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화-1] 신들의 전쟁 >
[58화] 신들의 전쟁
학명: 다미호(꼬리 많은 여우)
서식지: 한국
특징: 꼬리가 많을수록 강합니다.
위험도: 1종 특수
비고: 주식은 사랑♥
***
세상에는 미지로 가득하다.
굳이 우주까지 가서 고민할 필요도 없다. 그 예로, 바다 깊숙한 구역은 높은 수압 때문에 범접할 수 없는 영역으로 여전히 남아있다.
이처럼 모르는 게 어디 한두 가지일까?
하지만 이 생명체는 그 이상의 무언가 있었다.
모른다는 한마디로 끝낼 수 없는 무언가가….
『왜 이렇게 강해?』
이 때문이다!
이것이 정녕 우리와 같은 생명체인지 의심스럽게 한다. 이 압도적인 강함은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신’이라고 부른다.
대적할 수 없는 존재.
이해할 수 없는 존재.
인펠리아 제국 수도에 등장한 이것도 마찬가지였다.
“라그나뢰크가 왔다!”
“도망쳐!”
“우린 다 죽을 거야!”
최악이라고 일컬어지는 마신.
라그나뢰크.
하지만 그렇게 불리는 것치고 외형은 준수했다.
약 2.5m에 육박하는 장신(長身), 남성미가 돋보이는 근육질 몸매, 종아리까지 내려온 보라색 장발….
그 궁극의 나신은 온갖 장신구로 치장되어 있었다.
등에는 반투명한 에테르 날개 6쌍이 있고, 오른손에는 긴 창이 들려있었다. 왼팔은…. 딱 봐도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그 자체만으로도 살상력이 높아 보이는 흉흉함이 감도는 야수의 팔.
‘저것이…. 마녀의 천적?’
마신 라그나뢰크를 그렇게 부른다더라.
...그렇게 강해 보이진 않은데?
놈의 등장 이후로 맹렬하게 울리는 [예감]과 대조적으로, 엘퍼러의 눈에는 ‘조금 큰 사내’로밖에 안 보였다.
그렇다고 [예감]을 신뢰 안 하는 건 아니지만.
<이상합니다. 라그나뢰크는 저렇게 신사적인 마신이 아닙니다. 지금쯤이면 벌써 도시를 삼키려 했어야 맞는데….>
<삼킨다고?>
<네. 저 왼팔로.>
홍길동이 지적하기 무섭게, 라그나뢰크가 왼팔을 앞으로 쭉 뻗었다. 그리고 손바닥을 쫙 펼쳤다.
그 동작만으로도 세상은 어둠에 휩싸였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사태!
하지만 이 현상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는 엘퍼러의 대응도 기민했다. 처음 맞닥트린 상대지만, 현재 그의 [예감]은 풀(full)로 가동된 상태였다.
‘빛을 삼키다니!’
녀석의 왼손 손바닥은 ‘작은 블랙홀’이었다. 평범한 물질을 빨아들이는 거야 그럴 수 있겠거니 하겠지만, 빛은 얘기가 달랐다.
웬만한 흡입력으로는 불가능하니까!
그럼에도 엘퍼러는 두렵거나 몸을 뺄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정말로 ‘블랙홀’ 수준의 위력이었다면 벌써 행성이 흡수되어 사라졌을 테니 말이다. 아니면 자신이 사는 공간을 파괴하는 자살행위를 할 순 없어서 억제하는 걸지도.
...후자는 아닌 것 같다.
그런 위험분자를 나머지 마신들이 방관했을 리 없으니.
“마녀가 상대하기 힘들 만하군.”
에쏘드와 폴리검은 이 ‘흡입’에서 자유롭다.
하지만 마녀들은 자신들의 마법을 제물로 버티는 것이다. 순식간에 빨려들어 죽기 싫으면 일방적으로 수비만 해야 하는 입장!
게다가 지켜야 할 대상은 자신만이 아니다.
『제국!』
다른 도시나 시민도 중요하지만, 이 수도가 송두리째 사라지면 정말 끝장이다. 황제가 죽은 일이랑은 차원이 다르다.
하지만 의문은 남는다.
어째서 지금, 하필 이 순간에 마신이 나타난 걸까.
‘무일, 바로 너 때문 아닐까? 수컷의 공적.’
‘그런가…?’
무일은 한유일의 추측을 부정하지 못했다. 라그나뢰크도 일단은 ‘남성’에 ‘인간형’이었기 때문이다.
저 존재를 ‘괴수’의 카테고리에 넣는다면 말이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걸, 녀석의 다음 행동에서 알 수 있었다.
