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처럼-198화 (198/287)

< [48화-2] 가면의 공주 >

제거하는 건 간단하다.

다만, 오니오프처럼 간단히 처리할 수 없다는 게 문제.

아무렇게나 돌아다니는 것처럼 보여도, 키바 카즈마는 늘 감시카메라가 있는 장소로만 움직인다.

게다가 몸에는 이것저것 많은 장비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다.

암살에 철저히 대비한….

아이나미 산토가 안 움직이더라도, 그의 목숨을 노리는 자들이 무척 많은 탓이다.

『국수주의자』

우리나라가 무조건 최고! 이유는 묻지 마! 그냥 세계 최고!

...이러는 자들.

모든 나라에 조금씩은 다 있지만, 일본은 그 성향이 좀 더 짙었다. 겉보기에는 애국심하고도 비슷하지만, 방식이 과격하고 극단적이다.

카즈마 부자(父子)가 아무리 사죄해도 듣질 않는다.

이들의 머릿속에는 ‘매국노’라는 인식과 ‘천벌’을 내려야 한다는 생각뿐.

“곤란하네….”

아이러니하게도, 키바 카즈마는 위협에 노출된 덕분에 안전해졌다.

그렇다고 가만 놔두는 것도 좋지 않다.

생선 가시.

이 세계의 기준으로도 ‘9종 계약자’인 그녀의 눈에는 참 별것도 아닌 ‘남자’지만, 그냥 거슬렸다. 목에 박힌 가시처럼 무언가 크게 한 건(?) 할 것 같다.

그러니 처리하기로 했다.

사냥꾼들이 [예감]을 맹신하는 것처럼, 아이나미 산토도 자신의 감을 신뢰했다.

‘우선은 우회하도록 할까.’

키바 카즈마를 죽이고 싶어하는 일본인들이 있다.

그렇다면 활용해주는 게 예의.

입으로만 ‘고문 후 사형!’을 외치는 국수주의자들을 부추기고 지원하면 된다. 이 지구라는 행성에서는 미녀의 행동이 무척 자유롭다.

알리바이를 만들기가 무척 쉽다.

왜?

계약자의 프라이버시는 소중하니까!

집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그 어떤 감시도 받지 않는다. 혹시라도 찍힌 ‘굴욕적인 사진’이 인터넷에 떠돌면 수호자가 그대로 폭주하기 때문이다.

다만,

“산토 양. 운동하실 시간입니다.”

“...호호!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나요?”

엘퍼러 빼면 무서울 게 없는 ‘아이나미 산토’였지만, 그런 그녀에게도 정말 상대하기 힘든 존재라는 게 있었다.

그녀의 주치의 겸 매니저.

벌써 35년째 ‘교토의 무녀’의 건강, 체질, 몸매 등의 전반적인 사항을 빠짐없이 관리해주는 인연 깊은 여인이다.

흠잡을 곳 없이 성실하고 아름답다.

원래 ‘몸 주인’의 기억을 흡수한 영향도 무시할 수 없겠지만, 객관적으로 봐도 ‘싫어할 수 없는 여자’다.

자신을 위해 최선을 다해주는데 어찌 싫어할 수 있을까!

‘이런 기분은 처음인데….’

자신을 낳은 왕비부터 친자매들까지 전부 경쟁자다.

믿을 거라고는 자신의 마법뿐.

그런데 이 매니저란 여자는 시녀보다도 자신을 생각한다. 다만, 너무 생각해줘서 행동에 제약을 부를 정도다.

그럼에도 뿌리치지 못하는 건 미련 때문일까.

“산토 양. 요즘, 힘든가요?”

“무, 무슨 말씀이세요?! 호호!”

“죽을 뻔한 이후부터 무언가에 쫓기는 것 같아서요. 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입니다. 혼자 끙끙거리지 말고 상담하세요. 저는 잔소리꾼이 아니잖아요?”

“...네.”

“하지만 지금은 잔소리해야겠습니다. 함께 러닝머신 위를 달리며 얘기해볼까요?”

“으아….”

겉보기에는 똑같이 가녀린 여자의 손에 아이나미 산토는 질질 끌려갔다.

사실은, 프로사냥꾼보다 이 매니저가 더 위험하다.

가장 오랫동안 곁에서 ‘교토의 무녀’를 지켜봤기 때문이다.

그러니 객관적으로나 주관적으로나 보신(保身)을 위해 최우선적으로 제거해야 할 여자.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이해자.

너무나 달라진 그녀의 ‘이상행동’을 의심하지 않고 이해한다.

죽음의 문턱을 넘은 영향….

정신질환보다는 전환점(轉換點)이란 식으로 해석한다.

“산토 양. 또 브래지어를 안 했나요?”

“까, 깜빡하고….”

“당신이 명계에 다녀오고부터 자연주의에 눈을 떴다는 건 이해합니다. 가슴도…. 쳐지지 않고 크기도 훌륭하니 필요 없긴 합니다.”

“역시 그렇죠?!”

