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처럼-193화 (193/287)

< [47화-1] 황제의 이름으로. >

파르나르 장편소설

괴수처럼 24

[47화] 황제의 이름으로.

학명: 도끼토끼(귀엽다고 만지면 사망)

서식지: 들판

특징: 뭐든지 쪼갠다!

위험도: 8종 소형

비고: 붉은 눈을 조심하자.

***

세계가 한 사람을 중심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털래털래 여행하는 용사소설 주인공이 할 법한 망집(妄執)과 착각이지만, 지구 상의 모든 지역을 3시간 안에 당도할 수 있다면?

대적할 수 있는 존재가 아예 없다면?

엘퍼러는 그 조건에 가장 부합하는 10종 최강자였다.

(브라헨티나 국민 여러분께 인사드립니다.)

브라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 상공(上空)에 웨딩풍을 띄워둔 채 확성기를 켰다.

인사라고 했지만, 그걸 보는 입장에서는 전혀 달랐다.

태양과 구름을 가린 초대형 괴수에서 흘러나오는 엘퍼러의 목소리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주신 제우스를 연상케 했다.

저 거대한 하늘도시(올림포스)에서 쏘아져 지상을 강타한 붉은 레이저(벼락)는 그만큼 상식을 벗어나 있었다.

“오, 마이 갓! 쉣!”

“엘퍼러? 레알 엘퍼러?!”

“코리아 앰페러….”

침략행위 혹은 국가간섭이라고 시비 거는 인간은 없었다.

그런 만용을 쥐어짜기에는 창공을 가린 웨딩풍의 비주얼이나 스케일이 너무나 압도적이었던 까닭이다.

브라헨티나 국민들의 머릿속에는 오직 이 생각뿐이었다.

『같은 인간이 맞을까?』

『같은 남자가 맞을까?』

사람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실패할 수도 있고, 성공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한무일은….

성공이란, 한 단어로 정의할 수 없을 만큼 괴리감이 대단했다. 돈이 많은 재벌이나 국가를 좌지우지하는 권력자보다도 차원이 달랐다.

예를 들자면?

짜장면 배달부가 대통령이 됐다거나….

엘퍼러와 비교하면 현실적으로 가능한 얘기처럼 들렸다.

(이번 사건의 전모를 알려드리겠습니다.)

밑에서 어떻게 생각하든 엘퍼러는 하고 싶은 말만 쭉 했다.

당연히 반응은 가지각색이었다.

국민들은 자신들의 영웅을 욕하거나 동정했다. 그리고 인디오를 인종차별 해서 국력을 깎아 먹은 정부를 비판하거나 침묵으로 일관했다.

공통점이 있다면?

엘퍼러의 설명이 진실인지 반신반의하지 않았다.

저렇게 ‘아쉬울 게 없는 남자’가 거짓말할 이유 없다는 쉬운 공식.

“저들이 믿을 것 같은가?”

“상관없습니다.”

가휜의 질문에 무일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이왕 온 김에 ‘인디오 미녀’들을 구조해서 부산에 정착하도록 할 계획이기 때문이다. 인종차별에 대해서는 실망이나 유감이 일절 없다.

‘어느 나라나 하고 있으니.’

피부 색깔을 뜻하는 게 아니다.

인류는 유전자를 좀 더 세분화해서 ‘미녀냐, 아니냐.’로 여성을 차별한다. 인종처럼 외모로 사람의 가치를 재단하는 것이다.

남자는?

다를 거 없다.

정치인, 과학자 아니면 전부 사냥꾼이 될 운명이다. 서비스업을 비롯한 대부분이 로봇과 여성이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약골(弱骨)인 남성 대부분이 폐기물 취급이다.

(대화를 원합니다, 엘퍼러.)

영상통화 요청을 수락하자 한 남성의 얼굴이 모습을 비췄다.

수려한 이목구비의 백인 청년이었다. 모르는 얼굴.

즉, 초면.

이렇게 보면 누구나 전화번호를 알면 연락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선지혜의 자문단이 걸러낸 엄선된 자들만 이 통신선을 쓸 수 있다.

그래서 무일은 늘 누군지도 확인하지 않고 전화를 받는다.

당연히 중요한 인물일 거란 식이다.

(누구십니까.)

(아차! 실례. 마음이 급하다 보니…. 브라헨티나 수상을 맡은 ‘코펠 브라질리아’입니다. 서로 좋은 일로 만난 건 아니지만, 잘 마무리됐으면 좋겠습니다.)

(어떤 마무리를 원하십니까?)

(저희는 엘퍼러의 행보에 맞출 생각입니다.)

브라헨티나 수상(首相) ‘코펠 브라질리아’가 굳이 영상통화를 고집한 이유는 하나였다.

엘퍼러의 표정.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 어디에서나 들을 수 있었던 엘퍼러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고 불안했다.

