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처럼-225화 (225/287)

< [54화-3] 방어를 시작한다. >

(도와드리겠습니다.)

(엘퍼러, 당신의 노력에 늘 감사합니다.)

저런 입바른 소리보다는 ‘같이’ 노력해줬으면 좋겠는데….

해봐야 영양가 없을 핀잔은 포기한 엘퍼러는 곧바로 암시장 탐색에 나섰다. 물론, 전문분야도 아닌 걸로 시간 낭비할 생각은 없었다.

낚시는 낚시꾼에게, 나무는 나무꾼에게 맡겨야 하지 않겠는가?

이것도 마찬가지다.

“엘프라…. 요즘 그것들로 시끄럽긴 하더군.”

“도와주실 수 있습니까, 엑시온.”

“신세 지고 있는 마당에 거절할 수 없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고.”

유키나 미나미의 7종 수호자, 판타이탄 ‘엑시리얼 온드미온’은 흔쾌히 수락했다.

그 어렵지 않은 일로 모든 나라가 골머리를 앓고 있는데….

아무튼, 가상세계 하느님이 정보를 모으기까지는 채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하루?

봤노라, 있었노라, 알았노라!

그 과정이 순식간에 끝나버렸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암시장이 열리는지까지 상세한 정보가 줄줄이 나열됐다.

‘이거 참….’

판타이탄 덕분에 중간 과정이 대폭 생략됐다.

하지만 썩 유쾌하진 않았다.

그의 일 처리가 너무 뛰어나서 불만이란 게 아니라, 엘프랍시고 판매 혹은 경매되는 인간이 대단히 많았다.

어디 그뿐이랴?

계약직처럼 ‘대여’하기도 했다.

혹은, 하룻밤에 얼마라는 식으로 몸을 파는 부류도 있었다.

“유럽과 서남아시아에 많이 몰렸군.”

이집트와 가까우니 당연할 것이다.

마법에 대한 환상.

계약자의 꿈을 접어야 했던 여성이나, 사회적인 약자에 해당하는 남성. 이들 모두가 엘프에 솔깃했다는 건 확실하다.

엘퍼러는 곧바로 움직일 채비를 했다.

너무나 당연한 얘기겠지만, 역병이란 것은 빨리 잡을수록 좋다.

『터키』

유럽과 아시아 사이에 있는 약소국. 딱히 유감 있어서 고른 나라는 아니다. 이 나라에서 가장 먼저 암시장이 열리기에 온 것뿐이다.

고대에는 나름 ‘수도’라고 불린 도시가 따로 있었겠지만, 현재는 ‘터키’라는 나라가 유지 중인 유일한 도시의 이름도 ‘터키’다.

즉, 도시국가.

언제든 대처할 수 있도록 웨딩풍을 지중해 한가운데 띄워놓고 온 엘퍼러는, 단독으로 ‘터키’에 잠입한 상태였다.

마법으로 모습을 감추고, 뱀페스트의 스텔스기능이 겹쳐지니, 그 무엇도 엘퍼러를 찾아낼 수 없었다.

‘마법에 심취하는 자들의 마음을 조금은 알겠네.’

마법은 정말 편리하다.

바라는 무엇이든 이루어주는 능력은 너무나 매력적인 탓에 중독성마저 있었다.

그런 마법.

이 요물을 익히고 싶어하는 자들이 과연 잘못됐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런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렇다고 완전히 넋 놓고 있어도 된다는 건 아니다.

“팝니다! 엄청 싸게 팝니다!”

“파격 세일! 이보다 더 쌀 순 없다!”

“한 번 보고 가세요~. 돈 안 받아요~.”

굳이 통역마법을 안 써도, 이미 세계는 한국어가 사방에서 자연스럽게 이용되고 있었다.

아직은 젊은 세대로 국한되어 있지만, 시대를 역행하려는 부류만 아니라면 앞으로 이 흐름은 더욱 가속화될 것이다.

『엘퍼러』

가상현실게임을 휩쓴 대한민국의 힘도 어느 정도 있겠지만, 영어를 제치고 결정적인 한 방을 날린 건 그였다.

엘퍼러가 외국어를 안 배우니 어쩌겠는가?

권력의 중추(中樞)에 가까워질수록 이 ‘엘퍼러’와 어떤 식으로든 엮이게 되어있다. 그러니 말이 통해야 하는 건 필수!

그들이 교양처럼 한국어를 익히니, 자연스럽게 ‘허영심 빼면 시체’인 부류들이 유행처럼 따라 하기 시작했다.

그게 점차 확대되어 국민 전체로.

이 모든 게 ‘한 남자’가 바꿔버린 세계의 모습이었다.

‘여기로군.’

그 주인공이 도둑고양이처럼 암시장 깊숙이 파고드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유유히 경비를 지나쳐서 안쪽으로.

