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화-2] 환영인사는 없다. >
“그렇다고 합니다, 황비님.”
하녀도 믿기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마법은 여성의 전유물.
아르테르(몬스터월드)에서 이건 상식(常識)이고 진리(眞理)였으며 필연(必然)이다.
남자에게는 근육이 있고 여자에게는 마법이 있다.
아주 당연한 이치.
하지만 그 ‘엘퍼러’라는 남성이 대전제를 송두리째 무너트렸다.
“마술(魔術)이 아닌 마법(魔法)이 맞겠지?”
“마법이 분명하다고 합니다.”
이 둘은 같은 것 같으면서도 미묘하게 다르다.
마술은 ‘배우는 기술’이고, 마법은 ‘당연한 법칙’을 행하는 것이다. 생명체가 숨을 쉬고 몸을 움직이는 걸 자연스럽게 하듯.
쉽게 설명하자면?
조금이라도 ‘계산’이나 ‘주문’이 들어가면 무조건 ‘마술’이다.
‘믿을 수 없어! 남자가 마법이라니!’
마술사라면 적지 않은 숫자가 이 황궁에 머물고 있다.
다른 차원에서 ‘대마법사’라고 불렸던 사내들. 역사에 이름을 남길 정도의 업적과 능력의 소유자들이지만, 이 또한 상대적이다.
그 어느 차원의 ‘마법사’도 자신들의 마법을 당해낼 수 없었다. 당연히 어중이떠중이는 논외로 치고.
그런데 같은 여성도 아닌 남성이 ‘왕족’을 이겼다?
속임수나 함정을 이용한 게 분명하다. 그녀의 ‘상식’으로는 이게 타당한 결론이었다.
하지만….
근거 없는 소문은 아닐 것이다.
결과적으로, 황녀 ‘에르티나 페르시 인펠리아’를 잡아내지 않았던가.
“구출은 번거롭고, 말살이 좋겠지.”
나름대로 ‘딸’에게 인정을 베푸는 것이다.
생포된 미녀가 어떤 수모를 당했을지는 굳이 확인해보지 않더라도 뻔하다. 그러니 고귀한 황족으로 남을 수 있도록, 명예로운 죽음을 선사해주리라.
“어떻게 할까요, 황비님.”
“지금까지 보낸 ‘사역마(使役魔)’로 힘들다면 더 강한 녀석으로 보내면 그만.”
황비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거대한 차원이동문을 통해서 수많은 동물이 다른 차원으로 넘어갔다. 하지만 다른 차원으로 넘어갔다는 건, 약해서 밀려났다는 뜻이다.
그 증거?
근래에 보낸 ‘사역마’들의 성적을 확인해보면 알 수 있다. 지구에서 100년째 터줏대감 행세하던 ‘본토의 동식물들’을 수월하게 쓰러트렸다.
격이 다르다는 방증!
그리고 이번에는 ‘알짜배기’를 보내기로 했다.
“마하모드. 지구로 날아가서 내 소원을 들어다오.”
이 자리에 없는 누군가에게 ‘명령’아 아닌 ‘청원’을 하는 황비.
그만큼 이 ‘사역마’는 특별했다.
다중계약자로 알려진 마녀 중에서도 특별히 강한 그녀가 ‘지구의 계약자’처럼 저자세로 겸손함을 보여야 하는 생명체.
하녀는 깜짝 놀라며 반문했다.
“화, 황녀님! 그렇다고 제국의 수호자를…!”
“시끄럽다.”
“헛?!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사늘한 황비의 눈빛에, 하녀는 대리석 바닥에 이마를 박으며 자비를 구했다.
그 복종의 자세를 본 황비는 마음이 살짝 누그러졌다.
마법을 쓰는 남자?
입이 걸레였던 ‘유라 솔리넬 인펠리아’보다 더한 불쾌감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며칠 이내로 끝날 것이다.
『마하모드』
건국황제 ‘인펠리아 1세’의 동료이자 스승이었던 전설의 캥거루.
한 번 뛰어오르면 그 어떤 세상으로도 넘어가고, 한 번 주먹질하면 그 어떤 기사도 굴복시키며, 한 번 발차기하면 그 어떤 마녀도 팬티를 적신다는…!
제국의 심장이다.
건국황제의 복상사 이후로 이렇게 함부로 움직였던 적은 단연 처음 있는 일이었다.
