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처럼-240화 (240/287)

< [57화-5] 반격에는 반격으로. >

무일은 캥거루를 힐끔 확인했다.

그렇게 혼쭐이 났으면 이곳에 안 나올 법도 하건만, 녀석은 나왔다. 아니, 그전에 연기력을 칭찬해주고 싶다.

‘용케도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네.’

‘큭큭! 백성에게 차이다니. 무일. 너도 늘 완벽하진 않다!’

‘...누가 뭐래?’

꽁꽁 묶어서 천장에 대롱대롱 매달아두길 며칠째.

저 캥거루 괴수도 엘퍼러에게 패배한 ‘여성형 괴수’가 다 그러하듯 복종, 순종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웬걸?

풀어주고 이틀째 되는 날, 홀연히 사라졌다!

물론, 여기서 이 녀석을 다시 보게 되기 전까지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추종자들이 며칠씩 집을 비우는 경우가 제법 흔했던 까닭이다.

그런데….

“네 용기와 연기는 칭찬해줄게. 내 통수를 친 걸 포함해서!”

웬만한 아파트 못지않은 크기의 캥거루가 거대한 기관총을 든 모습은 우스꽝스러웠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움찔하는 태도는….

배꼽 잡아도 좋을 정도였다.

그야 이건 어디까지나 엘퍼러의 관점에서 그렇다는 얘기다.

제국의 기사와 마녀들은 웃을 수 없었다.

『이들에게 인펠리아란?』

제국의 시작과 끝! 전부이자 상징!

겉보기에, 인펠리아는 멀쩡하기에 천군만마(千軍輓馬)를 얻은 것처럼 사기가 높아졌다. 하지만 그 알맹이는 만신창이란 걸 몇이나 알까?

황비뿐이 모른다.

그것도 가르쳐줘서 아는 게 아니라 어림짐작으로.

‘패한 건가…!’

황비는 자세한 얘기를 듣지 못했다.

차원을 넘었다가 조용히 돌아온 인펠리아가 외부활동을 일절 하지 않았던 탓이다. 그리고 이 캥거루에게 ‘결과를 보고해!’라고 명령할 만큼 황비는 무모하지 않다.

그런데 이걸로 명확해졌다.

인펠리아는 패배했고 저 ‘괴물’을 이길 수 없다.

아니, 제국의 그 어떤 힘을 동원하더라도 무리란 걸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사역마를 동원해라!”

“네. 황비님!”

마법도 안 통하고, 싸울 의욕도 없던 마녀들.

그녀들은 황비의 명령을 받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뒤편으로 몸을 뺐다. 그리고 그 전략적 공백을 자신들의 사역마로 채웠다.

지구에서 괴수라고 부르는 이 세계의 동식물.

그중 ‘강력한 종’을 마법과 미모로 매혹해서 부리는 것이다.

‘질로 안 된다면 양으로 승부수를…!’

황비도 입으로는 양이라고 했지만, 사역마는 결코 마녀보다 약하지 않다. 질로 따져도 훌륭한 전력!

그 대표격이 인펠리아 아니던가?

일명 ‘반쪽짜리 마신’이라고 불리는 강력한 존재. 초대 황제 이후로 ‘사역’한다는 건 꿈도 못 꾸는 게 현실이지만, 분명한 사실이다.

사역마는 마녀 못지않게, 혹은 그 이상으로 강하다!

“크아앙!”

“어흥!”

엘퍼러 관점에서는 ‘괴수’인 녀석들이 달려들었다.

제국의 수도이기도 한 도시 자체가 워낙 큰 탓인지, 이 많은 녀석이 다 어디에 있었는지는 딱히 궁금하거나 신기하지도 않았다.

대부분이 처음 보는 종이었지만, 눈에 익은 녀석들도 눈에 띄었다.

‘하이블, 쑨우쿵, 엘로엘, 어비스트…. 8종이란 8종은 죄다 여기에 몰려있군!’

이것들을 전부 지구에 밀어 넣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지구 전방위에 걸쳐 모든 도시가 쑥대밭으로 변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이유는 본인들도 ‘마신’의 위협에 노출된다는 위험성 때문이다. 침략을 위해 멸망의 가능성을 열어둘 순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얻는 것보다 잃을 게 많은 행성이라면 더욱!

이들에게 지구는 열성인자로 가득한 병균행성이나 다를 게 없다.

지구에서 ‘엘프’를 그렇게 보듯이.

“하지만 신기하군.”

이렇게 많으면 ‘9종’도 한둘쯤 있을 법도 한데, 코빼기도 안 보인다.

저들 중에 ‘인간형’이었던 괴수들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들긴 하지만, 그렇게 따지더라도 대군(大軍)을 이끈 ‘왕’은 보이지 않았다.

짐작 가는 부분은 있다.

『지배하는 자』

9종은 군림하는 존재다.

그런데 사역마라니?