영상통화 너머로 자신을 죽일 듯이 노려보는 포르 3세처럼 열을 내면 대처도 달리해야 하는 까닭이다.

물론, 대처라고 해도….

신이나 다름없는 상대에게 정치가 통할 것 같지 않다.

(곧 인명부를 작성해서 귀국의 본부에 전달하겠습니다.)

(역시, 그겁니까?)

(생각하시는 게 맞을 겁니다. 그 인디오 여인들의 관리처분을 저에게 넘기십시오. 죽었다면 시체라도.)

모든 인디오 민족이 박해받던 건 아니다.

요즘이 어느 시대인데….

괴수의 위협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런데 국가 차원에서 국력을 깎는 정책을 펼친다는 건 자살행위 이전에 돌팔매질 당할 만행이다.

그래서 소심하게.

그저 인디오 고위계약자가 나와서 그 가족이 ‘정치’에 간섭하는 상황만 안 생기도록 할 뿐이다. 그래서 미색이 뛰어난 몇몇만 솎아냈다.

‘아까운데….’

코펠 브라질리아는 갈등했다.

엘퍼러가 강행하면 어차피 결과는 같다는 걸 알면서도 협조를 망설였다. 넘기자니 아까운 미녀들이 많았던 탓이다.

브라헨티나 정계에 발을 담그고 있는 사람들은 ‘인디오 미녀’를 첩으로라도 들이는 걸 은연중에 금지하고 있지만, 몸을 탐하는 것까지 막진 않았다.

도도한 고위계약자를 정복한 기분!

이 대리만족에 매료된 정치인 숫자가 적지 않았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엘퍼러. 그녀들의 의사도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부당한 대우를 받은 여인도 있다는 걸 부정하진 않지만, 그건 기술반에서 독자적으로 한 범행입니다.)

(그녀들의 의사는 필요 없습니다.)

(예…?)

브라헨티나 수상은 얼빠진 소리를 내뱉고 말았다.

이건, 괴수대응본부 정보과에서 분석한 엘퍼러의 성향이나 행동방침으로는 나올 수 없는 대답이었던 까닭이다.

엘퍼러는 눈을 가늘게 뜨며 답했다.

(행복은 상대적입니다. 본인이 불행한 창녀인 줄도 모르고 그걸 행복이라고 믿을 수 있다는 점을 저는 간과하지 않습니다.)

한무일이 부산에서 지긋지긋하게 봐온 여자가 창녀다.

하지만 그녀들이 하나같이 인생을 비관적으로 보는 건 아니다. 길거리에서 툭하면 강간당하는 여자들보다는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아니면 태생적인 요인으로 그리된 경우도 있다.

한 여자로 만족 못 하는 남자가 있듯, 한 남자로 만족 못 하는 여자도 있다. 그래서 스스로 창녀가 된 부류도 분명 있다.

어째서 한 남자로, 한 여자로 만족할 수 없는 걸까?

그건 진정한 사랑을 모르고 자랐기 때문이다.

(그, 그건….)

(저는 수상에게 물었습니다. 협조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저항하시겠습니까?)

연맹을 비롯한 수많은 국가가 엘퍼러를 은근히 ‘호구’로 본다. 아름다운 대의명분으로 설득하면 고분고분 따르는….

진정한 용사란 그런 존재다.

그 강력한 힘으로 세계를 지배할 생각은 안 하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귀찮은 사건을 도맡아서 처리하는 자원봉사자.

...틀린 표현이 아니다.

엘퍼러는 분명 그런 경향이 ‘카르 4세’ 때부터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착각하는 부분이 있다.

『엘퍼러는 인류의 편이다.』

너무나 포괄적으로 생각한다.

현재, 그를 움직이게 하는 목적은 ‘강제로 순결을 빼앗긴 인디오 소녀’ 혹은 ‘소녀였던 인디오 여인’들의 구출이다.

그렇다고 분노하진 않는다.

여기서 분노한다면 그거야말로 차별이다.

그녀들은 이미 아름답게 태어나는 축복을 받았고, 그저 운이 나빴을 뿐이다. 순결을 가져가겠다는 사내가 없는 여자가 세상에는 너무나 많다.

(협조하겠습니다.)

(훌륭한 판단이십니다. 그 보답으로 저는, 포르 3세가 브라헨티나의 모든 국민에게 속죄받을 때까지 봉사하도록 할 겁니다.)

가휜은 눈을 크게 떴다.

마찬가지로 본인 의사는 전혀 반영되지 않았던 까닭이다.

하지만 반대하거나 불만을 표시하진 않았다.

포르 3세가 배신감에 몸을 맡기긴 했어도 그건 우선순위가 ‘인디오 민족’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재작년까지 ‘최강의 프로사냥꾼’이었단 사실이 어디로 달아나는 건 아니다.

그의 ‘정의’는 진짜다.

