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처럼-212화 (212/287)

< [51장-2] 이계의 피난민 >

맞는 말이다.

이집트까지 온 것만으로도 상당히 멋대로 돌아다닌 셈이다. 죽을죄를 지은 건 아니지만, 서로의 신뢰에 살짝 금이 가게 했다고 할 수 있다.

당장은 괜찮다.

프로사냥꾼 한무일의 머릿속에 없는 종족을 발견했다는 명분이 있으니까.

하지만 여기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간다면….

‘흡혈을 못 하게 막겠지! 쪼잔하게!’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한유일은 득도한 고승처럼 마음을 가다듬었다.

당장에라도 달려가서 외교를 겸한 진솔한 대화를 나눠보고 싶지만, 정찰하는 걸로 가락을 잡았다.

피라미드 안에 마을이라?

“저것도 건물이라고….”

원시 부족이 따로 없다.

피라미드 내부의 바위를 깎아서 만든 티가 확 났다. 여기저기 때 묻은 손길로 보아선, 이곳에 정착한 지 꽤 됐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 비좁은 곳에서 어떻게 자급자족할 수 있었던 걸까?

엘프는 채식주의자들뿐이라더니, 정말 풀만 먹고 산 모양이다. 인공태양을 만들고, 모래 아닌 흙은 구해다가 밭을 일궜다.

나름 형태를 갖춘 계단식 농사법까지….

뭐, 좋다. 하지만 여태 안 들킬 수 있었다는 건 조금 많이 의외였다.

‘...아아! 머리 아픈 건 딱 질색!’

쥐새끼처럼 숨어서 염탐하는 건 왕이 할 짓이 아니다!

한유일은 은밀하게 마을을 돌아다니며 ‘대화 상대’를 물색해봤다.

도시는 이상할 정도로 여성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그냥 높은 정도가 아니다. 지구인의 성 비율이 ‘7:3’으로 여성이 2배 많은 것보다도 훨씬 심했다.

이건 그냥 여자뿐인 마을이라고 보는 편이….

“침입자는?”

“못 찾았어요. 당신의 능력으로도 안 되나요?”

“알잖아. 여긴 마나(Mana)가 극도로 희박하다는 거….”

“마을을 옮겨야 하는 것 아닐까요.”

“괜찮아. 나를 믿어.”

거의 혼자이다시피 한 남자에게 수많은 여자가 달라붙어서 걱정을 얘기한다.

늘 저 위치에 있던 한유일은 타인의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남자가 희희낙락하는 걸 잠자코 지켜보려니 진짜 짜증 난다….

나는 저렇지 않았어!

그렇게 자기 위로를 날린 한유일은 그들에게서 시선을 돌려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계속 엿들어봐야 영양가 있는 얘기뿐일 것 같았으니까.

경험으로 잘 안다.

<하렘의 왕. 슬슬 돌아가는 편이 낫지 않을까.>

<벌써?>

<숙주가 깨어나려 하고 있어.>

너무 빠르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이 피라미드 안에서 보낸 시간이 은근히 빠르게 흘러간 것이다. 딱히 흥미로운 건 없었지만, 새로운 장소를 구경한다는 자체가 흥미 요소.

아쉬움을 뒤로 하고 밖으로 향하려 했다.

한데, 문제가 생겼다.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있었던 출구가 사라지고 없었던 것!

‘막아버렸잖아!’

대단히 좋지 않다.

남은 방법은 강행돌파뿐. 하지만 그러면 소란이 발생한다. 특히, 미소녀와 싸우는 건 한유일로서는 극구 피하고 싶은 상황이었다.

어쩌지…?

달리 생각나는 방법이 없었다.

이대로 있더라도 들키지 않을 자신 있지만, 이대로 고립되면 곧 숙주가 깨어난다.

눈을 뜨고 얼마나 기가 막혀 할까!

<히히히! 망했네~, 망했어~.>

<...마법으로 해결책 좀 찾아봐.>

<몸을 감춰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라고, 하렘의 왕. 그리고 흐음…. 앞으로 10분 이내에 깨어나겠는데. 여기서.>

<아직 이른데 어째서…?>

<밖이 시끄러우면 예정보다 일찍 깨는 법이지, 이히히.>

아무래도….

