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화-4] 진격의 늑대 >
그러니 차분히 기다린다.
[반격]의 묘미는 상대의 강력한 공격을 받아치는 것에 있으니까.
사람들은 슬슬 ‘카르 4세’였던 한무일을 잊고 있지만, 여전히 그의 최대 무기는 몸에 두른 괴수들이 아닌 사냥꾼의 기술이다.
나머지는 보조하듯 능력을 ‘업(up)’ 해주는 것뿐.
아직은 [반격]해야 할 만큼 그럴싸한 공격이 안 들어오고 있다. 한 방에 상황을 뒤집어버리고 단숨에 ‘세계의 황제’에 오를 추진력.
엘퍼러는 전황 모니터에서 시선을 거뒀다.
적어도 늑대는 여기에 해당하기는커녕 발밑에도 못 도달했다.
“자…. 그러면 우리는 마저 하던 얘기를 할까.”
완전히 위축된 듀크마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계약자 ‘실바니아 하이로드’의 육신을 강탈한 대마법사는 상대의 강함에 전율했다. 만약, 괴수로 100% 각성한 상태였다면 [업보]로 진즉 깨달았겠지만.
반쯤 인간의 경계에 있는 현재는 긴가민가했었다.
하지만 그것도 방금까지 그랬다는 의미.
사람이 직접 보고 들은 정보를 신뢰하듯 그건 괴수도 마찬가지였다.
“위대하고 강력하신 황제 폐하. 이 늙은이에게 자비를 베푸신다면 최대한 그 숭고한 뜻에 맞추겠나이다.”
“그래? 다른 몸으로 옮겨.”
“영혼석이 약한 현재로써는 무리입니다.”
딸랑 한 명으로는 기적의 마법은 쓸 수 없다.
영혼이 망가질 정도로 혹사하면 어찌어찌 될지도 모르지만, 이 황제는 ‘실바니아 하이로드’가 고통받는 걸 원치 않는다.
그러니 현재로써는 육체를 공유하는 게 최선.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듀크마는 그 배분에 대해 생각했다.
‘욕심 없이 반반. 완전히 차지하는 건 무리겠지.’
하지만 엘퍼러는 그 반반조차도 원치 않았다.
게다가 ‘마법’은 듀크마의 전유물이 아니다.
모든 마법은 아니더라도 요술 방면으로 뛰어난 ‘다미호’ 무리가 그의 밑에 있다. 구미호의 위시한 그녀들이라면 뭔가 방법이 있으리라.
“있사옵니다.”
“역시!”
“저 늙은이가 협조적으로만 나온다면.”
늑대들을 ‘군단’으로 쓸어버린 구미호가 듀크마를 힐끔 쳐다보며 말했다.
고대부터 영혼과 연관이 많았던 요술이라 그런 걸까.
그녀에게는 실바니아 하이로드의 아름다운 껍데기가 아닌 내면에 기생 중인 대마법사가 보이는 모양이다.
구미로 왈.
영혼을 옮길 몸뚱이만 준비되면 언제든 가능하단다.
“젊고 싱싱한…. 이 또한 폐하 뜻대로 하소서!”
아무 몸이나 갈아타기 싫다는 의사를 밝히려던 듀크마가 찌그러졌다.
인상 팍 쓴 무일은 빠르게 결단 내렸다.
녀석의 취향을 최대한 맞춰준다.
단, 살아있는 사람은 아니다. 구할 수도 없고 그럴 생각도 없다. 어찌 멀쩡한 사람을 꼭두각시로 만든단 말인가!
범죄자, 사형수라면 또 얘기가 다르겠지만.
그중에 ‘처녀’라고 할 여인은 현재 친위대 양성으로 동난 상태였다.
“꼭 산 사람 중에서 찾을 필요는 없지.”
사요나락이 살려낸 사람의 몸을 쓰기로 했다. 물론, 그 영혼은 성불시켜주고.
