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화-4] 방어를 시작한다. >
당연히 기각이다.
본인은 힘들더라도 자식에게는 ‘마법’이란 멋진 능력을 주고 싶은 마음, 부모의 마음이 그렇게 죽을죄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다만, 그게 인류적인 측면에서 대단히 안 좋을 뿐.
엘퍼러는 경매장 내부를 쓱 훑었다.
‘그렇다고 이걸 이대로 방관할 순 없지.’
막긴 막아야 했다. 사정이야 어떻든 용납할 수 없는 짓!
물론, 이 자리에서 ‘안 돼!’라며 나서진 않았다. 그건 하수나 하는 방식이다.
무일은 조용히 경매장 뒤편으로 이동했다. 고객이 있으면 ‘상품’도 대기하고 있는 게 인지상정 아니겠는가.
뭐…. 요즘은 인터넷쇼핑이 워낙 활발해서 이 또한 장담할 수 없지만.
국가를 속이고 벌이는 일답게 그런 전산망은 이용하지 못한다. 모든 건 아날로그로.
택배처럼 편리한 기능은 없다.
“움움!”
“크으으….”
역시나, 여러 남녀가 붙잡혀 있었다. 하지만 그들 전부가 손발이 꽁꽁 묶이고 재갈이 채워진 신세인 건 아니었다.
옷까지 말끔히 차려입은 채 시계를 힐끔 확인하는 여유를 보이는 몇몇.
스스로 이 자리에 왔음을 알 수 있었다.
‘무일. 저 소녀들…. 뭔가 애매하다.’
‘애매하다고?’
‘버리자니 아까운 쓰레기 같은 느낌이다.’
‘그건 도대체 무슨 느낌이냐….’
기가 막혔지만, 한유일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대강 이해했다.
엘프의 피가 희석됐다는 의미.
분명, 괴수의 심미안을 끌어안는 매력을 떨어트리긴 하지만, 순수 혈통보다는 덜하다는 건 확실하다.
문제는….
계속 세대를 거치면 언젠가 ‘엘프의 유전자’가 말끔히 사라진다는 보장이 없다는 점이다.
더 나아가, 괴수가 어떤 점에서 ‘엘프’를 별로라고 생각하는지도 현재로써는 알 수 없었다.
순결한 자연미인인데 왜-! 왜 싫다는 건데!?
...이걸 모른다는 것이다.
“언제 끝나려나….”
“좋은 고용주를 만났으면 좋겠는데….”
“너희는 마법 하냐?”
이런저런 말들이 오가고 있었다. 여기에는 사회적인 불만과 돈 얘기도 당연히 포함됐다.
돈이야 뭐, 필요해서 여기까지 흘러왔겠고….
불만은 의외로 국가나 정부가 아닌 ‘가족’으로 향해있었다.
『순도(純度)』
엘프의 피가 옅어질수록 ‘마법’의 위력도 약해졌다. 역으로 짙다면 강해지고.
아주 간단한 공식.
남자든 여자든 ‘순수한 인간’과 섞이며 세대를 거칠수록 그 타고난 외모와 긴 수명, 육체 능력, 마법 위력이 절반씩 줄어든다.
50%, 25%, 12.5%, 6.25%….
이런 식으로 급격히 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문제!
『혈통주의』
피라미드 속에서 살던 ‘진짜 엘프’들은 상상도 못 했던 ‘엘프 사회’가 형성됐다.
판타지월드에서 차원을 넘어온 순수 엘프를 ‘0세대’라고 칭했다. 그리고 그 0세대가 낳은 자식들이 1세대. 그 자식들이 2세대….
이런 식으로 계보가 내려가는 것이다.
“나는 3세대다.”
“...5세대.”
“허! 5세대가 엘프냐? 인간도 엘프도 아닌 잡종이지.”
“그래도 너보다는 나은 것 같은데. 세대가 전부는 아니야. 아무래도 넌 부모가 형편없는 모양이네.”
“뭐? 말 다했냐, 이 자식아!”
당장에라도 싸움이 벌어질 것처럼 분위기가 흉흉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경매장 관리인 혹은 고용된 용병으로 보이는 사내가 총을 장전하며 한마디 하자마자 소란은 잠잠해졌다.
마법?
그보다 훨씬 빠르게 총알이 몸을 꿰뚫을 것이다! 먼저 공격하면 될 것 같지만, 저들의 마법은 [예감]을 익힌 사냥꾼을 이길 수 없다.
적의를 품는 즉시 사망!
강대국들이 엘프를 ‘힘’보다는 ‘성인병’ 취급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엘프의 마법은 어정쩡하다.
괴수를 쓰러트리기에는 턱없이 약하고 잡다하기만 한다. 인류의 정치사회에 방해공작을 벌이는 수준만 그럭저럭. 인류의 방파제 같은 ‘계약자’를 대신할 수 없다.
