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처럼-209화 (209/287)

< [50화-3] 이계의 말썽꾼 >

알아들으라고 한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마법’은 위대했다.

손발처럼 자연스럽게 써진 ‘통역 마법’은 상대에게 그 의미를 정확히 전달했다. 당연히, 영혼석 안에서는 ‘앗! 따가워!’ 등등 엄살로 난리가 났고.

“말썽? 건방진 녀석일세.”

“마기나로크!”

“어…?!”

상대도 명백히 깔보는 어조로 대꾸했지만, 그 여유로움은 삽시간에 사라졌다.

몸에 두르고 있던 보호막을 뚫고 들어온 ‘빛’ 때문!

길게 볼 것 없이 쏘아진 ‘에쏘드 필살기’가 외계인을 관통하고 지나갔다. 먼저 공격해주길 기대했는데 말이 많아 보였으니까.

[반격]을 포기하고 선공을 취한 것이다.

“싸우는 재미가 없네.”

잠시 휴식에 들어간 한무일을 대신해서 나온 한유일이 쓰게 웃었다.

구멍 땜질하듯 불려 나왔지만, 이건 ‘추가 자유시간’이니 불평불만을 토로할 수 없다. 대신, 세 백성 중에서 누구와 놀지 고민했다.

최은설, 아이밍 리, 유라 솔리넬 인펠리아.

마지막은 요즘 쭉 반항기, 사춘기라서 논외로 치면 둘이 남는다. 분명 오늘도 이 둘은 맛난 피를 제공해줄….

파앙-! 팡! 타당!

행복한 고민 중이던 한유일은 식겁하며 몸을 굴렀다.

황제 체면은….

답 없이 강한 숙주 녀석만 챙기면 된다!

자신은 백성들과 같은 레벨로 노는 서민적인 왕으로 만족한다. 어떻게든 살아남으면 된다는 게 흡혈귀의 신조이자 본능.

하지만 설마하니 또 이런 일이 터질 줄은 몰랐다.

그렇다고 해서 불만이 전혀 없진 않다. 자신은 싸움 전문이 아니니까. 물론, 싸우는 것도 좋아하지만 불리한 건 대단히 싫다.

누구나 그렇지 않을까?

만약, 옆에 나란히 있었으면 숙주의 멱살을 잡았을 말투로,

‘무일! 무일! 일 똑바로 처리 못 해?!’

‘어…. 성급했나. 아담처럼 피하는 놈이 여기 또 있네.’

‘졸지 말고 대책을 말해봐!’

‘흠. 죽지 말고 잘 싸워보도록. 후아암…!’

세상만사 다 귀찮다는 어조로 대꾸한 무일은 그대로 수면의 나락으로 빠졌다.

분명, 출력은 50% 내외.

허공에 쏘는 거라서 위력을 많이 줄이지 않았다. 그야말로 ‘일격필살’의 의도로 갈겼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런데!

용에 탄 채로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총질 중인 저 녀석은 뭐란 말인가!

물론, 완전히 멀쩡하진 않았다.

“비싼 마정석(魔晶石)이 다 날아갔잖아!”

옷에 달린 무수히 많은 수정구가 깨졌다.

한유일은, 한무일이 [예감]해놓은 정보를 통해서 저 많은 구슬이 ‘강력한 보호막’을 형성 중인 걸 깨달았다.

다만, 그 보호막을 뚫고 본체를 때렸음에도 견뎌낼 줄은 몰랐다.

‘뭐든지 소멸시킬 수 있다더니!’

‘...보호막이 그만큼 두꺼울 뿐만 아니라 저 녀석도 미지의 힘을 쓴다.’

‘말할 힘 있으면 당장 나와서 싸워라, 무일!’

‘...수고해. 이젠 한계.’

‘야! 야! 한계는 초월하기 위해 존재하는 거라며!’

‘......’

더는 아무리 불러도 반응이 없었다.