증거물확보는 따로 필요 없다. 그의 손목시계에서 모든 영상을 녹화하며 함께 지켜보고 있으니까.

물론, 재판 없는 즉결처분이 흔한 시대다.

증거와 증인을 내세워서 잘잘못을 가릴 것도 없이 현장에서 즉결처분!

이것이, 괴수와 함께 살아가는 인류의 24세기 헌법(憲法)이다.

‘무일! 한 방에 날려버리자! 몽땅!’

‘안 돼. 무고한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

물론, 그 ‘무고한 사람’이 있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지만.

이 암시장에 발을 들였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중죄다.

상품이 된 ‘엘프’를 제외하면, 이 자리에 억지로 끌려온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별로 생각되지 않았다.

호기심?

고대부터 말하지 않던가!

호기심은 죽음을 재촉한다고.

“음? 잠깐.”

본능이라고 할까, 얼떨결에 시선을 한 방향으로 고정하게 된 무일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 오묘한 감각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다른 차원의 냄새라고 할까?

한유일의 도움을 받아, 후각을 극도로 끌어올린 무일은 이 암시장에 ‘엘프’ 외에도 무언가 있음을 직감했다.

...초능력자도 파는 건가?

그럴 리 없다.

초능력과 마도구로 무장한 슈퍼월드 인간들은 엘프처럼 약하지 않다. 그리고 은밀하게 조직적으로 움직인다.

그렇다면 이 외계인 냄새는….

이 암시장에 손님으로 왔다고 해석해도 무방하리라.

‘무일. 녀석들도 엘프의 피에 흥미를 느낀 거 아닐까?’

‘...그럴 수도 있겠네.’

한 가지 능력에 특화된 초능력은 분명 강했다. 직접 체험해본 바로는 그랬다. 하지만 편중적인 능력은 ‘개별활동’을 철저히 배제하고 협동을 강요했다.

그래서 슈퍼월드는 ‘공격대’가 발달했다.

각기 다른 초능력으로 서로의 부족한 점을 보충해주거나 강화해주는 것이다.

하지만….

당연히 ‘혼자’서 무언가 해내고 싶을 때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거기에 가장 걸맞은 능력이 바로 ‘마법’이라고 판단했으리라.

“이거…. 알아볼 게 늘었군.”

지구는 ‘엘프의 피’를 매우 안 좋게 보고 있다.

계약자 때문이다.

하지만 이 ‘계약자’가 처음부터 없었고, 또 필요도 하지 않는 슈퍼월드는 어떨까?

...아무런 문제가 없다.

지구에서 ‘엘이즈’라고 명명한 저 ‘위협적인 유전자’가 자신들의 차원에는 넘어와도 괜찮다고 판단했으리라.

그리고 그건 설득력이 매우 높은 가정이었다.

‘엘프의 피가 섞여도 초능력자가 태어나려나?’

이 또한 흥미로운 가정이었다.

어쩌면 슈퍼월드는 그것 또한 알아보기 위해 이 암시장에 온 걸지도 모른다.

실험에 쓸 표본을 사러 왔다고 할까.

하지만 정말 그렇다면 이 또한 심각한 문제다.

『돈을 어디서?』

최근에 은행이 털렸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다. 아니, 못 들은 지 몇 년 된 것 같다.

당연히 무관심해서 모르는 건 아니다.

자원낭비를 줄이고자 현금이 사라지고 전자화폐로 100% 운영되는 현대. 은행을 점거하고 보따리에 현금을 쓸어담던 시대가 아니다.

땡전 한 푼 건지기 어렵다.

그리고 전자화폐는 유통의 흔적이 남는다.

‘지구에 공모자가 있다는 건가….’

외계인들이 한가하면 아르바이트 같은 걸 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문득 떠오른 그 가능성도 완전히 무시해선 안 되겠지만, 침공하러 온 작자들이 그렇게 한가할 것 같진 않았다.

누굴까?

지구를 배신하고 외계인에게 붙은 작자가.

이것만큼은 한무일의 [예감]으로도 짐작하기 힘들었다. 후보가 너무 많았던 탓이다.

『도우면 조금 때어줄게!』

이 말에 현혹될 인간이 너무나 많았다.

특히, 고대인 중에는 현 인류의 방침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자들이 상당하니까.

수호자라니?

도시를 지켜주는 괴수조차 싫다는 인간들이 있다. 대부분이 그 오랜 100년 전에 괴수의 침공으로 가족을 잃은 자들.

그들에게 ‘슈퍼월드’는 대단히 매력적으로 다가왔으리라.

원수나 다름없는 괴수와 더불어 살아가려는 현 정부와 본부보다는, 초능력으로 팡팡 괴수를 무찌르는 외계인들이 더 멋지게 보였을 것이다.

...여기까지가 ‘세계 최강의 프로사냥꾼’이 한 [예측].

확실하다고, 정말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신사숙녀 여러분. 저희 매장을 찾아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사회자가 인사하고 경매가 시작됐다.

