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처럼-237화 (237/287)

< [57화-2] 반격에는 반격으로. >

차원이동은 눈 깜빡할 사이에 이루어졌다.

옆집보다 가까이, 옆방보다 더 가까이! 근거리에 붙어있는 것처럼 이루어졌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다든가?

이런 코믹 같은 상황은 일절 없었다.

그냥 대마법사도 아니고 ‘순백(동정)의 대마법사’가 그런 실수를 할 리 있나!

“뭔가…. 큼지막하군.”

주변 경치를 쓱 훑어본 무일의 감상이었다.

괴수의 덩치를 보고 어느 정도 짐작하긴 했지만, 몬스터월드의 식물은 풀 한 포기도 사람의 신장에 버금갔다.

거인들이 세계로 온 기분.

아니, 자신이 작아진 게 아닌지 착각하게 될 정도다.

마법에 부작용이 있었던 걸까….

<여기가 ‘아르테르 행성’입니다.>

다행히도, 홍길동이 제대로 도착했음을 확인시켜줬다.

행성 크기는 지구의 약 1,300배. 대지(표면적)는 약 120배에 달한다. 그리고 거기에 못지 않게 식물군이 크고 튼튼했다.

무슨 말이냐면,

탁! 탁! 탁!

무엇이든 베어낼 수 있던 에쏘드.

하지만 나무 밑둥…. 그냥 벽처럼 눈앞을 막아선 나무껍질을 베어본 결과, 살짝 흠집이 생기는 정도에서 그쳤다.

에쏘드로 이 나무를 베어 쓰러트리려면 며칠이 걸리지 않을까?

그 정도로 나무들이 두껍고 견고했다.

하기야, 이 정도쯤 돼야 괴수들의 그 강력한 공격을 막아낼 수 있으리라. 역시나 괴수들의 고향답다.

지구처럼 한 번 싸울 때마다 쑥대밭으로 변했다면 이 ‘아르테르 행성’은 진즉 불모지로 변했을 것이다.

“마법에는 이상 없는 것 같고….”

가장 먼저 몸 상태부터 살폈다.

관광하러 온 게 아니니까.

믿을 거라고는 두 자루의 에쏘드와 몸뚱이뿐이다. 덤으로 폴리검 정도.

‘무일.’

‘왜?’

‘온 김에 내 동족도 찾아보자!’

‘...먹자는 거네?’

한유일의 생각을 읽은 엘퍼러는 조금 진지하게 생각했다.

종족마다 ‘괴수의 왕’은 단 한 마리씩뿐. 하지만 차원이 다르면 불가피하게 차원 숫자만큼 늘어날 수밖에 없다.

당연히 여기에도 ‘뱀페스트 왕’이 있을 터!

한유일은 그 왕을 쓰러트리고 세력을 흡수하자는 제안을 할 것이다.

<흡혈귀…. 녀석들은 찾기 힘들 겁니다.>

홍길동에게 ‘뱀페스트 왕’의 위치를 물었지만, 대답은 시원찮았다.

어째서 힘들다는 걸까?

영혼석 내에 ‘유일한 손님’으로 있는 한유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왜 힘든데?>

<거의 멸종 직전입니다.>

<허어…?>

<여성의 천적이라고도 일컬어지는 흡혈귀입니다. 깨물면 노예! 마녀들이 그런 흡혈귀를 가만 놔뒀을 리 없잖습니까.>

<아~.>

이해됐다.

위험하기에 일찌감치 싹을 도려낸 것이다.

그럼에도 끈질기게 멸종만은 면한 게 참으로 용하다.

<늑대인간들이 또 흡혈귀를 많이 사냥했습니다. 늑대인간의 발톱은 파상풍을 일으켜서 흡혈귀에게 대단히 치명적입니다.>

<어째서 그렇게 미워하는 거지?>

<여자 때문입니다.>

고대에 벌어진 대다수 전쟁과 싸움의 원인은, 좋게 말하면 ‘사랑’ 때문이고, 노골적으로 표현하면 ‘번식’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뱀페스트와 울프남 모두, 번식에 인간 여성이 필요하다.

여기에서 우위는 당연하게도 뱀페스트.

뱀페스트에게 물린 여성은 자궁에 ‘알’이 생기는데, 그것도 모르고 자신의 성기(性器)를 삽입한 울프남은 예외 없이 100% 사망한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흡혈귀가 흡혈하지 못하도록 수를 줄여둘 수밖에.

‘...그렇단다. 포기해라, 유일.’

‘쳇.’

제2의 왕국을 건설하려던 한유일의 야망은 빠르게 침몰했다.