이번 울프남 대란으로 가장 큰 피해를 받은 건 남성이지만, 정신적인 피해까지 합치면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야말로 성폭력 그 자체!
엘퍼러가 조기에 진압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피해는 어마어마했다. 벌써 늑대의 씨를 잉태한 여자들도 부지기수였다.
유일한 방법은 끔찍한 낙태뿐….
하지만 그녀들 중에는 ‘자결’을 택하는 부류도 있었다.
소중한 자궁에 괴수의 성기가 들어왔고 씨를 뿌렸다는 사실을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죽은 미녀는 좀….”
시체에 기생하면 자연적으로 사요나락의 영향을 받게 된다.
듀크마로서는 당연히 들어줄 수 없었다.
그건 꼭두각시로 있는 현재와 다를 게 없는 까닭이다. 몸은 좀 자유로워지겠지만, 마음은 복종해야 하는 주종관계.
개체가 ‘남성형 괴수’인 이 듀크마는 그걸 원치 않았다.
엘퍼러에게 적대적이지 않은 것만 해도 용하다고 할 수 있다. 아니, 이건 여성의 몸에 들어가면서 호르몬, 페로몬 등의 영향을 받은 탓이리라.
‘남자인데 여자 몸을 원한다…?’
딱 변태다.
그 시선을 느낀 걸까.
듀크마는 바로 변명했다.
“저희는 양성입니다. 굳이 말하자면 영혼석이 본체라고 할 수 있지요. 아늑히 먼 과거의 위대한 마법으로 ‘영혼의 감옥’이 창조됐으니, 그게 바로 저희입니다.”
죄인의 힘을 뽑아낸다는 취지로 창조된 생명체.
하지만 창조주의 사후, 그 용도는 ‘처녀 수집’으로 변질했다. 하지만 무고한 사람은 집어넣을 수 없는 ‘감옥’인 탓에 계약이 생겼다.
그 원리는, 계약 불이행.
이럴 시에 ‘죄’가 성립되며 영혼석에 가둘 수 있다.
영원히.
이 작은 보석이 완전히 파괴되기 전까지.
『죄?』
그 판단 기준이 무척 모호했다.
듀크마가 죽으면서 ‘계약’이 깨진 건데, 그 죄를 무고한 계약자 실바니아 하이로드가 덤터기 쓴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역시, 그 ‘계약’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봐야 한다.
계약서가 존재한다면 실비가 무조건 불리한 내용뿐인 사기!
나름….
듀크마도 정당성이 있다고 생각했던 마음이 깡그리 사라졌다. 대마법사가 아닌 사기꾼. 그리고 사람을 가두는 휴대용(?) 교도소처럼 보였다.
“보석에 성별은 무의미하단 거군.”
“뭐…. 그렇게 해석하셔도 무방합니다.”
이왕 치마면 다홍치마라고 했던가.
듀크마는 아름다운 몸을 갖길 원했다. 계속 저자세였던 녀석도 이때만큼은 ‘실바니아 하이로드’의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다는 뉘앙스로 완강하게 버텼다.
영혼석이 교도소라면.
몸뚱이는 실외장식이라고 할까.
“산 사람 중에는 안 돼.”
“저도 목숨이 저당 잡힌 상황은 받아들이기 무리입니다.”
“...기다려봐.”
무일은 여기저기 연락을 취하기 위해 시계를 조작했다.
한국에는 ‘처녀 범죄자’가 없지만 다른 나라라면?
하지만 곧 전화를 포기했다.
듀크마가 원하는 기준치의 미모라면, 그 어떤 범죄자라도 ‘재활용’했을 테니까. 감방에 가맘히 그 미모를 썩혀두진 않으리라.
한국만 봐도 알 수 있다.
강남구에서 쿠데타를 일으켰던 계약자들은 근래에 ‘엘퍼러 아이’를 출산하고, 수유(授乳)와 산후조리에 들어갔다.
