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화-3] 재난 >
‘무조건 먼저 쳐야 한다.’
선공을 허용하는 건 좋지 않다.
보통은 방어하는 쪽이 유리하지만, 차원이동 한 존재는 ‘회귀본능’이란 매우 강력한 힘을 손에 넣는 까닭에 그 반대가 된다.
아마도….
그 서세진이란 외계인이 마기나로크를 견뎌낼 수 있었던 것도, 단순히 ‘공격 반사’라는 초능력 덕분만은 아닐 것이다.
스치기만 해도 사망인 인간이 버텨냈다는 게 그 증거 아니겠는가!
그러니 가장 좋은 방법은 원정.
슈퍼월드로 넘어가서 훼방 놓는 것이다.
“고민 있으세요?”
최은비 돌보기로 바쁜 페이 링이 조용히 물어왔다.
평범한 일상….
명목상, 아쿠버스 계약자이고 실제로도 계약자이지만, 그녀는 자기 자신에게 엄격한 트레이닝과 다이어트 스케줄을 제외하면 정말 일반인처럼 보내고 있었다.
작년까지 흉흉한 절단기 ‘카르세리안 레이소’를 들었던 아가씨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은 변화였다.
무일이 바라던 모습이기도 했다.
물론….
한국의 어느 간호사에게 이상한 상식을 지금도 주입 당하고 있는지, 간혹 엉뚱한 모습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고민보다는 선택의 갈림길에 섰다고 할까.”
“둘의 차이가 뭔데요?”
“흠.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다는 정도? 어느 길로 가던 결과는 같은데, 과정이 미묘하게 다르다고 할 수 있지.”
방어냐, 공격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하지만 골머리를 썩일 만큼 심각한 건 또 아니다. 인간을 죽인다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지도 않는다.
전장에 나온 이상, 누구의 부모고 자식이란 자비는 무의미하다.
엘퍼러는 ‘어느 것이 유리한가.’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차원이동마법을 익혀봐야 알겠지만, 추종자는 물론이고 지원받을 수 있는 병력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반면, 방어전을 펼치면 다양한 전략을 펼칠 수 있다.
한국식 용어로 ‘쌈 싸먹기’가 가능하다.
‘둘 다 마음에 드는데….’
차원을 넘어서 공격하면 통수가 되겠고, 지구에서 방어하면 이것도 나름 외계인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겨줄 수 있을 것이다.
강력한 괴수 여럿을 한꺼번에 싸워본 경험이 얼마나 될까.
무일은 별로 없을 거라고 단정할 수 있었다.
‘왜?’
‘유일. 인간의 몸을 그리 튼튼하지 않아. 더구나, 그 초능력이라는 건 극단적으로 한 가지 능력에 특화되어 있어.’
자연히 가진 초능력의 종류에 따라 역할을 분담하게 되어있다.
그 정도는 쉽게 추측할 수 있다.
한데, 그런 전략은 여럿을 상대로는 무리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모든 공격으로부터 ‘약하디약한 공격수’를 지켜낸다는 건….
광역보호막 같은, 게임 같은 초능력이 있다면 또 어떨지 모르겠지만.
“링링.”
“네. 주인님.”
“외계인이 침공해온다면 어떻게 할 거야?”
“음…. 싸워야죠.
살짝 실망스러웠다. 너무나 보편적인 대답이었던 까닭이다.
곧 무일은 물어봐야 할 상대가 잘못됐음을 깨달았다. 그가 어떤 선택을 하고의 문제는 둘째라는 사실을.
선지혜가 ‘OK!’를 안 해주면 무조건 지구방어전이다.
차원을 넘어서 원정 간다는 걸 그녀가 순순히 허락해줄까…?
“안 돼! 못 보내!”
그랬다! 1초도 고민 안 한 단답형이 돌아왔다!
선지혜로서는 절대로 들어줄 수 없는 얘기였다. 안 그래도 잠깐만 외출해도 줄줄이 여자를 달고 오는 선배다.
그런데 차원을 넘는다고?
이번에는 분명히 ‘사랑에 빠진 외계인’을 끌고 올 게 뻔했다. 이건 안 봐도 훤하다.
무일은 머리를 긁적였다.
그건 난감하다는 의미도 있었지만, 괜히 ‘방어 vs 공격’을 놓고 갈등했다고, 스스로 한심하게 느낀 것도 포함됐다.
“알았어.”
“어?”
너무 순순히 알겠다고 하는 선배 때문에 역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라는 선지혜.
고집부릴 줄 알았던 탓이다.
하지만 그건 엘퍼러가 ‘서세진’이란 외계인을 보고 경각심을 느꼈다는 걸, 그녀가 몰라서 그런 것이다.
전쟁이란….
늘 죽을 각오로 임해야 한다.
