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화-4] 재난 >
“걱정이 뭔가, 소년. 이, 내가 있는데.”
신출귀몰한 7종 수호자가 말했다.
외형은 남성.
하지만 저 모습은 ‘휴머노이드’가 남성이라서 그런 것뿐이다. 실제로는 성별이란 개념 자체가 무의미한 전자계통 생명체.
【판타이탄 / 7종 특수】
하느님을 바로 옆에 두고 ‘정보전’을 얘기한다니?
현재의 모든 정보는 디지털이다.
그리고 그 디지털을 지배하는 존재가 바로 7종 괴수 판타이탄.
외계인 녀석들이 얼마나 훌륭한 프로그램을 들고 오든 ‘가상세계 하느님’을 이길 수 없다. 언제쯤 이 사실을 깨달을까.
아니, 녀석들은 당하기 전까지 모르리라.
“거짓 정보…?”
“그렇다. 소년이여. 이미 몇 차례에 걸친 해킹 시도가 있었지만, 그때마다 역으로 살짝 장난을 쳐놨지.”
너무나 인간적인 수호자는 멋들어진 미소를 지었다. 휴머노이드가 입고 있는 연미복과 그렇게 잘 어울릴 수 없다.
이 수호자는 ‘신사’다!
말로 안 해도 그렇게밖에 보이지 않는다.
“역으로라면 어떤 겁니까.”
“우선, 소년의 전투력 부분에서 잘못된 정보를 알려줬지. 녀석들이 경계하는 최우선사항이 문팽이와 배틀씹이 되도록.”
“...그쪽이 더 공략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만.”
덩치들이 어마어마하다.
찔끔찔끔 쏴대는 딱총(마법총)으로는 턱도 없을 것 같다.
하지만 판타이탄 ‘엑시리얼 온드미온’은 고개를 내저었다.
해킹하려던 적을 역으로 해킹해서 많은 정보를 빼내온 그는, 아무도 모르게 이미 ‘정보전’의 숨은 승리자, 절대자였다.
그런 괴수가 이유를 말했다.
“녀석들의 주력은 마정석을 가공한 무기. 이 안에 자신들의 초능력을 담으면 위력도 위력이지만, 속성도 부여되네.”
“호오….”
“소년이 얼마 전에 상대한 자는 방어형에 특화된 초능력자라서 못 느낀 것뿐. 녀석이 몸에 두른 방어형 장비가 능력을 증폭해서 방어를 배가시켰다.”
“즉, 위험하단 겁니까?”
강대국에서는 아직 ‘정보전’의 맥락은커녕 적의 실체도 발견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 ‘가상세계 하느님’은 이미 뿌리까지 뽑은 분위기!
엘퍼러의 질문에, 엑시리얼 온드미온은 근처에 놓인 소파에 멋들어지게 앉았다. 설명이 조금 길어질 거란 뉘앙스였다.
하지만 한무일은 모르리라.
이 순간, 손목시계를 비롯한 모든 도청장치가 이 수호자에게 해킹당했음을.
모든 정보를 공개하는 엘퍼러와 달리, 일반적인 ‘인간’이라면 자신이 알아낸 정보를 꽁꽁 감추고 싶은 법이다.
그건 판타이탄도 마찬가지였다.
“정말 독특한 초능력이 많다. 강력하다고 할까.”
쉽게 상상할 수 있는 공간이동부터, 시간을 둔화시키거나 노화를 촉진하는 초능력까지 그 범위도 다양했다.
특히, 서세진이 이끄는 공격대는 ‘사기’라고 부르기 좋은 초능력자들로만 모여있었다.
슈퍼행성의 ‘1군’이라고 봐도 무방하리라.
특히, 서세진의 아내 ‘성예린’의 초능력은 횡포나 다름없었다.
『공간붕괴』
자기 몸이 아주 강력한 폭탄이다.
초능력이 발동되면, 주위의 모든 사물과 생명이 일그러지고 뭉개진다! 3차원 자체를 건드리기에 방어력 같은 계수는 무의미.
약점이라면 너무 강력한 탓에 본인도 휩쓸린다는 것.