“수호신을 지켜라!”
“놈의 접근을 막아!”
라그나뢰크의 목적은 엘퍼러가 아닌 ‘인펠리아’였다.
생각해 보면 간단하다.
『사차원 주머니』
무엇이든 빨아들이는 손바닥을 가진 라그나뢰크의 능력하고 반대된 힘이라고 할 수 있었다.
천적까지는 아니지만, 상극(相剋)이랄까.
이 초대형 캥거루는 자신의 주머니에서 꺼낸 폭탄이, 마신의 손바닥에 빨려 들어가도록 끊임없이 유도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 효과가 있었다.
수도를 전부 빨아들일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 같던 흡입력이 뜸해졌다.
대신, 돌격!
오른손에 든 창으로 ‘상극의 존재’를 제거하고자 움직였다.
“크억!”
“가, 강해! 역시, 마신!”
엘퍼러를 막기 위해 몰려들었던 기사들이 온몸을 내던져가며 라그나뢰크의 진로를 봉쇄하고자 애썼지만 무의미했다.
하지만 이런 우연이 또 있을까?
캥거루와 마신 사이에 ‘이계의 황제’가 끼어있는 것이.
“...여전히 얍삽하네.”
“......”
우연이 아니라, 인펠리아의 소행이다.
자신의 위치를 교묘하게 움직여 그런 구도를 만든 것이다.
마치 보호하듯이.
‘...미운 정이라도 든 건가.’
복종하는 척하다가 시원하게 배신한 점은 괘씸하지만, 거기에 대한 벌칙이든 훈계든 저 캥거루가 살아있어야 가능하다.
에쏘드를 양손에 하나씩 쥐고 마신의 앞을 가로막았다.
“너는….”
마신은 말을 잇지 못했다.
한 방에 하나씩 쓰러지는 제국의 기사들이랑 달리 자신의 공격에도 끄떡없이 버텨선 미지의 존재 때문이다.
엘퍼러가 보기에도 마신은 미지(未知)였지만, 그건 라그나뢰크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그 의문이 더 컸다!
그럴 수밖에….
<라그나뢰크의 창은 파괴불가 속성 외에도 장거리 관통능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등에 날개는 공기저항을 무시하게 해주고….>
홍길동이 아는 내용을 속사포로 나불거렸다.
감형받기 위한 아부?
전혀 아니라고 할 순 없지만, 꼭 그런 것도 아니었다.
일단은 살아야 하니까!
엘퍼러의 이마에 박힌 영혼석이 단단하긴 하지만, 이게 부서지면 해방된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영혼이 그대로 소멸해버릴 수도 있다.
게다가 육체도 없이 빠져나가서 어쩌자고?
그러니 제대로 된 절차를 걸쳐서 ‘안전하게’ 석방돼야 한다.
‘정령이 만들어준 훌륭한 남체(男體)에 영혼이 깃들어야지!’
홍길동의 바람이었다.
과거의 고자가 아니라 괴수의 체력과 정력을 겸비한 극상의 육체! 아주 먼 미래까지 내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미래를 위해서라면 무조건, 악착같이 살아남아야 한다.
나는 다르다!
서자(庶子)로 태어났다고 일찌감치 포기한 자들처럼, 이 영원한 감옥에 갇혔다고 포기한 자들하고는 같지 않다.
<라그나뢰크는 강하지만, 너무 강한 게 또 약점입니다.>
<뭔 말이냐?>
<왼손의 능력. 그 위력을 최대로 발휘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왼팔이 버티지 못하여 자신의 몸이 빨려 들어가고 맙니다.>
<그걸 어떻게 아는데?>
<마신의 전쟁이란 책에서 읽었습니다.>
그것도 한두 번의 접전이 아니다.
마신이라고 뭉텅이라고 부르지만, 그들이 동맹관계인 건 아니다. 아니, 역으로 서로 견제하고 경쟁하는 관계라고 보는 편이 맞다.
프로메시아 vs 라그나뢰크
크로마티온 vs 라그나뢰크
그나마 평화주의자처럼 보이는 건 ‘위그드라실’뿐이지만, 그 세계수도 한 성깔 하기에 방심했다간 훅 가는 수가 있다.
그렇다고 해도, 마신들의 전쟁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주연이 ‘라그나뢰크’라는 건 변함없다. 괜히 ‘최악의 마신’이라고 불리겠는가?
하지만 그 덕분에 정보도 많다.
신비주의를 고수하는 프로메시아와 위그드라실에 비하면 정말….
“과연….”
다른 건 전부 넘어가더라도 빛마저 빨아들이는 저 왼팔은 무척 성가셨다.
