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화-4] 황제의 이름으로. >
리엘의 장래희망은 일단 보류하기로 했다.
몸에 혹시 모를 문제가 있는지 정밀검사부터 받고, 하고 싶은 일이 생길 때까지 엘퍼러를 따라다니며 이미지 개선에 들어가기로 했다.
그녀는 테러리스트.
이유야 어떻든 수많은 불행을 낳았다.
인체실험을 하는 연구소의 과학자들이야 죽어도 할 말 없겠지만, 건물 밖에서 경계근무 서던 경비원들이 공범인지는 불분명하다.
안에서 무슨 만행이 저질러지는지 모르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
‘일단은 한 건 해결했고….’
잠시 잊혔던 포르 3세도 시도해볼 실험이 있었다.
뱀페스트의 능력에는 ‘부활’이 있다.
그렇다면, 사요나락의 힘으로 되살아난 그가 다시 에쏘스트가 된다면? 생명공급을 끊어도 다시 ‘부활’할 수 있을까.
된다면 이건 ‘혁명’이다.
다만, 더는 인간이 아닌 괴수로 살아야 한다.
“재미있겠는걸!”
“...지혜. 사람의 목숨이 걸렸는데 재미라니.”
이건 중요한 문제다. 포르 3세가 계속 한국에 붙어있다면 상관없지만, 브라헨티나로 다시 돌려보낼 예정이다.
그때, 만약 새로운 사요나락이 등장해서 그를 무력화한다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다. 그렇기에 이 약점은 어떻게든 덮어야 한다.
안 된다면 어쩔 수 없지만.
‘누군가에게 목숨이 저당 잡혔다는 건 대단히 좋지 못해.’
내 몸속에 제거할 수 없는 폭탄이 들어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리고 그 작동버튼을 친구나 상관이 갖고 있다면?
단순한 신뢰관계로 굴러갈 수 없을 것이다.
계속 믿고 싶지만, 거슬려선 안 된다는 강박관념과 절대복종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마음을 좀먹으리라.
그건 서로에게 좋지 않다.
“우선은 이식되느냐인데….”
뱀페스트가 포르 3세의 심장에 기생하는 걸 거부하면 실패다. 이미 죽은 숙주이기에 ‘하자’가 있다고 봐도 무방한 까닭이다.
무일의 계획을 들은 가휜은 적극적으로 실험에 협조했다. 지금처럼 자신의 목숨을 타인에게 의지한 채 살고 싶지 않으니 당연한 걸지도 모른다.
게다가 능력면에서도 차이가 있다.
평범한 ‘에쏘드 계약자’와 에쏘스트 사이에는 도저히 메꿀 수 없는 격차가 존재한다.
지금의 포르 3세는….
5종 계약자보다도 가치가 없다.
좋은 MID 장비로 둘둘 하더라도 6급 사냥꾼은 무리다.
“하아…. 파란만장한 용사님을 만나서 고생이 이만저만 아닙니다.”
포르 3세의 ‘용사의 정령’은 칼에서 나온 이후로 한숨을 안 쉬는 날이 없었다.
첫 용사인 그의 취향을 100% 반영한 인디오 여인.
한세리와 한유나하고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가슴과 엉덩이가 소박했다. 그리고 여기에 맞춰서 얼굴도 수수한 편.
...촌스럽다고 할까?
시골에서나 통하는 미녀 같은 느낌이다.
억양과 음성도, 탄산음료처럼 톡톡 튀는 한세리와 한유나랑 달리 단아했다.
“그래?”
“피해의식, 민족의식, 역사의식…. 제 용사님을 간단히 설명할 수 있는 3가지입니다. 더는 발전의 여지가 없습니다.”
“고생이 많네.”
“...그에 반해, 당신은 지금도 변하고 있습니다.”
“내가?”
무일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미 그는 용사 싱크로율 100%다. 내려가거나 퇴보했으면 했지, 더는 발전할 여지가 없는 완전체 상태.
