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화-5] 방어를 시작한다. >
홍 씨 성을 가진 남자가 어쨌길래? 남자가 맞겠지?
선유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홍길동’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재벌의 서자(庶子)로 태어난 마법사가,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줬다는 모양이다. 어느 소설에나 있을 법한 얘기.
실제로도, 홍길동은 소설 속의 인물이라고 한다. 그렇게 모두가 알고 있다.
그런데….
(홍길동이라고 주장하는 자가 유럽에서 날뛰고 있습니다.)
(흐음…. 서유기의 원숭이 왕도 버젓이 있으니, 사람 하나 실존했다고 해도 딱히 놀랍지는 않군요.)
사칭이라고 생각하면 더 간단해진다.
바로 얼마 전에도 보지 않았던가?
『런던의 망령, 셜록 2세!』
영국 방문 기념으로 처리한 테러리스트.
차이가 있다면, 셜록 2세는 본고장에서 활동했다는 정도. 이 홍길동이란 녀석은 주소를 잘못 찾아간 모양이다.
서유럽에서 동아시아의 대한민국을 찾다니?
길치도 이 정도면 수준급이다.
(유럽 전역을 돌아다니며 재벌들을 공격하고 있어요. 이야기 속에 나오는 홍길동처럼.)
(흠…. 그 얘기는 잠시 후에 다시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제주도에 도착했군요?)
역시나 ‘용신의 계약자’다.
몇 가지 단서만으로 상황을 유추해내는 걸 보면.
엘퍼러는 한라산이 없는 평평한 제주도를 내려다보며 답했다.
(그렇습니다. 상황이 종료되면 연락하겠습니다.)
(네. 기다리고 있을게요.)
선지혜와 문팽이 콤비가 저지른 제주도 참사!
저 북단의 백두산과 함께 한국을 대표하던 휴화산 ‘한라산’이 사라진 섬은 황량하기 이를 데 없었다.
산이 없어서 그런 것만이 아니다.
문팽이가 지나간 제주도는 평평한 갯벌로만 이루어져 있다.
저렇게 만든 사유가 참….
가는 길에 걸리적거려서 그냥 밀어버렸다는 걸 안다면 사람들이 무슨 표정을 지을까?
...표정은 무슨.
세계에서 가장 강한 9종 계약자가 생긋 쳐다보면, 반작용으로 ‘잘하셨습니다!’라고 엄지를 치켜드는 것 외에 별수 있나!
‘덕분에 찾긴 쉽군.’
첩보위성 침입이 금지된 제주도. 그건 ‘엘프’가 이주해온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더 극심했다.
천연기념물 취급이랄까!
하지만 아직은 제대로 된 집도 마련되지 않은 탓에 염탐할 것도 없었다. 번식(!)이 얼마나 이루어졌는지 머릿수 파악하는 정도?
그것도 시일이 좀 지난 후에나 의미가 있다.
지금은 막 제주도에 상륙해서 짐을 풀고 환경에 적응 중이던 참.
콰광!
그곳에서 폭음이 터졌다.
하지만 화약이나 마법에 의한 현상은 아니었다.
사람 대 사람.
괴수가 아닌 인간들이 겨루며 낸 소리였다.
판타지월드를 제패했던 ‘레인’은 뛰어난 마검사(魔劍士)였지만, 이계에서 접한 사기적인 무기 탓에 영 힘을 못 쓰고 있었다.
『에쏘드』
특수능력에 대한 절대적인 내성을 가진 장비형 괴수.
그 탓에 순수한 검술대결이 됐다.
하지만 거기서 파생되는 힘은 평범한 검술시합이 아니었다.
몸에 ‘마나’를 품고 있는 ‘레인’은 말할 것도 없고, 뱀페스트와 에쏘드의 힘을 함께 다루는 다윙 밀리언은 이미 괴수라고 칭해도 될 육체였다.
그런 둘이 충돌할 때마다 밋밋했던 제주도 지형이 찰흙처럼 아무렇게나 변해갔다.
‘다행히 늦지 않았군.’
많은 엘프 마누라와 딸을 보유한 ‘레인’은 혼자가 아니다.
하지만 그건 다윙 밀리언도 마찬가지였다.
『그린포스』
에쏘스트이자 그린포스의 수장인 ‘다윙 밀리언’의 사상에 감화된 자들은 생각보다 많았다. 그리고 강했다.
자연을 지켜야 한다고 말만 싸지르거나, 길거리에서 민폐 끼치는 자들하고는 격이 달랐다.
이들이야말로 행동파!
자신들의 ‘정의’를 관철하기 위해서 힘을 기른 자들이다.
그 그린포스 구성원으로는 ‘조국을 증오하는 노블레스’가 다수 포함되어 있지만, 프로사냥꾼도 무시 못 할 수준이었다.
테러리스트치고 상당히 좋은 장비를 많이 확보해두고 있었다.
특히, 대인용으로.
엘프를 생포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해왔다.
