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화-3] 가면의 공주 >
“오늘도 역시 예쁘네.”
태초로 돌아간 유키나 미나미를 보며 무일은 중얼거렸다.
어째서 일본에서, ‘오니오프 계약자’가 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는지 알 수 있는 아름다움. 일본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여주인공 같은 자태다.
가녀린 팔다리에서 무지막지한 힘이 솟아날 것 같다고 할까…!
“이럴 때는 더 예뻐졌다고 하는 거야, 카레 짱.”
“흠. 그래.”
무일은 따지지 않기로 했다.
물론, 살짝 억울한 감이 없잖아 있지만.
선지혜에게 ‘더 예뻐졌네.’라고 말했다가 ‘전에는 별로였다는 거네.’라는 쓴소리로 돌아왔던 경험이 있다.
괴수처럼….
여자도 각각 대처를 달리해야 하는군.
참 피곤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몸은 충실하게 유키 짱의 곳곳을 누비는 프로사냥꾼이었다.
“너무 능숙해!”
“...사냥꾼은 몸 쓰는 기술을 빨리 배우니까.”
“흐읏! 카레 짱, 바보!”
몸속 깊숙이 파고든 말뚝에 콧소리로 반응하면서도 하고 싶은 말은 다 했다.
사냥꾼의 학습능력을 묻는 게 아니다.
게임으로 치면, 전에 만났을 때는 기술(!) 레벨이 ‘3’이었는데, 다시 만난 오늘은 ‘10’으로 뻥튀기한 상황!
그 경험치(!)는 얼마나 많은 여자를 사냥(!)해서 얻은 걸까?
새언니 ‘선지혜’ 한 명으로는 어림도 없다.
“흠흠. 오늘은 이쯤 할까?”
“진짜 바보!”
그렇게 투닥거리면서도 할 거 다 한 후에 ‘현실’로 넘어왔다.
아이나미 산토.
수상한 건 둘째치고 대화가 필요한 시점이긴 했다. 이대로 9종 수호자 싸우잔드의 작태를 두고 볼 수만은 없는 까닭이다.
전쟁이 벌어지면 당연히 필승, 완승이다.
하지만 수호자를 잃은 일본은 누가 지켜준단 말인가?
‘해결할 일이 또 늘었군.’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귀찮거나 피곤하다는 건 아니지만, 엘퍼러가 바쁘다는 건 세계가 불안전하다는 뜻과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아마, 지구에서 모든 괴수가 사라지더라도 계속 바쁘리라.
그때는 ‘4차 세계대전’을 막는답시고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지 않을까?
괴수가 떠난 땅의 주인이 되겠다고 서로 물어뜯으면 필연적으로 전쟁이 벌어질 것이다.
“외출이 잦으시네요, 주인님.”
최은비의 ‘엄마’ 역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여인.
일단은 ‘노예 1호’라는 명패를 달고 있는 ‘페이 링’이 무일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러면서 슬쩍 가슴도 밀착해온다.
이 집(시청사)에서 가장 바쁜 여성을 꼽으라면 그녀일 것이다.
아이 돌보기가 어디 쉽던가?
무일도 처음에는 쉽게 생각했지만, 최은비가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180도 달라졌다! 딱히 말을 안 듣는 건 아닌데 오묘하달까.
“외출이라고 해도 하늘에 둥둥 떠 있는 것뿐인데, 뭘.”
거물이라고 할 테러리스트는 아직 못 잡았지만, 잔챙이는 위치추적도 쉬워서 도끼토끼나 발키지어로 간단히 쓸어버리는 중이다.
실력 좋은 노블레스?
발키지어의 ‘천사 날개’가 활짝 펼쳐지며 순백의 깃털이 공간을 장악하면 그걸로 상황 종료. 반항 한 번 못해보고 바짝 마른 미라가 돼버린다.
항복 권고 같은 건 일절 없다.