일만 잔뜩 벌여놓고 몸을 넘겨줘야 할 것 같았다.

당분간은 조용히 지내야지.

한유일답지 않게 약한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대로 아무것도 못 해보고 들어가기는 억울했다. 뭐라도 하나 성과를 내고 싶었다.

이래서이랬다는….

미소녀와 놀려고 여기 온 게 아니란 걸 증명해야-!

‘됐어.’

‘이, 일어났어?!’

‘잠이 덜 깨서 잠자코 상황을 지켜보던 중이었다. 기절한 동안에 있었던 일들을 정리할 시간도 필요하고.’

‘...미안하게 됐다, 무일.’

‘별로. 그보다 여긴, 또 다른 차원에서 온 외계인인 모양이군.’

몸을 당장 넘겨받아도 되지만, 무일은 그렇지 않았다.

제삼자 관점에서 유심히 지켜보면 평소에는 볼 수 없던 사실이나 정보도 찾을 수 있으니까. 그리고 엘퍼러는 꽤 많은 걸 알아냈다.

꼭 [예감] 덕분만이 아니다.

다양한 경험과 지식에서 우러난 [예측]의 결과!

‘무일. 그래서 뭘 알아냈는데?’

‘이들은 괴수의 침공으로 쫄딱 망해서 도망쳐온 거야, 이 지구로. 그 서세진이란 녀석이 온 차원하고는 정반대 이유로.’

그쪽은 너무 흥해서 침략해온 거라면, 이들은 고향에서 쫓겨난 경우였다.

한유일은 예쁜 엘프 품평하기 바빠서 많은 부분을 놓쳤지만, 한무일은 그렇지 않았다. 이 피라미드 내부의 단편적인 정보만으로 많은 걸 유추했다.

‘그런 게 가능하냐?’

‘프로사냥꾼이라면 주위환경을 빠르게 숙지하는 건 필수지. 상대의 인상착의만 보고 어떤 상황에 부닥쳤는지도 알아야 하고.’

한유일은 피난민 차림이라고 했지만, 저 옷은 이 피라미드 안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고립되어 생활했는지 알려주는 단편적인 증거.

알아낸 건 그뿐만이 아니다.

“90년 전에 왔다고…?”

괴수의 침공 시기는 엇비슷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봤을 때, 이 엘프들이 괴수의 침공에 밀려 멸족 직전에 몰리기까지 10년도 채 안 걸렸다는 뜻이다.

그날 이후부터 쭉 피라미드 안에서 생활.

외부와 대화를 시도할 법도 한데, 입구를 가리고 이 좁은 새장 같은 곳에서만 보냈다. 당연히 여분의 옷을 짤 여력이나 재료가 있을 턱이 없다.

‘쉿. 들키겠다.’

‘그건 너 때문이고.’

한무일이 깨어나면서 [업보]가 슬금슬금 기어오른 영향.

엘프들은 아직 눈치채지 못했지만, 괴수들은 그렇지 않다. 특히, 이 피라미드를 포함한 넓은 사막 영토를 가진 이즈헬은 순식간에 ‘다른 왕’의 존재를 느꼈다.

이 땅의 모래가 모두 이즈헬의 눈과 귀일지니….

‘그런데 이즐헬이 이 침입자들을 왜 가만 놔둔 걸까? 예뻐서?’

한유일도 별 뜻 없이 그냥 해본 소리였다.

저 엘프들 중 태반이 유부녀였으니까. 그것도 한 남자를 공유 중인….

괴수들이 좋아할 이유가 하등 없었다.

게다가 저들은 인간과 괴수 경계에 있는 종족이란 결론을 내렸다.

즉, 태어날 때부터 계약자가 될 수 없는 몸이다.

그 대신에 무조건 아름다운 외모를 갖고 세상에 나오니 그리 억울하진 않으리라.

‘...이집트에 물어보면 알겠지.’

‘한통속이라고?’

‘아마도. 어떤 거래가 오갔다고 보는 편이 더 설득력 있으려나….’

여자가 원래 많이 태어나는 종족이 아니라면, 이 부족한 남성 숫자가 답이 되어 주리라.

다행히 이즈헬은 조용했다.

이미 엘퍼러를 느꼈음에도 신중하게 관찰하고 있다.

『에쏘드』

정령의 천적!