시야가 차단된다는 뜻이니까.
어디 그뿐이랴?
녀석은 주위의 ‘소리’마저 가져갔다!
그 탓에 청각마저 봉인됐으니 전투라는 것 자체가 성립될 수 없었다. 눈과 귀의 도움 없이 무슨 수로 싸우란 말인가?
하, 지, 만!
“어째서냐! 어째서 네놈에게는 내 권능이 통하지 않는 거냐!”
라그나뢰크가 일갈했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접전이 시작되자마자 자신이 수세에 몰리다니!
하지만 현실이었다.
눈앞에 인간은 시각과 청각을 빼앗기지 않은 것처럼 부드럽게, 거침없이 움직였다. 무엇이든 꿰뚫는 창을 쳐내며 바짝 붙어온다.
놈이 쓰는 무기의 정체는 안다.
온갖 특수능력으로부터 주인을 지키는 ‘용사의 검’이다.
하지만 그 저항력에도 한계가 있을 터!
‘그래야 맞거늘!’
손바닥을 아무리 들이밀어도 꿈쩍하지 않았다!
역으로 그런 불필요한 움직임이 상대에게 기회를 주는 바람에 유효한 타격을 입고 말았다. 치명적이진 않지만, 계속된다면 확실히 위험하다.
거기다 저 능력에는 한 가지 단점이 있다.
『직접적인 효과』
검의 주인에게 닿는 특수공격만 무효화 할 수 있다.
즉, 이 일대의 빛과 소리를 흡입해서 지워버리는 것만은 막지 못한다.
그걸 증명하듯이, 공중과 지상을 넘나들며 근접전을 벌이는 엘퍼러와 라그나뢰크 주위는 시커먼 어둠과 침묵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게 어찌 된 걸까?
...당연하게도 속 시원하게 가르쳐주는 조언자는 없었다. 그리고 조언을 받을 생각도 없었다.
마신은 고고한 존재.
그 어떤 것하고도 타협하지 않는다!
“무척 튼튼한 몸이군.”
“내 물음에 대답해라! 끈질긴 버러지!”
“우리가 이렇게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상하다고 생각되지 않나?”
엘퍼러는 듣고 보고 있지 않았다.
그저 [예감]할 뿐이다.
이제 막 입문한 초짜를 제외한 사냥꾼은 눈과 귀에 의존하지 않는다. 자신의 안면(顔面)이 허전하지 않도록 꾸며주는 장식품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그리고 프로사냥꾼쯤 되면….
상황이 아무리 기상천외해도 능수능란하게 대처할 수 있다.
거기에 더해,
『최강의 사냥꾼이라면?』
불가능한 기적을 시시하게 해낸다.
그래서 감동도 없다. 숨 쉬듯 당연한 걸 한 것뿐이니까.
“음!!”
라그나뢰크는 눈을 크게 떴다.
어째서 그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을까?
듣고 보니 그랬다.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잊고 있었다.
어떻게 저 ‘버러지’는 내 말에 꼬박꼬박 답할 수 있는 걸까? 소리가 전혀 전달되지 않고 있음에도….
주르륵….
슬슬 치유력을 넘어서는 피해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수를 읽힌다는 방증!
아르테르 행성의 동식물(괴수)과 마녀의 사역마가 가진 가장 위협적인 능력인 ‘학습’이다. 하지만 학습할 정도로 전투가 장기화한 적은 진정 처음이었다.
이제….
라그나뢰크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접근전은 불리하다!’
창술에 나름대로 조예가 있고 자신도 있다. 하지만 상대의 검술은 그 이상이었다.
그야 그럴 수밖에!
라그나뢰크는 사기적인 왼손 덕분에 제대로 된 접근전을 해본 적이 거의 없었던 탓이다. 이렇게 수백, 수천 번씩 창을 휘둘러보기도 오랜만이다.
심지어!
자신도 땀을 흘릴 수 있다는 것마저 깨달았다.
“웃기지 마라!”
냄새나는 땀이라니!
그런 건 하찮은 생명체나 하는 것이다. 같은 마신도 아닌 처음 보는 인간에게, 마법사 나부랭이에게 밀린다는 건 있을 수 없다.
라그나뢰크의 눈빛이 흉흉한 빛을 띠기 시작했다. 그리고 왼팔을 감싸고 있던 단단한 겉껍질이 허물을 찢듯 빠르게 벗겨졌다.
스스로 ‘안전선’을 벗어던진 것이다.
“...눈에 흙이 들어간 후에야 눈물 흘릴 신(神)이로군.”
< [58화-1] 신들의 전쟁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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