뒤편에서 멀뚱멀뚱 구경하는 추종자들도 속 터지긴 마찬가지였다. 좀 도우면 좋으련만, 같은 몸뚱이를 쓰더라도 한유일은 완전히 남남 취급이다.

내가 죽으면 너희가 환장하는 녀석도 같이 끝장이라고!

한유일이 아무리 설명해줘도 그녀들에게 ‘너는 너, 임은 임.’이다. 이젠 그러려니 하고 있지만, 상황은 더 좋지 않았다.

윈드걸스의 비주얼만 보자면….

“이 새끼! 뭐냐, 하늘에 궁전을 짓고 하렘을 차렸어?! 죽어라! 반드시 죽이겠어! 세상 모든 남자의 분노를 담아서!”

외계인은 크게 격분했다.

세상에 어찌 이런 악마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부들부들 떨며 활활 타오르는 질투를 가득 담아 방아쇠를 당기고 또 당겼다. 그러면서도 용케 ‘아리따운 구경꾼’들을 피해서 쏘는 것도 참 용했다.

다만, 당하는 한유일 입장에서는 좋지 못했다.

“망할! 나는 마법도 못 쓰는 거냐!”

진짜 분통 터졌다.

폴리검의 방패가 없었다면 진즉 ‘구멍 송송 치즈’로 변했으리라.

아니,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다.

하늘을 훨훨 날아다니는 적에게는 ‘흡혈귀’의 공격이 닿지 않았다. 도대체 누구냐! 전설 속의 흡혈귀를 박쥐에 비유하며 날개를 달아준 새끼가!

자신은 왕인데도 그런 편리한 기능일 일절 없다.

마늘, 태양, 십자가 등과 전혀 무관하다는 점에서는 불만 없지만.

“오빠! 제가 도울게요!”

“빠순이?! 안 돼! 가까이 오지 마! 위험해!”

전력에는 아예 포함되지 않지만, 이 웨딩풍에는 분명 ‘레이디 가브리엘’도 있었다.

그녀는 ‘왕’에게도 없는 날개를 활짝 펼친 채 날아오고 있었다.

아무 대책 없이 오는 건 아니었다.

과거에는 긴 손톱을 만들어서 싸우던 그녀도 최신무기의 도움을 받았다.

『크리피칼 하프』

약하디약한 ‘2종 괴수, 윈드걸스’ 무리의 전력을 ‘5종 무더기’ 수준으로 급상승시킨 최강최흉(最强最凶)의 산탄총.

적과 마찬가지로 양손에 하나씩 쥐는 무지막지한 괴력을 선보이는 그녀였다.

사람들은 총이 강하면 장땡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영화를 너무 많이 보신 거다.

강력한 총일수록 앞으로 쏘아지는 총알의 반발력, 반동의 부담이 더욱 커진다. 그리고 그건 전부 몸에 전달된다.

즉, 쌍총(雙銃)은 멋으로 아무나 쓰는 게 아니다.

어깨 탈골이 취미라면 말리지 않지만.

『쌍검(雙劍)은?』

이거라고 다를 건 없다.

소설과 전설에서는 ‘오오! 검이 깃털처럼 가볍다!’라며 환호성을 지르지만, 과학을 조금만 안다면 그게 얼마나 ‘판타지’ 같은 설정인지 알 수 있다.

쇠붙이가 날카롭거나 뾰족하려면 얇거나 가늘어야 한다. 좁은 표면적에 힘이 집중되어 충돌한 물체를 관통 혹은 절단하는 게 칼의 원리다.

그렇다면 마냥 얇으면 장땡?

이게 쉬웠다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명검은 ‘종이칼’이었으리라.

...명검(名劍), 신검(神劍), 보검(寶劍)이라면 얇고 가는 대신 튼튼해야 한다. 그리고 튼튼해지려면 분자밀도가 대단히 높아야 한다.

사족이 길었는데….

날이 잘 드는 좋은 검은 대단히 무겁다는 얘기다. 그러니 아무나 칼 두 자루를 들고 설칠 수 없다는 뜻.

하지만 이 외계인은….

“쌍총에 이어 쌍검이냐!”