마하모드를 움직일 수 있는 조건은 황족의 위기!
하지만 ‘유라 솔리넬 인펠리아’를 이 ‘전설의 캥거루’가 외면했던 것처럼, 녀석은 ‘황비’의 요구에만 반응한다.
물론….
공짜는 아니었다.
“이 몸을 닷새…. 아니, 열흘 동안 바치겠다…!”
황비는 비장한 어투로 말했다.
아르테르 캥거루들은 ‘마녀를 주머니에 넣고 돌아다닌다.’는 특이한 취미가 있다. 사람이 좋은 옷과 장신구에 집착하는 것처럼.
하지만 결코 마녀에게는 좋은 경험이 아니다.
캥거루 주머니 안은 아늑하지만, 캥거루가 폴짝폴짝 뛰어오를 때마다 재미있긴커녕 죽을 맛이다.
마법의 도움이 없다면 온갖 추태를 다 보였으리라.
인펠리아 4세와 잠자리를 갖는 건, 애를 낳을 때뿐인 황비도, 보름에 한 번씩 ‘의무’적으로 하루를 마하모드에 바치고 있다.
그것도 간신히 버티는데 열흘?
황비가 이번 일을 얼마나 중요시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이걸로 그 지구의 황제도 끝이겠지요.’
한편,
그 지구에서는 ‘슈퍼-메두사’의 심문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비협조적으로 나오면 고문한다는 야만적인 수단은 일절 없었다.
그저, 엘퍼러는 질문하고 ‘여자’는 성심성의껏 대답한다는….
아주 당연해진 광경만 있을 뿐이다.
“지구인을 전염병 취급한다는 거네? 그래서 침공하지 않는 거고.”
“그렇습니다, 주인님.”
남자를 길가의 돌멩이보다 못한 기생충으로 알던 황녀. 지구에서는 슈퍼-메두사로 악명을 떨치던 ‘에르티나 페르시 인펠리아’가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이 복종은 순리다.
타고난 마녀인 그녀는 그렇게 느꼈다.
여자로 태어나서 이렇게 ‘멋진 남자’와 마주하고도 도도하게 군다면?
남자처럼 서서 볼일을 해결할 수 없는 불편한 신체구조의 의미가 없다. 그래서 그녀의 현재 상태는 속된 말로,
『물이 바짝 올랐다.』
우수한 수컷의 페로몬에 정신 못 차리는 암컷의 발정기라고 해도 틀리지 않지만, 미화하기 좋아하는 인간답게 ‘사랑의 열병’을 앓는다는 고상한 표현을 쓰도록 하자.
전투도 매우 싱거웠다.
지구에 서식하는 ‘동물’ 중에서 사역마를 나름 엄선해서 선택한 후에 공격을 강행했던 슈퍼-메두사는, 대한민국 서울 야경(夜景)을 본 걸로 끝이었다.
‘아아, 저것이 진정한 마법…. 나의 진정한 주인님….’
여기서는 ‘8종’이라고 불리는 사역마들이 엘퍼러의 손에 순식간에 죽었다.
망토처럼 펄럭이는 날개는 너무나 멋들어졌으며, 하나도 다루기 힘들다는 ‘마기노투’를 양손에 하나씩 쥐고 있었다.
그녀의 마법은 일절 통하지 않았다.
물론, 마기노투에 ‘특수능력 면역’이란, 매우 사기적인 효과가 있긴 했지만, 그것도 허용치를 벗어난 압도적인 마법에는 속수무책이다.
그것이 ‘황족’이라고 불리는 자들의 마법.
하지만 이 엘퍼러는 그 한계치마저 웃돌며 가볍게 무효화시켰다.
그렇다면 해답은 하나.
『순도 95% 이상의 용사!』
무시무시한 마법으로 무장한 수많은 마녀를 굴복시키고 나라를 세운 사내들 같은 부류다.
마녀의 유일한 대적자.
표현은 그럴싸하게 대적자이지만, 마법이 일절 통하지 않는 이 사내들에게 ‘마녀’는 그저 ‘연약한 미녀’에 지나지 않는다.
그건 이 인펠리아 황녀도 다를 게 없었다.
배려심 없는 우악스러운 손아귀에 손목이 붙잡히고, 팔부터 강하게 몸이 끌려가서 넓디넓은 사내의 품 안에 쏙! 빨려 들어갔다.