늑대인간과 마녀의 협공을 받은 흡혈귀는 이 세계에서 거의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고 한다.

기회가 된다면 찾아보긴 하겠지만….

한유일이 최근에 터득한 변신능력도 그렇고, 분명 ‘원조 흡혈귀’는 우리가 모르는 기술과 지식을 많이 알고 있을 것이다.

부스럭.

어째서 조용한가 싶었더니 역시나!

아주 미세한 소리였지만, 엘퍼러는 놓치지 않고 들었다. 저 수풀에 숨어서 이곳으로 은밀하게 달려-, 날아오는 한 마리의 용.

터줏대감이 분명했다.

이 일대를 지배하는 괴수가 엘퍼러를 향해 도약했다.

‘레드군…?’

다혈질의 붉은 용왕.

하지만 확신하지 못한 건 덩치 때문이었다.

대한민국 서울의 ‘7종 계약자’ 윤소영의 파트너이자 젠틀맨인 그 레드군보다 덩치가 두세 배는 컸으니까.

도저히 ‘소형’이라고 할 수 없는 큰 덩치.

그렇다고 ‘보통’에 넣기에는 좀 미더운 크기.

“...그런가. 지구에 있는 레드군은 전부 새끼였군?”

윤소영에게서 정확한 나이를 듣진 못했지만, 자신의 수호자 레드군을 ‘어린 사내아이’ 또래라고 했던 게 어렴풋이 기억난다.

인간의 잣대를 들이밀자면 그렇다는 얘기다.

화르르륵!

레드군의 아가리에서 토해진 화염, 브레스가 대지에 작렬했다.

바로 지척에서 쏘아졌기에 피하기란 이미 늦었다. 하지만 엘퍼러는 처음부터 피할 생각이 없었다.

그의 [예감]은 시종일관 조용했다.

그래서 레드군의 습격을 조기에 예상하지 못했다.

왜 그렇겠는가?

『약해서.』

그리고 엘퍼러가 너무 강해서!

마법을 머금은 에쏘드가 쾌속으로 대기를 양단했다. 그리고 이 대기층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 브레스도 함께 좌우로 갈라졌다.

너무나 허망하게, 그야말로 마법처럼!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검사 주인공’을 똑같이 재현한 엘퍼러는, 파트너 한유일의 ‘상상력이 부족하다!’는 핀잔을 무시하며 뛰어올랐다.

“크아아앙!”

레드군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리고 포효했다.

하지만 엘퍼러에게는 ‘겁먹은 들짐승’의 발악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몸을 비틀며 회피하려는 녀석에게….

펄럭!

인간의 등 뒤에 날개가 있다니?!

그런 놀람이 가득한 두 눈 한가득 불신을 담은 용의 머리가 몸에서 분리됐다.

나무처럼 단단하면 어쩌나 고민했었는데….

괴수는 지구로 넘어온 녀석들하고 별 차이 없었다. 아니, 회귀본능이 없어서 방어력이 형편없다는 게 무일의 느낌이었다.

손맛이 없네!

공기를 베는 것처럼 부드럽게 갈린다.

그냥 ‘평범한 도마뱀’을 베는 것 같다고 할까.

“업보를 보고도 덤비다니…. 이상하군.”

그만한 능력이라도 있다면 또 모르겠지만, 지구 기준으로 간신히 8종 턱걸이쯤 할 법한 녀석이 덤볐다는 사실 자체가 살짝 의아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응징은 확실하게 했다.

이 레드군이 어떤 마녀의 ‘사역마’일 가능성도 있으니까.

터줏대감이 아니라 이 인근을 순찰하다가 ‘수상한 인간’을 발견하고 공격했을 수도 있다.

쿵-!

머리를 잃은 몸체가 지상에 처박혔다.

역시나 은색 피.

하지만 회복될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머리를 잃었으니 당연한 거겠지만, 보통은 머리를 잃어도 몇 초는 꿈틀거리는 게 ‘일반적인 괴수’의 최후다.

이걸로 확실해졌다.

‘약해.’

지구로 넘어온 괴수들보다 몇 단계는 밑이다.

덩치를 보고 ‘8종 턱걸이’라고 했던 평가도 재고해야 할 것 같다.

저 정도라면….

놈들의 [예지]를 뛰어넘는 [예감]으로 무장한 프로사냥꾼이 멀리서 저격하면 쓰러트릴 수 있으리라.

지구에 그런 사냥꾼이 엘퍼러 말고 또 있다면 말이다.