이 얼마나 멋에 맛 든 놈이란 말인가!

그야 힘이 넘쳐나는 모양이지만, 저걸 다 주렁주렁 매달고 다니면 기동성에서 매우 불리하게 적용된다.

그래서 자기 발로 안 뛰려고 용을 타는 걸지도….

외계인 청년은 ‘크리피칼 하프’를 난사하며 접근을 시도한 레이디 가브리엘을 향해 칼을 뽑으며 응전했다.

그냥 검도 아니고 ‘마법검’이었다.

오른손에서는 붉은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외손에서는 푸른 냉기가 풀풀 흘러나온다.

“덤빈 적은 무조건 죽인다는 주의지만.”

“꺅!”

“예쁘니 봐준다.”

두 자루의 검을 능숙하게 움직여 레이디 가브리엘의 날개를 벤다. 그리고는 발로 그녀의 복부를 차며 웨딩풍 방향으로 다시 돌려보낸다.

아니, 그뿐만이 아니다.

빠르게 두 검을 다시 착검하고 총으로 교환한다.

탕! 탕!

연발로 쏘아진 총알이 레이디 가브리엘의 양 팔뚝과 종아리에 박혔다.

재생력이 엄청난 괴수에게?

통했다!

총알이 박힌 상처에서 이상한 화학작용이 발생하더니, 그대로 상처를 콘크리트로 메꾸듯 막아버렸다.

당연히 힘줄이나 뼈 등이 재생될 공간이 없었다.

웨딩풍 위에 쓰러진 그녀는 팔다리를 꼼짝달싹 못 하며 힘없이 고통을 호소했다.

‘녀석…! 괴수를 상대로 싸우는 방법을 알아…?’

한유일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세상에 저런 효과가 있는 총알이 있다고는 듣지 못했다. 개발을 시도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괴수의 재생력 앞에서는 무용지물이라 일찌감치 단념했다.

그런데 저 외계인의 총은 어떤 고차원적인 과학을 접목했는지 몰라도 결과적으로 그 방법에 성공했다!

저런 흉흉한 놈은, 한 방이라도 맞으면 위험하다.

특히, 지금처럼 일방적인 공수가 반복되면 언제가 패배할 수밖에 없다. 방어만 해서는 이길 수 없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총알이 남아도나?!”

“마정석의 마력으로 쏘는 마법총이니 일찌감치 포기해.”

“망할, 마법! 끽하면 만능이잖아!”

친절하게 대꾸해주는 여유까지 부리는 외계인을 보며 한유일은 이를 갈았다.

어떻게든 접근전을 시도해야 한다.

상대에게는 현대무기가 통하지 않는다는 걸, 레이디 가브리엘의 희생으로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죽었다면 숙주가 많이 화냈으리라.

아마, 정신력의 한계마저 초월해서 깨어났을지도.

‘방법을! 저 녀석에게 닿을 방법이 필요해!’

마기나로크를 맞고 수정구 다수가 파괴되며 출력이 많이 약해졌음에도 ‘크리피칼 하프’는 놈의 보호막을 뚫지 못했다.

남은 수단은 절대적인 절삭력을 보유한 칼로 베고 찌르는 것뿐.

한유일의 시야에 레이디 가브리엘이 들어왔다.

“그 힘! 어떻게 쓰는 거야?”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냥 됐어요….”

“큭! 전에도 그렇게 말했던 것 같은데 또 물어봐서 미안. 안 되겠다. 이판사판이다! 무일 녀석이 좋아하는 수단이지.”

한유일은 가브리엘을 품에 안고 웨딩풍 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윈드걸스는 ‘먹이도 없이 돌격해오는 아이를 피하는 비둘기 무리’처럼 좌우로 쫙 갈라지며 멀찌감치 피했다.

너무하는구먼!

한무일이 이러면 포용하려고 500마리가 전부 양손과 날개를 활짝 벌린 채 달려들었으리라.

그런 불만도 잠시.

한유일도 괴수에게는 취미 없었다.