이후에는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마음의 포로’가 되어있었다.
“마녀의 혈통이라….”
영국을 공포와 죽음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여자의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무일은, 지구인으로서 살짝 불쾌감을 느꼈다.
이런 감정은 엘프들도 같지 않을까?
...그건 아무래도 좋다.
그보다도 조만간, 강대국이나 괴수대응연맹에서 ‘마녀 양산프로젝트’ 같은 걸 내놓으며, 이 외계인 여인의 난자를 채취하자고 난리법석 떨 것 같았다.
이건 추측이 아닌 확신!
미국을 시작으로 수많은 나라가 경쟁적으로 ‘계약자 양산프로젝트’를 강행하여, 수많은 실패자만 양산했다.
태어날 때부터 ‘계약불가’라는 낙인을 받고 태어나는 여자들.
처녀임에도 오해받는 불행한 운명.
마녀는 성공할 수도 있지만, 과학기술이 지구 못지 않게 발전한 몬스터월드에서 이 방법을 몰라서 안 했을 리 없다.
“주인님께서 원하신다면 당장에라도 아이를….”
영국에서 그 난리를 떤 ‘슈퍼-메두사’와 동일인물이란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수줍은 자태를 보여주는 에르티나 페르시 인펠리아.
그 영국의 왕위계승권 1위 왕태자 ‘카이서스 하이로드’가 이 광경을 봤다면 주먹을 부들부들 떨며 ‘가증스러운 마녀! 내숭은 그만둬라!’라고 했을 테지만….
그녀는 내숭이 뭔지도 모르고 자랐다.
할 필요가 있었어야지~.
명령만 내리면 제국의 그 어떤 사내라도 그녀의 발을 핥았다.
유일한 예외가 ‘언니’의 ‘3대 기사’ 정도.
하지만 그건 정말 특별한 경우다. 목성 크기의 대지에서 자란 수많은 사내 중에서 단 셋뿐이란, 매우 경이로운 확률!
그 ‘3대 기사’였던 양반은 현재, 중국의 가상현실게임 이용 후에 완전히 세뇌되어 완전히 중국인이 다 됐다.
엄밀히 따지면 ‘여협(女俠)을 지키는 무림인’이라고 할까.
‘아담도 사람이란 거겠지.’
그도 기사이기 이전에 혈기왕성한 ‘남자’였다.
무려 100년 동안, 수정 속의 레이디를 외로이 지키며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겠는가!
듣자하니 벌써 아내가 일곱이란다.
중국에서 강제한 정략혼은 아니었고, 넓디넓은 중원의 불여우 같은 여인들이 ‘의외로 순진한 숫총각’인 아담을 구워삶았다.
처음에는 그랬는데….
아르테르가 문화적으로 여성이 우대받아서 그런 걸까?
지구 기준으로 ‘착한 남자의 끝판왕’ 격인 아담은 여심(女心)을 매료할 줄 알았다. 그러니 인펠리아 황비조차 그를 좋아하게 된 거겠지만.
덕분에 잘 사는 모양이다.
불여우 같던 아내들이 ‘그이 없이는 하루도 못 살아요!’라는 분위기로 반전되면서.
“그나저나…. 너도 이름이 참 기네.”
“새롭게 지어주세요. 패배한 순간부터 제 몸과 마음은 주인님의 소유물. 인펠리아 제국의 혈통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흐음….”
딱히 떠오르는 건 없었다.
하지만 ‘지방방송’은 그렇지 않았다.
이마에 박혀있는 영혼석 내부, 거긴 감옥이라서 늘 심심한 편이었다. 그래서 한무일이 보여주는 ‘세상 돌아가는 모습’은 ‘가뭄은 땅에 내리는 단비’ 같은 존재!
그래서 뭔 일만 있으면 시끄럽다.
<노예 3호! 간단한 걸로 고민하는군.>
<그대로, 메두사. 내숭 떠는 꼴이 딱 꽃뱀이구먼.>
<라스트네임과 미드네임만 빼면 되겠네!>
죄수들은 급기야 ‘이 이름이 좋다, 저 이름이 좋다.’를 놓고 다투기 시작했다.
사나이들의 뜨거운 주먹이 오가기 시작한다!
어차피 몇 초 뒤에 회복되기 때문에 이긴 놈이나 진 놈이나 금방 질려서 나가떨어져야 정상이지만, 남자의 근성이란 그리 섬세하지 않다.
