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처럼-200화 (200/287)

< [48화-4] 가면의 공주 >

말 같지 않은 소리다.

사냥꾼의 [예감]이 적중률 높은 건 맞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예감]이 아닌 무일의 사적인 생각일 뿐이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혼잣말이라고 할까.

제국 문제는 잠시 접어두고, 오늘은 ‘영국’을 다녀올 계획이었다.

원래는 좀 더 일찍 갔었어야 했는데, 포르 3세가 정말로 ‘부활’되면서 이 또한 나름의 혁명으로 받아들여진 까닭이다.

죽은 에쏘스트의 부활!

생명보험(?) 덕분에 게임처럼 현실이 만만해졌다.

‘정말로 될 줄이야.’

사요나락이 지구에 단 하나뿐이라 희소가치마저 대단히 높았다.

선지혜가 이걸로 또 뭔가를 구상 중인 것 같은데….

정치는 신경 끄자.

각설하고, 영국 가는 길에 포르 3세를 브라헨티나에 내려줬다.

에쏘드까지 세트로 묶어서 보냈음에도 국민들의 시선은 싸늘한 편이었다. 명성과 신뢰가 높았을수록 그 배신감도 크다고 할까.

어째서 영웅이 배신하게 됐는지 한 번쯤 생각해보면 좋으련만.

사람들은 그 정도로 친절하지 않았다.

“뭐…. 자업자득인가.”

“전 가휜이 불쌍하다고 생각해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유치원 선생님을 사양하고 엘퍼러 곁에 달라붙은 여인.

레이디 가브리엘이 은근슬쩍 포르 3세를 옹호했다.

남아메리카 브라헨티나 국민들에게 진즉 실망했던 그녀로서는 남 얘기처럼 안 들렸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이 또한 맞는 얘기다.

조만간 그녀도 아이밍 리와 함께 위로공연을 다닐 예정인 까닭!

헐벗고 다니는 중인 아이밍 리는 중국에서 시켰고, 레이디 가브리엘의 경우는 엘퍼러가 눈에 힘을 줘가며 강권(强勸)했다.

개과천선했으니 봐달라고 오리발 내밀고 끝낼 수 없으니까.

무언가 성의를 보여야 했다.

“저 인간보다 더 불쌍한 사람이 많으니 너무 걱정하진 마.”

“예를 들면요?”

“우리가 지금 만나러 가는 영국 왕녀. 실바니아 하이로드.”

그녀는 뭘 잘못했다고 식물인간이 됐단 말인가?

잘못하거나 실수하긴커녕 나라를 위해 싸우다가 그렇게 됐다. 그런데 나라에서는 이젠 식물인간이 된 그녀의 몸뚱이마저 이용하려 한다.

아주 골수까지 빨아먹으려는구먼!

무일은 자신의 생일파티에도 와줬던 아가씨를 구해주기로 했다. 이성(異性)적인 호감이나 노림수가 있어서는 아니다.

안 그래도 여자가 너무 많다.

다다익선(多多益善)?

웨딩풍에는 현재, 미녀 승객만 550명(마리)쯤 한다.

조금씩 개성은 있지만, 그 숫자가 이 정도로 불어나니 이젠 다 똑같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보고 고자라니…!’

정말 오랜만에 주치의 오돈혁 선생님의 말씀을 빌리자면 그랬다.

아름다운 여자의 알몸이 돌처럼 보인다면….

그건 고자의 조짐, 건강에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는 뜻이란다.

늦기 전에, 대한민국 ‘정자 은행’에 추가로 정자(精子)를 기증하라는 권고까지 듣고 말았다. 농담이 아닌 진짜 진지한 어조로.

“웰컴 투 런던, 엘퍼러. 웰컴!”

입으로는 환영한다고 했지만, 영국 왕태자의 표정은 딱딱했다.

카이서스 하이로드.

이미 왕위계승은 기정사실이 됐지만, 영국 국민의 지지도는 썩 좋지 않았다. 역시, 슈퍼-메두사의 비극은 영국에 큰 상처였던 모양.

그는 특수체질로 태어나서 한탄 중인 ‘에쏘드 계약자’이기도 했다.

“반갑습니다, 하이로드 왕태자.”

“환영인사가 미미한 점 양해 부탁합니다, 엘퍼러. 지난 피해가 아직 복구되지 않았고…. 도착 10분 전에 알려주셔서 준비할 틈이 없었습니다.”

“괜찮습니다.”

본인은 괜찮다지만, 영국 왕실은 안 괜찮았다!

대처할 시간이 없었다.

전시 분위기라서 파티 같은 건 꿈도 못 꾸지만, 중국처럼 뭔가 얻어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엘퍼러가 기습적으로 방문했다.

원정대 얘기를 꺼내더라도 어떻게 협상해야 좋을지 하나도 생각해두지 않았다. 아니, 미계약자를 모으는 것조차 여의치 않았다.

한 일이라고는?

엘퍼러와 황태자가 나란히 걷는 장면을 뉴스에 내보내는 정도.

하지만 이조차도 몇 번을 망설였다.

