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화-2] 신들의 전쟁 >
엘퍼러는 침착하게 한 걸음, 한 걸음씩 거리를 좁혔다.
능력을 완전히 개방한 라그나뢰크의 무지막지한 흡입력에도 흔들리지 않고, 그저 [반격]을 할 최적의 타이밍을 젤뿐.
마신의 행동은 대단히 초보적인 실수다.
‘다혈질 기분파로군.’
녀석이 사냥꾼은 아니지만, 사냥꾼의 기준으로 본다면 실격이다.
아무리 답답한 상황이라도 차분히 대응하는 것이 사냥의 정석. 그런 의미에서 녀석의 행동은 대단히 인간적이었다.
짜증 난다고 대책 없이 밀어붙이는 패턴이었기 때문이다.
신(神)적인 힘은 있을지언정 정신적으로는 평범한 생명체에 불과했다. 아니면 정신적으로 성숙할 기회가 없었던가.
뭐가 됐든 ‘때’가 무르익었다.
사냥을 마무리할 순간이.
“크읔…. 인펠리아…! 이 하찮은 짐승이 방해를…!”
빛도 소리도 없는 어둠의 공간에서 라그나뢰크는 분노를 터트렸다.
인펠리아 제국을 지탱하는 캥거루의 ‘사차원 주머니’에서 무수히 많은 폭탄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예외 없이 빨려 들어갔다.
그 강력한 폭탄들이 어디서 폭발하겠는가?
라그나뢰크의 ‘왼팔’이 당장에라도 파괴될 것처럼 균열이 쫙쫙 갔다.
‘이대로면 죽는다!!’
뒤늦게, 냉수를 머리에 끼얹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했다. 아무리 답답하고 화가 나더라도, 자신이 죽어버리면 다 소용없는 헛짓인 까닭이다.
계속 눈앞에 버러지 때문에 잊고 있었다.
자신이 이곳에 왜 왔던가?
그건 바로, 자신과 상극이나 다름없는 존재 ‘인펠리아’의 숨통을 끊어놓기 위해서다.
인펠리아가 약해진 모습을 포착하자마자 망설임 없이 끝장내러 온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약해졌더라고 해도….
저 주머니가 자신의 왼팔에 대단히 위협적이란 건 변함없다. 그래서 주의했었는데….
“신이란 자가 후퇴인가?”
“이놈!”
능력을 이 어정쩡한 상태로 중단할 수 없었다.
멈추는 순간, 최소한의 간격을 두고 엎치락뒤치락하는 이 구도가 깨지며 단숨에 사달 나고 말 테니까.
그만큼 눈앞의 버러지는 강했으며 끈질겼다.
어디서 이런 무지막지한 놈이 갑작스럽게 튀어나왔단 말인가!
정보라도 있었다면 대책이나 대응법을 준비할 수 있었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럴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능력을 유지해도 죽음.
능력을 해지해도 죽음!
진퇴양난(進退兩難)에 빠지고 말았다.
‘그렇다면…!’
이대로 혼자만 죽을 순 없었다.
죽음이란 말도 안 되는 굴욕을 당할 바에, 이 행성과 함께 통째로 산화하여 흔적도 남기지 않으리라!
...그런 마음과 달리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했다.
라그나뢰크가 능력을 아무리 끌어올리더라도 단번에 행성을 파괴하는 건 무리다. 지구보다 1,300배 큰 행성이 껌값일 리 없잖은가?
그랬다면 어떤 마신이나 괴수의 홧김에 진즉 소멸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일대만이라면?
살기를 포기하고 모든 힘을 개방한다면?
그쯤은 할 수 있다.
괜히 마신이라고 불리는 존재겠는가!
“그건 좀 곤란한걸. 내가 죽으면 행성 전체가 곤경에 빠져서.”
고삐 풀린 추종자들이 지구를 엉망진창으로 만들 것이다.
그렇기에 엘퍼러는, 마신 라그나뢰크와 함께 죽어줄 마음이 털끝만큼도 없었다. 하물며 아리따운 여인네도 아닌 시커먼 사내와?
저승길로 가는 내내 후회막심하리라!
하지만 죽음을 불사한 위력은 마법으로 어찌할 수 있는 범주를 넘어섰다.
“크아아악!”
마신의 최후를 장식하는 모습치고는 썩 좋지 못했다.
익숙하지 않은 고통에 허우적거리는 모습은…. 차라리 놀이터에서 자빠진 동네 꼬마가 더 의젓할 것 같았다.
이젠 가만 놔둬도 자연히 소멸할 목숨!
형체가 일그러진 왼팔이 주위의 모든 사물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자신마저도!
인펠리아도 이젠 폭탄을 던지는 걸 중단했다.