그런데 포르 3세의 에쏘드 ‘율루’는 부정하듯 고개를 저었다.
어째서 그걸 여태 모르고 있었느냐는 표정으로,
“용사의 최후는 배신입니다.”
“내가 배신당한다고…?”
뭔가 섬뜩했다.
마왕을 쓰러트리고 쓸모없어진 용사는 ‘힘만 센 야만인’이다. 그러니 스스로 모든 걸 포기하고 은퇴해주지 않으면 곤란하다.
눈치 없이 버틴다면?
어떻게든 숙청해야 한다!
용사는 끌어안기에 너무나 부담스러운 존재다.
“그것도 하나의 결말이지만, 당신의 경우는 그 반대에요.”
“내가 배신한다?”
“네.”
분명, 역사적으로 전례가 있다.
용에게서 구해낸 공주를 아내로 삼고 왕이 된 용사 이야기.
넓은 왕국을 다스리는 왕에게 자식이 딸 하나뿐이란 설정이 기가 막히다. 아들이 없어서 무식한 사위에게 왕국을 바친다고?
왕비를 너무나 사랑해서 첩을 안 뒀다는 것도 변명이 안 된다.
여자의 자궁은 일회용품이 아니다. 왕이 고자이거나 사랑이 식지 않았다면 꾸준히 씨를 뿌리게 되어있다.
그게 수컷과 암컷이란 생물.
자연의 이치다.
“누구를?”
“세상을 배신합니다.”
싸움을 잘한다고 훌륭한 왕이 되는 건 아니다. 어릴 적부터 체계적으로 제왕학을 배운 ‘준비된 자’만이 왕이 될 수 있다.
게다가 유서 깊은 왕가의 혈통(血統)이란 것도 무시하지 못한다. 대를 이어 뛰어난 여자만 집안에 들여 품종개량을 거쳐 완성된 왕족.
인간에게 귀천(貴賤)은 없다?
못난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한 헛소리다. 우리는 유전자로 ‘그 부모에 그 자식’이란 공식의 정확도를 잘 안다.
노골적으로….
저능아는 100% 유전이다.
즉, 왕은 운명이 점지해주는 게 아니라 체계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찬탈』
그러니 뇌까지 근육으로 꽉 찬 용사가 ‘왕’이 된다는 건 웃기지도 않는 농담이다. 왕국 말아먹기 딱 좋다.
이야기가 왜곡되고 미화됐다.
남성호르몬 넘치는 혈기왕성한 용사가, 아름다운 공주를 강간하고 왕국마저 빼앗았다고 보는 편이 더욱 현실성 있다.
공주를 구해준 보답으로 사위?
무서운 괴수와 무식한 용사의 차이가 뭐란 말인가.
왕국이 멸망하는 건 똑같은데….
사춘기와 반항기가 중첩된 이팔청춘 딸을 진심으로 아끼고, 왕국의 미래까지 걱정하는 왕이라면, 절대로 용사를 사위 삼지 않을 것이다.
적당히 포상해주고 끝.
“나는 그런 얘기를 듣지 못했는데….”
“당신은 ‘용사의 정령’에게 조언을 구하거나 의지해본 적 있으신가요?”
“흠…. 없네.”
한세리와 한유나는 늘 뒤에서 보조하는 입장이었다.
다른 나라의 ‘에쏘드 계약자’들처럼 ‘까다로운 정령’에게 따끔한 핀잔을 듣고 사사건건 간섭받은 적이 일절 없었다.
한무일은 완벽한 용사.
용사의 정령이 해줄 조언이 없었다. 역으로 ‘용사님에게 폐가 되는 게 아닐까?’라는 괜한 걱정과 불안을 안고 산다.
그래서 늘 조심조심.
한무일의 에쏘드가 되고 싶어하는 정령은 차고 넘쳤다. 한세리와 한유나는 ‘해고’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싫은 소리’를 할 수 없는 처지였다.
“당신은 이미 용사가 아닙니다.”
