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처럼-194화 (194/287)

< [47화-2] 황제의 이름으로. >

중요한 국가정상회담(?)보다는 일방적인 통보에 가까운 영상통화를 마친 무일은 곧바로 ‘여성 뱀페스트’를 찾기 시작했다.

레이디 가브리엘.

인류의 기대와 희망을 품고 천사의 이름이 붙인 반인반수(半印半獸).

하지만 그러한 인류의 꿈은 수포로 돌아갔다.

‘희생을 강요하니 반발할 수밖에.’

아무리 그 뜻이 숭고하더라도 공감을 얻지 못하면 무의미하다.

비윤리적인 실험으로 몸과 마음이 너덜너덜해진 ‘여인의 한’이 결코 작을 리 없다. 그런데 그걸 간과하고 ‘인류를 위해.’ 같은 소리를 했으리라.

자애와 자비가 특기인 하느님의 딸이라도 되지 않는 한, 용서될 리 없다.

“아마존 밀림에 숨어있을 줄 알았는데 유적이라….”

최근에 에쏘드나 위치봉 같은 ‘장비형 괴수’의 발굴을 위한 유적탐사가 유행이란 건 무일도 들어서 알고 있다.

그런데 테러리스트도?

그야…. 에쏘드를 줍는다면 테러에 도움이 되긴 할 것이다. 쓸 수 있다면 말이다. 하지만 레이디 가브리엘은 ‘여성’이라 계약할 수 없다. 하물며 뱀페스트.

에쏘드 칼날에 스치기만 해도 치명상이다.

‘무일. 잉카(Inca)라는 곳에도 미소녀가 살아?’

‘잉카는 문명 이름이야.’

‘그게 그거지. 잉카는 곧 마추픽추라며? 고산지대에 있는 옛 도시.’

‘내가 아는 게 그뿐이긴 하지.’

잉카 마추픽추는 남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찬란한 황금기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유적이라지만, 무일도 그 이상은 전혀 모른다.

사냥꾼이 이 정도만 알아도 정말 대단한 것이다.

꼭 사냥꾼이 아니더라도 서울에는 아예 ‘인디오’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다. 고대인들은 ‘잉카 마추픽추’를 관광지로 기억하는 모양이지만.

현대에 버림받은 과거의 문화유산이다.

“뭘 하고 있지?”

“어…. 새끼들을 돌보고 있어요.”

시력이 현미경과 망원경, 투시경을 합쳐놓은 수준인 도끼토끼가 말했다.

너무나 예상 밖의 대답에 무일은 말문을 잃었다.

영상자료를 통해서 본 레이디 가브리엘의 언행은 사이코패스 그 자체였다. 그런데 그런 미친년, 살인마가 아이들을 돌본다고?

무일의 눈에는 그 광경이 보이지 않았다.

유적 내부를 볼 수 있는 능력이나 기술이 없는 탓이다. 그건 웨딩풍만 아니라 MID 과학기술로도 미구현 상태다.

오직, 도끼토끼의 ‘붉은 눈’으로만 물질이란 장벽 너머를 투과할 수 있다.

비슷한 능력을 보유한 괴수는 꽤 되지만 이 머나먼 거리에서는 도끼토끼가 유일하리라.

“흐음….”

레이디 가브리엘의 위치를 추적하기란 쉽지 않았다. 일반적인 뱀페스트와 달리 백혈구울처럼 신체를 변형할 수 있는 까닭이다.

그렇다고 백혈구울인 건 아니다. 명백히 뇌가 있고 생각을 할 수 있다. 덤으로 백혈구울처럼 자유자재로 변할 수 있지 않다.

순수한 인간의 육체에 추가로 날개나 발톱, 갈퀴 등을 붙이는 식이다.

『흡혈이 필요없는 흡혈귀』

이렇게 보면 된다.

능력을 쓸 때마다 흡혈한 ‘여성의 피’가 줄어드는 일반적인 뱀페스트하고 달리, 자신의 피를 쓰기에 항상 최상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래서 6종.

