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화-1] 재난 >
[52화] 재난
학명: 나무무(나무 빼고 없다.)
서식지: 대지
특징: 자연 생성기
위험도: 5종 대형
비고: 지나간 자리에는 대자연이...
***
나무무는 매우 큰 ‘나무 괴수’다.
흔히, 뿌리와 줄기를 팔다리처럼 움직이며 땅 위를 돌아다니는 ‘나무 정령’을 떠올리기 쉽지만, 나무무는 그렇지 않다.
그저 꾸준히 늘어나고 또 늘어날 뿐이다.
무슨 뜻이냐?
『확장』
녀석들은 평범한 나무처럼 가만히 한 곳에 있지만, 뿌리와 씨를 통해서 동족을 늘려가며 빠르게 ‘숲’을 만든다. 하늘까지 뒤덮을 만큼 넓고 풍성한 숲을.
그 성장 속도는 ‘사기’라고 하기에 충분할 만큼 빠르다.
크기만 한 나무?
아니다.
일단 자리를 잡으면 ‘초원거리 투석기’가 된다.
이동할 수 없는 대신, 땅 깊숙이 박힌 뿌리로 줄기를 지탱하고, 호두처럼 단단한 열매를 원심력으로 포탄처럼 던지는 것이다.
물론, 8종 괴수 배틀씹의 사정거리와 파괴력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활활 태워버려.”
약점이라면 역시 나무답게 불에 취약했다.
그래도 괴수랍시고 ‘물에 젖은 나무’처럼 화재(?)에도 끄떡없는 편이이지만, 꺼지지 않는 불을 다루는 오니오프의 상대는 아니었다.
이렇게까지 노골적인 천적도 드물지 않을까!
“네.”
오니오프 ‘사유리’는 자신의 장기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낌새가 이상함을 느낀 나무무가 일제히 모아둔 열매를 웨딩풍으로 던졌다. 하지만 그 높이도 높이지만, 단단한 고래의 외피를 두드리는 모습은 가소로울 뿐이었다.
그야말로 압도적!
괜히 8종을 재앙이라고 부르는 게 아니다.
푸른 불꽃은 ‘산보다도 높은 숲’을 송두리째, 홀라당 불태웠다.
‘굳이 확인할 필요는 없겠지.’
기습의 요체는 상대가 반응하기 전에 먼저 치는 것이다.
나무무는….
가장 빨리 끝낼 수 있을 것 같아서 첫 번째 상대로 골랐다. 희생양은 아니지만, 이렇게까지 허망하게 와해 되면 미안할 지경이다.
뭐, 그래서 놈들도 연합을 생각한 거겠지만.
약하니 뭉친 것 아니겠는가.
그래서 이후의 적들도 별 차이 없었다. 안 될 놈들이 뭉친다고 될 리 없었다. 하물며 각개격파라면 말할 것도 없다.
차례대로 무너졌다.
어떻게 처리했는지 설명하는 시간이 더 오래 걸릴 만큼 빠르게.
“뭐하자는 건지….”
이건 마치, 누군가 부추겨서 싸우게 된 것 같았다. 힘없는 나라를 괴롭힌 기분이랄까!
찜찜함은 남았지만, 그것도 이젠 마지막.
뭐가 어떻게 된 줄도 모른 채 번쩍! 했더니 전멸이란 황당한 상황을 맞이한 ‘싸우잔드’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당하는 입장으로서는 얼마나 황당할까.
하지만 사정 봐줄 이유가 없었다.
엘퍼러는, 꼴에 왕이랍시고 뭔가 해보려는 싸우잔드를 상대조차 해주지 않았다. 녀석은 해양괴수의 천적이나 다름없는 아쿠버스의 ‘전기분해’에 바짝 익고 녹아버렸다.
추종자들의 최후가 그랬던 것처럼.
‘상대해주기 민망할 정도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상대적이다.
엘퍼러가 아닌 다른 국가가 상대했다면 99% 멸망이었다. 어느 나라가 9종 여러 마리를 단독으로, 그것도 한꺼번에 쳐부순단 말인가!