하지만 최근, 지국에서 엘퍼러를 위기까지 몰았던 적(敵)은 없었다. 그래서 해외 토벌도 쉬엄쉬엄 가는 느낌이 강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아니다.
“이상할 것 없어.”
멋대로 차원을 넘어서 멋대로 죽어버리면 선지혜가 폭주한다.
하지만 지구에서라면 함께 싸울 테니 그런 극단적인 결말은 안 나올 것이다.
“...그 정도로 위험해?”
“위험보다는 마음가짐의 문제지.”
토끼를 사냥하더라도 최선을 다하는 것이 사냥꾼이다.
선지혜 덕분(?)에 앞으로 어떻게 대처할지 자동으로 결정된 엘퍼러는 엘프의 이주를 돕는 한편, ‘아담의 검술’과 ‘듀크마의 마법’을 연마했다.
여기에 더해서 ‘뱀페스트 변신’과 ‘가더발트 강화’까지 곁들어지면?
“대단하네요.”
원래 몸을 되찾은 실바니아 하이로드는 다시 밟은 세상에 감격했다. 그래서 삶에 대한 애착도 남달라졌다.
부수적으로 한무일을 향한 순애(純愛)도 깊어졌다.
엘퍼러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다.’라고 겸손이 아닌 정말 당연한 얘기를 했지만, 사람 마음이란 게 그리 쉽게 변할 리 없었다.
이거 완전 드라마잖아….
목숨을 구해준 사내에게 뿅 가버린 미녀.
그 때문에 한무일은 내버려뒀다.
감사의 마음에서 온 일시적인 충동의 감정이라고 본 것이다. 그녀가 영혼석 안에서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몰라서 하는 소리다.
<꺄앗?! 어딜 만지는-!>
<이히히! 감촉 좋은 애들이 많이 왔네. 히히!>
영혼석 안에서는 오늘도 가더발트 ‘에필로드 프롤로드’의 만행이 계속됐다.
죄수 1호가 석방되면서 적지 않은 상실감에 빠졌던 ‘속옷 정령’은 더욱 적극적으로 젖가슴을 좋아하기 시작했다.
남자들은….
좁은 방에 서넛씩 묶어서 가둬놨다가 계획을 변경했다.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스스로 생각하는 것도 포기한 영혼은 죽은 거나 다름없어서 ‘마법의 촉매’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던 탓.
『미로탈출게임』
그렇게 시작된 거대한 미로 감옥.
탈출에 성공하면 ‘석방’해준다는 달콤한 보상이 달린 게임이다.
늘 3면이 막혔지만, 뻥 뚫린 천장으로는 현실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보여주면서 끊임없이 포기하지 말라고 떠민다.
이 아이디어는?
‘나는 수컷에게도 자비로운 왕이다.’
‘잘도 그렇겠다.’
한유일의 자화자찬을, 한무일은 즉각 부정했다.
저건 희망고문이다.
출구가 존재하긴 하지만, 누군가 탈출구에 접근하면 의도적으로 그 부분의 미로만 확장해버리는 식이다. 끊임없이.
그러니 탈출은 영영 불가능.
똑똑한 녀석들은 언젠가 미로를 달달 외우면서 그 광대한 면적에 질려버릴 것이다.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는 건, 시선을 위로 할 때마다 보이는 현실의 역동적인 광경.
‘미소녀를 울린 수컷에게도 희망을 줬다.’
‘이건 희망고문이란 거야, 유일.’
‘아니다. 녀석들도 잘 적응하고 좋아한다. 봐라.’
남자란 생명의 숙명일까.
미로 속에 갇힌 지 닷새 만에 그들은 적응에 성공했다. 그리고 출구 찾기보다 ‘주먹’으로 서열과 영역 정하기에 열을 올렸다.
본성이 ‘개’라서 그렇다.
오줌을 싸질러서 영역표시를 하는 것처럼, 녀석들은 ‘내 땅!’을 정하고 상대의 땅을 노리는데 열을 올렸다.
그렇다고 탈출을 완전히 포기한 건 아니다.
모든 영토(미로)를 차지하면 탈출은 저절로 성공한다는 이상한 공식이 완성됐다.
‘뭐…. 알아서 해.’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다. 나는 이 영혼석 안에 거대한 도시를 세울 것이다.’
한유일은 새로운 목표를 밝혔다.
자유 시간을 기다리는 건 너무나 지루하다. 숙주가 좀 즐겁게 살면 모르겠지만, 온종일 일에 매달리는 탓에 재미가 별로 없다.
하지만 여기라면?
물론, 한유일은 이 영혼석 안의 세계를 마음대로 주무를 힘이 없다.
이곳은 교도소장 ‘에필로드 프롤로드’가 창조주처럼 모든 걸 뜻대로 만드는 공간. 하지만 그래서 더 마음에 드는 걸지도 모른다.