즉, 처녀는 100% 찾을 수 없다.
‘다른 방법 없나.’
엘퍼러가 부탁하면, 없는 ‘아름다운 처녀 죄인’도 만들어서 바칠 나라가 분명 있을 것이다. 아니, 수두룩하다.
하지만 그건 옳지 않다.
죄인이든 아니든 멀쩡한 숫처녀의 육체를 강탈한다니?
계약은 아닌 까닭에 실바니아 하이로드처럼 영혼석에 영혼이 갇히지는 않고 성불하겠지만, 절대로 그게 옳다고는 할 수 없다.
그때였다.
이 문제로 한참 골머리를 앓는데,
꿈틀꿈틀….
허리에 두르고 있던 ‘2종 괴수, 가더발트’가 움직임을 보였다.
늘 꿈쩍 않던 녀석이 갑자기 왜…?
팬티로 변해서 꼼지락거릴 때가 아니면 죽은 듯이 있던 장비형 괴수. 그런데 명백한 자율행동을 시작했다.
평양에서 그의 몸에 달라붙었을 때처럼.
이게 무슨 일일까?
또 옷이 갈기갈기 찢기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물론, 여기서는 누드 쇼를 해도 공영방송 탈 일이...
손목시계 ‘아메리카 드림워치’ 때문에 장담할 수 없었다.
노골적으로 자리 잡은 벌레 카메라 ‘모짜리나 바글버글’도 마찬가지. 오늘도 벌레들은 명당을 놓고 치열한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아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아무런 전조도 없이 갑자기 왜?
엘퍼러는 듀크마 문제를 잠시 제쳐놓고 가더발트에 집중했다.
스물스물….
가터벨트 끈처럼 생겼고, 그 위치도 앞에 둘, 뒤에 둘로 똑같은 4개의 촉수가 일제히 엘퍼러 몸을 타며 이동을 계시했다.
과격하게 옷을 찢으려는 시도는 없었다.
목포에서 들어오는 막대한 세금을 처바른 덕분에 튼튼하기도 했지만, 가더발트의 목적은 ‘습격’이 아니었다.
느긋하게 옷 사이로 빠져나온 촉수는 듀크마에게 접근했다.
정확히는 이마의 보석으로.
“뭐, 뭐냐…?!”
무일보다 조금 늦게 이변을 깨달은 듀크마가 깜짝 놀라며 뒷걸음쳤다.
물론, 마음만 그렇다는 얘기고 몸은 여전히 꼼짝달싹 못 하는 상황이었다. 엘퍼러가 허락한 부위는 입과 눈뿐인 탓이다.
이게 무슨 일일까?
명당을 놓고 ‘미니사이즈 우주전쟁’을 벌이던 모짜리나 바글버글. 각국의 괴수대응본부 정보과 능력을 대변하던 기계 벌레들도 잠시 휴전에 들어갔다.
이건 또 무슨 괴사란 말인가!
모니터를 주시하던 강대국 대표 혹은 대리인들은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부릅뜨며 모니터에 머리를 처박았다.
세상에 또 이런 일이!?
퐁.
영국산 절세미녀의 이마에 박혀 있던 보석이 빠졌다!
영혼석.
듀크마의 본체가 가더발트의 손아귀(?)가 들어갔다.
억지로 뜯어내면 실바니아 하이로드가 죽는다는 경고(구미호도 인정했다.)가 무색할 정도로 간단히.
변화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허리에서 죽어도 안 떨어지던 가더발트가 대이동을 시작했다!
목적지는 숙주의 머리.
보석을 납치(?)한 촉수가 선객으로 있었다.
“어, 어, 어…?!”
평양 때처럼 무일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피부에 착 달라붙어서 이동하는 가더발트를 무슨 수로 저지한단 말인가!
손버릇 나쁜 ‘속옷 괴수’가 실바니아 하이로드의 이마에 박힌 영혼석을 강탈해올 때는 경악하기 바빠서 한 박자 늦고 말았고.