하지만 역시 아무런 피해 없이 이길 순 없었다.
겨우 싸움의 여파만으로, 부산은 해일이 한 번 휩쓸고 지나가는 대참사가 벌어졌다.
그래도 뭐….
싸우잔드를 잃고 수도 ‘도쿄’ 일부도 타격을 크게 받은 일본의 피해에 비할 바는 아니다.
금전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간에.
(일본 정부에서 항의가 핏발 치고 있습니다, 엘퍼러.)
(맹주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 그야…. 흐음….)
아몬 헤이젤은 할 말이 없었다. 있을 턱이 있나.
한국은 정당방위였다. 피해도 있었다. 단지, 너무 조금이라서 모양새가 안 날 뿐!
무일도 이렇게 극단적인 결과가 나올 줄은 예상 못 했다.
‘완전히 사기이긴 했지.’
최근에 한유일이 터득한 ‘새로운 능력’까지 사용할 수 있는 한무일.
검술, 마법, 변신, 예지….
이쯤 되면 지고 싶어도 그렇기 무리였다.
기존의 약점이나 단점을 마법으로 덮어버리고, 흡혈귀의 변신이 마침표를 찍었다. 하늘부터 지하까지 어디든지 달려갈 수 있으니까.
일본 천왕을 주축으로 또 난리법석을 떨었지만, 가볍게 묻혀 버렸다.
이유는….
(엘퍼러. 흉내가 가능하겠습니까?)
(모르겠습니다. 보고 느끼는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친위대는 금방 따라 하는 것 같았는데, 노블레스와 에쏘스트도 그럴지는 미지수입니다.)
사람과 괴수의 감각은 아예 별개다.
한무일의 경우도, 사용하는 날개를 비롯한 ‘변신’은 한유일이 도맡아서 하고 있다. 영혼석 안에서 ‘에필로드 프롤로드’가 마법을 보조하듯이.
그러니 순수한 뱀페스트가 아니면 익히기 힘들 거라고 봤다.
하지만 그런 얘기는 하지 않았다. 해봐야 ‘독점’하려는 욕심으로밖에 안 보일 테니까.
‘쯧쯧…. 흥분하긴.’
보채지 않아도 모든 정보와 기술은 늘 공개해왔다. 그런데도 확인하는 걸 보면, 거짓말쟁이(정치인)는 남을 못 믿는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아무튼, 그 덕분에 일본의 항의는 무시됐다.
침략 의지가 너무나 명백했던 싸우잔드의 행동, 그리고 그걸 모른 척한 일본의 행태가 공분을 사기 딱 좋았다.
9종 수호자를 잃은 것치고는 참 조용하달까.
그래서 흘러가는 분위기는 ‘어머! 그 이웃집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나 봐!’ 딱, 이 수준밖에 안 됐다.
나머지 9종 괴수는 아예 언급조차 안 됐다.
이전의 오니오프는 ‘후계다툼’이라도 벌어졌었는데, 이번에는 깡그리 쓸려버리면서 그런 후유증, 후속타조차 없었다.
(일본의 계약자는 어떻습니까?)
(싸우잔드 계약자 ‘아이나미 산토’ 양이라면 담담합니다.)
(...그렇군요.)
계약도 파격적이더니 파기된 이후의 행동도 예상 밖이다.
보통, 수호자를 잃은 계약자는 짙은 상실감에서 온 합병증으로 심각한 우울증과 대인공포증에 빠진다.
이 우울증은 아내가 동고동락(同苦同樂)해온 남편을 잃은 심정하고 비슷하다.
의외로 빠르게 극복하는 부류도 물론 있다. 계약자와 수호자의 유대관계가 썩 좋지 않을수록 손쉽게 극복한다.
하지만 대인공포증은 틀리다.
지켜주던 강력한 힘을 잃은 그녀들은 너무나 약하다. 그걸 본인들도 절절히 깨달으며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오만방자한 생활태도로 적이 많은 ‘계약자였던 미녀’뿐만 아니라, 선행을 베풀어온 경우도 벌벌 떨며 사람을 피하게 된다.
