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처럼-214화 (214/287)

< [51화-4] 이계의 피난민 >

전혀 생각지도 못한 위협.

정말 예쁜데 자신의 유전자에 ‘엘프’가 1%라도 섞여 있으면 계약할 수 없다. 그건 여성 본인에게도 악몽이겠지만, 국가경영자 입장에서도 마찬가지.

강대국들의 움직임은 신속했다.

이건 자신들의 ‘생존’이 걸린 문제였기에 앞뒤 재볼 필요도 없었다.

가장 먼저, 이집트와 이어진 모든 국경이 봉쇄됐다. 또한, 밀수입 등으로 ‘이집트인’이 타국과 성관계를 가졌는지 철저히 알아보기 시작했다.

“아아, 전우(戰友)들이여….”

무일도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다.

한국 특공대에서 함께 생활했던 동료들이 ‘볼트윙 테러’를 계기로 많은 수가 이집트로 망명했던 까닭이다.

지금이야 이집트가 별로라고 생각되겠지만….

바로 1년 전까지만 해도 이집트는 부동의 1위인 초강대국이었다. 그리고 현재도 몰락하거나 한 건 아니었다.

노골적으로 ‘가진 자’가 행복한 나라, 이집트.

하지만 그 시절도 지났다고 봐야 했다.

‘어쩐지! 신종 괴수들에게 너무 속수무책으로 밀린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사정이…. 아니, 이런 이유가 없었다면 말아 안 되지.’

옛날부터 ‘9종 수호자 이즈헬’에게 극도로 의존해온 이집트다. 하지만 아무리 강력한 괴수라도 보조해줄 전력은 반드시 필요하다.

하물며 도시 하나도 아니고 ‘아프리카 대륙’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사막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존재할 수 있는 ‘사막의 정령’도, 모든 걸로 홀로 감당할 수 없다. 그리고 그건 추종자의 도움을 받아도 다를 게 없다.

순수한 계약자와 수호자가 필요하다.

이즈헬 외의 전력.

하지만 이집트는 ‘엘프’를 받아들였고, 계약자가 태어나기 힘든 나라가 됐다.

“무슨 SF영화 같은걸~♬”

외계의 불치병이 퍼지며 ‘아포칼립스(종말)’에 다가가는 인류라고 할까.

선지혜의 표현처럼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

다만, 무조건 나쁘게만 볼 게 아니다. 엘프의 육체와 마법 능력은 ‘사냥꾼’으로서 더할 나위 없이 뛰어나고, 수명도 보조식품에 의존할 필요 없을 만큼 길다.

덤으로 외모. 성형수술을 받지 않아도 된다.

즉, 발정기 혹은 바람기만 조심하면 활용할 수 있는 장점이 무궁무진하다.

“이집트는 그 유혹에 넘어간 거겠지.”

그래서 엄청난 보물을 주운 것처럼 꽁꽁 감춰둔 것이리라.

다른 나라에서 ‘노블레스’와 ‘에쏘스트’로 열광할 때, 피식 웃으면서 엘프 늘리기에 여염 없을 게 분명하다.

그러다가 이번에 한 방 크게 먹었고.

이즈헬 혼자서 감당 못 할 숫자와 위력의 ‘신종 괴수’가 속출하면서 이집트는 아프리카 대륙을 잃고 딸랑 수도 ‘카이로’에서 농성 중이다.

이걸로 명백해졌다.

『계약자는 반드시 필요하다!』

엘프 같은 걸로 대처할 수 없다.

외모와 능력이 인간보다 뛰어난 덕분에 ‘우월한 종’처럼 보이고, 계약만 아니었다면 실제로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그 결과가 ‘엘프의 고향’이다.

괴수대응연맹에서 ‘판타지월드’라고 명명한 그 차원의 축소판을 이집트가 제대로 보여줬다. 이즈헬 덕분에 싹 밀리지 않았을 뿐.

“일본은 어떻게 할 거야?”

“일본이 아니라 ‘싸우잔드’를 말하는 거겠지.”

무일은 선지혜의 질문을 정정해줬다.

수호자의 돌발행동을 국가의 책임으로 묶어버리면 곤란하다.

선지혜는 싸우잔드와 묶어서 일본을 통째로 밀어버리고 싶은 모양이지만, 그건 옳지 않다. 고민해볼 필요도 없는 문제다.

“뭐가 됐든.”

“...전쟁까지 앞으로 4시간 남았다고 했지?”

“응.”

선전포고를 해온 건 아니지만, 분위기상 그랬다.

감히?

그렇게 생각될 만큼 가소로웠지만, 적은 ‘싸우잔드’ 하나가 아니었다.

이것들이 단체로 약을 빤 걸까?

한국과 인접한 지역을 영토로 삼고 있는 ‘왕’들이 한꺼번에 달려들려는 조짐이 보였다. 그리고 녀석들의 병력집결이 완료되는 시기가 앞으로 4시간.

초대형 연합국의 탄생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견제인가? 아니면 다른 뭔가가 있는 걸까?’

문팽이와 선지혜의 전력만으로도 9종 수호자 서넛은 간단히 찜쪄먹을 수 있는 수준이다.