“오빠…?”

“될지 알 수 없지만, 해봐야지.”

도움을 전혀 안 주는 윈드걸스지만, 그녀들이 다치는 걸 원치 않는 외계인이 멈칫하는 사이에 숨 돌릴 틈이 생겼다.

미녀는 어디서나 대우받는 세상!

그 덕분에 송곳니 박고 ‘흡혈’할 시간을 벌었다.

“아읏…!”

“꿀꺽…!”

신음과 삼키는 소리가 동시에 터졌다.

미소녀의 목덜미에 송곳니를 박고 피를 빨 때마다 행복한 표정을 짓던 한유일. 하지만 이 순간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지독하게 쓴 약을 삼키는 심정이라고 할까!

가브리엘의 피는 엄밀히 말해서 ‘여성의 피’보다는 ‘괴수의 피’에 가까웠던 탓이다.

하지만 원하던 바는 달성할 수 있었다.

그녀의 몸에 침투한 ‘각인’은 신체정보를 빠르게 훑고는 다시 원주인에게로 돌아와서 결과보고 했다.

억지로 밀어붙였는데….

이게 또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오빠?! 등에 그건…?”

“왕이라면 신하보다 늘 뛰어나야 하는 법.”

신하보다 모든 면에서 우수할 필요는 없다는 기존 생각(한무일 영향)을 손바닥 뒤집듯 바꿔버리는 한유일.

웨딩풍의 몸에 난 무수히 많음 구멍 중의 한 곳에 레이디 가브리엘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은 ‘흡혈귀 왕’은 등을 돌렸다.

상체를 가리고 있던 옷은 찢어진 지 오래였다.

‘그래! 이런 느낌이군! 쓴 약이 역시 몸에 잘 든다더니!’

덕분에 완벽히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레이디 가브리엘만 흡혈했다면 몰랐으리라.

하지만 한유일은 ‘반쪽짜리 백혈구울’ 황진천의 피도 빨았었다. 그리고 그렇게 모은 정보를 바탕으로 능력의 사용법을 끌어냈다.

어쩌면….

원래부터 있던 능력인데, 도중에 계승이 끊기면서 잊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처음 써보는데도 이렇게나 자연스럽지 않은가!

“오래 기다렸다, 개자식!”

한무일이 깨어나려면 앞으로 반나절은 있어야 한다.

아마, 그전에 웨딩풍이 버티지 못하리라.

하지만 이젠 괜찮다.

오른손에는 명검, 왼손에는 방패. 등에는 두 쌍의 거대한 날개.

그렇다, 날개! 날개가 생겼다!

심지어 피부도 갑질로 변하면서, 갑옷을 입은 것처럼 보였다.

그래도 천사는 아니다. 등의 날개가 새하얗고 깃털이 달렸다면 ‘신의 사도(使徒)’ 혹은 ‘하늘의 전사(戰士)’로 오인했겠지만….

고대의 흡혈귀가 이러할까?

지금, 한유일을 본다면 인류의 선조들은 거짓말한 게 아니었다.

두둑! 두둑!

변화는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폴리검의 2단계!

칼날에서 톱니가 튀어나오며 더욱 커졌다.

“아! 여자가 왜 이리 많은지 의심스러웠는데, 역시! 마왕이었구나!”

한유일이 아님에도 통역마법은 유효한 걸까?

뭔 말인지 알아들을 수 있어서 좋았지만, 썩 좋은 감상평은 아니었다.

인상을 팍 쓴 한유일이 대꾸하며 비상(飛上)했다.

“하렘의 왕이다. 똑똑히 새겨들어라, 공처가.”

“네, 네 녀석이 어떻게 그걸?!”

“가출하는 유부남들의 사유는 다 거기서 거기라더라, 숙주가.”

“잠깐! 내가 결혼한 걸 어찌…?!”

“거울 안 보고 사냐? 인생경험이 풍부한 얼굴이네, 라고 또 숙주가.”

< [50화-3] 이계의 말썽꾼 > 끝

ⓒ 파르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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