현 상황을 쉽게 풀이하면 이랬다.
『가더발트 + 듀크마』
엘퍼러의 이마에 영혼석이 박히고, 그 겉면을 가더발트 촉수가 단단히 동여매듯 감쌌다. 그리고 가더발트 본체는 듀크마 본체로 스며들었다.
그 형태는 마치,
『왕관(王冠)』
금테가 없는 탓에 가까이서 보면 아니란 걸 알 수 있다.
하지만 실바니아 하이로드의 이마에 박혀있을 때하고는 확연히 다른 영롱한 빛을 내는 영혼석은 아름다움을 넘어 몽환적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값진 보석이 있다면 이것 아닐까!
겉보기에는 그런데….
그 영혼석 안에서는 ‘영혼’의 소란으로 난리가 났다.
<꺄아?! 어?! 기사님?!>
<...재미난 곳으로 들어왔네. 그리고 난 무일이 아니라 유일.>
한무일과 똑같이 생긴 미청년이 영혼석에 나타났다.
몸을 공유 중이니 당연한 걸까?
늘 시야와 감각을 공유할 뿐, 이렇게 따로 육체가 구성된 적은 없었던 한유일은 살짝 놀라면서도 벌써,
‘오오! 자유공간 확보! 덤으로 미소녀 세트!’
...라며 기뻐했다.
그렇다. 미소녀 세트.
미소녀는 실바니아 하이로드 하나만 있는 게 아니었다.
그녀 뒤편에서 기습적으로 등장한 인물은….
<우히히! 진짜 여자 가슴이야! 여자 가슴! 이 부드러운 감촉, 온기, 탄력! 아아, 내 정체성은 아직 살아있었어!>
<어머?!>
음흉한 아저씨 같은 표정을 짓는 미녀가 있었다.
미친 몸매는 딱 봐도 정령.
유리처럼 빛을 반사하거나 투과하며 반짝이는 머리카락이 특이했다. 얼굴은 성격이 유감스럽다고밖에 할 수 없을 만큼 단아했고….
전부 알몸인데 그녀 혼자만 가터벨트와 스타킹을 착용하고 있었다.
그래서 딱 보는 순간 알 수밖에 없었다.
영국의 왕녀를 성희롱 중인 저 여자가 ‘가더발트의 영혼’이라고.
<어, 어떻게 이런 일이…?>
외부인은 하나가 아니었다.
실바니아 하이로드와 판박인 여인이었다. 차이라면 머리카락 색. 눈처럼 새하얀 백발인 그녀와 달리 순금으로 뽑은 실 같은 금발이었다.
그녀는 누구인가?
듀크마.
방금까지 계약자의 몸을 강탈하고 지배해온 대마법사.
어째서인지 양성인 듀크마에게 뚜렷한 ‘영혼의 실체’가 생기고 자신의 육체라고도 할 수 있는 영혼석에 갇히고 말았다.
혼란스러워하는 ‘금발의 대마법사’에게 ‘속옷 아가씨’가 친절하게 답해줬다.
나쁜 손버릇도 함께 발동하며,
<히히히! 오늘부터 이 ‘선남선녀 수용소’를 총괄할 ‘프롤로드 에필로드’라고 해. 저 밖에서는 가더발트라고 불렸어.>
전방에는, 현실 세계가 유리창 너머처럼 선명하게 투과되어 비쳤다.
무일의 이마에서 보는 광경이리라.
그 뒤편은?
영혼석 내부가 변하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없던 밋밋한 공간이 다채로워지고, 백발과 금발의 두 미녀의 손목과 발목에는 죄수처럼 쇠고랑이 채워졌다.
무죄 선고를 받았던 대마법사를 놀리듯, 프롤로드 에필로드가 계약자 실바니아 하이로드와 수호자 듀크마를 공동책임으로 묶어버린 것이다.
예외는 한유일뿐.
<에…. 나는 손님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