‘한데, 그런 것도 전혀 없고.’
슬슬 그 ‘아이나미 산토’가 수상하게만 보였다.
하지만 이 이상은 [예감]으로 무장한 무일도 넘겨짚기 힘들었다.
『수상해서 어쨌는데?』
이것에 대해 뚜렷한 답이 없는 탓이다.
세상에는 온갖 인간이 다 있고, 그중에 수상하지 않은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물론, 유키나 미나미의 지적처럼 ‘딴 사람’이라면 얘기가 또 된다.
이계에서 영혼만 넘어온 사람이라던가?
고전소설을 즐겨 읽은 게 도움이 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허무맹랑하다기보다는 그럴싸하게 들렸으니까.
조만간 한 번 만나보기로 했다.
큰 문제만 해결되면.
(이집트는 어떻습니까?)
(엘프의 존재를 처음에는 부인했지만, 증거가 속속 드러나면서 말을 바꿨습니다. 결과부터 말씀드리자면 대화로 풀긴 무리입니다.)
이집트는 이미 심각한 수준이었다.
하기야 무려 90년이나 세상을 속이고 ‘엘프’를 키워왔는데 무사태평하다면 그게 더 이상했을 것이다.
엘프의 마법은….
괴수를 상대로는 무용지물이지만, 인간에게는 매우 위협적이었다.
계약서 같은 걸 자연스럽게 뜯어고치는 건 기본이고, 최면술 같은 종류의 정신계통은 ‘정치’에서 대단히 큰 변수와 강수로 쓸 수 있다.
그걸 이집트 권력자들이 몰랐을까?
(얼마나 심각합니까?)
(이집트의 상류층은 전부 ‘엘프의 피’가 흐른다고 보시면 됩니다.)
(맙소사…!)
괴수의 등장과 계약 여부만 아니었어도, 엘프는 대단히 매력적인 종족이었을 것이다. 인간의 상위종족이라고 해도 부정할 수 없을 만큼.
괜히 고전소설에서 ‘엘프 마누라’에 열광하던 게 아니다.
이게 다 상업적인 대리만족 아니겠는가?
각설하고,
괴수대응연맹 맹주 ‘아몬 헤이젤’은 상류층이라고 했지만, 그건 100%라는 의미일 뿐, 그 밑의 피지배층과 중산층은 순수한 인간이라는 얘기가 아니다.
(나라를 통째로 격리조치 해야겠군요.)
정치인 중에서 아랫도리가 깨끗한 인간이 몇이나 되겠는가.
본부인 외에도 숨겨둔 첩이나 하룻밤 정을 통한 여자들을 통해서 ‘엘프의 피’가 사방으로 확산했을 게 뻔하다.
본인들은 아니라고 하시겠지.
증거가 다 드러나기 전까지 뻔뻔스럽게 발뺌하는 게 그들의 습성이니까.
(이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닙니다.)
이 세상에는 밀무역이란 아주 신사적인 상업수단이 존재한다.
그건 이집트도 마찬가지.
원수지간처럼 으르렁대는 적대국에 무기와 식량 등을 파는 상인들이 꼭 있다. 그리고 이 밀수꾼들은 이집트와 국경을 접하거나 지중해를 사이에 둔 나라들을 자기 집 앞마당처럼 들락날락했다.
그리스, 이탈리아, 스페인, 터키, 사우디아라비아….
전부 난리가 났다.
그 ‘엘프의 피’가 아주 오래전부터 야금야금 퍼져버린 것이다.
(엘프는 귀가 뾰족하지 않습니까?)
(아닌 경우가 더 많습니다. 엘프의 유전자가 조금뿐이 안 섞였다면 귀도 일반적인 사람과 별 차이 없습니다.)
하지만 귀가 멀쩡해도 ‘엘프의 피’가 한 방울이라도 섞여 있으면 계약은 무리.