레이디 가브리엘, 아이밍 리 때하고는 확실히 다른 방침이었다.
『남자라서?』
노골적인 남녀차별을 하려던 의도는 아니다.
다만, 테러리스트로 전향한 노블레스의 만행이 용서할 수 없는 수준이었을 뿐. 그건 노블레스의 특징 탓도 있다.
괴수의 피 정화.
특수체질은 능력을 유지하려면 끊임없이 ‘여성의 피’를 공급받아야 한다. 하지만 방약무인한 테러리스트가 신사다운 협조를 구할 리 없었다.
납치, 감금, 강간, 고문….
남자가 여자에게 저지를 수 있는 모든 죄악은 다 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러니 재판 없이 단숨에 처단해주는 게 차라리 자비이리라.
“흐응. 저는 주민이 늘어나서 좋아요.”
테러리스트가 빠르게 줄어들면서 사람들의 이주(移住)도 활발해졌다.
쭉 비었던 목포의 집들이 빠르게 채워지면서 레저시설 등의 요구도 점차 늘어나는 추세다. 특히, 여자들을 위한 쇼핑센터가 시급했다!
남자들은….
훌륭한 망원경 하나만 있으면 끝이니 무시하자.
왜냐?
목포에서는 아리따운 인어(人魚)와 요정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그녀들은 인간에게 가까이 접근하진 않는 탓에 세밀하게 관찰(!)하려면 망원경이 필수.
남자의 자존심, 스포츠카?
목포에서만큼은 ‘망원경’이 대세고 진리다!
“도시가 좀 시끌벅적해지긴 했지.”
인구밀도가 낮은 도시치고는 대단히 활기찼다.
심리적 안정감 때문이 아닐까?
그 전경을 바라보며, 무일은 한 가지 ‘목표’가 생겼다. 괴수로부터 인류를 지켜낸다는 통상적인 바람에서 좀 더 구체화 됐다.
『위대한 제국을 세운다.』
꼭 영토점령을 할 필요는 없다.
미국만 하더라도 연합 형식으로 묶여있지 않던가.
무일의 목적은,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 구심점이 되어 인류의 방향성만 조율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생체실험의 피해자’를 줄일 수 있으리라.
괴수대응연맹과 비슷하다.
하지만 좀 더 실질적인 무력을 갖춰서 ‘옳지 않은 일은, 옳지 않다.’고 답할 힘이 있는 세력이 될 계획이다.
이름은?
『제국(帝國)』
사족이나 성씨를 붙이지 않고 그냥 ‘제국’이다.
고유명사가 될 생각이다.
이 지구 상에 유일한 제국!
엘퍼러는 뒤에서 인류를 보조해오던 역할을 뿌리치고 앞으로 나아가기로 했다. 전에는 그런 생각을 못 했지만, 최근에 바뀌었다.
율루.
포르 3세의 에쏘드.
그녀는 무일에게 이미 ‘황제’라고 했다.
그와 동시에 여전히 ‘용사’이기도 하다는 등의 주절주절 설명이 많았는데, 그 진실 여부는 엘퍼러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언제는 주변 시선에 신경 썼나?’
의도적으로 용사가 되려고 움직였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냥 하고 싶은 일을 했더니 그게 ‘용사의 길’이었을 뿐이고, 에쏘드가 달라붙었으며, 사냥꾼의 [예감]이 강해져서….
안 죽는 경지에 이르렀다.
이제,
또 한 번, 하고 싶은 일을 하기로 했다.
지금은 결정적인 계기를 조용히 기다리고 있을 뿐.
‘그냥 차지하면 된다! 도시의 50%가 내 편이다!’
한유일이 끼어들었다.
그냥 무력시위로 세계정복하자는 ‘괴수다운’ 의견이었다.
하지만 세상은 여자만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하물며 한유일이 말할 50%는 잘못된 생각이다. 계약자가 아닌 ‘평범한 여성’은 ‘백성 후보’가 아닌 탓이다.