하지만 그 문제는 ‘남편’의 ‘공격 반사’를 만나면서 해결됐다. 아니, 해결됐을 뿐만 아니라 성예린의 ‘공간붕괴’ 초능력이 더욱 강력해지는 시너지가 됐다.
안전을 걱정 안 하고 마음껏 최대출력으로 초능력을 쓰는 건 물론이고, 자신에게 피해를 주려는 공간붕괴마저 반사해서 더욱 증폭하는 원리.
“...약점은 남편인가.”
성예린 자체는 움직이는 ‘연쇄 폭탄’이나 다름없었다. 접근은 당연히 무리고, 원거리에서 날리는 공격마저 ‘공간붕괴’에 휩쓸리며 무마된다.
너무 강력해서 스스로마저 해치는 초능력자.
그래서 ‘성예린’은 슈퍼월드에서 ‘천덕꾸러기’였다. 하지만 ‘서세진’을 만나면서 자신의 초능력을 200% 활용할 수 있게 됐다.
문제는, 이게 그녀만 그런 게 아니란 점이다.
“서세진의 공격대에는 지나친 파괴력을 가진 초능력자가 다수 있다. 성예린이 가장 강력하지만, 나머지도 무시 못 하지.”
그 대표격이 공격대 부대장, 윤미라.
마법총으로 쏘아낸 총알이 플라즈마(Plasma)를 일으킨다. 초고온 중성 입자가 아주 넓은 지역을 녹여버리는 것이다.
당연히 본인도 휩쓸리는 탓에 평소에는 쓸 수 없다.
그랬던 그녀를 서세진이 주워(?)다가 성예린처럼 꽃피워줬다.
“이런 초능력자가 일곱….”
공격대장 서세진의 보조가 반드시 필요한 초능력자 숫자만 그 정도다.
스스로 ‘프로’를 자칭해도 될 실력자가 서른 명을 훌쩍 넘었으며, 그 뒤로 2군, 3군이라고 불리는 팀이 더 있었다.
어디 그뿐이랴?
서세진이 이끄는 공격대 ‘아임 이레귤러(I'm Irregular)’ 외에도 서열 3위, 4위에 해당하는 공격대들도 이번 원정에 눈독 들이고 있었다.
2위가 슬쩍 빠졌군?
“이쪽은 차원 원정을 반대했다는 모양이다.”
모두가 욕심쟁이인 건 아니다.
그 이유가 안전지향이든 평화주의든 간에 말이다.
문제는….
슈퍼차원으로 갔던 괴수들이 절대 약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니, 그 차원에서 추가로 ‘마정석’이 몸에 생기면서 더욱 강력해졌다.
외형이 달라졌을 만큼.
그래서 슈퍼월드에는 ‘인간형 괴수’라는 게 없었다.
“완전히 다른 괴수가 된다는 겁니까?”
“전부 그런 건 아니니 오해하지는 말도록, 소년.”
하지만 슈퍼월드에는 ‘소형’이라고 부를 크기의 괴수가 없었다.
즉, 몸집이 작은 인간형은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한다고 봐야 했다.
예를 들자면…?
지구에서는 한없이 아름다운 ‘검소한 가슴 미녀’ 쉬임프가, 슈퍼월드에서는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린 ‘초대형 육지 가재’로 변하는 식이다.
간혼 정말 잊곤 하지만.
엘퍼러의 추종자는 전부 인간이 아닌 괴수다.
외형에 속으면 제명에 못 죽는 아주 강력하기 짝이 없는 존재.
“그래서 공격대인가….”
초능력이란 강력한 무기가 있음에도 슈퍼월드 인간들이 협공이란 방식을 택한 건, 그만큼 괴수들도 강력한 탓이다.
다만, 지구는 아예 대적할 방법이 없었던 것에 반해, 초능력이란 힘을 손에 넣은 그쪽 세계는 괴수 방어를 훌륭히 해냈다.
...그건 아무래도 좋다.
지구의 괴수보다 더 강한 괴수를 해치운 초능력자들이 대거 지구로 넘어온다는 게 문제다.
좋지 않은 목적으로.