만약, 엘퍼러가 그냥 와서 그냥 돌아가 버리면 ‘영국 왕실’은 무능력 인증 이전에 개망신이기 때문이다.

“곧 식사를 준비하겠습니다.”

“마음만 받겠습니다. 기습할 예정이라서.”

웨딩풍의 단점은 은밀함이 떨어진다는 점이다.

그 커다란 덩치에도 불구하고 레이더에 잡히지 않지만, 목포에 주차(?) 중인지 그 여부 정도는 현대 기술력으로도 파악할 수 있다.

게다가 이미 영국 수도 런던 상공에 두둥실 떠 있다.

만약, 슈퍼-메두사가 인근에 숨어있다면 이 광경을 절대 놓치지 않았으리라.

‘부탁할게.’

엘퍼러의 지시를 받은 요정군단이 일제히 하늘로 날아올랐다.

등에 투명한 곤충 날개 2쌍을 단 전라의 소녀들이 거대한 하늘도시에서 빠져나오는 광경은 아름답다는 표현으로도 한참 부족했다.

아니, 아름답다기보다는 ‘환상의 동화’ 한 장면.

그녀들은 런던을 중심으로 넓게 산개하며 슈퍼-메두사의 흔적을 찾기 시작했다.

【윈드걸스 / 2종 소형】

전투력은 기대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들의 연계와 머릿수를 믿는다.

슈퍼-메두사를 발견할 확률이 1%만 되도 합치면 500%가 넘는다. 다만, 이미 자취를 감춘 시일이 꽤 지났으니 완전히 다른 곳으로 갔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엘퍼러는 그렇지 않다고 확신했다.

‘인간을 상대로 장난치고 있어.’

계약자들을 죽이지 않고 마비시켰다는 게 그 증거.

슈퍼-메두사는 머리카락을 쏘아서 죽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실바니아 하이로드를 포함한 계약자들의 목숨을 붙여뒀다.

살아도 산 게 아닌 비참한 상태로.

“엘퍼러. 레이더로도 못 잡았습니다.”

“영국의 기술력을 못 믿는 건 아니지만, 때로는 원시적인 방법도 필요합니다. 하물며 슈퍼-메두사는 ‘인간형 괴수’라서 찾기가 더욱 요원합니다.”

“흐음….”

카이서스 하이로드는 무언가 말하려다가 입술을 도로 다물었다.

인간형 괴수.

그게 얼마나 찾기 까다로운지는 물어볼 필요도 없다.

현재, 영국 곳곳을 날아다니는 윈드걸스도 레이더에 잡히지 않기는 매한가지였다. 도시에서 쫓아낸 추방자하고 구분이 안 된다.

그녀들이 하늘이 아닌 육지를 걸었다면 어려웠으리라.

『슈퍼-메두사는?』

인간에게 없는 날개나 뿔 같은 특징조차 없다.

사요나락처럼 겉보기에는 완벽한 인간.

그나마 전에는 ‘긴 머리카락’으로 분간이 됐었지만, 지난 전투에서 카이서스 하이로드의 분투로 싹둑 잘라낼 수 있었다.

머리카락이 다시 길어지지 않았다면?

외모를 바꾸는 변용술(變容術) 같은 걸 익혔다면?

‘이미 도시에 숨어들었을 수도.’

수색은 소득 없이 끝났다.

아니, 겉보기에만 그렇고 실제로는 얻은 게 있었다.

소 대신 닭이랄까?

『셜록 2세』

런던의 망령이란 악명으로 영국에서 떠들썩한 사이코패스.

윈드걸스가 날아가는 장관은 ‘남자라면’ 꼭 직접 자신의 두 눈에 담고 싶어진다. 그리고 상대를 본다는 건, 자신도 외부로 노출된다는 뜻이다.

겉보기에는 날개 달린 미소녀.

하지만 그 내면은 인간의 한계에서 완전히 벗어난 괴수다. 고층빌딩 위에서 몇몇이 자신을 쳐다보는지 정도는 다 알 수 있다.

물론, 윈드걸스도 ‘털 없는 원숭이’들의 얼굴은 전혀 구분하지 못한다.

하지만 ‘순수한 원숭이’가 아니라면?

『노블레스』

신출귀몰한 셜록 2세는 흡혈귀였다.

백지 위의 ‘흑점’처럼 눈에 띌 수밖에 없다.

본인은 나름 조심한다고 이것저것 애썼겠지만, 수치심을 모르는 알몸의 아가씨들이 적나라한 춤사위로 하늘을 노닐면?

어느샌가 넋 놓고 보게 되어 있다.

‘저기로군.’

영국 런던의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상관없다.

중요한 건, 윈드걸스가 수상쩍은 뱀페스트를 발견했다는 것이다.

“무슨…?”

카이서스 하이로드는 질문하면서 무심코 하늘을 내다봤다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웨딩풍에서 붉은 빛줄기가 떨어졌다.

바늘로 콕 찌른 것처럼 도시 한복판에 떨어진 빛은 금방 사그라졌다. 그 와중에 도끼토끼가 고개를 도리도리했다면 대참사가 벌어졌으리라!