왕들이 정말로 ‘국왕(國王)’이라고 본다면 나쁜 판단은 아니다.

너무 강한 이웃은 껄끄러우니까. 약한 나라끼리 힘을 합쳐서 대항하는 게 옳다.

다만, 그게 인간도 아닌 괴수 사회에서 쓰였다는 게 이상하다. 기존의 그 어떤 ‘괴수 생태계’에서도 없었던 현상이었던 까닭.

인위적으로 발생한 일이라면?

누군가의 음모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스케일이 컸다.

한둘도 아니고 6마리의 왕을 움직인다니?

중국이 꽉 막고 있는 서쪽을 제외한 모든 방위에서 ‘괴수의 왕’과 그 군세가 침공해올 예정이라고 보면 된다.

“그래도 혹시 모를 위협 하나는 막았으니….”

엘프는 이미 ‘하렘의 왕’이 접수했다. 그 엘프의 남편이고 아빠인 ‘인간’에게는 많이 미안하게 됐지만, 그 종족은 인류에게 위협적이라 철저한 통제가 필요하다.

역으로, 엘프 촌장 ‘레인’은 무일에게 고마워해야 한다.

뱀페스트로 안 만들었으니까!

...본인은 갑자기 아내들이 성관계를 거부하는 바람에 당혹스러움을 넘어 분노하는 단계에 접어들었겠지만.

그러다 홧김에 강제로 하면?

끝장이다.

노예는 멀리서도 관리할 수 있지만, 자궁에 서서히 자라나는 ‘알’들은 아니다. 남자의 음경이 보이면 망설임 없이 침투하리라!

‘문제는 이쪽인데….’

괴수에게 발린 ‘판타지월드’는 그렇다고 쳐도, 그 강력한 괴수를 압도한 ‘슈퍼월드(연맹의 작명감각은….)’가 지구를 노리고 있다.

강력한 초능력과 마도구(魔道具)로 무장한 무력집단.

논란이 됐던 ‘회귀본능’이란 재생력까지 겸비한 ‘초능력자’들을 무슨 수로 상대할 것인지가 가장 큰 문제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하지만,

『마기나로크』

그 강력한 공격을 막아냈다!

태평하게 ‘엘퍼러가 알아서 해결하겠지.’라고 안일하게 생각했던 나라들은 경종을 울렸다. 국가존속이 걸린 전쟁이 됐으니까.

그런 각자의 사정들은 제쳐놓고….

엘퍼러는 짧은 고민 끝에 결론을 내렸다.

“우리가 먼저 친다.”

방어만 하고 있을 수 없다.

명백한 적의(敵意)를 갖고 덤빈다면 거기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게 해주리라.

우선, 가장 가까운 문제부터.

추종자들에게 황제의 뜻이 전달됐다.

‘지금부터 총공세에 들어간다. 북쪽에서 진군해오는 나무무를 시작으로 시계방향으로 돌며 모든 왕을 섬멸한다.’

한국의 과학자와 기술자들에게 ‘여신’으로 추앙받고 있던 아쿠버스 ‘산드라미아 레미’가 가장 먼저 움직였다.

숙제를 안 해온 하등생물 중 하나(행운아)를 지목해서 의자 대용으로 쓰는 벌(상)을 주던 그녀는 ‘자습이다, 게을러터진 놈들.’이라고 통보하며 교실을 나섰다.

그러면서 중얼거렸다.

“빠끔. 교육방식에 문제가 있는 건가…?”

한 박자 늦게 쉬임프 ‘플로티날 아브롤라’가 합류했다.

그녀는 놀랍게도, 수영장 위에 두둥실 뜬 채 스마트폰을 조작 중이었다! 용신 아쿠버스만큼이나 인간적인 사회생활력이었다.

방금까지 ‘아름다운 유방을 키우는 50가지 비결’이란 장문을 정독 중이던 ‘세계에서 가장 단단한 괴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유제품은 입에 안 맞던데….”

“내가 가르쳐줄게! 맛있게 먹는 방법을!”

우유가 주식인 발키지어 ‘펠-쉐어퐁’이 하늘에서 내려오더니 대뜸 끼어들었다.

그녀의 별명은 ‘부엌파괴자’다.

어디에서 요리프로그램을 봤는지 모르겠으나, 갑자기 제빵을 시작했다. 우유와 버터 등이 잔뜩 들어간 빵을 선호하는데….

돕는 제빵사들은 비명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천성인지 모르겠지만, 괴수인 그녀는 섬세함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리고 파괴에 특화된 그녀에게 창조활동은 운명적으로 아닌 것 같았다.

그 운명에 저항하는 바람에 밑에서 돕는 사람들을 늘 울상.

‘태평한 쉬임프를 담당해서 좋겠다, 너.’

‘빵 굽는 게 편한 거야. 여자의 가슴 히스테릭이란…!’

친구사이인 오니오프와 도끼토끼는 하던 말다툼을 멈췄다. 그녀들의 일상생활을 지원하던 관리자(시청 직원)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들이 폭주하면 가장 먼저 자신들이 휩쓸려서 죽을 테니까!