녀석이 죽으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까닭이다.
‘지금까지 흡수한 것들은 다 어디로…?’
그건 라그나뢰크만 알 것이다.
전혀 다른 차원으로 보내버리는 거라면 차라리 다행. 하지만 저 왼팔에 고밀도로 압축해온 거라면 얘기가 다르다.
쓰레기통 비우듯이 어딘가에 버려둔 거라면 또 괜찮을지도 모르지만, 정말 최악의 상황도 가정해둘 필요가 있다.
마신이 웃는 건지, 우는 건지 알 수 없는 얼굴로 외쳤다.
“전부 죽여버리겠다! 감히 나를 화나게 한 대가를 똑똑히 치르게 해주마!”
“...그런가.”
“나는 라그나뢰크. 내 이름은 절망. 죽음과 어둠을 관장하는 마신 앞에 무릎 꿇고 목숨을 구걸하라!”
“...그렇군.”
어린이 만화에 나올 법한 삼류 악당의 대사에 뭐라고 답해줘야 좋을까?
엘퍼러는 적당히 맞장구쳐주며 시간을 벌었다.
웬만하면 무리수를 두지 않는 방향으로 가고 싶지만….
“너만은 기필코 죽인다, 버러지!”
어떻게든 거리를 벌리려고 용쓰던 라그나뢰크가 역으로 바짝 추적해왔다.
에쏘드로 등의 에테르 날개를 베어보지만, 마신의 튼튼한 몸은 치명적인 피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끈덕지게 들러붙었다.
슬슬 한계라는 뜻이리라.
‘몸을 빼는 거야 어렵지 않은데….’
마신(魔神)이라고 해도 ‘미치도록 강한 생명체’일 뿐이다.
전지전능하지 않고, 만능도 아니다.
역사에 나오는 모든 신(神)이 그러하듯이.
지금이라도 공간이동을 써서 다른 차원으로 몸을 빼버리면 그만이다. 목표를 잃은 라그나뢰크는 그냥 여기서 이대로 자폭! 자살!
그걸로 끝이다.
하지만….
엘퍼러는 그럴 수 없었다.
‘무일. 쓸 거냐?’
‘써야지. 뒷일을 부탁하마.’
이 인펠리아 제국의 시민들이 죽도록 방관할 순 없다.
상대는 적대국이고, 오지랖인 것도 맞다.
하지만 남들처럼 이해타산을 따진다면 개나 소나 다 ‘용사’로 불렸을 것이다. 그런 이해득실을 따지는 건, 명성을 쫓아다니는 ‘영웅’이나 하는 짓이다.
엘퍼러는 그럴 수 없다.
황비가 ‘나쁜 년’이라고 해서 그 나라의 국민들마저 ‘나쁜 연놈들’인 건 아니다.
따져보면 황제도 피해자일 수 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침략자’에 맞서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한 걸지도 모르리라.
<아, 안 돼…!>
<아내와 아이들이 저기에 있을 텐데!>
<제국이! 나의 조국이!>
영혼석에서 무력하게 모든 걸 지켜봐야 하는 황제와 기사들이 외쳐댔다.
그 누구에게도 닿지 않을 공허한 메아리.
<거참, 시끄럽네!>
아리따운 여인의 교성도 아닌, 남자의 절규를 두고 볼 교도소장이 아니었다.
에필로드 프롤로드가 그런 황제와 기사들을, 방음처리 된 독방에 가뒀다. 참으로 인정머리 없는 태도!
하지만 그러니 괴수 아니겠는가?
자식만은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어미 앞에서, 그 자식을 장난감처럼 망가트리는 흉악한 존재!
인간의 잣대고 관점일 뿐이겠지만.
“버러지에게 죽는 넌 뭐지?”
“닥쳐라! 누가 누구에게 죽는단 말이냐! 나는 스스로 사라질 뿐이다! 이 지긋지긋하고 따분한 세계에서!”
마침내, 라그나뢰크의 왼팔도 인계점에 도달했다. 당장에라도 부서질 것처럼
이대로 모든 게 사라질 것이다!
...라고, 라그나뢰크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변이 터진 것도 그때였다.
우우우웅-!
라그나뢰크는 정말로 믿고 싶지 않은 걸 보고야 말았다.
두려울 게 없는 마신이지만, 닿는 모든 걸 말끔히 소멸시키는 공격만큼은 무시할 수 없었다. 아니, 대단히 경계하는 편이었다.
특히나, 마신 중에서 가장 몸집이 작은 라그나뢰크가 그랬다.
저 공격을 안다.
저 공격에 죽을 뻔했던 경험이 있으니까.
“마기나로크…!”
어감이 비슷한 건 우연이 아니다.