‘하기야, 승산이 보이는 침략을 생각한 거겠지.’
녀석들도 질 것 같은 전쟁을 걸어오진 않았으리라.
덤으로, 자신들의 초능력이면 외계행성도 효과적으로 관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발로.
꽤 절망적인 열세로 보이는데?
하지만 그런 것치고 엘퍼러의 표정은 담담했다.
자기 과신(過信)이 아니다.
저 슈퍼월드로 넘어간 괴수들의 문제점을 알기 때문이다. 그건 판타이탄도 마찬가지였다. 같은 고향 동포로서 수치스럽게 여기는 것처럼 보였다.
“머리에 마정석이란 돌멩이가 박히더니 멍청해졌다.”
그랬다!
슈퍼월드에서 ‘몬스터’라고 부르는 괴수들은 한결같이 멍청했다. 효과적인 전투를 지향하는 판타이탄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됐다.
『한 놈만 팬다니?』
가장 가까이에 있는 ‘적’을 최우선으로 공격한다.
그 ‘적’만 더럽게 튼튼하고 주위에서 알짱대는 나머지는 ‘종이 몸’이라고 해도, 거들떠보지 않고 처음 찍은 녀석만 주시한다.
세상에 이런 멍청한 경우가 또 있을까!
이렇게 알기 쉬운, 친절한(?) 괴수가 득실거렸다면 지구의 인류가 이렇게까지 몰리진 않았을 것이다.
물론, 처음에는 깜짝 등장한 괴수들에 우왕좌왕하며 속수무책으로 밀리겠지만, 몇 년 이내에 공략이 나오고 첨단무기로 무장한 사냥꾼들이 충분히 반격하며 활약했으리라.
하지만 현실은 시궁창!
지구에 상륙한 괴수들은 ‘싸움의 천재’들이다.
인간의 머리꼭대기에서, 지략과 무력 양쪽으로 농락하는 진짜 사냥꾼.
“대략적인 그림이 그려지는군요. 정보 감사합니다.”
“나머지는 차차 더 알려주도록 하지. 유키에게 좀 더 신경 써준다면.”
“하…. 하…. 노력하겠습니다.”
“말로만?”
“아닙니다. 약속을 잡아보겠습니다.”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무일을 놀린 엑시리얼 온드미온은 유유히 가던 길을 갔다.
곧 계약자 ‘유키나 미나미’가 하교할 시간인 까닭이다.
학교에 당당히 침대를 가져다 놓고 ‘선생님은 열심히 떠들어, 예요. 나는 자면서 들을게, 예요.’를 실천하는 불량학생!
부들부들….
굳이 보지 않아도, 온몸을 떨며 분노를 삭이는 선생님들의 모습이 훤히 그려졌다.
무시무시한 7종 계약자라서 혼낼 수도 없고!
‘모습이 변한다고…?’
엘퍼러는 호기심이 동했다.
그 슈퍼월드로 넘어간 자신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하고.
인간의 형태? 괴수의 형태?
근거 없는 추측이지만 후자일 거라고 판단했다.
이미 엘퍼러의 몸에 흐르는 피는 ‘은색’이었던 까닭이다. 종(種)까지 분류하자면 ‘뱀페스트’가 될 것이고.
‘궁금하냐, 무일.’
‘왜? 너는 알 것 같아?’
‘모른다. 네가 모르는 걸 내가 알 리 없지.’
알아볼 기회가 언젠가 오리라 기대해본다.
슈퍼월드로 넘어갈 기회가.
물론, 당장은 아니다!
한국 주위를 영토로 삼고 있던 9종 괴수들이 한꺼번에 무너지면서, 그 공백을 메꾼답시고 야금야금 새로운 이주자들이 등장하고 있다.
엘퍼러는 그것들을 솎아내는 중이다.
인류를 향해 중립적인 입장이거나, 유익한 수호자가 될 가능성이 농후한 괴수 위주로 자리 잡도록 유도하는 식이다.
대단히 번잡한 작업이지만, 보람은 있었다.
한 번 이렇게 해놓으면 대규모 지각변동이라도 없는 한, 쭉 유지될 테니까.
