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화-5] 가면의 공주 >
영국을 좀먹던 테러리스트 ‘셜록 2세’도 잡아냈다.
그런데 슈퍼-메두사는 5백에 달하는 윈드걸스의 [예지]가 동원된 수색에도 불구하고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찾아낼 방법이 없다는 게 맞을 것이다.
남은 수단은 몽타주를 일일이 대조해보는 무식한 정면돌파뿐. 하지만 영국에서 그 방법을 안 해봤을 리 없다.
‘이렇게 탁 막혀보기도 또 오랜만인걸….’
‘환자를 보고 역추적은?’
웬일로 한유일이 사냥꾼 같은 말을 했다.
무일과 기억을 공유하니 당연한 거겠지만, 이런 적극적인 태도는, 슈퍼-메두사가 ‘인간 미소녀’일지도 모른다는 기대 때문이리라.
역추적이라?
물론, 사냥꾼의 [예감]은 한 번 찍은 ‘사냥감’을 지구 반대편까지 추적할 수 있다. 하지만 그 터무니없는 능력도 ‘사냥감’을 정확히 알아야 가능하다.
뭔지 알아야 쫓을 것 아닌가.
“...슈퍼-메두사가 다시 움직이면 그때 대응토록 하지요.”
“흠. 알겠습니다.”
예방할 수 있다면 하고 싶었지만, 당장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미리 통보, 예고한 일정대로, 실바니아 하이로드 왕녀만 데려가기로 했다.
슈퍼-메두사 때문에 불경기인 영국에서는 무언가 해주길 바라는 눈치면서도 먼저 굽히고 들어올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래서 평행선.
엘퍼러가 영국을 떠나는 순간까지 무난하게 흘러갔다.
‘왕태자 태도가 영…. 정치인 같네.’
여왕은 불명예 은퇴를 앞둔 팀장 같은 분위기였다. 그녀의 잘못은, 그녀의 엄마(전 여왕)보다 국가운영을 잘해내지 못했다는 것.
나름 억울할 것이다. 에쏘드 계약자로서 사냥꾼과 정치인들의 대변인이었던 왕자, 8종 계약자로서 영국 계약자의 대표면서 국민의 사랑을 받던 왕녀.
여왕은 그 둘의 관계를 조율하며 이끈 업적이란 게 있다.
하지만 ‘셜록 2세’란 사이코패스를 만들고, 슈퍼-메두사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잘못이 너무 컸다.
끝으로….
은근히 밀어주던 왕녀가 주저앉는 바람에, 여왕의 노고가 전부 물거품 됐다.
왕위는 민심이 저조한 카이서스 하이로드에게로.
“해독할 방법은? 아니, 마법이라고 해야 하나?”
“쉽진 않지만, 못할 것도 아니옵니다.”
유리아에게 걸린 봉인에 비하면 만만하다고 답하는 구미호. 이쪽도 순결을 떼기만 하면 풀린다는 점에서 쉽다면 쉬운 걸지도?
실바니아 하이로드에게 걸린 ‘주술’을 풀기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
생명을 죽이긴 쉬워도 살리긴 어려운 것처럼.
구미호는 추종자들의 보조까지 받아가며 왕녀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걸려?”
“금방 끝나옵니다.”
영원한 잠에 빠진 것처럼 가만히 있던 실바니아 하이로드가 천천히 깨어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어리둥절해 하다가 차츰 빠르게 현 상황을 이해한다.
대단히 침착한데?
살짝 감탄한 무일이었지만, 겉으로 내색하진 않았다.
선배가 여자에게 칭찬해주면 ‘엘퍼러가 나를 좋아하나?’라고, 그녀들이 착각한다는 선지혜의 충고를 따른 것이다.
“음. 많이 늦었지만, 실바니아 하이로드가 인사드려요.”
“괜찮습니다. 잠시 후에 경위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설명을 끝까지 경청한 영국 왕녀는 잠시 망연자실해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금방 현실에 수긍하며 적응하려는 눈치였다.
왕위계승권 박탈.