『어? 싸움 났네? 나도 껴야지!』
...여자는 이해할 수 없는 사고회로를 가졌다.
대체로 그렇다는 것도 아니지만, 적어도 ‘늑대인간’들은 그랬다.
<닥쳐! 시끄러워서 젖가슴에 집중할 수가 없잖아!>
레슬링장처럼 소란스러웠던 영혼석은, 교도소장의 분노 폭발로 평정됐다.
어떻게 이런 잔인한 생각을 해낼 수 있을까?
비좁은 구덩이에 ‘남성 죄수’들을 전부 떨어트렸다. 그리고 뚜껑처럼 무거운 바위를 떨어트려서 납작하게 압축시켰다.
영혼이라서 죽진 않겠지만….
죽지 않기에 별 해괴망측한 만행이 이렇게 벌어진 것이다.
“...좋은 이름이 생각 날 때까지 보류.”
“네. 주인님.”
무일은 느낄 수 없었지만, 이 순간에도 여자들의 신경전은 벌어지고 있었다.
수호자를 잃고 남들은 겪어볼 수 없는 고초를 겪은 영국 왕녀, 실바니아 하이로드가 가장 예민해 보였고….
나머지 여성들은 살짝 경계하는 수준.
최은비?! 너마저…?!
여난(女難)의 전초전은 넘어가더라도, 인펠리아 제국의 황녀 ‘에르티나 페르시 인펠리아’가 확답해준 ‘또 한 명의 외계인 마녀’는 당장 처리해야 했다.
『아이나미 산토』
아니면, 인펠리아 제국의 속국 ‘가르시아’의 공주라고 해야 할까.
차이가 있다면 ‘영혼’만 넘어와서 빙의해있는 상태.
육체의 진짜 주인은 이미 죽고 없었다.
하지만 엘퍼러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추종자 ‘사요나락’이 있으니까! 육체만 그럭저럭 멀쩡하면 죽은 자를 되살려내는 권능의 괴수.
마법으로도 가능할 것 같지만….
저승에서 이승으로 ‘영혼’이 내려오던 도중에 ‘영혼석’의 흡입력에 빨려 들어가서 실패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실바니아 하이로드처럼 도로 빼내면 그만?
말은 쉬운데, 교도소장 ‘에필로드 프롤로드’가 허락할 리 없다.
『죄수 1호는?』
그녀는 보답 차원의 특례였다.
계속 숙주 ‘한무일’의 허리에 속박되어있던 가더발트는, 과정이야 어떻든 영국 왕녀가 듀크마의 영혼석에 갇혀준 덕분에 지금의 힘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특례는 앞으로 없을 것이다.
가더발트가 ‘새로운 젖가슴’을 포기할 리 없으니까!
게다가 이 정령은 벌써 ‘죄수 1호의 탱탱한 가슴이 그리워!’라면서 후회 중이었다. 그러니 석방은 이젠 끝! 한 번 영혼석에 끌려가면 무기징역 확정이다.
그러니 조심할 필요가 없다.
무고한 여성이 영혼석에 빨려 들어가서 영원히 수모받지 않도록.
뭐….
최근에 여성 숫자가 늘어남에 따라, 실바니아 하이로드 때처럼 온종일 젖가슴을 희롱당하는 경우는 없었다.
순서와 할당량이라고….
“그럼…. 진짜 결판을 내러 일본에 또 가야겠군.”
이번에는 일본 정부에 통보조차 안 하기로 했다.
천왕의 악다구니는 무시하면 그만이지만, 사람의 몸을 들락날락할 수 있는 ‘사령마녀’가 눈치채면 곤란하니까.
은밀하게 접근해서 단숨에 결판내야 한다.
펄럭-!
그렇기에 이번에는 웨딩풍을 대동하지 않았다.
이 덩치가 목포에서 사라지면 ‘나는 출장 중입니다.’라고 알리는 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홀가분하게 단독으로 움직이기로 했다.
날개와 마법으로 ‘차원의 물리법칙’을 깔끔히 무시한 엘퍼러.
세계에서 가장 빠른 ‘6종 날치 괴수’ 볼트윙에 버금가는 속도로, 동쪽으로, 일본 도쿄로 번개처럼 날아가기 시작했다.
< [53화-2] 환영인사는 없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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