즉, 효과가 미미하다.
흡혈해서 각인을 심기 전까지는 절대적인 호의를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틀린 말도 아니다.
세계의 모든 계약자가 ‘내 편!’이란 사실만으로도 세계전력 80%가 엘퍼러의 손아귀에 떨어진 셈이기 때문이다.
‘남자도 안고 가야지.’
‘우엑! 남자를 안을 바에 못생긴 암컷을 안겠다!’
‘그런 뜻이 아닌데….’
남성형 괴수들은 엘퍼러를 끔찍이 싫어하지만, 인간 남성들은 그렇지 않다. 물론, 정치인들은 웃는 얼굴 뒤로 욕하겠지만.
적어도 ‘사냥꾼 세계’에서 ‘카르발트’는 우상이고 신이었다.
이러면 세계전력 99%가 아군.
이미 끝난 싸움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이 세상은 ‘무력’만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국민의 지지를 끌어내지 못하면 ‘위대한 제국’은커녕 몽상으로, 폭군으로 끝나리라.
‘애국심이 밥 먹여주는 것도 아니잖아?’
‘그렇긴 한데, 완전히 무시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야, 유일.’
나라를 욕하면서도 나라가 위험해지면 목숨 거는 사람이 있다.
적을 것 같지만, 상상 이상으로 많다.
개망나니 같이 살던 인간도 ‘태어나고 자란 나라’가 사라진다고 하면, 갑자기 애국 투사로 돌변하기도 한다.
게다가 세상을 지배하는 체제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이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돈의 지배’에는 익숙하면서도, ‘인간의 지배’에는 거부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대단히 많다.
둘의 차이가 뭔데?
하지만 그 미묘한 말장난으로 세계는 약 400년째 굴러가고 있었다.
‘무일. 너도 돈 많잖아? 수컷들은 돈으로 지배해라.’
‘그러면 정치경제가 돼서 안 돼.’
유리한 장기를 버리고 굳이 힘든 싸움을 할 필요는 없다. 게다가 세상에는 정말 터무니없는 재벌이 많다. 벼락부자나 다름없는 무일이 끼어들 곳이 못 됐다.
엘퍼러가 내세울 건 무조건 무력!
모든 외적 요소를 밀어낼 만큼 압도적인 힘이다.
하지만 ‘힘’으로 통제하려고 하면 사람은 반발하게 되어있다. 그게 좋은 의도였든 아니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인권과 자유가 꼭 좋은 것만은 아니란 뜻이다.
‘그래서 어쩌자는 건데?’
‘때를 기다리고 있어. 명분이라고 할까.’
‘지배하겠다고 해도 군말 없이 따를 수밖에 없는 이유가 필요하다는 거냐?’
‘맞아. 그런 게 필요해.’
처음에는 치사한 방법도 생각했었다.
엘퍼러의 ‘제국’에 편입된 나라만 도와준다는 식으로.
선지혜가 제시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지만, 그건 한무일이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런 식으로 하면 좋은 소리 못 듣기 때문이다.
잘하고도 욕먹는다고 할까?
욕하면 ‘귀염둥이들, 발사!’를 외치면 된다는 선지혜의 반론도 당연히 기각됐다.
“으읏….”
한참을 머릿속으로 토론하던 때.
마치 그림자처럼 조용히 따라오던 외계인 ‘유리아’가 허벅지를 바짝 오므린 채 다리를 비비 꼬기 시작했다.
딱 봐도 ‘꽃을 꺾으러 가야 할 때’였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이런 민망한 사안은 알아서 해결해줬으면 좋겠지만, 온갖 마법으로 ‘영혼’이 봉인된 그녀는 능률적인 자기판단이 거의 불가능했다.
“저쪽 화장실로.”
다행이라면 세밀하게 지시를 안 내려도 된다는 정도?
하지만 영원히 저렇게 놔두는 것도 못할 짓이다.
