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화-3] 황제의 이름으로. >
(대화할 수 있을까?)
웨딩풍의 확성기를 통해 엘퍼러가 말했다.
테러리스트와 대화를?
그게 가능했다면 테러리스트라고 부르지 않았을 것이다.
‘대화? 누구를 바보로 알아!’
가브리엘은 코웃음 쳤다.
저 말도 안 되는 비행체를 안다. 웨일풍이다. 그리고 저 목소리는 브라헨티나 연구소 등에서 심심찮게 들었던 엘퍼러의 목소리.
정부와 어떤 거래를 했는지 모르지만, 대화랍시고 만나는 순간 생포되어 온갖 생체실험과 치욕을 당할 것이다.
내가 10종하고 싸울 줄 알아?
그녀는 순백의 날개를 빠르게 펄럭였다.
“잘 왔어.”
“...예.”
가브리엘이 정신 차렸을 때는 이미 웨딩풍 안의 접견실 같은 곳에 있었다.
그렇다고 기절했다거나 납치된 건 아니다.
그녀는 자기 날개와 발로 창공에서 이 장소까지, 새색시처럼 고분고분 한 남자를 쫓아왔던 과정을 모두 기억하고 있다.
그저 ‘대화할 수 있을까?’ 이 한마디에 매료됐다.
희망 없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자신이 어깨를 기대고, 미래도 기대할 수 있는 남자일지 모른다는 막연한 환상….
강요하는 건 아니지만 저항할 수 없었다.
아니, 저항하기 싫었다.
‘시, 심장이 터질 것 같아!’
가브리엘 특유의 깔깔 웃는 웃음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두근두근!! 이런 소리가 실제로 들리는 것 같다.
심장이 특급열차 엔진처럼 발광 중! 그래서 당장에라도 터질 것처럼 아팠지만, 절대로 싫은 고통이 아니었다.
자신은 왜 여기에 있을까?
간단하다.
『이 남자를 보고 싶다.』
그런 마음이 들끓었다. 테러리스트로 활동하며, 오직 ‘강하게 보이기’ 위해 사용했던 무수히 많은 언어와 억양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머리로는 이 상황에 의문을 표하지만, 몸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 본능이 엘퍼러에게 순종하라고 속삭인다.
가브리엘은 ‘여자’로서 생각해봤다.
눈앞에 남자가 나를 이상하게 만들 정도로 매력적인지를.
대답은?
‘어머! 어쩌면 좋지…?’
날렵한 표범처럼 쭉 뻗은 키에, 어깨는 넓고 다부지다.
여성이 성형수술과 영양제로 호리호리한 몸매가 보편적인 것처럼, 남성도 이 정도는 평균에서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여심(女心)을 사로잡는 하나가 있었다.
『눈빛』
이런 눈을 한 남자를 신뢰하지 못한다면 세상 그 무엇도 믿을 수 없으리라!
여기에 평소 엘퍼러의 평판이 뒷받침해줬다.
더는 인간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스스로 채찍질해온 가브리엘은 ‘혹시?’ 같은 생각을 하는 자신에게 깜짝 놀랐다.
그만큼 상대는 거물이었다.
자신이 반항 한 번 안 하고 이렇게 얌전해질 줄은 상상도 못 했지만.
“나이가 올해 스물로 아는데, 말 편하게 해도 되겠지?”
“네? 네….”
다른 사내가 물었다면 ‘깔깔! 숙녀의 나이를 캐물어? 죽고 싶지?’라고 했을 레이디 가브리엘이지만, 신입사원처럼 꼼짝 못 하고 있었다.
역으로 자신을 향한 관심으로 곡해하기에 이르렀다.
“가브리엘 양이 실험 받은 건, 내가 노블레스 정보를 공개했기 때문이야. 그 복수의 책임은 내게도 있지.”
“그, 그렇지는….”
“내가 그렇게 느끼면 그런 거다.”
“......”
레이디 가브리엘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단 하나만은 알 수 있었다.
엘퍼러가 대단히 책임감 넘치는 남자라는 점. 어째서 그가 ‘최강의 용사’라고 불리는지 절절히 느껴졌다.
“아이들을 돌본다고 들었는데.”
“그걸 어떻게…?”
“다 아는 수가 있어. 네 아이?”
“아니에요!”
연구소에서 성희롱 당하긴 했지만, 숫처녀에게 무슨 말씀을!
부모를 여읜 여자아이들이다.
일단, 뱀페스트인 가브리엘은 계약자로 성장할 법한 아이들을 볼 수 있었다. 그래서 그런 아이들을 데려왔다.
이대로 브라헨티나 정부의 손에 양육권이 넘어가면, 예쁜 숙녀가 돼봐야 ‘정부의 암캐’로 전락하리란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레이트 아마존은?”
대도시 ‘아마존’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여왕.
노블레스와 에쏘스트를 포기하지 않는 브라헨티나 정부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반란군사령관 겸 8종 계약자이기도 하다.
그녀라면 순순히 이 아이들을 받아주지 않을까?