지구인의 가장 큰 특이점을 꼽으라면 그녀는 주저 없이 ‘가슴가리개’를 들 것이다.

밑은 위생을 위한다고 치지만 위는 왜?

예쁜 얼굴을 가면으로 가리면 낭비이듯 훌륭한 가슴은 당당히 내놓는 게 당연하다. 그런데 이 행성은 보물처럼 꽁꽁 감추기 바쁘다.

아니, 이것도 이해한다.

‘불편해! 거슬려! 답답해!’

가장 좋은 원단에 MID 기술력을 총망라한 신상품….

그딴 설명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이걸로 젖가슴을 덮는다는 것 자체가 그녀는 고역이었다. 광대놀음 같다고 할까. 어째서 이런 우스꽝스러운 꼬락서니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도 안 됩니다.”

“치이….”

“산토 양. 훗날, 당신의 아이를 위해서 참으세요.”

“내 아이?!”

“엄마 젖꼭지가 꺼칠꺼칠하다면 아기가 빨기 힘들어합니다.”

매니저는 ‘브래지어가 모유(母乳)를 더 맛깔나게 해준다.’는 식으로, 뚜렷한 근거 없는 ‘브래지어 정당성’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이나미 산토는 무조건 ‘네! 네!’라고 답할 뿐이었다.

가슴가리개의 중요성은 제왕학에도 없었고, 진실 여부를 가려줄 사람이나 지식도 전혀 없었기에 그냥 무조건 받아들였다.

아니, 이건 변명이다.

매니저가 ‘아기를 낳는다.’고 말할 때부터 머릿속이 백지 상태였다.

“...언니.”

“네. 산토 양.”

“저는 계약자인데, 아이를 가질 수 있을까요?”

그건 ‘아이나미 산토’가 아닌 자신을 위한 질문이기도 했다.

계약자가 아닌 약소국 공주로써.

매니저는 생긋 웃었다.

‘누가 이 사랑스러운 소녀를 ‘9종 계약자’라고 믿을까요?

이렇게나 평범한 여자에 지나지 않는데.

매니저는 ‘교토의 무녀’였던 아이나미 산토보다 지금이 훨씬 좋았다. 나이를 초월하여 ‘사춘기 소녀’로 다시 태어난 그녀가.

“산토 양이 몸가짐에 주의한다면요.”

“...또 브래지어인가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남성들은 가터벨트를 한 여성에게 성적 매력을 강하게 느낀다고 합니다. 그건, 기합이 잔뜩 들어간 브래지어와 팬티도 마찬가지고요.”

유부녀인 매니저는 자신의 경험담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질문에서 많이 어긋났지만, 능글맞은 표정으로 성적인 묘사까지 자세하게 설명하는 그녀 때문에 아이나미 산토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 탓에….

알리바이 만들기 좋은 집에 돌아왔을 때는 기진맥진!

오늘은 ‘키바 카즈마’도 잊고 푹 자기로 했다. 하루쯤 더 오래 살려둔다고 대세에 영향을 끼치진 않는다고 자기변명 하며.

물론, 머릿속에는 다른 생각뿐이었다.

‘모든 걸 내려놓을 수 있다면 언제든 낳을 수 있다….’

매니저가 그녀에게 해준 말이었다.

계약자에게 ‘순결’은 속박이다.

처녀막, 이까짓 얇은 피막(皮膜)이 뭐라고?

격한 관계를 피하고 주의하면 처녀막을 안 찢고도 여자의 자궁에 남자가 사정(射精)하는 게 가능하다.

어디 그뿐이랴?

출산 후에도 처녀막이 파열 안 되는 경우도 있다.

“내려놓을 수 있을까?”

아이나미 산토는 알 수 없었다. 내려놓는다는 것이 ‘포기’나 ‘항복’을 뜻한다고 생각하니 두려움이 온몸을 휘감았다.

덤으로, 은연중에 깨닫고 있었다.

이 행성에 오래 머물면 머물수록 자신이 이상해진다는 사실을.

(정말 이상하네. 저게, 정말로 산토 언니?)

일본에서 ‘9종 계약자’가 등장하며 잊히고만 7종 계약자.

유키나 미나미.

여전히 한국에서 유학(연애라고 읽는다.) 중인 소녀는 수호자 판타이탄이 수집해온 정보를 훑으며 귀엽게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리 섭섭하게 해도 내 나라.』

엘퍼러처럼 헌신할 생각은 없지만, 심심할 때마다 일본의 정황을 꼼꼼히 살펴보는 유키나 미나미였다.

...요즘에는 섭섭한 마음보다 괘씸하다고 생각 중이었다.

9종 계약자가 등장하자마자 ‘헌 나막신’처럼 자신을 잊어버리다니!

일본 정부에서 ‘내가 잘못했어! 그러니 돌아와!’라고 싹싹 빌면 ‘기러기 아내’처럼 출장 형식으로 도와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웬걸?

정부에서는 사사건건 간섭하던 사고뭉치를 치웠다는 분위기였다.

국민들은 ‘사랑에 눈이 먼 철없는 아가씨’ 취급이고.

