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화-3] 이계의 피난민 >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다. 하지만 밀폐된 피라미드 안의 좁은 마을에서 일어날 일이란 지극히 한정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건 뭘까.
비록 한때지만, 한 세계의 절대자까지 찍었던 남자는 기분이 매우 언짢았다.
영원히 사랑할 것을 약속했던 아내들과 관계가 소원해지긴 했지만, 어제와 오늘이 이렇게까지 다를 수 있다고 느낀 건 처음이었다.
이젠 부부보다는 지긋지긋한 인연 느낌이긴 했지만….
‘뭐지…? 내가 뭘 잘못했나…?’
그랜드 소드마스터 ‘레인’은 자신이 고립됐다는 기분에 휩싸였다.
오늘따라 아내들이 낯설다고 해야 할까.
이 비좁은 바위산 안에 사는 게 얼마나 답답한지는 잘 안다. 이 문제로 부부싸움도 엄청나게 했었기에 더욱.
하지만 전부 옛일이고, 현재는 그러려니 지내고 있다.
『모험? 도전?』
워낙 처절하게 당했었기에 그럴 엄두가 안 났다.
죽여도 죽지 않는 괴수들에게 대항했다가 ‘소드 퀸’이라고 불렸던 인간 아내를 잃고, 용감한 아들들은 시체조차 남기지 못했다.
어디 그뿐이랴?
애지중지 키운 딸들의 끔찍한 죽음 앞에서는, 끝내 정신을 놓고 말았다. 이렇게 모든 걸 버리고 이계로 도망쳐올 정도로.
그런데 기껏 넘어온 세계에도 그 괴수들이 있는 것 아닌가!
대적?
아예 시도할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이렇게 마나가 희박해서야….’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마법은 물론이고 무공도 거의 무용지물. 거의 평범한 인간이나 다름없는 처지로 전락했다. 그러니 싸워볼 용기가 나겠는가?
이렇게 사막 한복판에서 아내들과 은둔한 채 살아갈 뿐.
심지어 이조차도 자유의지가 아니었다. 이 ‘사막을 지배하는 정령사’의 허락이 있었기에 지금 같은 삶이라도 유지되는 중이다.
단, 여기도 조건이 있었다. 제물이라고 해도 좋으리라.
“또 아들을 생각한 것이오?”
“아니에요. 아무것도.”
“흠….”
그 무지막지한 괴수를 길들이는 능력이 있는 마녀(魔女)들이 다스리는 나라. 그곳으로 아들들을 ‘공물’로 보냈다.
귀를 감추고 평범한 인간 행세를 하며, 그녀들의 비위를 맞추는 광대로 전락했다. 듣기로는 호위기사 같은 걸 하고 있다나?
정말로 그런지는 확인할 방도가 없었다.
아무튼, 어미에게서 아들을 떼어놓은 건 ‘남편’으로서 대단히 실격이었다. 그래서 부부관계도 더는 떨어질 수 없는 사이가 됐지만….
오늘은 좀 아니었다.
비단, 한 아내뿐 아니라 전부!
“그보다, 슬슬 결계를 풀고 바깥과 교류하는 게 어떤가요?”
“...정말 괜찮은 것이오?”
“네.”
레인은 더욱 이상하다고 느꼈다.
폐쇄적인 생활은 자신보다 그녀들이 더 원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엘프 아내들의 만류만 아니었으면 이곳을 박차고 원주민의 도시로 떠나버린 ‘인간 아내’들처럼 그도 어떤 식으로든 행동에 옮겼으리라.
그랬는데 이게 무슨 일일까?
한 명이야 ‘마법의 날’처럼 갑작스러운 심경변화가 있을 수 있다지만, 전부가 그러길 바라는 건 아무래도 정상처럼 보이지 않았다.
밤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소외된 것 같은, 혼자만 따돌림당하는 것 같다.
‘도대체 뭔 마법이 있었던 거야?!’
엘프는 한 번 몸을 준 남성에게 평생을 헌신한다.
그런 문화 때문에 아무리 사이가 틀어져도 금방 풀리고, 감추는 비밀은 더욱 없었다. 레인이 감추면 감췄지, 아내들이 먼저 그랬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남편에게 순종적인 엘프 여성이니까.
엘프 남성은 이와 반대로 권위적이긴 하지만.
“딸들도 슬슬 시집보내야 하지 않겠어요?”
“강한 인간이 아니면 안 된다고….”
“가보면 있겠죠.”
“이 세계의 노예상인들이 노릴 거라고….”
“좋은 사람을 만날 수도 있어요.”
자신이 엘프 아내들을 설득할 때 썼던 말들을 되받으니 뭔가 배신당한 기분이었다.
이럴 거면 이곳에 처음 왔던 날에 했어야지!
그랬다면 ‘인간 아내’들이 바람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아아, 정말! 정말 뭐냐고!’
그랜드 소드마스터 할아비라도 알 수 없으리라.