(대장님! 큰일 났습니다!)
판타이탄이 차단해둔 통신망이 회복되자마자 경종처럼 울리는 시계. 오랜만에 서울 괴수대응본부에서 온 연락이었다.
특공대 인물은 아닌 것 같고…. 그새 본부장이나 대통령이라도 바뀐 걸까?
무일은 고개를 갸웃하며 대꾸했다.
(외계인이라도 쳐들어왔습니까?)
(슈퍼-메두사가 활동을 계시했는데, 하필 목적지가 서울입니다. 그리고 혼자가 아닙니다! 어떻게든 해주십시오!)
(마녀니 당연하려나….)
다중계약자.
참으로 얼토당토않은 능력이다.
무일은 초능력보다 이쪽이 더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초능력자들은….
겉멋만 잔뜩 들어간 ‘소년소녀만화’ 떠오른다.
애초에, 그런 멍청한 괴수를 쓰러트리고 ‘아싸!’를 외치는 ‘게임 같은 사냥’에 점수를 후하게 주긴 힘들었다.
(영국에 있었던 괴물이 어째서 한국에….)
이보시오. 신종의 최종목적지는 원래부터 다 한국이었소.
통화기 너머로 중얼거리는 상대에게, 무일은 이렇게 한마디 해주려다가 포기했다. 이렇게 위기의식을 갖고 연락해준 것만으로도 고맙다고 할까!
고대의 ‘북한’을 상대로도 그랬지만….
대한민국은 늘 느긋했다. 그렇다고 벌벌 떨며 살라는 건 아니지만,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전쟁은 없을 거야.’라는 분위기다.
이게 정치적인 희롱인지 경제적인 노림수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런데 누구십니까? 어디서 들어본 목소리 같긴 한데….)
(예…?)
(정말로 몰라서 하는 질문입니다. 진지하게.)
상대도 당황한 것 같다. 어처구니없어 하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곧 섭섭하다는 어투로 대꾸했다.
(공석이라 예의를 차려서 그런가…. 정말 오랜만일세, 무일 군. 함께 염소 젖을 짜며 한국의 미래를 걱정하던 사이끼리 이러면 안 되네.)
(어…? 강민우 사장님?!)
서울의 모든 유제품을 지배하는 한국우유 사장!
오랫동안 ‘카르 4세’의 밥줄을 책임져준 고마운 은인이기도 했다.
어떻게 그를 잊고 있을 수 있을까?
엘퍼러는 주위에 너무 소홀했다고 반성했다.
물론, 주위에 개성적이고 드센 여자들이 넘쳐나는 바람에 한눈팔 틈이 없었지만, 시야를 좀 더 넓게 볼 필요가 있었다.
목포뿐 아니라 서울, 그리고 세계를 고루 살피는 안목이 필요했다.
(당선되어 대통령이 됐네. 자네 덕도 좀 봤지.)
한국우유에 오랫동안 염소 젖을 납품하던 카르 4세다. 그 사실이, 한국우유 사장을 ‘엘퍼러 후원자’로 미화시키며 표심을 자극했다.
아무리 서울 시민들이 무관심해도 이젠 ‘엘퍼러’가 누구인지 정도는 안다.
얼굴은 몰라도 그 명성쯤은 들어봤다고 할까.
외국에서 워낙 유명세를 탔고, 정치권 뒤에서 오랫동안 장기집권해온 선지혜의 애인이란 스캔들(당사자가 범인이다.) 때문에 알려질 수밖에 없었다.
(늦었지만, 축하합니다. 한데, 슈퍼-메두사가 온다고요?)
(아차! 그랬지. 음? 여보, 아니. 비서님. 엘퍼러하고는 오랫동안 아는 사이라서 편하게 얘기를 주고받을 수도…. 넵. 안 그렇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갑자기 지방방송으로 빠져버리는 대한민국 대통령.
이 나라가 ‘대통령 비서’에게 지배받고 있음을 여실히 드러나는 대목이었다.
엘퍼러는 헛기침 후에 말했다.
(흠흠. 강 대통령 각하. 어떻게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 [52화-4] 재난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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