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처럼-192화 (192/287)

< [46화-4] 우리들의 미끄러진 영웅 >

‘굳이 직접 내려갈 필요는 없지.’

웨일풍은 MID 기술이 밀집된 초호화 비행체, 웨딩풍으로 탈바꿈했다.

초강력 레이저빔, 도끼토끼의 합류로 전쟁수행기능 대부분은 생략하고 ‘방어력’과 ‘생존력’을 올리는 쪽으로 개발했다.

웬만한 공격에도 끄떡없고 물자공급 없이 자급자족할 수 있다.

어디 그뿐이랴?

우주나 심해에 떨어져도 탑승객들이 죽지 않도록 내부환경을 ‘우주선’처럼 설계했다. 미국과 중국의 웨일풍에는 없는 기능이었다.

당연했다.

전투력을 포기하며 확보한 여유공간을 활용했으니까.

그렇다고 약한 건 절대 아니었다.

“정밀사격은 자신 없는데….”

도끼토끼 ‘찌르뱅팽’은 당근을 입에 문 채 볼멘소리를 했다.

딱 19세 전후의 사랑스러운 소녀의 모습을 한 그녀는, 눈에 보이는 모든 걸(당근 제외) 파괴하는 쪽을 선호하는 ‘괴수다운 괴수’다.

하지만 그런 투정도….

당근보다 더 좋아하는 황제의 한마디에 사르르 녹아내렸다.

“빼지 말고 해봐.”

“...내 임께서 그걸 원하신다면요.”

고대국가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는, 남아메리카 대륙이 ‘브라헨티나’이란 이름 하나로 통일된 이후에도 수도 역할을 하고 있다.

그 대도시 상공에 도착한 웨딩풍.

에쏘드의 접근전 특성상 요란한 파괴 행각은 벌어지지 않았지만, 거기에 맞서는 헌병대의 MID 무기의 화력이 도시를 불태우고 있었다.

도심에서 괴수토벌이 벌어질 때보다도 상황이 안 좋다.

‘인간을 잘 아는 괴수를 상대하는 기분일 터.’

여성의 기억을 흡수한 괴수는 성가신 정도로 그치지 않는다. 하물며 상대는 ‘프로사냥꾼’으로 이름을 떨쳐온 포르 3세.

수호자와 사냥꾼의 심리를 꿰차고 있다.

끽해야 전투력 7종의 몸으로 요리조리 시가전을 벌이며 수많은 고위괴수와 프로사냥꾼들을 농락하고 있었다.

에쏘드 덕분에 체력은 무제한.

아니, 그렇지는 않았다.

“지치기는 하는군.”

일찌감치 저격당해서 제거된 에쏘드 본체는 검(집)으로 들어간 상태였다.

그래서 발휘되는 능력도 미미한 수준.

카르 4세가 ‘용사의 정령’이 깃들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카르세리안 레이소’를 사용했을 때하고 비슷했다.

기력이 매우 천천히 떨어지고 있다.

“한 방에 날려버릴까요?”

“아니. 우리가 노릴 목표물은 시체가 아니야.”

포르 3세에게 생명을 부여해준 ‘이계의 사요나락’이다.

행성이나 차원이 다른 수준이 아니면 거리의 제약이 없다시피 하기에 찾기란 요원하다. 하지만 방법은 있다.

쥐구멍에 숨어있는 녀석이 제 발로 나오게 하려면?

권속을 강탈하면 된다.

“빼앗아와.”

“네. 소녀가 주신(主神)의 명을 받듭니다.”

사요나락 ‘엔츄 베르테’는 양손을 아랫배 위에 포갠 채 허리를 숙였다.

절대로 죽지 않는 존재를 향한 공경(恭敬).

그녀에게 엘퍼러는, 거역 따위는 가정조차 해선 안 되는 진짜 불사신이었다. 여기에 황제의 지배력까지 곁들어지며 헤어나올 수 없는 상태.

그래서 순종적인 다른 추종자들 이상으로 절대복종하고 있었다.

“...이동합니다.”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듀크마와 함께 웨딩풍에서 강하했다.

왕이 다른 왕의 계약자를 뺏을 수 있는 것처럼.

사요나락은 다른 사요나락의 권속을 강제로 가져올 수 있었다.

에쏘드가 ‘특수기술 면역’이란 능력을 쓰는 건 맞지만, 계약자의 목숨을 유지해주는 기술까지 차단하는 건 아니다.

게다가 이건 외부의 적용이다.

통신선처럼 사요나락과 포르 3세 사이에 연결된 ‘생명선’을 끊어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생명선을 대신 이은다.

‘간단하네.’

브라헨티나를 멸망시킬 기세로 날뛰던 포르 3세가 쓰러졌다.

너무나 허망하게.

실 끊긴 꼭두각시처럼 움직이지 못했다.

곧바로 사요나락 ‘엔츄 베르테’가 ‘미미한 생명력’을 공급해주면서 되살아나긴 했지만, 그야말로 목숨만 간신히 붙어있는 수준이었다.

“소녀, 엔츄 베르테. 막 다녀왔습니다.”

포르 3세를 제압해서 웨딩풍으로 귀환하기까지….

정말 찰나에 이루어졌다.

