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화-3] 반격에는 반격으로. >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정말로 노숙하진 않았다.
우직하게 돌격하는 ‘검사’와 달리, 뭐든 ‘마법’이란 ‘마법의 단어’로 해결하는 ‘마법사’답게 행동했다.
무슨 말이냐면,
슝-!
어느 호텔의 빈방으로 ‘공간이동’ 했다.
마법이 발달한 세계답게 그런 꼼수를 방해하는 장치들이 사방에 덕지덕지 붙었지만, 그냥 마법사가 아닌 ‘대(大) 마법사’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영혼석 안에서, 마법의 촉매로 쓰인 영혼들이 아프다고 난리법석을 떨긴 했지만.
“그럭저럭 괜찮은걸.”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문명 수준은 지구보다 더 우위에 있다고 말하기 모호한 구석이 많았다.
특히, 편의시설 부분에서 영 시원찮았다.
엘리베이터라던가…?
아르테르 행성의 모든 건물은 계단만 있었다. 그것도 비상구라고 말하기조차 민망한 수준이었다.
그렇게 된 이유를 들자면 인간의 능력이 워낙 출중한 탓이랄까.
층과 층을 그냥 훌쩍 뛰어넘는다!
남자는 근력으로, 여자는 마법으로.
‘어떻게 생겨 먹은 동네가….’
황당하긴 했지만, 이것도 좀 시간이 지나니 익숙해졌다. 불편한 느낌도 없고.
어째서 추종자들이 멀쩡한 출입구를 놔두고 창문 같은 다른 통로를 이용하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냥 그렇게 살아온 것이다!
두 발이 땅에 닿아야만 살 수 있는 지구인하고는 달랐다.
그게 우월한 종족임을 뜻하는 건 아니지만, 편리하겠다는 생각은 들었다. 당장, 무일도 마법과 육체 능력을 실생활에 잘 활용하고 있으니까.
<여긴 그런 곳입니다. 사람들이 모두 강하지요.>
지구에서 ‘괴수’라고 부르는 생명체가 여기서는 평범한 동식물에 해당하니 어련할까.
문명 수준은 대체로 엇비슷했다.
지구에서는 ‘계약자’라는 존재가 도시를 지탱하고 있다면, 여기서는 ‘마녀’가 도시보다 규모가 큰 국가를 지킨다는 약소한 차이가 있을 뿐.
그녀들이 하는 일은 하나다.
『마신(魔神)』
행성에 단 ‘넷’뿐인 이 최강의 존재로부터 국가를 지킨다.
물론, 지구에서처럼 미친 듯이 인류를 공격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한 번 움직였다 하면 상상을 초월하니 주의와 경계를 기울이는 것이다.
지구의 모든 문화산업이 괴수 중심이듯이.
아르테르 행성에서는 이 ‘마신’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관광할 때가 아니지.”
마신과 충돌할 이유도 없고 말이다.
엘퍼러는 자신이 여기에 있는 이유를 상기했다.
이 몬스터월드의 전복(顚覆)!
용사가 할 짓은 아니지만, 이미 무일은 ‘평범한 용사’의 범주를 넘어섰다. 굳이 말하자면 ‘이야기 후의 용사’라고 할까.
뭘 하든 용사의 연장선이란 뜻이다.
에쏘드 ‘관점’에서는 그랬다.
그 증거가,
『마기나로크』
온통 적뿐인 여기선 쓸 수 없다는 게 문제지만.
엘퍼러는 호텔에서 조용히 빠져나왔다. 지금부터 할 일은 이곳 ‘인펠리아 제국’을 시작으로 몬스터월드를 한바탕 휘저어주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진다.
와보니, 이 세계와 소모전은 불리하다는 게 절절히 느껴졌다.
‘그렇다고 해도 민간인은 피해야겠지….’
성인군자는 아니지만, 아닌 건 아닌 거다.
그래서 엘퍼러가 선택한 방법은 황궁에 침투하는 것이다. RPG 게임처럼 밑에서부터 차근차근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없잖은가?
시작부터 보스!
이 모든 분쟁의 원흉인 ‘황비’와 단번에 결판내리라!
그래서 황궁 입구까지 곧장 순간이동 한 엘퍼러는 들키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안쪽으로 침투했다. 기사들의 삼엄한 경비를 뚫는 것도 순탄한 편.
어떻게?
<저 앞에서 오른쪽으로 꺾으십시오.>
홍길동은 이 황궁에서 오랫동안 근무해왔다. 그리고 현재는 영혼석 안에서 모든 걸 지켜보고 있다.
모든 정보는 한유일을 거쳐 한무일에게 전해졌다.
솔직히 말해서, 홍길동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상당히 애먹었을 것이다. 그냥 힘으로 밀어붙여야 했을지도?
그건 좋은 선택이 아니다.
<다음은?>
<기사숙소가 허점입니다. 가장 삼엄할 것 같지만, 여인의 몸이 그리운 기사들은 휴식시간에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고자들이 밝히긴.>
<흠흠! 순찰은 3교대로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역시나 빈틈투성이인데, 어떻게 하시냐면….>
홍길동은 끈질긴 구석이 있었다.