그가 사용하는 힘의 원천인 ‘마나’가 희박한 지구에서는, 원래 능력의 1%가 고작이라 할 수 있는 일이 지극히 한정됐다.
하물며 ‘인간 여성’을 지배, 매혹하는 절대권능이라니?
마왕(魔王)에게 그런 사기적인 능력이 있었다면 레인은 진즉 정신 줄을 놓았을 것이다.
왜?
사랑하는 아내가 다른 남자에게 활짝 웃으며 이런저런 하는 꼴을 봐봐라, 그러고도 맨정신이 유지되나.
여기에 더해, 레인은 ‘뱀페스트’를 모른다.
“위험할 수 있소.”
어째서 나는 말리고 있는가?
레인 스스로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만약, 한무일이 이곳에 있었다면 간단명료하게 그 이유를 가르쳐줬으리라. 무력한 지구인들이 갖는 일반적인 마음을.
『겁먹었네.』
산과 바다를 가르는 힘을 이전처럼 팡팡 못 쓰는 레인은 평범한 인간보다 조금 나은 싸움꾼에 지나지 않았다.
그게 그의 자존심과 자긍심을 송두리째 빼앗아갔다.
물론, 처음부터 이런 나약한 심성을 갖게 된 건 아니다.
고향에서 괴수와 붙었다가 사경을 헤매고, 사랑하는 가족과 지인의 처참한 죽음과 고통을 막지 못한 악몽!
여기에 더해, 지구에서의 90년은 인간에게 너무나 길었다.
긴 수명만큼이나 변화와 감정 기폭이 적은 엘프에게도 90년은 짧지 않거늘, 마법과 무공으로 노화를 억제 중인 인간에게는 아주 긴 시간이었다.
“그럼…. 알겠소.”
늘 순종적인 아내들의 반격에 밀리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딸들도 ‘엄마 편’이었다.
그나마 ‘이집트 제국’으로 ‘아직’ 보내지 않은 소수의 ‘어린 아들’들만이 중립적인 태도를 고수 중이었다.
언젠가 밖으로 나가긴 해야 했다.
아들만 내보내더라도 딸들이 늘어남에 따라 식량이 점점 부족해진 까닭이다.
“잘 생각했어요, 여보.”
“시간은 많아요. 어쩌면 이곳 원주민들의 도움으로 고향을 탈환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엘프에게 우호적인 나라가 분명 있을 거예요.”
“딸들을 시집보낼 훌륭한 사내도….”
레인은 점점 미궁에 빠져드는 심정이었다.
하지만 알 길이 없었다.
이 세계에서 가장 위협적인 ‘전염병’이 한 번 훑고 지나갔음을. 가장 많은 인구수를 자랑하는 강대국(중국)조차 ‘24시간’ 만에 함락됐다는 사실을.
이젠 그러려니 체념할 뿐이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거기까지 보고 만족하며 떠나는 인형이 있었다.
‘잘됐네. 일이 잘 풀렸어.’
‘봤지? 이게 바로 내 위엄이다!’
‘수고했어.’
모든 작업을 마치고 들어간 ‘하렘의 왕’이 으스댔고, 한무일은 부정하지 않고 칭찬했다.
물론, 싸운다면 단번에 결판나리라.
일방적인 전투가 예상된다.
하지만 꼭 피를 봐야 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되도록 안 보는 편이 좋다는 것이 무일의 생각이다.
물론, 저들 ‘엘프’라는 종족은 ‘열성인자’로서 엄중한 혈통관리가 필요할 것 같다.
『계약 불가』
그건 대단히 치명적인 결함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여성으로 100% 타고날지라도 괴수의 마음에 들지 못한다면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게 현실.
미모는 성형수술과 영양보조식품으로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으니까. 그러니 저 환상적인 외모에 연연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저 엘프의 피가 인류에 퍼진다면….’
몇 세대만 지나면 계약자 숫자가 반 토막 나고 말 것이다.
그건 대단히 위협적이다. 진정한 의미로 ‘전염병’이라 칭할 수 있었다. 문제라면 저 ‘엘프’가 사냥꾼으로서는 상당히 매력적인 종족이란 점이다.
뛰어난 오감과 육체….
저기에 [예감]만 곁들어지면 완벽하다.
특히, 지구인은 선천적으로 전혀 쓸 수 없는 ‘마법’이 가능한 체질이란 점이 주목할 만하다.
이게 어떤 변수를 줄 것인가.
이집트는 그걸 예상하고 은밀하게 준비하고 있었다.
“그래서 엘프 남성을 받아들였겠지.”
대서양을 가로질러 한국으로 향하는 무일은 [예측]했다.
엘프 여성은 ‘순결을 준 남자에게 평생을 바친다.’는 귀찮은 설정 탓에 ‘엘프 측’에서 반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엘프 남성’은 다르다.
인간 여성과 관계를 갖는 족족 ‘혼혈’이 태어난다. 태어나기 전부터 ‘우수한 사냥꾼’으로 성장할 가능성을 내포한 혈통이.