엘퍼러의 시녀(비서).
귀국할 필요 없음.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이랬다.
그보다, 실바니아 하이로드는 자신이 잠시 잠든 사이에 너무나 달라진 대한민국 목포와 부산을 보며 더욱 놀라워했다.
“여긴 별천지(別天地)네요.”
“제2 고향처럼 편하게 지내십시오. 그리고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왕녀님.”
“시녀에게 왕녀님이라니요. 친근하게 ‘실비’라고 불러주세요. 기사님.”
“전 기사입니까. 뭐, 나쁘지 않군요.”
“말씀도 편하게 해주세요. 저는 이젠 왕녀도 계약자도 아니니까요.”
“...그럴까. 잘 부탁해, 실비.”
하지만 실바니아 하이로드의 말은 잘못됐다.
왕녀가 아닌 건 맞지만, 계약자는 글쎄?
‘어디, 괜찮은 괴수 없나?’
남성형 괴수만 아니면 어찌어찌 될 것 같다!
하지만 여전히 7종 이상은 무리. 그럴 바에는 기존에 데리고 있는 8종 추종자 중에서 고르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다.
계약자가 하는 일?
중국의 쑨우쿵은 복제 숫자가 늘어나는 놀라운 효과를 보였고, 문팽이는 선지혜를 만나면서 더욱 지배력이 향상됐다.
하지만 그건 정말 특수한 경우다.
보통은 수호자의 보호를 받으며 미모 관리에만 힘쓰면 된다.
아! 또 하나 역할이 있긴 하군.
“임께서 말씀하신다면…. 그런데 꼭 해야 해요?”
“...아니. 됐어.”
남아메리카 대륙에 ‘초대형 당근’ 삽화를 그려 넣은 도끼토끼.
어떤 의미로 진짜 대작(大作)이었다.
살짝 왈가닥 기운이 넘실거리는 그녀에게, 전직 왕녀의 침착한 성격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찌르뱅팽은 입술을 삐죽 내밀며 싫다는 분위기가 풍겼다.
얼마 전까지 8종 계약자였던 미모인데….
저렇게 대놓고 별로라고 퇴짜 놓을 줄은 몰랐다.
“저를 위해 애쓰시지 않으셔도 돼요.”
“실비. 그게 무슨 뜻이야?”
이 집에서 추종자들처럼 놀고먹겠다는 걸까?
그건 절대로 안 될 말이다.
계약자로서 가능성이 있다면 살리는 게 도리리라. 그걸 죽이고 딴 일을 하겠다면 차라리 유부녀가 돼주는 편이 인류에 도움이 된다.
인류를 위해 그러라고 강요할 생각은 없지만.
“잘은 모르겠지만, 몸을 빼앗길 것 같아요.”
“빼앗겨? 누구에게?”
“죽은 제 수호자 듀크마. 마법의 공작은 아직 살아있어요. 엄밀히 따지면 육신은 죽고 정신만 남은 상태로 제 몸에 깃들어 있지요.”
영국 왕녀는 일반적인 계약과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그게 ‘8종 괴수, 듀크마’라는 괴수의 원래 성향일 터였다.
‘영혼을 담보로 마법을 빌렸다…?’
왕녀는 듀크마와 계약했다.
듀크마는 계약자에게 ‘마법’을 빌려주고, 실바니아 하이로드는 수호자에게 ‘영혼’을 바쳤다.
그녀의 순백 머리카락은 그 계약의 증표.
어릴 적에는 금색이었던 그녀의 머리카락이 새하얗게 변한 이유가 이 때문이다. 몸과 혼 이전에 머리카락부터 준 것이다.
머리카락에는 사람의 혼이 깃들어있다고들 하니까.
맛보기, 보증금, 선수금이라고 해도 좋다.
『영혼석』
대마법사 듀크마의 이마에는 마법의 촉매로 쓰이는 보석이 박혀 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무수히 많은 ‘영혼’이 깃들어있다.
처음부터 그랬을까?
아니다.