이 ‘영원한 감옥’ 안에서는 꿈도 희망도 없는 무기징역이라고 몇 번이나 일렀다. 괜한 희망은 절망과 정신적 고통을 수발하니까.
이렇게까지 말하면 석방을 포기할 법도 하다. 하지만 그는 성실하게 협조 중이었다.
이유는 딱히 거창하지 않았다.
선례나 예외가 전혀 없었다면 모르나, 한 번 있었던 일은 두 번째도 있을 수밖에 없다나?
<탐관오리들이 꼭 그랬습니다.>
<......>
<잘못을 뉘우친다고 해놓고 또 얼마 안 있어서 잘못을 저지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악당이다?>
<지, 진지하게 해석하지 마십시오! 어디까지나 예입니다, 예!>
고집스럽게 믿고 있으니 착각하도록 놔두기로 했다.
괘씸한 놈! 탐관오리? 좋다! 탐관오리! 평생 감옥에서 썩어봐라!
‘그래도 도움이 된 건 확실한걸.’
마법과 첨단과학이 어우러진 황궁은 ‘초행자’에게 미로나 다름없었다.
생명반응을 추적하려고 해도 하녀가 사방에 널렸다!
미색이라도 딸렸다면 그나마 무시할 수 있었겠지만, 옷차림만 빼고 보면 여자마다 황비나 공주 같아서 시선이 절로 간다.
그래서 여기서도 홍길동은 좋은 길잡이였다.
황궁이 아무리 크고 복잡하더라도, 안 가본 곳 없는 그는 모르는 길이 없었다. 심지어 황녀들 별궁까지 세세하게 알고 있다!
<그런 건 알아서 뭐하냐?>
<하렘의 왕이시여! 다 아시면서 물으시다니…. 눈요기입니다.>
<...모르겠는데.>
놀리는 게 아니라, 한유일은 정말로 몰랐다.
예쁜 여자가 보이면?
우선 목덜미에 송곳니부터 박고 시작한다!
그런 흡혈귀 왕이, 멀찍이 숨어서 아리따운 미녀를 멀뚱멀뚱 지켜본다는 홍길동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턱이 없었다.
아무튼, 홍길동은 제법 도움이 됐다.
꼭 기사가 아니더라도, 하녀를 시작으로 뛰어난 마법 실력을 보유한 여인들이 득실거리는 황궁을 제집처럼 돌아다닐 수 있게 해줬으니까.
그건 황비의 방이라고 해도 예외가 아니었다.
“아응…! 그래, 거기! 거기를 좀 더, 좀 더 세게!”
“네. 황비님.”
...이상한 상상과 오해를 부를 소리가 귓가로 들려왔다.
보기만 해도 숨이 멎을 만큼 아름다운….
그런 예쁜 아가씨들을 질리도록 봐온 엘퍼러는 자신의 감상을 과감히 생략했다.
대신,
‘...아동법을 위반하고 있는 저 여자가 황비인가!’
황비로 추측되는 30대 초반 외모의 여인이 자신과 마찬가지로 알몸인 소녀들에게 둘러싸여 마사지 받고 있었다.
아직 15살도 안 됐을 아이들에게 저 무슨 만행을…!
엘퍼러는 분노로 부들부들 떨었다.
인펠리아 제국의 황비는 찬사와 미사여구를 붙여도 좋을 미인이란 건 분명하다. 하지만 마음씨는 최악이라고 결론지었다.
마사지는 힘 좋은 남자에게 받으라고! 이 나쁜 년!
설득할 생각이 완전히 사라졌다.
저런 심성의 여자라면 나중에 뒤통수칠 게 확실하니까.
‘오오! 드디어 내 차례인가!’
‘봐주지 마라, 유일.’
‘당연하다!’
이곳 흡혈귀들은 어떨지 모르지만, 한유일의 변신능력은 하루가 다르게 진화했다. 그리고 현재에 이르러서는 ‘스텔스’ 기능이 마법에까지 닿았다.
그게 어쨌냐면….
마법사의 감시마법에 걸리지 않는다!
이건 ‘한무일’이 할 수 없는 ‘뱀페스트 고유능력’이었다.
<히히히! 젖가슴이 무척 탐스러운 여자네! 보내줘! 얼른!>
황비의 알몸을 본 옥황사제 ‘에필로드 프롤로드’가 벌써 아우성이었다.
그녀는 한유일에게 ‘투명화 마법’을 걸어줬다.
이걸로 마법은 물론이고 사람의 눈에도 걸리지 않게 됐다!
...처음부터 그렇게 황궁에 침투했으면 되지 않았느냐고 할 수 있겠지만, 대단히 모호한 감이 있었다.
한무일은 ‘마법’을 잘 다루고, 한유일은 ‘변신’을 잘하고….
게다가 황궁 내에서는 신중할 필요가 있었다. 무턱대고 한유일에게 맡겼다간…. 미녀 목덜미에 한눈팔다가 필연적으로 들켰으리라!
