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처럼-221화 (221/287)

< [53화-3] 환영인사는 없다. >

날개를 펄럭인다고 날 수 있는 게 아니다. 공기저항이 적은 성층권에 새들이 안 날아다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공기를 밀어내어 몸을 띄우는 것이다. 그러니 일반적인 새들은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지표면 근처에서만 놀아야 한다.

하지만 무일은 예외였다.

두 날개는 공기 대신 무언가를 계속 밀치며 무일을 허공에 띄웠다. 그리고 마법이 그 뒤를 받쳐주고 식이다.

서걱!

그 속도 앞에서는, 돌머리 초대형 참치도 도망칠 수 없었다.

생각 없이 돌진해오는 녀석 앞에 멈춰서 [반격]으로 일격필살을 가했다. 이건 서울에서 했던 그 목숨을 담보로 한 모험하고는 달랐다.

『1년』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 그를 이렇게 바꿔놨다.

감개무량한 심정도 잠시, 일본의 수도 도쿄 상공에 도착한 엘퍼러는 지체하지 않고 몸을 날렸다.

목적지는 당연히 ‘아이나미 산토’의 몸을 쓰는 외계인의 집.

일본 괴수대응본부에 기록된 그녀의 시간표를 보면, 이 시간에는 집에서 꼼짝 않고 가상현실게임이나 인터넷쇼핑을 즐긴다고 되어있다.

아니면 수면.

되살아난 그녀는 ‘수면’을 즐긴다는 모양이다. 이 또한, 과거의 ‘아이나미 산토’와는 확연히 다른 움직임이었다.

‘그렇겠지.’

기록이 꼭 남는 전자계통은 그녀가 알리바이를 만드는 데 있어서 가장 큰 문제였다.

이곳에 없다면 또 무슨 흉계를 꾸미고 있다는 뜻이리라.

다행히, 오늘은 얌전히 집에 있었다.

아직 엘퍼러의 존재는 눈치 못 챈 것 같다.

하지만 그게 당연하다. 서울에 있던 그가 이곳에 나타나기까지 1분도 걸리지 않았으니까.

아무리 빠른 전자통신망을 갖췄다고 해도, 모르는 사실을 보고할 수 있을 리 없다. 하물며 그 정도를 다루는 건 기계가 아닌 사람.

이래저래 시간이 지체될 수밖에 없다.

“산토 양. 이대로 결혼하는 건 어떤가요?”

“겨, 결혼이요?!”

그녀는 매니저와 미래에 대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꽤 당황한 모습.

몬스터월드의 여성들에게는 그리 익숙하지 않은 단어임은 분명하다. 물론, 지구의 여성들도 갑작스럽게 결혼 얘기를 꺼내면 허둥대긴 매한가지지만.

‘...저 여자가 정말 마녀?’

그런 생각이 들 만큼 사랑스럽지 않은가.

얼굴을 살짝 붉히며 수줍어하는 자태는 도저히 ‘흉악한 외계인’으로 보이지 않았다. 물론, 피도 눈물도 없는 사채업자도 자기 새끼에게는 착하다는 얘기를 어디서 들은 것 같지만...

대도시도 순식간에 파괴할 수 있는 여자가 저러니 뭔가 묘했다.

가증스럽다는 건 아닌데….

“침입자인가.”

“음!”

너무 오랫동안 망설이며 구경한 탓에 끝끝내 들키고 말았다.

하지만 그녀 본인이 아닌 제삼자였다.

남성스러운 말투와 달리 얼굴이나 몸매는 호리호리했다. 여자인지 남자인지 분간할 수 없을 만큼 목소리 자체는 여성스러웠다.

무일은 저런 자들을 안다.

『내시』

황위를 욕심부려도 얻을 게 없도록 해놓기 위해 거세된 남자다. 고대에 유행했던 꽃미남하고는 달리 절대로 좋다고 할 수 없는 모습.

하지만 어째서 여기에 저런 자가?

몬스터월드에서 마녀만 넘어온 줄 알았는데, 저런 괴상한 자도 있었다.

요즘 세상에 진짜 고자라니….

다짜고짜 공격해오지 않은 점만은 칭찬해주기로 했다. 누구인지 물어보는 걸로. 아니었으면 보이자마자 베어버렸을 것이다.

‘...그것도 쉽지 않겠군.’

녀석도 아담처럼 ‘폴리검’을 장비하고 있었다.

왼손에는 널찍한 원형 방패, 오른손에는 칼보다 몽둥이에 가까운 검이 쥐어져 있다.

약해 보이는 외모와 달리 ‘기사’였다. 어느 레이디를 지키는 기사인지는 굳이 확인질문 할 필요조차 없었다.

마기나로크를 쓴다면 한 방.

하지만 ‘사령마녀’까지 상대하려면 이전처럼 난발해서 탈진하는 건 곤란하다.

“랜슬럿. 고대의 망령이라고 해둘까.”

“원탁의 기사?”