‘최우선적으로 저자부터 정리해야겠군.’
엘퍼러에게는 전혀 위협이 안 된다. 모습을 드러내도 생채기조차 줄 수 없지만, 그래도 소란이 확산하면 여러모로 피곤해진다.
그리고 엘프만 쏙 빼버리면 간단히 해결될 문제.
상품이 없으면 경매 진행이 안 되니까.
나머지는 그 나라와 연맹의 판단에 맡길 것이다.
“잠시만 조용히 있어.”
엘퍼러가 달래듯 한마디 하자 감시자가 스르륵 무너지며 모로 쓰러졌다. 그대로 잠들어 버린 것이다.
이거야말로 진짜 마법!
엘프가 복잡한 주문과 계산으로 일으키는 기적은 ‘마술’이다. 그리고 그 마술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기술조차 전수받지 못한 ‘하프 엘프’들의 마법은 잡기(雜技).
다듬지 않은 원석이란 표현조차 아깝다.
“큭!”
“무슨 일이…?”
이변을 깨달았을 때는 너무나 늦었다.
대기소의 모든 엘프를 잠재운 무일의 이마에서 다시금 빛이 반짝였다. 그리고 불규칙적으로 쓰러져 잠든 그들은 ‘터키’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
소멸? 아니다.
다른 장소로 단숨에 이동하는 마법. ‘공간이동’이라고도 불리는 힘이다.
절대로 쉬운 능력은 아니지만, 엘퍼러의 영혼석에 깃든 무수히 많은 영혼이 보조해주자 너무나 손쉽게 해결됐다.
양의 승리!
어느새 천(千)에 달하는 영혼을 쥐어짜서 얻는 힘은 그만큼 무지막지했다.
“...쉽군.”
생포한 엘프는 예외 없이 ‘제주도’로 전송됐다.
납치되어 여러 경로를 통해 경매장으로 끌려왔든, 돈이 필요해서 제 발로 찾아왔든, 저들에게는 선택지가 없다.
죽이지 않고 격리로 끝낸 것만으로도 ‘인권’은 지켜준 셈이니까.
이 이상의 도움은 현재로선 무리다.
아직 지구는 외계인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된 까닭이다. 엘프와 공생할 방법과 정책 등을 모색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하다.
미안한 얘기지만….
과도기에 해당하는 현재는 꾹 참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싫다면 억지로!
“뒷일은 터키 괴수대응본부에서 알아서 하겠지.”
엘퍼러는 속 시원한 마음으로 바람처럼 그 자리를 벗어났다.
아마, 터키는 암시장을 찾은 이들에게 ‘사형’ 대신 ‘벌금형’을 내릴 것이다. 그리고 현장에서 체포하는 데 성공하면 ‘재산압류’까지 갈 확률이 높다.
뭐든 돈이 들어가니까.
엘퍼러는 그 기세로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하프 엘프’를 제주도로 전송했다.
점점 마법이 숙달되며 빠르게 강해지는 건 부수적인 효과였다.
‘무일. 궁금한 게 있다.’
‘뭔데?’
‘어째서 넌 공간이동을 안 하고 계속 날아다니는 거지?’
시간 낭비를 극도로 싫어하는 프로사냥꾼 한무일이다.
그런데 이동으로 시간을 낭비하는 이유가 뭘까?
같은 몸을 공유 중인 한유일조차도 짐작할 수 없었다.
‘만약을 대비한다고 할까.’
공간이동은 편리하지만, 당연히 공간적인 제약이 따른다.
이동해서 도착할 장소에 ‘공기’뿐이 없어야 한다. 이 마법의 원리는 공간을 비집고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100권을 수납할 수 있는 책꽂이에 101권째 책을 시도하는 거랑 비슷하다.
억지로 비집고 들어간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공기처럼 분자가 띄엄띄엄 있는 공간에서나 가능하다. 만약, 액체나 고체로 꽉 들어찬 곳으로 이동하려고 하며….
『즉사(卽死)』
인체와 물체가 한 공간에 겹치면 어떻게 될지는 자명하다.
그런 일이 발생할 확률은 0.001%도 안 되지만, 엘퍼러의 목숨은 개인의 것으로 국한되어 있지 않다.
수많은 추종자의 ‘고삐’를 쥐고 있다.
엘퍼러가 혹시라도 죽으면?
이전처럼 마음껏 활보할 ‘여성형 괴수’들이 아시아의 대한민국을 중심으로 세계의 모든 나라를 초토화할 것이다.
그래서 엘퍼러는 편리한 마법을 놔두고 본인만은 열심히 걷고, 뛰고, 난다.
시간을 포기하고 안전을 도모한 것이다.
(잘 지내셨나요, 한무일 씨.)
