 공식이 머릿속에 입력됐다.
이 세상에는 어찌 이리도 무시무시한 백성(미소녀)이 많이 사는 걸까?
하지만….
한유일은 고고하게 바닥에 선 마녀를 멍하니 봤다.
그래도 아름다웠다.
쉽게 닿지 않기에 더욱 가치 있고 아름답게 보였다.
“이제 대화를…. 어머? 흡혈귀 씨. 저를 향한 시선이 참 천박한데요? 그게 종족본능인 건 알지만, 웬만하면 좀 참아주세요.”
“크흠!”
“...여자의 말을 듣는 흡혈귀라? 더욱 흥미롭군요. 산책 나온 보람이 있어요.”
산책 나온 김에 허허벌판?
그런 생각을 하던 한유일은 눈을 크게 떴다.
공간째 삼켜져 풀 한 포기 하나 없던 땅에….
새 생명이, 나무가, 비디오를 수억 배 가속한 것처럼 쑥쑥 자라나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숲으로 변했다.
너무나 이상한 세계….
하지만 그래도 한유일은 상관없었다. 이미 그의 관심은 한 ‘여인’에게 꽂혔으니까!
나머지는 아무래도 좋았다.
< [58화-3] 신들의 전쟁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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