“음? 나에 대해 조금은 아는가.”

“별로. 나는 엑스칼리버와 아서왕밖에. 나머지는 그냥 덤.”

사랑과 불륜, 근친이 아주 일요드라마처럼 막장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하지만 그 이상은 모른다.

괴수를 사냥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으니까.

“...네 녀석은 무척 특이하군. 용사의 검과 기사의 검. 거기에 등에는 정체불명의 날개와 이마에는 영혼석. 괴물인가?”

“썩 달가운 표현은 아니군.”

랜슬럿의 표현에 무일은 눈살을 찌푸렸다.

살짝 불만을 표시하면서 ‘아이나미 산토’의 동향을 살폈다.

‘눈치챘지만, 함부로 움직이진 않는군.’

영혼의 탈출을 시도해주길 원했다. 그러면 사령마녀의 영혼은 순식간에 영혼석에 빨려들 테니까.

영혼을 담는 그릇인 육체에 손상을 준다는…. 죽인다는 선택지도 있었지만, 진짜 그녀를 살리기 위해서 보류한 상태다.

너무 무른 계획인 걸까.

하지만 타인의 희생은 역시 원치 않는 무일이었다.

그것이 그가 걸어온 ‘정의’였으니까.

“랜슬럿. 이름으로 보아 지구인인데, 어째서 외계인 편을 드는 거지? 너를 거세시킨 자들도 분명 녀석들일 텐데.”

남성으로서 대단히 굴욕적인 일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랜슬럿의 표정은 담담했다.

“사랑은 꼭 육체적으로 확인할 필요는 없다. 처음에는 분노도 있었지만, 이런 나를 수백 년째 사랑해주는 두 아내가 있는 가장이다.”

“...미안하군.”

이건 뭐랄까….

동정남, 숫총각은 감히 알 수 없는 영역이었다.

이건 실력을 넘어선 각오와 신념의 문제.

하지만 질 거란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육체적인 능력도 능력이지만, 폴리검의 특수효과가 소화해낼 수 있는 허용치를 간단히 씹어 먹을 마법도 수두룩.

진솔하게 검술대결을 펼치더라도….

‘이길 수밖에 없다.’

랜슬럿은 끽해야 칼질 좀 하는 자. 대단히 잘한다고 치자.

하지만 엘퍼러는 [예지]와 [예감]이란 사기적인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랜슬럿이 무슨 신묘한 검술을 선보이든 모든 걸 파악할 수 있다.

변수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파괴불가 속성을 가진 에쏘드가 엿가락처럼 휘거나 부러지지 않는 한.

“피차 양보할 수 없으니 짧게 가지요.”

사령마녀가 ‘악당’이라면, 랜슬럿은 ‘직장인’ 같다는 느낌이 강했다.

서로의 입장과 목적이 다를 뿐.

다른 이유로 만났더라도 좋은 말동무쯤 되지 않았을까.

“유감이군. 그리고 미안하군.”

“음?”

“시대가 너무 바뀌었어. 내가 알던 세계, 지구가 아니지. 사냥꾼의 능력쯤은 안다. 그리고 스스럼없이 결투를 신청했다는 건, 승리가 확실하다는 것 아닌가.”

“그렇다고 해도, 당신은 피할 수 없는 처지일 텐데?”

“누가 피한다고 했는가. 승산을 높일 뿐.”

일본 괴수대응본부 헌병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서울보다 도쿄의 수준이 더 낫다고 생각하지 않는 무일로서는, 너무 빠른 등장이라는 생각을 지우기 힘들었다.

하물며 저 완전무장. 그리고 명백한 적의.

누구를 상대하기 위함인지는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포위된 건가. 같은 지구인들에게.’

기가 막혔지만, 그게 현실이었다.

저들은 ‘자국의 심장부에 침입한 괴수’ 엘퍼러를 진압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인 것이다.

어째서 이렇게 됐는지는 고민할 필요도 없다.

『천왕』

그 인간이 벌인 짓이 분명하다.

일본의 헌병대는 고대 일본의 잔재인 자위대와 천황군 등이 제멋대로 버무려져 있는 짬뽕 사냥꾼 집단이다.

이데올로기…….

그런 진부한 표현은 제하더라도 정상은 아니다.

‘실수로군.’

일본이 현재 ‘엘퍼러’에 얼마나 유감이 많은지를 간과했다.

자국의 9종을 죽인 한국의 수호자.

이 정도 인식이 아닐까.

아이나미 산토의 9종 수호자 ‘싸우잔드’의 적의가 명백했다는 정황과 증거가 떡하니 있음에도 사람이란 원래 간사한 생물이다.

보고 싶고, 듣고 싶은 내용만 여과해서 받아들인다.

“키바 카즈마…?”

“피차 나눌 말은 없습니다. 물러나십시오, 엘퍼러.”

그의 등장은 살짝 예상 밖이었다.

천왕뿐 아니라 일본 총리도 자신을 안 반긴다는 걸로 해석해도 되려나?