‘마녀(魔女)라….’
지구에서는 계약자가 짱이라면, 외계 행성에서는 마법사가 최고란 모양이다.
마찬가지로 여자만 가능!
남자는 여기서나 저기서나 살기 팍팍하다는 현실에 눈물 찔끔….
그 행성에서 ‘남자는 근육, 여자는 마법.’의 축복을 받고 각자 태어난다고 한다.
어릴 적에는 남자가 강하지만, 나이를 먹고 경험과 지혜가 쌓이면 쌓일수록 여자가 압도적인 강세를 보인다.
그 구도는 ‘불로장생’의 등장으로 마침내 절정을 찍었다.
근육은 성장의 한계가 금방 오지만, 마법은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있던 탓이다.
남자는 축생보다 조금 나은 위치로 전락했다.
“봉인을 어떻게 풀지….”
솔직히, 9종 수호자 싸우잔드의 도발은 안중에 없다.
위협적으로 느껴져야 말이지!
선지혜가 ‘유라 솔리넬 인펠리아’를 눈엣가시처럼 여긴다는 게 더 심각한 문제다. 질투라고 할까? 무일이 일일이 챙겨주는 걸 대단히 못마땅해 하고 있었다.
링거 꽂아서 처박아두자는 게 ‘달팽이 여왕님’의 주장이다.
‘무일. 쉬운 방법을 알잖아.’
그렇다!
봉인된 당사자도 이미 알고 있는 방법.
전래동화 ‘백설공주’와 ‘잠자는 숲 속의 공주’에도 나왔었다. 조상님들의 지혜는 늘 우리와 함께하고 있었다.
『왕자의 키스!』
...입맞춤으로 정말 끝났을까?
현실은 현실답게 좀 더 구체적이고 잔혹한 법이다.
상식적으로 상상해보자.
아무도 없는 길가에서 ‘뺨을 때려도 깨어난 기미가 안 보이는 퀸카’를 발견했다. 그리고 자신은 ‘세상의 그 어떤 여자를 건드려도 무탈한 엄친아’다.
순백의 스포츠카에 태워서 가까운 병원으로….
과연 이럴까?
위험한 늑대가 우글거리는 길가에 쓰러진 미녀의 몸에 아무런 이상이 없는지부터 확인해보는 게, 사내대장부의 도리 아니겠는가!
“고대인들의 사고방식은 도통 이해할 수 없네.”
죽이고 싶을 만큼 싫으면 깔끔히 죽일 것이지 이게 무슨 장난이란 말인가.
순결이 깨지면 깨어나는 저주라니?
본인 의사가 전혀 반영되지 않았기 때문에 엄밀히 따지면 ‘강간’이라고 할 수 있다. 백설공주의 입술을 훔친 왕자도 따져보면 ‘성희롱’이고.
이 시대에 태어났으면 딱 사형감인데….
‘무일. 그래서 제국은?’
‘...기회가 되면.’
‘흥! 가만히 기다리며 잘도 건국하겠다.’
‘혹시 모르지. 정말로 마왕 같은 게 튀어나올지도…?’
등장하자마자 퇴장하지 않을 강자!
무대에 올라오자마자 픽! 하고 쓰러지면 인류가 위기의식을 느끼고 뭉칠 리 없잖은가?
그렇다고 지나치게 강하면 이건 또 이것 나름대로 문제였다.
즉, 오묘한 딜레마였다.
‘내가 아닌 너를 상대로 막상막하? 그런 놈이 있을까?’
‘차원이 둘뿐인 것도 아니잖아. 우리가 전혀 모르는 차원에서 굴러들어온 강력한 생물이 깽판 칠 수도 있어. 방심하면 안 돼.’
‘...무일.’
‘왜?’
‘네가 [예측]하면 꼭 그렇게 되더라.’
‘에이~, 설마~.’
< [48화-3] 가면의 공주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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