(수호자가 달라지면 계약자의 성격도 변하는 게 당연하다, 유키.)

(그렇기는 한데….)

(혼자 끙끙거리지 말고 말해봐.)

(응. 엑시온.)

계약자와 수호자는 서로에게 물든다.

하지만 ‘아이나미 산토’는 그 공식에서 완전히 어긋나 있었다.

바로 얼마 전까지 ‘교토의 무녀’로 불렸던 그녀는 세상사에 초탈한 노파 같은 분위기와 성격이었다.

괴수와 교감한 악영향?

그 반대다.

아이나미 산토는 계약으로 득을 본 희귀한 경우였다.

그녀의 초등학교 생활기록부에는 ‘마음씨 착한 은둔형 외톨이’라고 쓰여있다. 계약자의 이미지 개선을 위해 삭제됐지만, 판타이탄에게 복구는 껌!

(과연…. 유키 설명처럼 이상하군.)

아이나미 산토는 활발한 수호자를 만나면서 ‘은둔형 외톨이’ 기질이 사라졌다.

하지만 그건 엄밀히 말해, 극복한 게 아니라 중화된 것이다.

선지혜처럼 태어났을 때부터 계약자였다면 얘기가 또 다르겠지만, 사람의 성향이란 한 번 굳으면 쉽사리 변하지 않는다.

보통은 평생.

그런데 아이나미 산토는 너무나 달라졌다.

전혀 다른 사람처럼.

(산토 언니는 싸우잔드의 영향을 전혀 안 받는 것 같아. 새언니와 문팽이처럼 천생연분, 찰떡궁합도 아닌데.)

그건 수호자도 마찬가지다.

만약, 싸우잔드가 계약자의 성격에 조금이라도 물들었다면 지금처럼 호전적일 수 없다. 하물며 녀석은 왕.

아이나미 산토를 계약자로 선택했다면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꼭 인연이 아니더라도 그녀의 매력에 빠졌다는 뜻.

하지만 ‘계약 과정’도 베일에 싸여있고, 싸우잔드는 온화해지긴커녕 강력한 ‘문팽이 왕국’에 무모한 시비를 계속 걸고 있다.

전쟁에 환장한 폭군처럼.

아니, 곱게 미쳤다면 차라리 다행이다.

국력부터 아예 차원이 다른 ‘엘퍼러 제국’이 ‘문팽이 왕국’의 동맹이다. 질 싸움을 하려는 태도는 확실히 이상하다.

(즉, 계약자와 수호자, 둘 다 수상하다는 거군.)

(응! 그것도 아주 많이!)

(그렇다면, 우리만 알고 있지 말고 소년에게 알려주는 편이 현명하다. 상황도 딱 좋다고 생각되는데.)

(전혀 안 좋거든! 엑시온, 바보!)

늘 음성으로 말하는 둘은 현재 채팅에 가까운 상태였다.

이곳은 가상현실세계.

둘은 현재 아주 멀리 떨어져 있었다.

대화 상대가 ‘가상세계 하느님’ 판타이탄이 아니었다면 ‘침대에 홀로 누워있는 소녀’ 유키나 미나미는 정말로 혼자였을 것이다.

이 공간은 외부와 단절된 특별한 장소였으니까.

“유키 짱. 심심했어?”

“30초인데 30분은 쓸쓸하게 기다린 기분이야, 카레 짱.”

오늘은 한무일과 유키나 미나미의 데이트 약속이 있는 날이었다.

선지혜만큼은 아니지만, 주기적으로 만나고 있다.

처음에는 ‘닥치고 옷부터!’ 같은 흐름이었지만, 차츰 익숙해짐에 따라 굳이 할 필요 없는 목욕을 하는 등의 ‘달콤한 분위기 제작’에도 공을 들이는 추세다.

그렇긴 한데….

무슨 사족을 붙이더라도 목적은 같다.

“뭔가 할 말이 있는 얼굴인데?”

“응. 있어. 하지만 굳이 여기서 지금 할 필요 없는, 재미없는 얘기야.”

“유키 짱이 재미없다면 중요한 일이란 건데….”

“지금은 안 돼! 지금은 내 시간이야, 카레 짱. 결사반대!”

용신 아쿠버스, 산드라미아 레미가 심혈을 기울여 특수제작한 장치로 현실 몸을 100% 구현한 소녀의 부드러운 살결이 거침없이 비벼온다.

음모(陰毛)부터 하얀 솜털까지 완벽재현!

눈으로 볼 수 없는 안쪽의 주름과 괄약근도 예외가 아니었다.

‘정말로 현실과 똑같을까?’

아무리 잘 만들었어도 이런 의혹이 생길 수밖에 없다.

하지만 두 차례에 걸친 임상시험에서 그렇다고 확인해줬으니 이젠 믿을 수밖에.

문세웅, 장혜린 부부.

이승필, 홍영희 부부.

두 커플의 협조에 감사하는 바이다.

< [48화-2] 가면의 공주 > 끝

ⓒ 파르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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