하지만 깔끔했다.

그리고 ‘셜록 2세’는 증발했다.

표현 그대로 뼛조각 하나 안 남기고 소각(燒却)됐다.

영국을 오랫동안 못살게 괴롭힌 흉악한 사이코패스치고는 허망한 최후였다.

“흠. 슈퍼-메두사가 생각보다 신중한 괴수인 것 같습니다.”

엘퍼러의 [업보]를 본다면 투쟁심은커녕 반항심조차 안 생긴다.

당사자만 그 사실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을 뿐.

주위에서 아무리 설명해줘도 마음에 와 닿지 않는다. 거울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는 감상하고는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그래도 엘퍼러는 실망하지 않았다.

슈퍼-메두사가 꼭꼭 숨어있다면 ‘떡밥’을 던져서 유인하면 그만.

『유라 솔리넬 인펠리아』

위험에 노출 시킬 필요는 없다.

이미 그녀는 웨딩풍에 탑승해있는 상태.

슈퍼-메두사가 지구로 넘어온 관광객이 아닌 ‘암살자’라면 무조건 이 기회를 노릴 것이다. 지금보다 좋은 기회는 앞으로 영영 없으리라.

...라고 기대했지만, 역시나 슈퍼-메두사는 낚이지 않았다.

엘퍼러의 [업보]는 이런 흔치 않은 기회조차 깔끔히 포기하게 만드는 위력과 설득력으로 충만했다!

무일은 정확히 12시간 동안 기다린 후에, 이 사실을 인정했다.

『12시간』

영국 런던 시민들은 이 12시간을 ‘마법의 시간’이라고 불렀다.

이 단어는 영국 국민들이 웃자고 한 괴담이 아니었다. 괴수대응본부에서 무심코 흘린 한마디가 도시에 유행처럼 퍼진 것이다.

마법의 시간.

영국 사냥꾼과 계약자들은 이 12시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필요가 없었다.

그야말로 매직(Magic)!

봉급을 올려달라고 생떼 부렸다는 의미가 아니다. 정말로 할 일이 없어서 12시간 동안 가만히 대기 타고 있었다.

【엘퍼러 / 10종 소형】

요정의 황제가 지배하는 하늘나라가 두둥실, 도시 위에 떠 있는 것만으로도 영국 런던은 일시적으로 안전지대가 됐다.

괴수들이 사방으로 도망치면서 서식지가 완전히 뒤집힐 테지만….

아직은 거기까지 내다보는 사람이 없었다.

“하이로드 왕태자. 왕녀를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편하신 뜻대로.”

괴수가 사방으로 도망치는…. 바다를 가른 ‘모세의 기적’ 같은 현상을 목격한 카이서스 하이로드는 이 12시간 만에 압도되고 말았다.

질투는?

같은 인간일 때나 하는 것이다.

신(神)을 상대로 질투하는 건 어리석다. 바람둥이가 ‘바람은 자유로워서 좋겠네.’라며 부러워하는 거나 다름없다.

‘흐음…. 전혀 환자 같지 않네.’

이걸 보존상태라고 해야 할까?

영국 의무대 침대에 뉘어져 있는 실바니아 하이로드 왕녀는 겉보기에 멀쩡했다. 방금까지 꽃밭을 산책하고 살짝 지친 것 같은 생동감의 여운이 감돈다고 할까.

물론, 외모보정도 있으리라.

백설공주가 관에 누워있는 모습을 보며 ‘죽었네.’라고 생각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실바니아 하이로드는 그런 미모의 여인이었다.

“그야말로, 마법에 걸린 공주 상태입니다.”

카이서스 하이로드가 여동생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왕태자 뒤편에는 어느샌가 영국의 에쏘드 ‘룬 엘리자베스’가 자리하고 있었다. 직함은 여전히 왕태자비로 되어있지만, 금실 좋은 부부관계는 아니다.

그건, 룬 엘리자베스의 불만스러운 표정만 봐도 알 수 있다.

용사가 권력을 쥐는 건 잘못이 아니다.

단!

마왕이든 괴물이든 물리치고 에필로그를 본 이후다.

하지만 카이서스 하이로드는 그런 과정을 생략하고 ‘정치’로 권력을 차지했다. 그것도 여동생을 몰락시키면서.

“마법이라면?”

“슈퍼-메두사의 독에 감염된 자는 세포가 멈춥니다.”

“의미 그대로 멈춘다는 거로군요.”

생명활동을 중단했다는 뜻이 아니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모든 생리작용이 정지됐다는 의미.

...마법이라?

슈퍼-메두사가 괴수란 증거는 없다. 머리카락을 자르긴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은색 피가 흐르는지 파악하기란 요원하다.

엘퍼러는 그녀가 ‘순수한 인간’일 가능성도 열어두기로 했다.

즉, 마녀.

마법을 부리는 여자.

‘정말로 그렇다면 이렇게 찾기 힘든 것도 수긍이 가지.’

< [48화-4] 가면의 공주 > 끝

ⓒ 파르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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