계약자와 수호자의 계약하고는 명백히 다르다. 대등한 위치가 아닌 주종관계를, 그것도 지배가 아닌 피지배를 ‘왕’이 받아들일 리 없다.

당장은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저들이 지구로 몰려가지만 않으면 얼마든지 상대해줄 수 있다.

‘허어…. 또 먹통이군. [예감]은….’

이 많은 적을 앞에 두고도 위기라고 판단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다.

괴수 중에서 육체파의 정점이라고 불리는 ‘하이블’의 맨주먹을 역으로 쳐내서 밀어낼 정도니 말이다.

어디 그뿐이랴?

바람을 조종해서 온갖 사기적인 능력을 구사하는 엘로엘. 하지만 그 이상의 강력한 마법으로 더 터무니없는 괴력을 발휘하는 그에게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다른 8종 괴수들도 마찬가지.

그리고 실패의 대가는 허망한 죽음이었다.

“막아! 어떻게든 막아!”

“협공해! 혼자서는 상대할 수 없어!”

“어디서 저런 괴물이?!”

약점은 없었다.

공중에서 찔끔찔끔 덤빈다면 똑같이 날개를 형성해서 공중전을 펼치면 그만. 안개를 형성해서 시야를 가리는 꼼수도 무의미했다.

엘퍼러가 투덜대는 그 미약하디 미약한 [예감]에 걸려들었으니까.

여기에 괴수를 압도하는 반사신경과 속도는 이미 따라잡긴커녕 쫓기도 힘든 실정이었다.

처음에는 황비만 그렇게 불렀지만….

피해가 늘어남에 따라 전염병처럼 번졌다.

『괴물』

어째서 자신들이 공격받는지 아는 사람을 정말 극소수였다. 하지만 랜슬럿이 ‘적’의 정체와 정보를 공개함에 따라 금방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일단은 같은 인간이란다.

심지어 같은 ‘남자’라네?

하지만 무시무시한 사역마들을 압도하고, 마녀들은 뒤에서 내숭이나 떨도록 한 저 ‘존재’를 자신들과 똑같은 선에 놓고 싶지 않았다.

내 꼴이 너무나 한심하고 비참해지니까!

그러니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괴물!

“...스스로 사기저하 하겠다는 걸 말리진 않겠다만.”

듣는 당사자 입장에서는 썩 기분 좋진 않았다.

엘퍼러는 폐허로 변한 황궁 무대에 수많은 괴수의 시체를 쌓아가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를 정말로 기분 나쁘게 하는 건 따로 있었다.

“이계의 괴물!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다!”

“......”

황제와 캥거루.

이 둘은 아직도 쓰러지지 않고 있었다.

어디 그뿐이랴?

<폐하! 힘을 내십시오!>

<인펠리아! 제국을 구해줘!>

영혼석에 빨려 들어간 기사들이 열심히 응원 중이었다. 물론, 그 소리는 황제 ‘코란 돌 인펠리아’와 캥거루 ‘인펠리아’에게 닿지 않는다.

하지만 엘퍼러에게만은 들렸다!

이게 얼마나 거슬리는지는 두말할 필요도 없다.

‘저것들 좀 조용히 시켜봐!’

전투에 집중이 안 된다.

그야, 전투 중에 욕설과 비방이 난무하는 건 흔한 일이다. 하지만 사람을 완전히 ‘악역’ 취급하는 거에는 이래저래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싸움의 승패나 향방에 영향을 줄 정도는 아니었지만.

실력차이가 정도껏 압도적이지~.

이건 전투보다는 일방적인 학살이고 사냥이었다.

겉보기에야 충성심과 사명감, 정의감으로 똘똘 뭉친 제국의 분위기가 휩쓸려 너도나도 겁도 없이 덤벼들고 있지만….

콩깍지 벗고 보면 무모한 돌격이다.

“인펠리아 제국을 위해…!”

“폐하! 소인은 먼저 가옵니다!”

“몸은 고자라도 내가 바로 남자다!”

기사 대부분의 원류를 따져보면 ‘지구’다. 혹은 다른 차원.

그럼에도 충성심이 대단히 높았다.

입 싹 닦고 배신한 홍길동이 정말 특수한 경우라고 할 수 있었다.

<억울합니다! 저들이 이상한 겁니다! 마녀의 마법에 현혹됐던가. 고자에다가 늘 찬밥신세! 남자 알기를 축생쯤으로 하는 여자들! 그게 말이 됩니까!>

가치관의 차이라고 해두자.

남존여비(男尊女卑) 사상이 뼈에 새겨진 ‘고대의 한국인’이라서 그렇다고.

본인은 남녀를 평등하게 생각한다고 극구 부정하지만, 한무일이 보기에는 아직 멀었다. 그리고 현대사회에서 살긴 좀 힘들 것 같았다.

누가 뭐라 해도 현대는….