<모르토르 화산의 악룡 ‘베르카무 오린’이 이리 허망하게 가다니….>

아르테르 행성의 전반적인 지식을 가진 홍길동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의 놀람을 공감하는 자는 영혼석 내에 하나도 없었다.

뭘 알아야 말이지!

방금 죽은 레드군이 어디서 뭘 하던 용인지 알게 뭐람? 나름 대단했던 양반이란 건 알겠는데, 마음에 와 닿지는 않았다.

아무튼, 죽은 레드군 덕분에 여기가 어디인지는 알 수 있었다.

‘화산 옆이란 말이지?’

울창하다는 말로 부족한 숲에 가려져서 볼 수 없었던 활화산.

더 놀라운 점은….

바로 옆에 화산을 두고도 나무들이 쑥쑥 자랐다는 점이다. 휴화산도 아니고, 용암이 뿌리에 닿아도 잘만 버티는 게 아닌가!

생각해보니, 방금 레드군의 브레스에 활활 타버렸어야 정상인 수풀도 살짝 그을린 정도에서 그쳤다.

이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 걸까?

<됩니다. 아르테르 행성의 풀과 나무는 신(神)과 이어져 있어서 웬만한 공격에는 꿈쩍하지도 않습니다.>

<신이라고?>

무일을 대신해서 한유일이 질문했다.

지구에는 신(神)이 없다.

괴수에게 고통받는 인류를 버린 건지 포기한 건지는 몰라도, 아무튼 없다.

그런데 여기에는 있는 모양이다.

<조선에서 생각하는 도사나 부처는 아닙니다. 자연신. 고대부터 살아왔던 나무 한 그루가 행성의 힘을 빨아들여 풀과 나무에 공급하고 있습니다.>

<아주 강력한 나무란 거지?>

<네. 오래된 소나무, 향나무로 생각하면 큰코다칠 겁니다.>

확실히, 500년을 몬스터월드에서 구른 홍길동은 아는 게 많았다.

생뚱맞은 ‘신’이란 존재.

이 세계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마녀(魔女)를 뛰어넘은 생명체에게 경의를 담아서.

아르테르 행성에서는 ‘그들’을 이렇게 불렀다.

『마신(魔神)』

지구에도 수많은 ‘신’이 있었다.

온갖 잡다한 신을 다 제외하더라도, 세상을 창조했다는 유일신이 대륙마다 서넛씩 존재하는 걸 보면 그다지 대단한 양반들도 아닌 것 같다.

아니면 ‘하나의 신’이 여러 존재를 사칭(詐稱)했던가.

...신비주의를 고수한 거라면 대단히 난센스였다고 말해주고 싶다.

하지만 이곳, 몬스터월드는 확실했다. 정말 터무니없는 힘을 갖춘, 신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생명체가 신이다.

『최초의 마신 - 생명의 나무, 위그드라실』

『최강의 마신 - 마법의 정점, 크로마티온』

『최고의 마신 - 세계의 자궁, 프로메시아』

『최악의 마신 - 마녀의 공적, 라그나뢰크』

이렇게 넷.

지구의 130배에 달하는 면적을 자랑하는 땅덩어리에 존재하는 ‘신(神)’치고는 너무 적어 보이지만, 이 넷의 영향력은 보다시피 막강하다.

풀과 나무의 강인한 생명력이 바로 ‘위그드라실’의 영향.

그 외에도 많다.

마신들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도 몬스터월드, 그 어디에도 없다.

“뭔가…. 대단히 터무니없는 세계로군.”

우선을 도시를 찾고 그곳에서 ‘주인 없는 돈’을 쓰기로 했다.

그 주인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길동아. 통장번호와 비밀번호 불러라.>

영원한 감옥, 듀크마 안에 갇혀있었다.

한유일의 강압적인 요구에 홍길동은 부들부들 떨었다.

<큭! 내 영혼으로 만족 못 하고 피땀 흘려 모은 유산마저…!>

...결과부터 말하자면, 그 돈은 쓸 수 없었다.

이미 국가에 압류된 후였던 탓! 설상가상으로, 홍길동은 ‘황녀를 배신했다!’는 따끈따끈한 죄목이 붙은 ‘지명수배범’이었다.

그 탓에, 괜히 그의 통장을 건드린 엘퍼러는 영문도 모른 채 도시를 탈출해야만 했다.

거저 얻으려다가 벌 받은 것 같았다.

추적자들을 간단히 따돌린 후, 엘퍼러는 아쉬움의 한숨을 내쉬었다.

“기념품은커녕 당분간은 노숙해야 할지도.”

< [57화-2] 반격에는 반격으로. > 끝

ⓒ 파르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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