하지만 이런 돌무더기뿐인 유적에서 미개하게 살라는 것 자체가 고문이고 고역이다. 가브리엘의 뜻은 잘 알겠으나 두둔해줄 순 없었다.
“더욱 최악이에요.”
“최악?”
“사람들은 아마존의 본성을 몰라요. 그녀는 대단히 이기적인 여자예요. 자기밖에 몰라요. 세상에서 자신이 가장 아름답고, 앞으로도 그래야 한다고 믿어요.”
“...너는?”
“세상을 끔찍이 싫어하는 여자요.”
“흠….”
자신에 대해 나름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러니 아마존도, 주관이 섞인 편견은 아니라고 봐도 무방할 것 같았다.
무일이 아는 ‘그레이트 아마존’은 여걸(女傑)이었다. 북해빙궁을 이끈 미녀우월주의자 ‘아이밍 리’와 달리 사리분별 할 줄 아는 여성.
노블레스와 에쏘스트를 반대하며 반란까지 일으키긴 했지만, 세상이 하는 짓거리를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고 이해했다.
워낙 막장이어야지!
수많은 테러리스트와 사이코패스가 노블레스다.
당연히 자연 발생이 아니다. 모든 나라에서 극구 부정하지만, 노블레스와 에쏘스트는 [혼돈]이란 약이 필수이기에 그냥 탄생할 수 없다.
“이미 짐작했겠지만, 내 밑으로 와.”
“그 말씀은…. 엘퍼러의 여자가 되라는 뜻인가요?”
“너무 극단적인 해석인걸. 나는 너에게 어떤 것도 원하지 않아. 조용히 아이들이나 돌보며 지내도 괜찮아. 지금처럼만 안 산다면.”
무력이라면 차고 넘친다.
환상의 궁합이라고 할 수 있는 ‘웨일풍, 도끼토끼’ 콤비만으로도, 이미 세계정복 준비는 끝났다고 봐도 무방하다.
하늘에서 적수가 없는 웨딩풍 위에서 도끼토끼가 쏘는 정밀저격!
그 어떤 전략과 수호자로도 막을 수 없다.
“저를…. 연구소에 안 보내실 건가요?”
“무슨 소리! 너를 보낼 바에 내가 가겠다!”
가브리엘이 어깨를 움츠릴 정도로 엘퍼러는 크게 화를 냈다.
여인을 생체실험실로 보낸다고?
물론, 엘퍼러는 인권을 고집스럽게 따지는 인물은 아니다. 사형수는 인간이 아닌 짐승으로 취급해도 된다고 믿는다.
친위대의 공정과정만 봐도 알 수 있다.
목포 교도소에는 ‘성교금지’라고 엉덩이에 경고문이 새겨진 미녀들이 있다. 자궁에 ‘뱀페스트 알’이 득실거리는 탓!
뱀페스트로 재탄생시킬 범죄자만 상대하는 여인들이다.
‘무일. 정말로 갈 거냐?’
‘정말로.’
‘나는 싫다! 네 몸이라고 막 정하지 마라!’
‘진정해, 유일. 나도 연구소 같은 곳에 들어가지 않아. 내가 싫기에 남에게 가라고 명령하거나 권하지 않는다는 뜻이야.’
하지만 개인적으로 레이디 가브리엘의 날개에는 흥미가 있었다.
뱀페스트에 없던 능력.
저건 뱀페스트의 한계를 넘어선 백혈구울의 변신과 흡사했다. 육해공(陸海空)을 자유롭게 다닐 수 있기에 부럽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게다가 스텔스기능.
여전히 그녀의 위치는 레이더에 잡히지 않았다.
“이건 체질을 바꿨기 때문이에요.”
“흠. 설명이 길어질 것 같으니 우선은 아이들부터 챙기기로 하지.”
무일은 정신을 집중했다.
그도 이제 ‘9종’으로서 추종자를 다루는 방법에 익숙해졌다.
인류가 두려워하는 왕의 권능.
그건, 서로 협력하지 않고 질서도 없는 괴수를, 정예군단처럼 통솔하는 능력이다. 굳이 말로서 전하지 않아도 된다.
무일은 방금 편입된 새로운 추종자에게 부탁했다.
‘아이들을 이리로. 최대한 겁먹지 않도록 해서.’
괴수에게는 상당히 무리한 요구지만, 선녀로 오인할 정도로 인간적인 2종 괴수 ‘윈드걸스’에게는 문제없었다.
그녀들의 충성심과 배려심은 무일의 예상을 아득히 넘어서 있었다.
괴수의 사고와 시점에서 벗어나기 위해 몇몇이 ‘스스로’ 날개를 뜯어냈다. 그리고 동료의 도움으로 잉카 유적으로 내려가서 아이들을 달래고 설득했다.
벌거벗고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누가 봐도 인간!
그 언행부터 자태까지 너무나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소녀들이었다.
“숨어있던 아이들을 전부 데려왔어요. 그중에 한 아이가 엄마만 계속 찾아서 저희를 곤란하게 했지만, 간신히 달랠 수 있었어요.”
“...수고했어.”
“수고라니 가당치 않아요. 상제(上帝)의 부름에 행복할 따름이에요.”