하지만 율루는 한무일의 에쏘드가 아니다.
그렇기에 거침없이 말할 수 있다.
게다가 그녀는 포르 3세도 나쁜 직장(?)이 아니라고 생각하기에, 혹시 모를 대기업(한무일) 취직 떡밥(내숭)을 뿌리지도 않았다.
그래서 진솔하게.
자신의 용사님을 구해준 그에게 진실을 말했다.
“그럼 뭐지?”
“이미 ‘황제’라고 불리시는 걸로 압니다. 설명이 더 필요한가요?”
“그건…. 음….”
무일은 뭐라고 하려다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쭉 위화감이 없었다.
자연스럽게 ‘영토’와 ‘신하’가 생겼다. 하지만 그게 ‘용사 싱크로율 100%’ 영향이라고는 조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 점은 율루도 긍정했다.
“우연한 일치입니다. 그래서 배신의 시기가 짧아졌습니다.”
“더, 더 자세히 듣고 싶은데.”
지금, 바로 옆 방에서는 포르 3세가 보균자(뱀페스트 알을 품은 여성)와 한창 성교 중이다.
무일은 그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 잠깐 들른 참이었다.
그런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대에게 전혀 예상하지 못한 얘기를 듣게 됐다.
포르 3세의 부활보다 더 중요한 일.
안 그래도 [업보] 때문에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도 없는 처지인데, 이젠 용사가 아니란 소리까지 듣고 말았다.
엘퍼러는 마음이 뒤숭숭할 수밖에 없었다.
‘내 정의가 잘못됐다?’
이런 건 누군가 얘기해주기 전까지 모른다.
하지만 그의 주위에는 ‘무조건 옳아요!’라고 답해줄 여자들뿐이다.
...근처에 남자 하나 없다는 것도 놀랍군.
무일은 살짝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지나친 독선은 독재나 다름없다. 늘 올바른 길만 간다면 상관없지만, 착각에 빠져 그릇된 길로 가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그건 바람직하지 않다.
“마기나로크.”
“에쏘드 필살기지.”
“당신이 말씀하시는 에쏘드가 ‘용사의 정령’을 뜻한다면, 그 해석은 틀렸습니다.”
“틀렸다고?”
“마기나로크는 엄밀히 말해서, 정령의 힘이 아니라 당신의 힘입니다.”
에쏘드(카르세리안 레이소)는 그 힘을 외부로 방출하는 매개체에 지나지 않는다.
율루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용사의 최후.
그 결말은 극단적이다.
세계의 견제로 타락한 악당(惡黨).
먼저 세계를 뒤통수친 폭군(暴君).
율루는 자신의 계약자가 ‘악당’에 근접했다고 말했다. 쉽게 말해서, 세계의 악의에 심한 충격을 받고 정신 줄을 살짝 놨다고 할 수 있다.
아무튼,
“내 힘이라고?”
“한세리. 그녀가 당신의 영혼에 귀속됐으니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용사의 정령이란 표현도 잘못됐습니다.”
“좀…. 혼란스럽네.”
“쉽게 설명하겠습니다. 맨손으로 마기나로크를 써본다고 생각해보세요.”
“음?”
그런 시도는 해본 적이 없었다.
에쏘드 필살기.
그런 강박관념 때문에 당연히 ‘검으로 펼치는 기술’이란 의식이 확고했었다.
엘퍼러는 자신의 손바닥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우우웅….
...미약하지만 빛의 알갱이가 모여들었다.
익숙하지 않고 생소해서 ‘이미지’가 잘 그려지지 않은 탓에 ‘힘’은 생각처럼 모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건 명백한 ‘전조’였다.
마기나로크를 쓰기 직전에 힘을 끌어모으는 단계.
여기서 ‘기술명’을 외치면 발동된다.
“하지만 맨손으로 쓰는 건 권하지 않습니다. 마기나로크 출력을 버티지 못하고 팔이 파열하니까요. 존재를 지워버리는 탓에 재생도 느립니다.”