하지만 지금은 괜찮다.
쳐다볼 목덜미가 목표물인 황비뿐이니까.
“음…?”
아르테르 제국의 황비 ‘리트멜 데모 인펠리아’는 오한을 느꼈다.
굳이 말하자면 여자의 직감 혹은 육감.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은 미지의 감각이 그녀로 하여금 위기가 도래했음을 알려줬다.
그래서 마법을 사용했다.
어깨를 주무르는 두 어린 소녀를 밀쳐낸 황비를 중심으로 전방위 보호막이 펼쳐졌다.
“헛-!!”
한유일은 숨을 들이켰다.
이대로 벌처럼 쏘아져 날아가서 황비의 목덜미에 송곳니를 박을 예정이었다. 하지만 반투명한 장막이 왕의 앞길을 막았다.
파직!
허공에서 방탄유리에 금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혹시나 싶었던 황비는 눈을 크게 떴는데, 오랜 연륜을 증명하듯 ‘꺅! 침입자다!’ 같은 예쁜 비명을 지르진 않았다.
대신, 튼실한 허벅지와 엉덩이 사이의 수풀을 바짝 오므리고, 수박처럼 큰 젖가슴을 조용히 팔로 감쌌다.
그녀의 대처는 그걸로 그치지 않았다.
“무엄한 암살자여. 어떻게 여기까지 침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살아서 돌아갈 생각은 하지 마라.”
강력한 마법이 황비의 방을 집어삼켰다.
물론, 한유일도 그때 동안 잠자코 구경하고만 있던 건 아니었다. 폴리검을 꼽고 방패를 소환하여 그녀의 마법을 흡수했다.
그 기세로 접근을 계속 시도!
이 싸움은, 육체가 평범한 여인 수준에 지나지 않는 마녀(魔女)인 황비에게 닿기만 하면 승리다.
하지만,
‘유일! 아이들!’
‘아! 미래의 내 백성~!’
방치된 소녀들을 망설임 없이 물러섰다.
이 연약한 아이들이 황비를 마사지하는 이유가 충성의 발로인지, 강제인지 혹은 천직(天職)인지는 일절 관심 없다.
중요한 건 아직 어린 여아(女兒)들이란 점.
마법과 과학으로 영원한 젊음과 미모를 유지하는 마녀의 관점에서도, 이제 막 2차 성장을 시작한 외모는 ‘실제 나이’일 확률이 대단히 높다.
매력적이지 않으니까.
가슴은 평평하고 엉덩이는 밋밋하다.
꼭 남자에게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더라도 ‘여자의 자존심’은 미숙한 외모를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다.
무슨 옷을 입어도 ‘남자’ 같잖은가!
그리고 몬스터월드의 ‘남자’ 지위는 ‘여자’보다 한참 아래다.
『남자처럼 생겼네~?』
대단히 굴욕적인 언사다.
잠시 얘기가 셌지만, 저기에 소녀들은 정말 ‘소녀’일 거란 뜻이다.
홍길동도 거기에 대해서는 동의했다
“황비라는 여자가 어찌…!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백성이구나!”
소녀들을 쑥 끌어당겨 구해낸 ‘하렘의 왕’이 꾸짖듯 외쳤다.
저건, 외부에 알릴 생각으로 쓴 마법.
자신을 마사지하던 소녀들의 생사 따위는 신경 쓰지 않은 위력이었다. 그리고 그 무자비한 마법 폭풍 속에서 아이들을 구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지만 한유일은 해냈다.
마법이 아닌 본연의 힘으로.
“몸에서 촉수가…?”
인펠리아 제국의 황비 ‘리트멜 데모 인펠리아’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암살미수범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몸에서 촉수가 튀어나온 것만으로도 암살자가 인간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단정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바스테유…! 그리고 마기노투…?!’
하찮은 사내들의 유일한 희망인 ‘기사의 검’과 ‘용사의 검’을 한 몸에 갖고 있다.
불가능해! 말도 안 돼!
용사와 기사는 성질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용사는 자신을 죽이고 전체를 위한 헌신을 밑거름으로 한다면, 기사는 ‘한 명의 숙녀’를 위해 얼마든지 이기적이고 독선적일 수 있는 존재.
하지만 눈앞에 현실이 그랬다.
“아이들을 납치한 저 ‘괴물’을 당장 죽여라!”
침착함을 가장한 황비 ‘리트멜 데모 인펠리아’가 거짓말 섞어서 명령했다.
구하겠다는 의지가 일절 느껴지지 않는 발언!
하지만 제국의 단합은 의외로 견고했다.
강력한 마법을 구사하는 하녀들과 ‘강력한 검’으로 무장한 기사들이 일제히 침입자에게 달려들었다.
그 구도를 보며 ‘한무일’은 혀를 찼다.
과정이야 어쨌든 ‘실패’한 한유일은 찍소리 안 하고 들어갔다.
< [57화-3] 반격에는 반격으로.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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