“꺅!”
“언니?!”
“마나만 풍족했어도….”
“아읔!”
변수는 없었다. 당연한 형국.
엘프들은 열심히 저항해보지만, 전부 부질없는 발악이나 다름없었다.
생포가 목적이 아니었으면 진즉 끝장났으리라!
놈들은 이 방면의 전문가들이었으니까. 상대가 괴수는 아니지만, 이능을 쓰는 존재. 당연히 그런 마법에 대한 저항력이나 대처법 연구도 끝났다.
“물러나지 마세요!”
“여긴 도망칠 곳도 없어!”
모든 면이 바다로 막힌 제주도에서 빠져나갈 방법은 없다.
자연스럽게 짜인 배수진.
하지만 그런 분투에도 불구하고 엘프들은 하나둘…. 아니, 무더기로 붙잡히기 시작했다. 대단히 허망하게.
마취총에 맞고 그대로 붙잡히는 것이다.
과거에, 남편 ‘레인’과 함께 불의에 맞서 싸웠을 만큼 전투력에 자신 있던 하이엘프, 정부인들도 별거 없었다.
전문용어로 보쌈.
멀리서 쏘는 마취총은 피하는 데 성공한 그녀들은, 근거리에서 마취 폭탄을 터트리는 노블레스의 대응에 속수무책으로 쓰러졌다.
“아, 안 돼….”
“비겁한….”
판타지월드에서도 ‘노예 사냥꾼’들이 비슷한 방식을 썼다.
하지만 이 정도로 강력하진 않았다.
그린포스는 엘프들이 뭐라고 하던 담담히 행동했다.
분한 표정을 지으며 쓰러진 그녀들의 치마와 바지를 벗기고, 엉덩이에 주삿바늘을 냅다 꽂아서 완벽하게 마취시킨다.
그 뒤는?
손발을 바비큐 요리처럼 긴 작대기에 묶어서 트럭에 실었다.
‘누가 전직 사냥꾼 아니랄까 봐.’
엘프를 생포하는 방식도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주로, 소규모 농장에서 키울 젖소와 양을 포획할 때 쓰는 방식이다. 하기야, 인간도 동물이니 이 방법이 안 통할 이유가 전혀 없다.
하지만 그린포스도 ‘마취총’은, 사전에 계획해둔 포획방식을 벗어난 대응이었다.
“이년들은 어째서 조종이 안 되는 거지?”
“분명, 2세대에도 먹혔는데.”
“이유를 모르겠군. 마법으로 정신보호막이라도 친 건가?”
그린포스의 노블레스들은 귀찮다는 불평을 터트렸다.
흡혈이 안 먹힌다!
아무리 각인을 심어도 그녀들은 통제되지 않았다.
처음에는 ‘외계인이라서 그런가?’라고 생각했지만, 그렇다면 이곳을 공격하기 전에 임상시험을 위해 준비한 엘프가 고분고분해진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다.
...당연히 될 리 있나!
다른 누구도 아닌 ‘왕’이 침 발라둔…. 송곳니 박아둔 여자들인데.
뱀페스트 왕족은커녕 제대로 된 귀족조차 아닌 노블레스가 뭔 짓을 하더라도 각인을 덧씌우는 건 불가능하다.
덥석!
그때였다.
내딛고 있던 땅에서 팔 같은 게 튀어나오더니 그린포스 노블레스와 프로사냥꾼들의 다리를 붙잡고 그대로 끌어내렸다.
한둘만 그랬다면 끌려가지 않도록 서로 도왔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기현상에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뭐, 뭐야?”
“사막형 괴수인가?!”
“미친! 그것들은 이런 팔이 없어!”
“마법이다! 마법이 분명해!”
“찾아! 이 괴상한 마법을 쓴 엘프가 근처에 있을 거다!”
늪에 잠기듯 벌써 무릎까지 먹힌 그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애초에, 엘프의 마법이 이렇게 강했다면 처음부터 고전했을 것이다.
아니, 엘퍼러의 눈을 피해서 제주도를 강습한다는 계획 자체를 포기했으리라.
“설마….”
“엘퍼러?!”
궁극의 에쏘스트라고 불리던 최강의 검객이, 대마법사마저 됐다는 정말 사기적인 소문은 접한 지 꽤 됐다.
일본에서 그 난리를 쳐놨는데 모를 수 있을 리가.
하지만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할 만큼 일방적인 강함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누가 아니겠는가? 자신들은 ‘노블레스’다!
한 번 물은 여자는 예외 없이 노예로 전락하고, 남자는 팔씨름 상대조차 되지 않는 우월한 존재.
『신인류』
그렇게 불려야 마땅한 새로운 인류다.
흡혈만 꾸준히 해주면 불로영생(不老永生) 하는 그들은 ‘군림’을 희망했다. 인류의 완전한 ‘멸족’을 바라는 ‘다윙 밀리언’하고는 달랐다.