성취감이 있으니까.
<안녕? 예쁜이.>
<당신도 제 가슴을 노리는 건가요?>
<아니. 그냥 대화나 하자고.>
이 세계에서는 ‘하렘의 왕’ 한유일의 ‘페로몬’이 일절 통하지 않았다.
여성 죄수들의 영혼이 전부 ‘괴수’라서 그런 걸까?
뭐가 됐든 그로서는 심심하지 않아서 좋았다. 무작정 좋다고 따라다니는 백성보다는 이렇게 튕기는 여자도 매력적이랄까.
이래저래….
영혼석 내부는 대단히 번잡했다.
겉보기에는 그저 사람 이마에 박힌 보석이지만.
‘덕분에 마법은 펑펑 나가겠네.’
한무일의 마법은 영혼석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그 안에 촉매로 있는 영혼들의 상태에 따라서 위력이 달라진다.
그래서 현재는?
최고조라고 해도 좋았다.
앞으로 더 많은 영혼을 모은다면 더욱 강해지겠지만, 현재로써는 최상의 상태 유지 중이라고 할 수 있었다.
(엘퍼러.)
(네.)
(어째서 노블레스와 에쏘스트는 변신이 안 되는 겁니까.)
최근에 한무일이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었다.
한 번 대답해주면 자기들끼리 공유해왔기에 똑같은 질문에 똑같은 대답을 해주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그러니 이건 간접적으로 보채는 것이다.
뭔가 빼먹은 게 없느냐고.
하지만 엘퍼러는 그럴 이유가 전혀 없었다. 만능하다고 할 수 있는 마법이 있는 그에게 ‘뱀페스트 변신’은 있어서 나쁠 것 없는 능력일 뿐.
꽁꽁 감출 이유가 없다.
더한 것도 아낌없이 공개했는데 무슨.
(공개하지 않은 건 없습니다. 이미 몇 번을 설명했다시피, 그저 노블레스와 에쏘스트가 기생 중인 뱀페스트의 협조를 못 받아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저는 과학자가 아닙니다. 보모는 더욱 아니고.)
가르쳐줬는데 먹여달라고까지 하는 강대국들의 태도는 그저 기가 막힐 뿐이다.
어떻게 저런 뻔뻔한 말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걸까.
뱀페스트를 강제로 억압해서 힘과 능력만 착취해오는 노블레스와 에쏘스트의 방식으로는 아무리 용 써도 ‘변신’은 무리다.
한무일도 이것만은 한유일의 협조를 받고 있다. 안 되는 건 안 되는 것이다.
이건 흡혈귀 ‘고유능력’ 같은 게 아닐까, 단순하게 추측해본다.
(하지만 인제 와서 화합은….)
강대국들도 답답하긴 마찬가지였다.
그건, 엘퍼러의 태도 때문이 아니라 그의 사고방식이 범인(凡人)을 아득히 초월한 탓이다.
당연히 따라 했었다.
『매일 10분의 자유 시간을 줄 테니, 협조해라.』
...라고 말이다.
똑같은 것처럼 보이지만, 제시한 시간이 극단적으로 달랐다!
한무일처럼 6시간을 탁! 내놓을 수 있는 인간은 희박하다는 정도를 넘어, 아예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게다가 능력만 계속 착취당해온 뱀페스트들의 심기는 대단히 좋지 못했다.
그래서 녀석들의 대답은 다 엇비슷했다.
『매일 20시간의 자유 시간을 줘. 협조해줄 테니.』
이건 도와줄 마음이 전혀 없다는 뜻이다.
그나마 현실적인 제안을 하는 뱀페스트가 평균적으로 ‘10시간’을 제시했지만, 노블레스와 에쏘스트는 10시간은커녕 ‘1시간’도 아까워서 줄 수 없었다.
그래서 평행선.
여태까지 변신에 성공한 건, 엘퍼러와 친위대뿐이다.
친위대는 애초부터 노블레스가 아닌 순수한 뱀페스트였고, 한유일의 자식들이나 다름없기에 이 새로운 능력을 스펀지처럼 흡수했다.
(이런 한심한 문제로 시간을 지체할 수 없습니다.)
(아니. 그러니까, 방법 좀….)
여전히 포기를 모르는 강대국들.
희생 없이 능력을 얻겠다는 욕심은 그 끝이 안 보였다. 억지도 정도껏 부려야 하는데, 이들의 뇌 구조는, 사탕 달라고 보채는 유치학생보다 덜떨어졌다.
엘퍼러가 해줄 말은 하나였다.
(곧 침공이 시작됩니다. 어쩌면 이미 시작됐을지도 모르겠군요.)
같은 ‘인류’이기에 알 수 있다.
정보전이 이미 시작됐을 거라고.
< [52화-3] 재난 > 끝
ⓒ 파르나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