『여존남비(女尊男卑)!』

몬스터월드에서는 ‘마법’ 때문이라면 지구에는 ‘계약’이 있다.

아무튼, 영혼석 안에서 홍길동을 포함한 제국의 기사들이 토해내는 ‘지방방송’이 계속 엘퍼러의 집중을 흩트려 놓는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런 악조건에서도 전투는 계속됐고, 이미 기세는 기울었다.

개인이 단체를 압도하는 걸로.

엘퍼러가 이계에서 벌인 첫 교전이 막을 내리려 하고 있었다.

“컥…! 분하다…. 원통하다….”

인펠리아의 소극적인 공세 덕분에, 어깨에 타고 있던 황제는 계속 안전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젠 끝이었다.

인내심이 먼저 바닥을 드러낸 황제가 인펠리아의 어깨에서 뛰어내린 탓이다.

그렇게 된 원인은 당연하게도 엘퍼러.

고의로 허점을 보여서 상대의 행동을 유도하는 기술 [암시]로, 황제 ‘코란 돌 인펠리아’가 적극적인 공세를 하도록 한 것이다.

이것이 그 결과.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대(代)에서부터 물려받은 ‘용사의 검’이 빗겨나고, 그 대가로 상대의 ‘용사의 검’이 가슴을 훑고 지나갔다.

“착각은 자유지.”

계속 캥거루와 호흡을 맞춰가며 견제 위주로 했다면 훨씬 더 오랫동안 버텼을 것이다.

하지만 녀석은 그렇지 않았다.

이게 그 대가.

뜨거워진 머리는 영혼석 안에서 조용히 식히는 게 좋을 것이다.

그 안에서 무력하게 제국이 무너지는 꼴을 보고도 그럴 수 있을지는 미지수지만.

“왕이 죽었으니….”

“소녀는 이만 투항할래요.”

“인펠리아 혈통은 끝났어요.”

황비 눈치를 보던 마녀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잽싸게 항복의사를 보냈다.

분명, 제국은 황비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황제’가 전혀 무의미한 건 아니다.

남자 혼자서 애를 못 낳듯이,

여자도 남자 없이는 애를 낳을 수 없다. 그리고 몬스터월드의 모든 왕조(王朝)의 지배자는 전통적으로 ‘남성’이었다.

허수아비든 종마였던 간에….

단시간에 많은 ‘혈족’을 뿌리는 건 남성만 할 수 있다.

“배신이냐! 아직 내가 있다! 제국의 국모(國母)가!”

황비 ‘리트멜 데모 인펠리아’가 분노를 담아 일갈했지만, 마녀들은 정말 ‘평범한 사춘기 소녀’처럼 남자의 넓은 등 뒤에 쏙 숨어버렸다.

남자라고 해도 아무 남자가 아니라….

저 무시무시한 황비로부터 자신들을 지켜줄 든든한 남자에게로!

엘퍼러는 쓰게 웃었다.

적대국 하나를 무너트린 것치고는 긴장감이 너무 없었으니까.

‘오오! 무일! 백성이 엄청나게 늘어났다!’

‘아직 끝난 건 아니야.’

‘또 틀렸다, 무일. 이건 끝난 싸움이다.’

‘글쎄…. 마녀들이랑 달리 기사들의 충성은 아직 안 끝난 모양이네.’

누구를 향한 충성일까?

황비? 제국? 세계?

슬슬 구차한 질투로만 보였다.

이 제국의 역사만 돌아봐도, 인펠리아 제국은 ‘황제가 된 용사’가 아닌 애마(?) 인펠리아의 가호로 성립된 국가다.

그리고 그 인펠리아는 현 황제가 죽자마자 무릎을 꿇었다.

용사의 자손을 계속 지켜주고 싶었지만, 이렇게 허망하게 죽어버렸으니 의리도, 미련도 다 끝난 것이다.

『황자(皇子)?』

몇몇 있긴 했지만, 인물됨이 글렀다.

그 황자의 자식, 황손에 기대를 걸어볼 수도 있겠지만, 인펠리아는 그렇게까지 제국을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

이미 한 번 목숨을 걸었다.

그걸로 할 도리는 다했다고 판단했다.

“...마음 같아서는 영혼석에 쳐넣고 싶지만, 제국 유지를 위해 참는다.”

“끙….”

캥거루가 처량한 표정을 지었지만 싹 무시하고….

이제 정말로 남은 상대는 황비와 기사들.

엘퍼러는 일을 마무리하기 위해 다시 한 번 도약했다.

아니, 그러려고 했을 때였다.

콰과과광!

쿠웅! 쾅! 펑!

인펠리아 제국 수도로 유성우가 폭포수처럼 떨어지기 시작했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사태!

하지만 수도 시민들의 비명으로 그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마신이다!”

< [57화-5] 반격에는 반격으로. > 끝

ⓒ 파르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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