계약을 통해 정당한 방식으로 하나하나 수집한 것이다.
아름다운 처녀들의 영혼을.
“하지만 그 듀크마가 슈퍼-메두사와 전투 중에 죽었어요. 물리적인 현상으로 그렇다는 얘기고, 정확히 말하면 육체를 잃은 것뿐이죠.”
“그래서 계약자의 몸을 노린다?”
“네. 원래는 제가 사고사 혹은 자연사로 죽은 뒤에 벌어졌을 미래예요. 단지 차이가 있다면 계약자인 제가 아닌 수호자의 육신이 죽었다는 정도.”
실바니아 하이로드는 깨어나고도 마음 편히 있을 수 없었다.
겨우 하루 만에 이 사실을 깨달았다.
어떻게?
평범한 인간인 그녀의 이마에 생겨나기 시작한 ‘빈 영혼석’이 그 증거였다. 듀크마의 죽음으로 계약이 파기된 줄 알았는데 오산이었다.
곧, 그녀의 영혼은 저 보석에 갇히고 빈 육신에는 듀크마가 자리하게 될 것이다.
“구해냈더니 더 큰 문제에 봉착했군….”
무일은 난감함을 감추지 못했다.
사요나락 ‘엔츄 베르테’의 권속, 듀크마(스스로 이름을 버렸다.)의 추가설명을 들은 이후였을 것이다.
계약은 신성하다.
그렇기에 외부에서 어떤 짓을 해도 깰 수 없다.
실바니아 하이로드의 생사가 불분명할 때는 잠자코 있었지만, 이렇게 부활한 이상, 듀크마가 그녀의 육신을 빼앗기 위해 본격적으로 움직일 거란 뜻이다.
‘완전 바보네….’
무일은 체념의 빛이 역력한 실비를 물끄러미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어릴 적에, 카이서스 하이로드의 술수로 일찌감치 정략혼으로 인생과 미래가 결정되었을 그녀가 여태 처녀일 수 있었던 건 ‘듀크마’ 덕분이었다.
하지만 그렇기 위해 영혼을 넘기다니?
모든 마법을 다룰 수 있다는 대마법사 듀크마.
하지만 ‘모든 마법’을 쓰려면 감수해야 하는 장애가 대단히 많다. 그리고 그걸 대처하기 위한 촉매가 이마에 박힌 보석이다.
『영혼의 감옥』
이 안에 갇힌 영혼이 대신 고통받는 걸로 ‘모든 마법’은 성사된다.
즉, 실바니아 하이로드는 곧 영원에 가까운 고통을 받으며 저 좁은 보석 안에서 살게 된다. 자신의 육신이 멋대로 움직이는 걸 지켜보며.
그건 얼마나 끔찍한 삶일까?
절대 어리다고 할 수 없는 실바니아 하이로드가 이 사실을 모를 리 없다. 그런데도 저 담담한 낯짝은 뭐란 말인가!
무일은 순수하게 화가 치밀었다.
“실비! 살아날 방법을 찾아야 할 것 아니야!”
“없어요. 들으셨잖아요. 계약은 신성해요.”
그녀도 이제 막 알았다.
듀크마의 죽음으로 해방된 줄 알았는데 이건 방아쇠에 지나지 않았다.
예상했던 것보다 한참 일찍 당겨진 잔혹한 운명.
‘...그렇다면 내가 새로운 계약 하나를 짜겠다!’
계약은 절대적이고 신성하다고?
잘나신 대마법사는 똑똑히 알아야 할 것이다. 덤으로 전설에 나오는 악마(惡魔)도.
이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편법과 강수가 존재한다는 것을.
“누가 이기나 해보자!”
“기, 기사님…?”
“죽기 전에 해주는 이별의 키스 같은 거 아니야.”
얼굴을 사르르 붉히며 입술을 살짝 내밀고 눈을 감은 실비.
하지만 무일은 쓰게 웃으며 그녀의 입술 대신 목덜미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유일. 왕의 체면이 있으면 밀리지 마라.’
‘자, 잠깐! 이건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계약이라고 계약!’