하지만 황진천하고 비교하기에는 다소 약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녀석은 ‘생각할 수 있는 백혈구울’이기 때문이다. 한유일은 ‘잡종’이라고 깔보지만, 순수한 전투력은 왕보다도 압도적으로 강하다.

‘흥! 다시 만나면 내가 썰어버릴 수 있다!’

칼집처럼 조용히 따라오는 석상이 한유일의 자신감 원천이었다.

검과 ‘보조’가 한 세트인 폴리검.

보조는 파수꾼(석상)으로 활동하거나 방패로 변신할 수 있다. 그리고 폴리검의 진짜 무서운 점이 바로 이 방패에 있다.

주변의 특수능력 흡수!

무효화 하는 에쏘드보다 한 차원 더 높은 것처럼 보이지만, 에쏘드 필살기에 분쇄된 걸로 봐서는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누구나 무난하게 쓸 수 있는 장비형 괴수라고 할까!

‘뭐…. 그렇다고 해두자.’

‘나는 잡종에게 없는 뛰어난 백성도 있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지만, 이 웨딩풍에는 세 여인이 타고 있다.

최은설, 아이밍 리, 유라 솔리넬 인펠리아.

언제 어디서든 피를 공급받기 위해서란 사소한 이유 외에도 이 웨딩풍에서 ‘앞으로 쭉 살아야 하는 이유’가 있다.

『최은설』

타고난 무당인 그녀는 한유일의 계약자다.

엘퍼러가 백혈구울이 되지 않도록 막아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래서 유일한 ‘약점’이라고도 할 수 있다.

최은설이 죽거나 계약이 파기되면?

에쏘드로 자해(自害)해서 ‘여성의 피’ 농도를 죽여야 한다. 그 과정에서 쇼크사로 죽을 위험성은 물론이고 필연적으로 약해진다.

부산보다도 안전한 웨딩풍은 최은설의 새로운 터전이었다.

『아이밍 리』

그들이 탄 웨일풍(웨딩풍)의 계약자다. 수호자를 안심시키기 위해서라도 그녀는 항상 탑승해있어야 했다.

게다가 그녀는 중국에서 지정해준 ‘헐벗은 옷’만 입어야 한다는 벌을 받고 있다. 홍일점 젖꼭지와 다리 사이만 가리다시피 한….

그래서 본인 스스로 밖에 돌아다니는 걸 꺼렸다.

바로 얼마 전까지 북해빙궁이란 여성단체(아름다운 테러리스트 집단)를 이끌던 궁주의 체면이란 것이다.

그래서 평소에는 도도한 척하는데….

희귀체질 천음절맥이 괜히 천음절맥이 아니다.

음기(陰氣)와 음기(淫氣)를 굳이 나눠서 해석할 필요 없는 상태다.

『유라 솔리넬 인펠리아』

고향에서 탈출한 외계인이다.

최근에는 애칭으로 ‘유리아’라고 부른다.

이미 그녀가 아는 정보는 전부 빼낸 상태지만, 그렇다고 연약한 여인을 죽도록 방관하는 건 용사와 ‘하렘의 왕’에게 있을 수 없는 얘기!

그 보상처럼 떨어진 폴리검도 빼놓을 수 없다.

앞서 둘과 다른 점이 있다면?

유리아는 ‘한유일의 명령’이 통하지 않았다. 그건 명령권을 이어받은 아쿠버스 ‘산드라미아 레미’도 마찬가지였다.

며칠 만에 면역력이 생겼다고 할까!

‘수긍할 수 없다!’

‘흠…. 진정한 미녀는 진정한 남자를 알아보는 법이지.’

똑같은 몸인데 ‘인기’가 완전히 다르다는 건 의외로 자존심 상하는 부분이었다.

한유일이 ‘잘나신 숙주’보다 잘한다고 생각해왔던 유일한 부분!

하지만 그 자존심이 박살 났다.

유리아는 한무일의 명령만 수행한다!

용언을 모르기 때문에 ‘보디랭귀지(body language)’를 쓰지만, 그녀는 용케 이해하고 고분고분 따르고 있었다.

이건 ‘진정한 남자’ 운운하기 전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는 것 같지만….