당연하게도 썩 마음 내키는 건 아니었다. 종마도 아니고.
하지만 여자보다는 그래도 남자가 낫다는 게, 저 ‘레인’이란 녀석과 그의 아내들이 내린 결단이었으리라.
‘처절하네.’
무일은 혀를 차며 저들의 처지와 차원을 애도했다.
괴수가 여러 곳에서 민폐였구먼!
동질감을 느꼈다. 덤으로, 그 차원이 어떤 모습일지 대략 상상이 갔다. 아마, 도시에서 추방된 자들보다도 훨씬 최악의 몰골이리라.
어쩌면 진짜 원숭이 수준?
그렇게 된 원인은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이종족』
유인원(類人猿)이라고 해도 좋을까.
이종족 혼혈이 많을 수밖에 없는 그 차원에서는 ‘계약자’가 무척 적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계약 조건’을 깨닫기도 전에 인류문명 자체가 송두리째 무너졌으리라.
안타까웠다.
덤으로, 지구의 강대국들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할 수 있을 것 같다.
‘그쪽을 정복하라고 할 생각이냐?’
‘정복이 아니라 개척이지. 주인 없는 땅이니.’
덤으로 저 ‘엘프 동네’에도 ‘마력석’이란 특수자원이 존재하는 모양이다.
메리트는 충분하다고 본다.
다만, 차원을 넘는 존재에게 생긴다는 ‘회귀본능’이 관건이다. 인류에게 어느 정도 도움될지가 미지수.
아무튼, 그건 소위 강대국이라고 불리는 자들이 해결할 문제다.
조금 무책임한 감이 없잖아 있지만, 엘퍼러는 길을 제시해주는 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선택과 판단에 따른 책임은 스스로 져야 한다.
“흐응~. 선배가 외국에서 예쁜 계집애들을 주웠다는 거지? 소설 속에나 등장하던 ‘엘프’라는 촌년들을.”
“흠흠!”
“비싸게 굴면서 남편 등골까지 싹 다 빼먹는다는데 정말이야?”
“그, 글쎄…?”
이집트에서 귀환한 무일은 곧바로 선지혜의 추궁을 들었다.
한유일이 속에서 ‘너도 공처가냐?’ 같은 도발적인 언사를 했지만, 간단히 무시해줬다.
인류의 생존이 내 태도에 달렸다는 사명감!
미소녀이기만 하면 다 좋다는 흡혈귀에게 핀잔 들을 이유가 어디에도 없다.
“이집트에서 독점해왔다는 거네?”
“과연 어떨지….”
계약자를 포기하고 본격적으로 ‘엘프 사냥꾼’을 육성했다면?
그게 벌써 반백 년 전의 일이니, 모르긴 몰라도 정말 많은 숫자의 ‘하프 엘프’가 태어나고 진즉 성년이 됐을 것이다.
어떻게 이 중요한 걸 여태 모를 수 있었을까?
그건, 이집트의 단단한 방어 탓이다.
사막 위에 있는 이집트 수도 ‘카이로’는 9종 수호자 이즈헬의 철통 같은 모래벽으로 둘러싸여있다.
저걸 뚫으려면 등골 휘는 정도로도 부족하다.
무일도 자신 없을 정도니까.
폭풍의 정령, 엘로엘의 바람을 헤치는 거와 다르다. 이건 ‘모래’라는 물리력과 질량에 압도될 수 있다.
괜히 최강의 괴수로 불리는 게 아니다.
(...제가 알아낸 정보는 이 정도입니다.)
곧바로 괴수대응연맹에 연락을 취한 엘퍼러.
이집트에 왜 갔는지는 과감히 생략하고, 피라미드에서 발견한 ‘외계 생명체’에 대해 차근차근 설명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역시나 짙은 흥미를 보였다. 하지만 ‘소설’에서처럼 ‘순종적인 엘프 마누라 얻자!’라며 열광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실험의 연장선.
엘프의 몸에 뱀페스트를 심으면 어떤 ‘노블레스’가 나올 거냐는 주제였다.
(가칭 ‘엘프’가 저희 인간과 교배할 수 있으며, 그 유전자가 인류의 생존에 대단히 위협적이란 엘퍼러의 경고.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그렇습니까.)
얼마나 잘 이해했는지는 두고 볼 문제지만, 아주 못 미덥진 않았다.
선천적으로 계약자가 될 수 없는 유전자.
이건 사실이니까.
하렘의 왕, 한유일은 ‘상징’적인 의미의 전염병이었다면, 이건 진짜 생화학테러였다! 인류의 미래를 위협하는….
괴수에게서 매우 자유로워진 것처럼 보여도, 인류는 여전히 계약자와 수호자에게 극도로 의존하고 있다.
이 아슬아슬한 균형은 그들 덕분이다.
괴수대응연맹 맹주 ‘아몬 헤이젤’은 심각한 어조로 답했다.
(이집트는 이미 ‘오염’됐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 [51화-3] 이계의 피난민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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