용언(龍言)으로 ‘라그나뢰크’가 ‘모든 걸 빨아들이는 자’라면, ‘마기나로크’는 ‘모든 걸 지워버리는 자’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누가 더 우위에 있느냐고 묻는다면?
『마신, 라그나뢰크』
어찌 쇠붙이와 인간 따위가 신에게 대항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랬을 터였다.
마기나로크의 빛은 왼손으로 단번에 빨아들일 수 없어서 대단히 위협적이긴 하지만, 자신을 수세에 몰아넣을 정도는 아니다. 죽음은 더욱!
하지만 이건 달랐다.
흡입력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텐데도, 버러지의 검에 모여드는 빛의 양은 줄어들긴커녕 점점 그 크기를 키워가고 있었다.
그렇다고 전혀 흡수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그저, 흡수하는 양보다 모이는 양이 현격히 많을 뿐.
“...네 덕분에 좋은 걸 배웠다.”
현재, 이곳에는 한세리와 한유나가 없다. 엄밀히 따지면 검(집) 속에 있는 상태. 그래서 에쏘드의 위력도 최하(最下)였다.
당연히 ‘마기나로크’도 덩달아 ‘최하’여야 정상.
하지만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최상(最上)이었다.
『용사는 절대로 밀리지 않는다.』
쭉 잊고 있던 에쏘드 속성.
용사가 용사다운 일을 할 때, 용사의 검은 최상의 힘을 발휘한다!
그걸 여실히 드러냈다.
한국에서는 단 한 번도 없었던 현상이다. 그럴 수밖에. 한국은 피해규모도 작고 지켜야 할 인구수도 터무니없이 적었으니까.
하지만 여긴 다르다.
지구와 달리 도시 인근에도 사람이 많이 산다. 아니, 애초에 도시 크기나 인구밀도에서부터 격이 달랐다.
라그나뢰크가 이대로 폭발하면 수천억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다.
이걸 막지 않고서야 어찌 용사라 할 수 있겠는가!
“자, 잠깐-!”
“마기나로크-!!”
근거리에서 직격으로 맞은 필살기(必殺技).
세상을 집어삼킬 기세인 외팔을 제외한 몸뚱이가 먼지처럼 사라지고, 그 왼팔마저도 빛에 노출된 채로 1초를 간신히 버티다가 소멸했다.
엘퍼러의 다음 대응도 민첩했다.
‘불안해서 그냥 잠들 수가 있어야지….’
‘킁! 좀 믿어봐라.’
몰려드는 졸음 속에서, 간신히 정신을 쥐어짜서 공간이동을 시도했다.
안전한 지구로 차원이동 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졸음운전은 죽음을 재촉하는 법이다.
<히히! 죽지 않도록 보조하겠습니다!>
라그나뢰크의 죽음을 확인하지도 않고 몸을 뺐다.
이 몬스터월드에서도 최대한 먼 곳으로.
인펠리아 제국의 소식이 최대한 늦게 도착할 나라로 날아갔다. 정확히 어딘지는 모른다. 불시착에 가까웠으니까.
그보다 확실한 건….
라그나뢰크의 영혼도 유감없이 영혼석에 빨려 들어갔다는 점이다.
<여긴 지옥인가…?>
<...마신도 죽으니 별거 없군.>
<뭣이라? 버러지가 감히 신에게 뭐라-, 컥?!>
<신은 개뿔! 한 번 더 죽어라!>
제국이 무사하다는 걸 확인한 후,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황제와 기사들.
그들은 쓰레기통에 집어넣듯 자신들의 독방에 던져진 ‘인간’을 구타하기 시작했다!
마신의 고고한 자존심?
주먹 앞에 평정됐다!
<히히! 사이 좋게 지내. 쓰레기들끼리.>
아무리 젖가슴이 없다고 해도 그렇지! 면전(面前)에 대고 폭언을 날린 교도소장 ‘에필로드 프롤로드’는 기분이 무척 좋아 보였다.
그건 이곳으로 끌려온 영혼이 ‘마신’ 하나뿐이 아닌 까닭이다.
그중 상당수가 가슴 평평한 기사들이었지만, 마신의 왼팔에 희생된 빵빵한 마녀와 추종자도 있었다.
그렇다! 추종자!
겉모습이 분명 ‘인간 아닌 동식물’이었던 괴수 중 일부가 ‘인간의 영혼’으로, 죽자마자 저승보다 가까운 이 영혼석으로 인도됐다.
당연히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다.
아마….
지구였다면 ‘인간형’으로 분류됐을 괴수들이 아닐까.
아니, 그보다 문제는,
“여긴 또 어디래?”
< [58화-2] 신들의 전쟁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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