암시장이라고 했지만….

이곳, 터키에서는 그만큼 은밀한 장소가 없었다. 도시 외곽에 파괴된 지하철 정거장에서 상당히 공개적으로 진행됐다.

그렇다고 노골적으로 ‘엘프 팝니다!’라고 하는 건 아니었다.

간단한 말장난을 이용해서 간접적으로 ‘여기에 엘프 있어. 엘프 알지?’라는 식으로 재치있게 설명할 뿐이었다.

“거, 사회자 양반. 빨리 시작합시다.”

“걸리면 바로 총살인데 참 여유로운 작자로군.”

“전설처럼 정말 귀가 뾰족하려나?”

고객들의 야유와 호기심에 힘입어 경매는 신속하게 개최됐다.

하기야 그럴 것이다.

이 자리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저들은 ‘범죄’를 저지르는 중이다. 그리고 현대에서 범죄는 무조건 사형이다.

안 그래도 부족한 식량, 죄수에게 먹일 순 없으니까.

합법적으로 입을 줄이기 위한 정부의 노력은 끊이지 않고, 국민들은 ‘비인도적이다!’라고 욕하면서도 지지를 보낸다.

『나만 아니면 돼.』

그리고 내게 피해가 안 오고 이득을 주면 그만이다.

식량난이 해소될수록 물가는 안정되기 때문에 서민 입장에서 ‘사형’은, 아주 훌륭한 복지제도가 분명했다.

하지만 가진 게 많은 부자는 아니다.

그 많은 재산을 놔두고 죽어야 한다면 이 얼마나 통탄할 일인가!

게다가 대다수 부자가 고대에서부터 이어진 가문. 즉, 고대인들이라서 과거를 잊지 못하는 부류가 많다.

지금처럼 성추행만 해도 사형인 세상을 대단히 못마땅해 하는….

‘이 또한 고대인들이 지구를 배신할 사유겠지.’

그들이 있었기에 현재의 진취적인 젊은 세대가 태어날 수 있었다는 건 부정하지 않는다.

분명 그렇다고 해도….

수명의 한계를 초월하며 세대교체가 잘 이루어지지 않는 인류는 안쪽에서부터 곪아가고 있는 것도 맞다.

고인 물은 썩는다고 하지 않던가?

그 물이 바다처럼 많고 넓다면 또 얘기가 다르겠지만, 지금의 인류는 비좁은 도시에 갇혀 살고 있다.

썩기 딱 좋게.

‘경매는 안 보고 뭔 생각이냐, 무일.’

‘...그냥. 네 말대로 여길 마법으로 쓸어버리면 어떻게 될까, 가정해봤다. 그것이 인류에 보탬이 될지, 혼란을 부를지를.’

경매는 무척 빠르게 진행됐다.

죽기 싫은 건 사회자나 고객이나 마찬가지니까.

빨리 끝내고 ‘모른 척’하는 게 최선이다.

“이번 사진도 남자입니다! 아주 뛰어난 사진작가가 찍은 거지요. 손에 든 불꽃이요? 멋지게 보이려고 합성한 거니 진지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큭큭. 합성이래.”

“진짜로 가짜인 건 아니겠지…?”

당연하게도, 판매되는 엘프의 실물은 관중에게 공개되지 않았다.

그거야말로 걸리면 빼도 박도 못하니까.

모든 거래는 ‘알몸의 사진’을 대신 판매하는 걸로 진행됐다.

고대에는 연예인이나 배우가 촬영 한 번 할 때마다 수십억씩도 벌었다지만, 현대에는 그렇게까지 비싸지 않다.

물론, 서울의 영웅으로 불리는 ‘7종 계약자, 윤소영’ 정도라면 꽤 받을 것이다. 하지만 그 아가씨조차도 끽해야 수백, 정말 용돈 수준밖에 못 번다.

그러니 충분히 수상했다.

사진 한 장이 터무니없는 고가(高價)에 거래된다는 것이.

‘초능력자를 찾아야 하는데….’

테러리스트라면 이미 얼굴과 위치를 파악해뒀다.

이미 찍힌 저들은 지구 반대편으로 도망쳐도 끝까지 추적할 수 있다.

그것이 사냥꾼.

한 번 겨냥한 사냥감은 놓치지 않는다!

...그래야 맞는데 말이다.

외계인을 상대로는 이 [예감]도 영 신통치 않다. 어쩌면 그 ‘서세진’이란 초능력자가 지구에 없어서 못 찾는 걸지도 모르지만.

그건 지구 반대편을 아득히 초월한 거리였으니까.

‘무일! 내게 좋은 생각이 있다!’

‘...뭔데?’

‘마법으로 여길 초토화하면 된다. 그리고 살아남은 녀석이 십중팔구 초능력자다!’

< [54화-3] 방어를 시작한다. > 끝

ⓒ 파르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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