인디오 문제만 없다면 ‘인류를 위하는 용사’다.

(그를…. 믿을 수 있겠습니까?)

코펠 브라질리아는 ‘암살’을 걱정했다.

뒤가 간지러운 정치인이라면 누구나 안고 있는 불안!

프로사냥꾼이 작정하고 암살하려고 하면 어떤 수를 쓰더라도 막을 수 없다. 그리고 포르 3세는 자신들을 굉장히 죽이고 싶어한다.

당연히 무일은 그런 사정까지 고려해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뭘 잘했다고.’

인디오라는 이유만으로도 수많은 여인의 미래와 순결을 강제로 빼앗아갔다.

마음 같아서는 브라헨티나 정치인들을 전부 고자로 만들어주고 싶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건 ‘전쟁’이 돼버리기 때문이다.

물론, 전쟁 시작 1초 만에 끝날 것 같지만, 매번 그런 식으로 처리하면 그 어느 나라의 지도자도 도움을 요청하지 않을 것이다.

그건 좋지 않다.

껴안고 있던 자국의 문제를 ‘엘퍼러의 처분’이 두려워서 꽁꽁 감춘다면, 그 피해와 고통은 고스란히 국민들이 겪게 된다.

그래서 엘퍼러는 수상을 달래듯 말했다.

(포르 3세는 민족의 행복을 위해서 무조건 인내할 겁니다.)

그가 다시 ‘인류를 위하는 용사’가 되려면 최우선순위의 안전이 보장돼야 한다.

같은 업을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무일은 그 사실을 잘 안다. 그래서 ‘인디오 미녀’들을 한국으로 데려가려는 것이다.

...한유일이 ‘미소녀를 놓칠 순 없다!’라고 난리법석을 떤 것도 있고.

코펠 브라질리아는 안도했다.

선택권이 없긴 했지만, 나쁜 제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엘퍼러이기에 생각할 수 있는 ‘무른 조치’였다.

‘인디오에게 자치권을 줘야 한다고 할 줄 알았는데….’

노예해방운동처럼 한바탕 뒤집어놓을 걸 예상했다.

하지만 깔끔했다.

등 뒤에서 무시무시한 프로사냥꾼이 노려보는 불안감을 안고 살아야 하겠지만, 정적이 보낸 암살자의 위협은 늘 있었으니 무난했다.

게다가 포르 3세의 현재 전투력은 ‘7급 사냥꾼’이다.

더는 에쏘스트가 아니지만, 사요나락의 권속이 된 ‘죽음의 기사’라는 점에서 그 효용가치가 더 클 수 있다.

죽지도 않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프로사냥꾼.

도시 방어에 이보다 좋을 순 없다.

(엘퍼러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수상의 협조에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여인들은 30분 뒤에 데려가겠습니다. 준비해주십시오. 그리고 포르 3세는 한국에서 조사를 마친 후에 파견 형식으로 보내겠습니다.)

코펠 브라질리아는 긴장했던 어깨의 힘을 뺐다.

엘퍼러가 ‘파견’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건, 포르 3세가 브라질리아에서 또 문제를 일으키면 엘퍼러가 명령권자로서 책임지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니 이건 일종에 안전보장!

그렇다고 마냥 좋다고도 할 순 없었다.

포르 3세의 국적이 ‘한국’으로 바뀌기 때문에 함부로 대할 수 없다. 외교적으로 이건 대단히 성가신 문제가 맞았다.

그저 이런 일에 익숙한 정치인이다 보니 별거 아닌 것처럼 느껴질 뿐.

(차질 없도록 하겠습니다, 엘퍼러.)

(흠. 뭔가 또 말하려다가 놓친 것 같은데….)

(......)

(아! 브라헨티나를 방문한 김에 귀국의 실수를 대신 해결해드리겠습니다.)

(레이디 가브리엘…?)

코펠 브라질리아는 자연스럽게 이 이름이 떠올랐다.

반드시 생포해서 연구해야 할 돌연변이.

하지만 엘퍼러는 브라헨티나 수상이 ‘그녀는 저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라고 말할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았다.

(이건 따로 보상이나 대가는 바라지 않으니 참고만 하시면 되겠습니다.)

(예….)

안 된다고 죽어도 말할 수 없었다. 세상의 모든 연구자가 가장 탐내는 돌연변이가 바로 ‘엘퍼러’였던 까닭이다.

그 앞에 대고 ‘생체실험’ 뉘앙스를 풍기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엘퍼러의 단호한 태도만 봐도 알 수 있다.

참고만….

반론은커녕 의견조차 듣지 않겠다는 뜻이 확고했다.

(수상.)

(말씀하십시오.)

(인간을 위해 인간이길 포기하면 안 됩니다.)

(......)

(부디, 생각이 많은 하루가 되시길.)

< [47화-1] 황제의 이름으로. > 끝

ⓒ 파르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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