한유일이 느낀 충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크으…. 하렘의 왕인 내가….’

‘자자, 업무방해는 그만하고 조용히 있어.’

무일은 묘한 승리감의 여운을 즐기며 지상을 내려다봤다.

잉카 마추픽추.

위대한 문명의 흔적….

...산꼭대기에 쌓은 돌무더기 같은 유적에는 관심 없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도 그렇지만, 그 옛날에 만드느라 참 고생했겠다는 생각뿐이 안 들었다.

“우선은 접촉해보도록 할까. 아니면….”

세계의 이목을 속이고 아마존 아지트가 아닌 잉카 유적에 숨어있는 레이디 가브리엘.

엘퍼러는 곧바로 쳐들어가는 대신 기다리는 쪽을 택했다.

만약, 도끼토끼의 입에서 ‘아이들을 돌본다.’는 얘기만 없었다면 태도를 달리했을 것이다. 이번에 놓치면 또 찾느라 고생해야 하는 까닭이다.

브라헨티나에서도 놓친 그녀를 추적할 수 있었던 이유?

『뱀페스트 왕』

가브리엘이 뱀페스트인 이상, 그녀가 어디에 숨든 한유일은 찾아낼 수 있다. 지구 반대편에 있더라도 말이다.

물론, 그녀가 ‘평범한 뱀페스트’였다면 힘들었을 것이다.

왕의 권능으로 모든 뱀페스트 위치를 아는 한유일이지만, 번호표나 이름표 없는 ‘똑같은 사내새끼’를 구분하기란 불가능하다.

하지만 가브리엘은 여성.

세계에 단 하나뿐인 여성 뱀페스트다.

그 특징으로 나머지를 걸러내면 무조건 가브리엘만 남는다.

“날벌레들이 접근하고 있어요.”

“저건….”

성층권에서 대기 중인 웨딩풍으로 접근하는 괴수 무리가 있었다.

당장 태워버릴 기세로 붉은 눈을 반짝이며 묻는 도끼토끼, 찌르뱅팽을 말린 무일은 가브리엘이 아닌 엉뚱한 ‘여성형 괴수’들을 지그시 관찰했다.

【윈드걸스 / 2종 소형】

혹시, ‘선녀와 나무꾼’을 아는가?

연못에서 목욕 중에 ‘여자에 굶주린 노총각 나무꾼’에게 옷을 빼앗기고, 가사(家事)와 출산을 강요당한 선녀의 비극적인 이야기.

...어째서 그 누구도 나무꾼을 비난하지 않을까?

현대에 이런 짓을 하면 사형감이고, 고대에도 강간범이나 납치범이라고 해서 좋게 보지 않았다. 그런데도 아이들이 읽는 전래동화에 떡하니 있다.

어떻게 된 일일까?

간단하다. 조상님들이 악착같이 남긴 경고메시지다.

강간당한 선녀의 실체가 ‘괴수’이기 때문에 그 누구도 나무꾼의 저질스러운 범죄행위를 욕하지 않은 것이다.

“숫자가 장난 아닌데…?”

족히 500마리는 될 것 같았다.

여왕은 따로 없지만, 윈드걸스는 늘 철새처럼 무리 지어서 행동한다. 그래서 ‘바람둥이 소녀들’ 혹은 ‘개구쟁이 소녀들’이라고 불리는 여성형 괴수.

서식지는 고정되어있지 않지만, 남반구(南半球)에 위치한 남아메리카와 아프리카,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에 각각 하나씩의 무리가 살고 있다.

윈드걸스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경’으로도 불린다.

등에 달린 얇은 투명날개 2쌍을 펄럭이며 공중곡예 하는 전라의 미소녀들이 하늘을 가득 메웠다고 상상해보라!

하지만 특징은 그뿐만이 아니다.

“여기서 머물려는 것 같습니다.”

쭉 조용히 있던 사요나락 ‘엔츄 베르테’가 슬며시 끼어들었다.

윈드걸스는 ‘여성형 괴수’다.

지나가던 길에 엘퍼러에게 끌렸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그녀들은 단순히 ‘괴수’이기만 한 게 아니다.