정치인과 권력자를 포함해서 반항의 여지가 있는 남자들은 전부 죽이고, 고분고분 순종할 여자들로만, 아름다움과 마법으로 무장한 하렘을 구축하길 원했다.
그 첫 단추가 엘프.
노블레스의 그런 야망을 짓밟는 ‘계약자’의 씨를 말리는 것이다.
그린포스 수장 ‘다윙 밀리언’을 제외하고는, 흡혈귀가 아무리 까불어도 고위수호자의 상대는 아닌 까닭이다.
하지만 그런 환상과 꿈도 오늘로 끝이었다.
“크, 크억?!”
“풀어라! 안 풀면 이년들을 죽이-! 읔?!”
“수, 숨이…. 나, 살려~!”
엘퍼러의 마법은, 성장기 어린이들의 정서를 위해 건전하게 계획된 애니메이션처럼 친절하지 않았다.
첫째도 효율, 둘째도 효율!
멋들어진 불덩이 같은 걸 쏘는 쇼(show)는 없었다. 상대에게 회피나 방어를 일절 허용하지 않는 마법으로 간단히 끝장낼 뿐이다.
흙을 움직여 다리를 묶고, 이 일대의 공기를 차단한다.
그걸로 끝이었다.
풀썩!
툭.
산소공급이 끊기면 그 어떤 동물도 살 수 없다. 물론, 괴수는 오랫동안 버티거나 아예 멀쩡한 경우도 더러 있지만.
뱀페스트는 아니다.
피가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 까닭에, 폐와 심장으로 산소를 받아들여 끊임없이 피를 순환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엘퍼러는 그 점을 콕 찔러서 공략했다.
그린포스 대원들과 같은 공간에 함께 있던 엘프들도 위험하긴 매한가지지만, 그녀들은 엘퍼러의 각인이 심어진 ‘노예’였다.
마취되어 몸을 움직일 순 없어도 ‘숨을 참는다.’는 행위쯤은, 사전에 명령을 통해 대비시킬 수 있다.
마무리는?
질식사로 전멸한 그린포스 대원들의 영혼은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엘퍼러의 영혼석에 빨려 들어갔다.
<으아아아~!>
<여, 여긴 대체 어디야?! 지옥? 천당?>
<너흰 또 뭐고? 컥!>
영혼석 안으로 강제이주한 초짜들은 곧 텃세 부리는 기존 죄수들의 공격으로 몸과 마음이 너덜너덜해지리라!
예쁜 여자라면 그전에 교도소장이 젖가슴을 잡아끌며(?) 데려가겠지만.
이마에 박힌 보석의 내부사정에는 관심 없는 엘퍼러는 사내들의 시신으로 무성한 주위를 쓱 훑었다.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생존자를 찾는 것이다.
하지만 미약하게나마 마법까지 사용해서 숨을 참고 있던 엘프를 제외하고는 전멸.
당연한 결과다.
엘퍼러와 그들 사이에는 도저히 메꿔지지 않는 ‘격’이란 벽이 있으니까.
“포박된 가족과 동료를 풀어주고 이곳에서 대기해라.”
“네, 주인님.”
그렇게 엘프는 정리하고 시선을 돌렸다.
여전히 치열하게 싸우는 중일 두 남정네가 있는 방향으로.
하지만 그쪽도 이미 끝나있었다.
“...엘프 서방은 죽은 건가.”
대등하게 좀 싸우는가 싶었다. 하지만 마누라와 딸들이 테러리스트들에게 제압되어 끌려가는 광경을 보고 동요한 게 분명하다.
프로사냥꾼의 [예감]은 그런 빈틈과 기회를 잘 파고드니까.
아마, 여기에 당한 ‘레인’은 스스로 깨닫기도 전에 일격필살로 죽음을 맞이했으리라!
‘다윙 밀리언은…?’
부하들을 포기하고 일찌감치 도주했다. 마법으로 모습을 감춘 엘퍼러를 직접 본 건 아니지만, 프로사냥꾼의 [예감]이 그렇게 하라고 시켰으리라.
그 와중에 용케도 외계인 강자를 쓰러트렸군.
인생의 승리자, 하이엘프 기둥서방 ‘레인’의 시신은 사요나락이 와도 어떻게 손쓸 도리가 없을 만큼 철저하게 분쇄됐다.
...차라리 다행일지도.
아내들이 전부 다른 남자의 ‘노예’가 됐다는 사실을 모르고 죽었으니까.
그 ‘다른 남자’가 질문했다.
‘무일. 녀석을 추적할 거야?’
‘당연히 해야지. 하지만 지금 당장은 아니야. 녀석은 이미 내게 찍힌 사냥감. 그러니 서두를 것 없어.’
본거지를 찾아내서 뿌리째 뽑아낼 것이다.
다윙 밀리언.
부디, 그자가 홍길동처럼 길을 잃지 않고 자기 집까지 안녕히 가길.
< [54화-5] 방어를 시작한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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