봉급을 많이 주는 탓에 하긴 하지만, 이럴 때마다 수명이 팍팍 깎이는 심정이다.

무시무시한 8종 둘이 싸우던 이유는 별거 아니었다.

“사유리! 카레에 당근은 진리라고!”

“틀렸어. 찌르뱅팽. 당근은 이 세계에서 내가 맛본 최악의 채소 5위야.”

그런 둘을 말리며 데려가는 여인은 사요나락 ‘엔츄 베르테’.

육체 능력이 1종 수준에 지나지 않는 그녀가 가장 안전에 주의해야 하는데, 본능인지 끊임없이 ‘아름다운 시체’를 찾아다녔다.

당연히 그녀를 돕는 호위는 듀크마.

그림자처럼 따라붙은 미모의 대마법사는 오늘도 공허한 표정을 지은 얼굴과 시선으로 멍하니 세상을 관조하고 있었다.

“여왕님. 가실 시간이옵니다.”

“아아, 그래. 나를 찾으시는 소리가 들리는구나.”

다미호도 움직였다.

꼬리 숫자가 적은 약한 개체는 남고, 칠미호(7종) 이상의 강력한 추종자만 움직였다. 그리고 그녀들을 이끄는 건 구미호.

9종이지만, 더 강한 황제에게 복종하는 왕.

신하 중 그 누구도 그녀의 판단을 흉보거나 실망하지 않는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역으로, 엘퍼러를 공격하려는 왕들의 만용을 비웃었다.

“흠. 다 모인 건가.”

그렇게….

한자리에 모인 추종자들은 외투를 하나씩 걸쳤다.

옷을 입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그녀들에게 외출할 때만 의무적으로 입도록 한 것이 이 회색 망토였다.

『엘퍼러 패밀리』

처음에는 이렇게 명명했다.

당연히 ‘성의 없다.’는 말이 은근히 나돌았다.

그래서 망토에 새겨진 ‘통일된 마크’에서 착안하여 달리 불리게 됐다. 딱히 누구 먼저 시킨 건 아니었지만, 자연스럽게.

『십자군(十字軍)』

마크가 십자(十) 형태를 한 영향이다.

엘퍼러가 사용하는 두 자루의 에쏘드를 본떴다. 장검을 수직으로 세우고 단검을 가로, 수직으로 그 뒤에 포개놨다.

너무 단순한 디자인 아니야?

...그런 지적이 나오는 바람에 ‘날개’와 ‘보석’이 마크에 추가됐다. 날개는 좌우에서 두 검을 감싸고 보석은 검이 교차하는 중앙에 얹어져 있다.

각각 ‘한유일’과 ‘옥황사제’를 상징했다.

‘휴우…! 잠깐이지만 쉴 수 있겠네!’

‘제발 장기출장이 되길!’

‘계약자와 내가 다른 게 뭘까? 운동?’

엘퍼러의 모든 추종자는 계약자 대신 ‘매니저’가 붙는다. 물론, 강력한 괴수의 경우에만 일대일로 붙고, 윈드걸스나 세이랑은 다섯에서 열씩 묶어서 챙긴다.

당연히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과 똑같거나 비슷하게 생겼다고 해서, 사고와 생활방식마저 그런 건 아니다.

물론, 거대한 덩치와 이상한 외모를 자랑하는 괴수보다는 좀 더 인간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래도 괴수는 괴수였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통수를 친다!

바퀴벌레를 잡겠다고 방을 홀라당 태워버리는 건 애교에 속한다. 기상천외한 이유로 기상천외한 짓을 벌인다.

그러거나 말거나….

“징벌의 시간이다.”

엘퍼러의 군세가 움직였다.

목포 위에 두둥실 떠 있는 웨딩풍에서 윈드걸스 무리가 내려왔다. 그녀들은 고위괴수들을 끌어안고 다시 날아올라 거대한 괴수에 탑승시켰다.

집결과 출진까지 걸린 시간은 3분.

두 에쏘드, 한세리와 한유나(너마저!)가 샌드위치를 꼭 싸야 한다고 고집부리지 않았으면 더 빨랐을 것이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매일 토벌하면 괴수도 언젠가 박멸되지 않을까?』

하지만 그건 정말 아무것도 모르기에 가능한 소리다.

괴수는 끊임없이 태어난다.

죽거나 떠나며 비어있는 면적만큼 다시 새로운 괴수가 채운다. 어떤 괴수가 채우느냐의 차이는 있지만.

그래서 여태까지는 가만 놔뒀었다. 왕들이 얌전하기도 했고.

하지만 생각을 달리하게 됐다.

‘인류에게 우호적인…. 최소한 중립적인 괴수로 전부 갈아치운다.’

괴수를 지구에서 몰아내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 괴수를 어떤 종으로 채울지는, 끊임없는 물갈이를 통해 유도할 수 있다.

지금부터 그 과업을 실행할 것이다.

미지의 적, 슈퍼월드가 침공해오기 전에.

< [51화-4] 이계의 피난민 > 끝

ⓒ 파르나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