날개를 뜯으면 ‘붉은 피’가 흐르는 인간이 된다.

다시, 비윤리적인 ‘선녀와 나무꾼’ 얘기로 돌아가서….

선녀는 옷이 없으면 하늘나라로 돌아갈 수 없다고 나온다. 그리고 그 옷은 ‘투명한 비단옷’으로 자주 묘사된다.

옷의 정체는?

윈드걸스의 날개다.

“...본의 아니게 남아메리카 명물을 빼앗아가네.”

윈드걸스는 날개를 잃으면 ‘평범한 인간’이 된다. 인간이 되겠다는 다미호의 목표가 허황한 꿈이 아니란 증거다.

겉모습만이 아니라 생식능력도 마찬가지. 전래동화에서 선녀가 나무꾼의 아들과 딸을 낳았다는 것처럼 임신도 가능하다.

하지만 완전한 인간인 건 아니다.

순결과 관계없이 계약할 수 없고, 날개를 되찾으면 다시 괴수로 돌아간다. 그리고 인간인 채 오랫동안 생활하면 요절한다.

나무꾼이 선녀에게 옷을 돌려준 이유라고 할까.

‘아프리카와 오스트레일리아 무리를 합친 것보다 많겠는데?’

그럴 것이다.

이집트에서는 윈드걸스의 날개를 뜯고 노리개로 삼았다. 분노한 윈드걸스가 수도 카이로를 총공격했다가 이즈헬의 모래에 파묻히며 전멸!

오스트레일리아는 약육강식에 따라 자연스럽게 줄어든 경우다. 강력한 터줏대감이 수시로 그녀들을 잡아먹는 바람에 남아메리카로 싹 다 도망쳤다.

아무튼….

윈드걸스의 입주(入住) 대환영!

집주인으로서 얼굴을 내밀었다가 알몸의 미소녀 수백 명에게 둘러싸이는 등의 소소하다면 소소한 사건이 있었다.

선지혜가 또 뭐라고 하겠는걸….

‘어? 무일!’

‘...나도 느꼈어.’

‘반짝이가 이동하기 시작했다.’

한유일은 그녀를 ‘반짝이’라고 부른다.

시커먼 밤하늘(사내)을 빛내는 찬란한 별이라나?

‘그런 것 같네.’

마침내, 레이디 가브리엘의 움직임이 포착됐다.

황진천이 그랬던 것처럼 땅굴을 팔 줄 알았다. 그런데 가브리엘은 당당히 순백의 날개를 활짝 펼치고 날아가는 것 아닌가!

그럼에도 웨딩풍에 설치된 레이더에 잡히지 않았다.

흡혈귀에게 스텔스기능이…?

어째서 가브리엘이 신출귀몰했는지 알 수 있었다. 물론, 그런 괴수가 몇몇 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정령.

엘로엘처럼 실체가 없는 괴수는 레이더에 절대로 잡히지 않는다.

뱀페스트도 순수한 인간과 구분하기 어렵긴 하지만, 첩보위성의 표적이 되면 그 뒤에는 따돌릴 수 없다.

그런데 레이디 가브리엘은 그걸 해냈다!

“고민하지 말고 직접 물어보는 쪽이 좋겠지.”

운전대(?) 없이 목적지까지 자동으로 안전운행하는 웨딩풍이 고도를 낮췄다.

비행과 운송에 특화된 웨일풍은 정말 빨랐다.

원래는 땅에서 사는 뱀페스트보다 비행속도가 느리다면 그게 더 이상하리라.

“아….”

발키지어와 판박인 ‘여성 뱀페스트’가 하늘에서 멈췄다.

천국(天國)을 목격한 천사가 이러할까.

가브리엘은 아담한 연분홍색 입술을 벌린 채 꿈쩍할 수 없었다.

야생에서 ‘괴수’로 꽤 오랫동안 생활하며 다양한 괴수를 보아왔던 그녀지만, 눈앞의 비행체는 가브리엘의 상상력을 아득히 넘어서 있었다.

< [47화-2] 황제의 이름으로. > 끝

ⓒ 파르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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