날개를 뜯어내는 희생까지 감수한 다섯 소녀가 머리를 조아렸다.
저 소녀들이 정녕 괴수란 말인가!
헛것이 아니란 걸 증명하듯 자신의 날개를 도로 회복한 그녀들은 ‘윈드걸스’로 회귀했다. 무일의 추종자들이 주로 짓는 표정과 태도다.
느긋하다.
당장 복도에 드러누워서 잠들 기세다.
저러고도 아찔한 몸매가 항상 유지된다는 비겁한 패시브를 단 ‘여성형 괴수’들!
무려 500마리(?) 이상이 하루아침에 추가됐다.
“...능력 좋으시네요, 엘퍼러 님.”
“웬 존칭?”
가브리엘을 돌아본 무일은 낯뜨겁다는 표정을 지었다.
추종자들의 태도는 거의 숭배에 가깝지만, 그래도 ‘님’이란 호칭은 쓰지 않는다. 그녀들에게 엘퍼러는 머나먼 존재가 아닌 친근한 선도자.
사모하는 상관(上官)에 가깝다.
물론, 이조차도 추종자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아니면 뭐라고 불러드려야 하나요.”
“무일 씨.”
“콜록콜록!”
“...왜?”
“죄, 죄송해요. 너무 놀라서 사레들렸어요.”
무일은 가브리엘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었다.
서울에서는 그를 ‘한무일 씨’라고 한다. 그게 예의를 지킨 보편적인 호칭일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좀 더 친해지면 ‘무일 씨’로 좀 짧아진다.
세계적인 유명인이 동네아저씨 취급….
한국어에서 ‘씨’의 의미를 그렇게 배운 가브리엘은 뭔가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인간적인 분….’
인간에게 인간적이란 표현이 옳을까?
하지만 가브리엘이 보고 느낀 세계는 ‘인간의 탈을 쓴 악마’들이 너무나 많았다.
엘퍼러가 말했다.
약간 쑥스러워한다고 느낀 건 그녀만의 착각일까.
“아니면 오빠라고 부르던가.”
“오빠요…?”
“싫으면 말고.”
무일은 가브리엘에게 짙은 호감을 느꼈다.
이성에게 품는 애정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아이들을 책임지고 돌보는 그녀의 마음씨를 높게 평가한 것이다.
남아메리카의 악명 높은 테러리스트?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아이들을 좋아하는 사람치고 나쁜 사람은 없다.』
이게 한무일의 지론이다.
여기에 ‘직업’이나 ‘돈’ 혹은 ‘성욕’이 연관되면 당연히 논외다.
일석이조(一石二鳥)?
좋아하는 아이들을 돌보며 돈도 벌 수 있다면 최고일 것이다. 하지만 모든 교육자와 양육자가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다.
부모나 정부에서 제공하는 물질적인 풍요를 위해 ‘아이들을 좋아하는 척’하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다.
아이들을 좋아하려면….
선결과제처럼 인내심과 이해심이 많이 필요하다.
“아니요. 오빠….”
“흠. 은비가 부를 때하고는 역시 다르네. 아무튼! 가브리엘 양이 원하는 세상, 생체실험으로 고통받는 소녀가 없는 지구를 만드는 일은 앞으로 내가 이어받을게.”
누구도 엘퍼러에게 너무 늦었다고 비난할 수 없다.
이제 겨우 1년이다.
변변찮던 3급 사냥꾼 ‘카르 4세’가 강해지고 또 강해져서 세계무대에 자신의 ‘정의’를 펼칠 수 있게 되기까지 걸린 시간.
작년 생일파티 때, 경매로 기술 및 정보를 공개했으니 아직 1년도 안 된 셈이다.
세계가 그 1년을 기다려주지 않아서 문제!
프로사냥꾼 한무일이 강해지는 동안, 강대국들은 ‘피해자’를 양산했다.
테러리스트 ‘레이디 가브리엘’도 크게 보면 피해자. 그녀는 복수할 힘이 있어서 주목받은 것뿐이다.
‘해야 할 일들이 끊이지 않는군….’
마왕을 무찔렀더니 온 세상이 행복과 사랑으로 충만해졌다!
...같은 전개가 내게는 안 오는 걸까.
엘퍼러는 서두르지 않고 할 수 있는 일부터 차근차근 풀어가기로 했다. 당장은 눈앞에 ‘방황하는 20살 소녀’부터.
“가브리엘 양.”
“짧게 ‘리엘’이라고 불러주세요, 오빠.”
“흠. 리엘.”
“네!”
세계가 알고 있는 ‘레이디 가브리엘’ 영상과 점점 달라지는 그녀.
원래 성격이 이런 건지, 엘퍼러 앞이라서 내숭 떠는 건지는 앞으로 두고 볼 문제였다.
엘퍼러가 진지한 시선으로 ‘리엘’을 쳐다봤다.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을 말해봐. 예를 들어, 목포에서 수호자나 사냥꾼으로 활동해도 돼.”
“별로….”
“그러면, 유치원 선생님은 어때?”
“딸꾹!”
< [47화-3] 황제의 이름으로. > 끝
ⓒ 파르나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