뭐가 됐든 엘퍼러가 갈 길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다.

내 길.

옳다고 생각되는 정의를 강행할 것이다.

그것이 용사와 영웅이란 이기적인 자들의 공통점.

“위협과 경고라…. 1년 전의 나라면 몰라도.”

엘퍼러는 검을 넣었다.

그걸 보고 자신들의 위협이 먹혔다고 으스대듯 어깨가 활짝 펴지는 일본 헌병대.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검을 넣은 건….

휘두르면 저들이 100% 사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법이라면…?

운이 좋으면 10% 확률로 안 죽을지도 모른다.

“신이시여….”

“......”

“어머니, 아버지….”

바위 인형이 이 일대를 꾸역꾸역 메꾸기 시작했다.

엘퍼러를 둥글게 포위하고 있던 헌병대의 뒤편에서 더욱더 많은 숫자가 그들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말았다.

모든 종류의 마법을 쓸 수 있는 듀크마.

이 능력을 흡수한 엘퍼러를 이전의 ‘칼쟁이’로만 여긴다면, 그거야말로 유감이다.

쑨우쿵의 주특기 복사?

비슷하지만, 깊게 파고들면 그 괴물원숭이 왕의 자기복제 원리와는 아니다.

결과만 같으면 뭐….

드드드드-!

그뿐만이 아니었다.

엘퍼러를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던 일본 헌병대는 점점 위로 겨냥을 옮겨야 했다.

저 거대한 바위괴물을 일본인들은 잘 안다.

자신들이 만든 애니메이션 등에 종종 등장하니까.

『골렘』

그 기원은 동양보다 서양이지만, 저작권 같은 것도 없으니 상관없다.

도쿄의 지반을 단단히 유지해주던 콘크리트로 이루어진 초대형 거인의 어깨에는 그 소환사(?)라고 할 수 있는 엘퍼러가 있었다.

영혼석 내부에서는 아프다고 징징 중이지만….

그런 건 깡그리 무시하며, 엘퍼러가 역으로 경고했다.

“당장 군대를 해산해. 아니면…. 알지?”

동요하는 헌병대. 당연했다. 생명체도 아닌 바위를, 그것도 수천 구를 상대로 총알과 칼날이 먹힐 리 없었다.

일종에 정령이라고 할 수 있는 존재였으니까.

그 시전자인 엘퍼러를 쓰러트리지 않는 한, 끊임없이 재생될 것이다.

“웃기지 마라! 이 야쿠자 녀석!”

“......”

확성기를 든 천왕이 외쳤다.

다 끝난 분위기에 초를 친 이 작자는,

“과거의 참패를 잊지 못하고 침공해온 한국의 위선자 놈! 세계에 네 만행을 낱낱이 고하겠다! 우리는 그렇기 위해 이 자리에 섰다.”

“...뭐래, 쟤.”

“일본의 위대한 천황군은 마지막 한 사람까지 저항하며 세계에 경고할 것이다!”

그래서 저항하는 녀석들의 수장인 넌 어디에 있는데?

딴죽 걸고 싶은 무일이었지만, 그런 것도 구차한 짓거리 같아서 그만뒀다.

군대에 비유하자면?

명분을 따질 군번과 계급은 진즉 지났다.

사단장님 마음에 안 들면 뒷산도 깎아서 치우는 것이고, 군단장님 마음에 안 들면 호수도 메꿔버리는 것이다!

“그러시던가.”

“음?”

“장렬하게 마지막 한 사람까지 저항해라. 살려달라고 애원하지 마라. 구차하니까. 외계인과 모의한 관계자에게 엘퍼러가 얼마나 잔인하게 보복하는지를…. 세계에 보내는 경고가 되어라.”

일본의 수많은 건물 벽으로 만들어진 크고 작은 ‘콘크리트 인형’이 진격을 개시했다.

당연하게도….

죽겠다는 각오는 천왕 혼자였다. 그것도 말뿐인.

자국의 수호자를 살해한 자라는 식으로 선동당했지만,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이성을 되찾은 일본 헌병대는 총칼을 버리고 항복했다.

이건 개죽음이다.

생명체도 아닌 무언가와 싸워서 무슨 수로 이긴단 말인가!

“...좋아. 잠시 재롱잔치가 있었지만, 다시 일대일로 돌아왔다. 랜슬럿.”

“너는…. 대마법사 ‘멀린’보다 더하군.”

제국을 움직이는 그 마녀보다도.

그런 감상을 내놓는 기사에게 사냥꾼. 아니, 마법사가 외쳤다.

“동정의 힘을 무시하지 마라. 여자에게 지배받지 않는 진짜 사나이들이니까!”

“...싸우기 전에 한마디만 하겠다.”

“해봐.”“힘들지? 힘내라.”

“......빨리 덤벼. 호감도 최악의 기사 양반.”

< [53화-3] 환영인사는 없다. > 끝

ⓒ 파르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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