“한세리가 내게 귀속됐다는 건 이런 뜻인가….”
“당신의 영혼 귀퉁이가 그녀의 새로운 안식처입니다. 사용 중인 집(카르세리안 레이소)은 이미 전세(傳貰)로 내놓은 상태입니다.”
“......”
정령의 세계에도 부동산이…?
율루는 진지한 표정으로 짙은 흥미를 보였다.
“용사님이 성욕에 빠지면 죽여버리는 저주가 걸린 검이로군요? 희소가치뿐 아니라 실용성에서도 탁월하다고 생각됩니다.”
“......”
“갑자기 말이 없으시네요. 배신했다고 너무 낙담하진 마셨으면 합니다. 당신의 또 다른 에쏘드, 한유나는 당신이 여전히 용사라는 증거입니다.”
한유나는 평범한 ‘용사의 정령’이었다.
그건, 한무일의 정의가 아직 살아있음을 대변해준다.
“내가 세상을 배신했다….”
“진지하게 받아들이시지 말았으면 합니다. 굳이, 용사와 황제를 구분 지어서 생각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당신은 ‘용사였던 황제’니까요.”
“그건 또 무슨 말이야?”
“당신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용사의 연장선’이란 뜻입니다.”
용사는 마왕(魔王)이나 악룡(惡龍)을 무찌른 시점에 이야기가 끝난다. 해야 할 임무와 역할이 끝났다는 뜻이다.
그 뒤에 하렘을 만들든 땅따먹기를 하든 상관없다.
한무일은 이미 완성된 용사.
에필로그 뒷이야기는 ‘완성된 용사’가 풀어가는 새로운 ‘용사의 길’이다. 즉, 악당으로 돌변해도 싱크로율 100%는 추가고정이란 뜻이다.
그렇다면?
전설과 역사 속의 용사들은 전부 어디로 사라진 걸까?
괴수가 고대부터 조금씩 등장했던 것처럼 ‘에쏘드와 용사’도 쭉 어딘가에 있었으리라.
“그들은 어떻게 됐지?”
마기나로크는 정말 강력한 힘이다.
지금도 대적불가인데, 첨단무기가 없던 시절이라면 그야말로 신의 힘!
율루는 한 곳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날붙이와 화살이 일절 통하지 않는 근육질 용사도, 아리따운 여인이 거기를 물어뜯으면 급살(急煞)입니다.”
“그 정도의 머저리가 무슨 용사냐….”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무일은 다리를 오므렸다.
용사의 천적은 미녀.
충격적인 새로운 사실보다 이 먹이사슬(?)이 엘퍼러의 머릿속에 더욱 깊게 남았다.
‘맞아. 그랬었지.’
한세리와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카르세리안 레이소.
주인만 6번 죽였다고 똥값이 된 명검!
하지만 그녀는 이 ‘저주받은 검’에 쾌재를 불렀다. 아주 좋은 저주가 걸려있다고.
“세리는 예상했었군….”
자신의 계약자가 싱크로율 100%를 넘어서며 ‘자신의 소유주’가 될 미래를.
용사에게 미녀는 교양(敎養)이다.
하지만 ‘완성된 용사’에게는 ‘치명적인 독’이었다.
‘...무일.’
‘왜?’
‘아무래도 너는 평생 고자일 운명인 것 같다. 가상현실에서 가상체험하는 걸로 만족해라. 현실이랑 별 차이 없다더라.’
‘남 얘기처럼 말하지 말아 줄래?’
한무일과 한유일은 어차피 한 몸!
하지만 ‘하렘의 왕’은 그게 어쨌다는 태도였다.
‘나는 피를 빠는 걸로 충분히 만족한다. 저주받은 너와 동족취급은 곤란하다.’
‘......’
하지만 ‘저주’가 때로는 ‘축복’일 수도 있다.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차이일 뿐.
『동정이면 절대 안 죽는다.』
< [47화-4] 황제의 이름으로.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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