현재, 모든 나라에서 이 사태를 ‘국가재난’으로 판단하고, 엘프 혼혈을 찾아내는 기술을 개발 중이지만, 영 신통치 않았다.
인간사회에 숨어든 뱀페스트를 찾기 힘들었던 것처럼.
아니, 그 이상!
약간이지만, 수많은 변수를 줄 수 있는 마법은 그만큼 성가셨다.
혈액검사 같은 걸 조작하는 건 물론이고, 신분세탁도 너무나 간단하게 해버린다.
“이거 참….”
이계로 침공하느니 어쩌니 했던 강대국 중 절반이 이번 사태로 떨어져 나갔다.
성인병처럼 번진 ‘엘프의 피’ 때문에.
이대로 가다가는 나라의 존속 자체가 위태로워질 뿐만 아니라, 인류의 생존을 위협받는 까닭이다.
그만큼 ‘계약자’가 없는 인류는 상상하기 힘들다.
천하무적처럼 든든하기만 한 엘퍼러조차도 따져보면 ‘계약자’일 정도니까.
‘이런 식으로 인류를 위협하는 강력한 적은 또 처음이네….’
손가락 하나로 지구를 말아먹을 수 있는 마신(魔神)쯤을 상상했다.
그런데 이건 주먹구구식 싸움으로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열성유전자 테러라니….
진짜 웃겨서 말도 안 나왔지만, 그 고집불통 강대국들조차 두려움에 벌벌 떨며 모든 야욕(이계 침공)을 잠시 제쳐놨을 정도니 말 다했다.
“선배. 제주도를 이용한다고?”
“음. 엘프들을 격리…. 좋게 표현하면 자유보호구역이라고 할까.”
섬에 가둬두고 뭐가 ‘자유’인지는 의문이지만, 듣기 좋은 단어를 아무 생각 없이 붙여봤다니 의외로 어감이 좋았다.
음. 이래서 사람들은 ‘자유’와 ‘사랑’을 남용하나 보군?
작명감각은 ‘최은비’ 이후로 최악을 달리는 엘퍼러에게 선지혜가 아닌 유키나 미나미가 잽싸게 끼어들었다.
“카레 짱. 엘푸인데?! 가슴 큰 엘푸는 남자의 로망 아니야, 예요?”
“...고전소설은 적당히 읽어. 유키 짱.”
외국에서는 이 ‘엘프의 피’를 ‘성인병’ 취급하며 모든 방송매체를 통해 국민들에게 경고 중이었지만, 대한민국은 목포뿐 아니라 전체적으로 아주 태평했다.
일단, 이름 붙이기 좋아하는 연맹에서는 이렇게 칭했다.
『엘이즈』
고대에 수많은 커플을 지옥의 구렁텅이에 몰아넣은 ‘에이즈’ 짝퉁이다.
위험하기로 따지면 글쎄….
계약자가 될 생각만 없다면 나쁘다고 할 순 없다.
태어나기 전부터 확정인 선남선녀 마법사!
하지만 인류는 수호자 없이는 하루도 못 버티는 게 현실이다. 판타지월드처럼 망하고 싶지 않다면.
엘프도 계약할 수 있게 해주는 ‘신약’이라도 개발된다면 또 얘기가 다르겠지만.
일단, 그런 편리한 건 없었다.
그래서 이집트는 국제적인 맹비난을 사는 중이었다.
수도 ‘카이로’ 하나만 남겨둔 나라에 뭐라 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건 없지만, 통수를 제대로 먹은 강대국들 입장에서는 헐뜯기라도 안 하면 화병으로 쓰러질 심정이었다.
그렇게 ‘엘이즈’는 지구를 강타했다!
강력한 초능력으로 무장한 ‘슈퍼월드’와 ‘괴수의 본고장’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세상이 어쩌다 이렇게 됐담?’
‘...가장 많이 바꿔놓은 네가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 무일.’
‘내가 어쨌다고?’
‘모르면 됐다.’
< [52화-1] 재난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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