(국모…? 어…. 음…. 흠흠! 무슨 일이십니까.)
이탈리아 암시장을 조용히 처리하는 데 실패해서 한참 우울한 상태였던 무일은, 대한민국 국모 ‘선유나’의 통신에 살짝 의외란 듯이 반문했다.
와이츠와 함께 서울과 파주를 관리 중인 그녀가 웬일도 연락을 다 한 걸까?
절대로 좋은 일은 아니리라.
(제가 전화한 게 그리 신기한 일인가요?)
(아닙니다. 서울에 딱히 문제도 없는데 갑자기 연락을 주셔서 그렇습니다.)
어떻게 보면 장모(丈母)….
그렇기에 더욱 상대하고 싶지 않다.
선유나는 와이츠처럼 매우 이성적인 인물인 탓이다. 이해득실을 철저하게 따지고 필요 없는 행동은 절대 하지 않는다.
그런 철두철미한 여인이 연락을 다 줬다면?
하려는 얘기가 절대 쉬운 ‘부탁’이 아님을 쉽게 예측할 수 있다.
(제주도에 침입자가 대거 침투해 오려 합니다.)
(...슈퍼월드의 소행입니까?)
(아니요.),
(그럼 몬스터월드?)
마녀가 엘프에 관심을 보였을 리…. 없군.
아무 생각 없이 질문했더니 역시나!
선유나는 기계적인 음성으로,
(아니요)
(그럼 누구의 소행입니까? 설마하니 판타지월드의 생존자들이 엘프를 찾으러 왔다는 얘기일 리는 없을 테고.)
(공격받았습니다. 그것도 같은 지구인에게.)
그 한마디로 충분했다.
하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제주도는 문팽이의 영역일 텐데…?’
빈집털이도 아니다. 제주도 해변에 장벽을 쌓은 추종자 ‘4종 괴수, 퀸크랩’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다. 그런데 그걸 무시하고 공격한다?
죽고 싶어서 안달 난 게 아니고서야 이럴 수 없다.
(정확히 누구의 소행입니까?)
(테러리스트입니다. 암시장에서 구한 엘프들은 마법 효율이 극도로 떨어진다는 걸 깨달은 거지요. 그래서 ‘순혈’을 노리려는 겁니다.)
(허! 하필 이때….)
(바로 지금이 적기란 걸 그들도 아는 거겠지요.)
엘퍼러는 망설이지 않고 곧바로 웨딩풍에 탑승했다.
선지혜에게 부탁해봐야 ‘실수’로, 엘프와 테러리스트를 몽땅 뭉텅이로 쓸어버릴 게 분명하다. 그렇다고 다른 나라에 요청하기에도 늦었다.
아니, 다른 나라는 자기들이 싼 똥 치우기도 바쁘다….
테러리스트가 어떻게 제주도까지 은밀히 상륙할 수 있었던 걸까?
‘분명히 조력자가 있다는 건데….’
‘너무 걱정하지 마라. 무일.’
‘왜?’
‘순종 엘프들을 이끄는 외계인 왕을 잊은 건 아니겠지? 아내와 딸들을 빼앗기기 싫으면 죽을 힘을 다해 싸울 것이다.’
하이엘프 마누라들을 둔 행운아.
이름이…. 기억 안 나는군.
아무튼, 그자를 간신히 떠올린 무일은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판타지월드를 잠깐이지만 통일시키기까지 했던 인물이 고작 테러리스트에게 탈탈 털리진 않으리란 막연한 기대.
그렇다고 넋 놓고 있을 순 없다.
‘이게 양동작전이라면 상당한데….’
테러리스트들끼리 사전합의를 본 합동작전이라고는 조금도 생각되지 않지만.
일단은 믿어보기로 했다.
설마하니 삼류악당 따위에게 발리진 않겠지. 아니, 10분만 버텨주면 된다. 그러면 그 뒤는 깔끔히 처리해주리라!
(한무일 씨도 한 번쯤 들어보셨을 겁니다.)
(누구의 소행입니까?)
(다윙 밀리언. 그린포스의 수장입니다.)
(아! 그….)
지구의 자연을 위해, 인류는 멸종해야 한다고 굳게 믿는 에쏘스트. 그저 말뿐인 작자라면 모르겠으나 그는 강하다!
직접 붙어본 적은 없지만 말이다.
...강함의 기준을 자신으로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엘퍼러도 자각하고 있다.
(또 한 가지…. 이건 좀 당혹스럽더군요.)
(말씀하십시오.)
(유명무실해진 UN에서 온 항의입니다만….)
(네.)
(한무일 씨. 혹시 ‘홍길동’이라고 들어보셨나요?)
(네…?)
< [54화-4] 방어를 시작한다. > 끝
ⓒ 파르나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