이건 달걀로 바위 치기라는 걸 잘 아는 까닭이다.

덤벼봐야 개죽음이란 사실을.

한세리와 한유나가 근처에 없어서 그 위력은 많이 약하겠지만, 이즈헬이 그런 세세한 것까지는 알지 못했다.

아니, 약해졌다는 걸 알았더라도 [업보] 때문에 망설였으리라!

‘무일. 교대할까?’

‘...아니. 교대하면 들킬 거야. 강한 힘을 감지하도록 하는 마법 장치가 이 피라미드 내부 천장에 한가득해.’

전구처럼 생긴 인공태양뿐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마법의 언어가 새겨진 주문이 곳곳에 적혀있다.

한유일은 저것들의 의미를 알 수 없었지만, 졸지에 대마법사가 된 한무일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저건 고위괴수를 탐지하는 ‘마법진’이다.

한유일이 안 걸린 이유는 지극히 간단하다.

약해서.

폴리검까지 합치면 막강하지만, 무기는 따로 계산된다.

하지만 한무일은 그렇지 않다.

뱀페스트, 가더발트, 듀크마, 에쏘드….

이 전부가 그에게 빌붙어 사는 더부살이들이다. 그래서 능력 일부처럼 받아들여지며 강력한 힘을 발산한다.

덤으로, 수백 마리의 ‘늑대(울프남) 영혼’이 짜내는 마법도 무시할 수 없다.

‘무일.’

‘왜?’

‘저 여자 어때?’

한무일이 이것저것 더 알아보기 위해 관찰하는 동안, 한유일도 놀고만 있던 건 아니었다. 이곳에 사는 엘프 중에서 누가 가장 예쁜지 점수 매기는 중이었다.

정말 쓰잘머리 없어 보이지만….

어쩐지 저 여자는 설득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더 나아가 자신들에게 협조할 수도…?

당장 시급한 것은 외부와 통신을 연결하는 것이다.

전파가 안 잡히기 때문!

남편, 남친 걱정이라기보다는, 순전히 심심하다는 이유로 ‘최악최악의 9종 계약자’ 선지혜가 이집트에 선전포고할 수도 있다!

그러니 이곳에 오래 머물 순 없다.

‘아까 본 인간 남성 촌장과 엘프 여성 사이에 태어난 딸이군.’

‘그런 것도 알 수 있어…?’

‘관찰하면 다 나온다.’

이 마을에는 총 다섯 남자가 있는데, 엘프들의 대표를 맡은 ‘평범한 인간’을 제외한 모두의 귀가 뾰족했다.

하지만 순수한 엘프처럼 길지는 않았다.

혼혈(混血).

열성인자를 물려받은 거라면 대단히 안타깝지만, 어떻게 해줄 수 없는 문제였다. 사랑은 종족과 국경마저 초월한다고 누가 그랬던가. 음?

그런 가정사는 제쳐놓고...

상대를 골랐으니 이젠 행동으로 옮길 시간!

“아으읏…?!”

“꿀꺽.”

한유일은 썩 내치지 않았지만, 기습적으로 아까 ‘가장 예쁘다.’고 찍어둔 엘프의 목덜미에 송곳니를 박고 각인을 심었다.

은밀하게.

소란이 발생하면 나름 곤란하니까.

간신히 살린 목숨을 이런 답답한 곳에서 보낸다는 건 대단한 불행이다. 그리고 ‘서세진’을 떠올리면 적은 하나라도 적은 편이 좋다.

녀석의 아내가 얼마나 강한지 아직 불분명하니까.

그 초능력은 확실히 성가셨다. 덤으로 ‘공격대’라는 발언도 간과할 수 없다.

‘공격대라…. 이 지구에도 잠깐 있었는데….’

뛰어난 프로사냥꾼들을 규합해서 고위괴수 사냥을 시도한 것이다.

게임처럼.

탱커, 힐러, 딜러.

이렇게 셋으로 역할을 분담하고 싸워보기로 한 것이다.

당연하게도 대실패!

지구에 상륙한 괴수들에게는 ‘어그로(도발)’란 개념이 없었다. 그저 [업보]를 통해 객관적으로 가장 위협적인 적부터 제거한다.

또한….

초능력 같은 게 없는 사냥꾼에게 ‘힐러’는 무슨….