‘그렇다면 본인이 깨도록 만들어야지.’
무일은 실바니아 하이로드의 피를 빨고 ‘뱀페스트 각인’을 심었다. 뭔가 부족한 감이 없잖아 있지만, 그래도 왕의 흡혈이다.
끽해야 5종인 일반적인 흡혈귀와 차별된 지고지순한 9종!
아직 사람일 때라면 분명 통하리라.
덤으로 ‘붉은 피’가 단번에 ‘은색 피’로 변하진 않을 것이다.
뱀페스트가 ‘여성의 피’를 빨아야 하는 것처럼 듀크마도 ‘완전한 괴수’가 되려면 무언가 조건이 필요할 게 분명.
하지만 무일은 그렇도록 놔둘 생각이 없다.
“실비. 내가 명령할 때까지 모든 행동을 멈춰. 영원히.”
“......”
“자, 대마법사 씨. 실비를 보석에 가두면 너도 영원히 그 몸에서 꼼짝달싹 못 하게 되는 거야. 그것도 기저귀를 차고 평생.”
행동이 저지된다면 똥오줌 가리는 것도 불가능하다.
젊은 여성이 감수하기에는 대단히 수치스럽고 굴욕적인 일이지만, 그 계약을 깨려면 다른 방법이 없었다.
조금이라도 빈틈을 보이면 비집고 들어오리라!
그게 괴수다.
생존이 걸린 문제에서만 머리가 비상하게 돌아가는….
‘...무일.’
‘왜?’
‘일방적으로 계약을 깨란다고 대마법사가 깨줄까? 그게 자신의 생명줄이란 걸 알 텐데.’
‘거래나 협상 같은 걸 제안해보자는 거야? 너 때처럼?’
‘그게 맞겠지.’
‘...옳은 말이야.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그래?’
아직은 견딜 만할 것이다.
거래란?
상대가 불리한 상황에서 해야 얻을 것도 많아지는 법이다.
그러니 지금은 아니다.
엘퍼러가 절대 ‘실바니아 하이로드’의 목숨을 포기하지 않는다고 단언하는 현재로써는 원하는 방향으로 ‘새로운 계약’을 주도할 수 없다.
그 시기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다 큰 처자가 정말로 기저귀에 볼일을 본지 닷새쯤 지난 날이었을 것이다.
기어코 완성된 듀크마의 영혼석에 갇힌 ‘영혼’이 자신의 육신을 제삼자 입장에서 쳐다보며 참담한 표정을 지었다.
‘조금만 참아, 실비.’
슈퍼-메두사의 독에 중독됐을 때하고는 달랐다.
실바니아 하이로드의 육신은 빠르게 여위고 아름다움도 퇴색되기 시작했다. 생리현상을 전부 겪는 진짜 식물인간이 된 탓이다.
골골 앓는 병약한 미소녀?
전부 가짜다!
휠체어나 침대에서 온종일 꼼짝 않고 있는데, 그 환상적인 몸매가 가당키나 한 일인가! 정말로 숨만 쉬면서 가능할 만큼 미녀의 길은 쉽지 않다.
엘퍼러는 빠르게 추해져 가는 괴수에게 말을 걸었다.
“대마법사 씨. 대화하고 싶으면 눈꺼풀을 두 번 깜빡여. 눈만 자유롭게 해줄게.”
“깜빡깜빡!”
“세상에 유일무이한 못생긴 괴수로 남고 심진 않겠지? 자, 이젠 말해봐.”
완전히 굳어버린 것 같던 입술이 벌어졌다.
살짝 망설이던 듀크마 왈.
서리가 몰아칠 만큼 한 맺힌 미성이었다.
“...비열한 왕이여! 원하는 바를 말하라!”
“열흘 뒤에 다시….”
“세상에 다시 없을 위대한 왕이시여! 이 늙은이가 잠시 실성했었나 보옵니다. 저까짓 거를 위해 열흘씩이나 할애하실 필요는 없나이다.”
< [48화-5] 가면의 공주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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