결국, 전부 각자의 역량으로 이리저리 회피하며 괴수를 상대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 마을에서 네가 가장 예뻐서 골랐으니 너무 낙담하지 마.”

“영광입니다, 주인님.”

흡혈 당한 엘프가 맨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공손히 답했다.

이게 일반적인 뱀페스트와 노예 사이의 관계.

진즉 이럴 것을, 이라고 한유일은 혀를 찼다. 분명 예쁘긴 한데 끌리진 않았다. 순수한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리라.

그렇다면 배려해줄 필요도 없다.

“너의 이름은?”

“세르네스 사우스엘븐. 남대륙 엘프를 다스리는 여왕이었습니다.”

“여왕? 그러면 아는 게 많겠네.”

“주인님께서 흡족해하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럼….”

충실한 노예가 된 그녀는 아는 모든 걸 실토했다.

부친은 ‘무림’이란 이계에서 넘어온 ‘그랜드 소드맛스터’고, 모친은 엘프 중에서 가장 고귀하다는 ‘하이엘푸’라는 것부터 시작해서 줄줄이.

부친이 너무 잘난 탓에 눈만 높아져서, 마음에 드는 신랑감을 여태 못 구했다는 불필요한 얘기까지 곁들였다.

그런 자잘한 업적이나 계보는 생략하고….

한유일은 가장 중요한 사안을 ‘세르네스 사우스엘븐’에게 질문했다.

어째서 지구로 넘어왔느냐고.

“제 고향에도 몬스터(monster)는 있었습니다. 또크, 또우거, 또롤, 또래곤…. 하지만 약 100년 전에 갑작스럽게 등장한 몬스터는 아예 차원이 달랐습니다.”

“그래서?”

“속수무책으로 밀린 저희는 모든 대륙을 빼앗기고 멸망 직전까지 몰렸습니다. 아니, 사실상 멸족했습니다.”

부친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세르네스 사우스엘븐의 모친을 포함한 세 여성만이 순수한 ‘엘프’고, 자신을 포함한 나머지는 전부 반쪽짜리라고 한다.

즉, 앞으로 엘프는 영영 ‘순혈(純血)’이 태어날 수 없다.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사멸할 종족이 된 셈이다.

‘꼭 그렇진 않은데….’

현대의학은 여자 혼자서 아이를 가질 수 있는 경지까지 발전했다.

눈에 차는 사내는 없지만, 아이는 갖고 싶은 ‘은퇴한 계약자’들이 종종 그 인공수정법을 사용하니까.

아무튼, 대략적인 상황은 잘 알았다.

이 피라미드 속 마을은 ‘이계의 절대자’가 자신의 가족들만 부랴부랴 챙겨서 고향을 탈출하고 세운 새로운 터전이었다.

이렇게 꽉 막힌 곳에서 잘도 살아왔다는 감탄사도 잠깐.

결론은?

“다스리던 백성들을 다 버리고 왔다는 거네.”

“부끄럽게도 그렇습니다.”

가족을 최우선으로 생각했다고 해서 비난할 순 없다.

그 또한 ‘정의(正意)’니까.

게다가 한무일이 아닌 한유일은, 남의 일에 분개할 만큼 오지랖 넓지 않았다. 하물며 그 희생자들이 미소녀가 아니라면 굴러다니는 돌멩이만도 못한 존재….

그래서 고개만 살짝 끄덕이며 그러려니 넘어갔다.

다만!

그런 선악(善惡)과 별개로 ‘흡혈귀 본능’이 발동됐다. 아끼고 보듬어줘야 할 백성(미소녀)은 아닌데 각인은 각인대로 먹히는 종족이라?

하렘의 왕은 씩 웃었다.

“가서 네 모친을 불러와라. 그리고 끝난 다음에는 언니, 여동생, 이모, 고모…. 자연스럽게 한 명씩, 조용히.”

“네. 다녀오겠습니다, 주인님.”

병법(兵法)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바로 ‘정치’라고.

‘나는 정치가의 소질이 있을지도…! 무일. 어떻게 생각해?’

‘...남자와 입씨름하고 싶다고?’

‘우엑! 상상해버렸다. 정치는 포기한다! 나는 현재로 만족하겠다.’

< [51장-2] 이계의 피난민 > 끝

ⓒ 파르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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