치하의 뜻으로 사요나락의 가녀린 어깨를 가볍게 주물러준 무일은 맨바닥에서 꿈틀거리는 사내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그의 눈빛에는 인류를 향한 불신과 적의로 가득했다.

“초면이 아니지요, 포르 3세.”

서울에서 터진 ‘황진천의 난’으로 잠시 만났었다.

사건이 대충 마무리되자마자 함께 전투식량을 먹은 사이이기도 했다.

여자(미녀)들이 대우받고 남자들이 천대받는 세상에서, 사나이들에게 이 정도면 충분히 친해질 수 있는 시간과 계기였다.

“...‘가휜’이라고 부르게.”

입술을 꾹 다물고 있던 사내의 입술에서 유창한 한국어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문제는 포르 3세가 별명을, 사냥꾼이길 포기했다는 점이다.

엘퍼러는 자신하고 가장 비슷해 보였던 남자의 변화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그 탓에 무겁게 가라앉은 말투로 날카롭게 질문했다.

“가휜. 무엇이 당신을 이렇게 바꿔놨습니까?”

“달라진 건 없네.”

“당신이 목숨과 바꿔서 지킨 브라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저 꼴로 만들어 놓고도 그런 말이 쉽게 나옵니까….”

“그런 자네도 황진천을 방관한 적이 있잖은가.”

“......”

무일의 입술이 꾹 다물어졌다.

그 한마디로 가휜이 하고 싶은 말을 완전히 이해했다.

『나만의 정의를 관철했다.』

여전히 포르 3세는 영웅이고 용사였다. 에쏘드가 떠나지 않고 계속 힘을 빌려주고 있다는 게 그 증거.

단지, 정의의 방식에 차이가 생긴 것이다.

더 쉽게 표현하면 가치관.

똑같이 인류를 위하는 용사라고 해도, 세세하게 파고들면 목적이나 우선순위에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수 있다.

예로, 카르 4세는?

『아이들이 행복한 세상』

어릴 적부터 애들을 돌보는 걸 좋아하기도 했고, 성지순례 하듯 보육원과 유치원 등을 멀찍이서 구경하는 것도 그런 이유다.

반대로 어른에 대한 인식은 좋지 않다.

인류를 위해 희생하는 엘퍼러도 보호해야 할 대상의 우선순위를 정해뒀다. 공평하게 모두를 지킨다는 건 몸이 수백 개라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 미세한 차이.

포르 3세를 바꿔놓은 결정적인 도화선이 그곳에 있으리라.

“나는 분명 죽었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조국은 내 영혼을 더럽혔네.”

겨우 그깟 일로….

그 말이 튀어나올 뻔했던 무일은 도로 삼켰다.

사람들이 간혹 잊지만, 포르 3세는 ‘인디오의 후예’다.

샤먼이라고 불리는 주술사와 토속신앙이 있고, 사후세계와 영혼에 대해 확고한 의식과 문화를 가진 아메리카 원주인.

그들에게 죽음은 끝이 아닌 영혼의 안식이다.

“그래서 무고한 사람을 해쳤습니까?”

“...카르 4세. 이 남아메리카 대륙에 대해 얼마나 아는가.”

“잡설은 사절입니다.”

“나는 말일세. 핍박받는 우리 민족이 브라헨티나에서 인정받았으면 했네. 그렇기 위해 정부에 협력하고 권력에도 손을 댔으며 영웅도 되어줬지.”

포르 3세도 인류를 위하긴 했다.

하지만 그 구체적인 우선순위는 ‘인디오 민족’이었다.

그게 어쨌다는 걸까?

고대하고 달리 브라헨티나에는 온갖 인종이 살고 있다.

애초에, 순혈(純血) 인디오가 존재하긴 할까? 피부가 하얗거나 검더라도 조상 중에 인디오의 피가 섞였을 확률이 대단히 높다.

“변명은 그게 다입니까?”

“소문처럼 가차 없군.”

꼼짝달싹 못 하는 가휜의 넋두리는 계속됐다.

그건 며칠 전의 회상이었다.

죽었을 터인데 오감과 정신이 뚜렷해졌다. 그리고 그가 처음 본 광경은 ‘아기를 밴 인디오 여인’들이었다.

식물인간이 된 포르 3세와 성교한 전라의 여자들.

하지만 되살아난 그가 느낀 충격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인디오 박해는 다른 형태로 계속돼왔었다.

“저도 사생아라면 꽤 있습니다만?”

대한민국 서울에서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생일은커녕 이름, 성별조차 모른다.

그저 남부럽지 않을 만큼의 생활비를 꼬박꼬박 지원해줄 뿐이다.

“이건, 내 개인의 문제가 아니네! 브라헨티나 정부는 인디오 계약자의 탄생을 원치 않았어! 그녀들은 미색이 드러나기 시작한 순간부터 노리개로, 씨받이로 살아왔지!”

“......”

“이제 알겠는가? 내가 느낀 배신감을!”

브라헨티나는 은밀하게 인종차별을 해왔다는 모양이다.

고대부터 명맥을 이어온 문화와 영혼의 믿음 덕분에 타고난 사냥꾼의 재목(材木)이 많은 전투민족 인디오.

그 능력을 경계한 이방인(다른 민족)들이 은밀히 공작을 벌였다.

인디오 여인의 순결을 미리 끊어서 고위계약자가 나오지 않도록 하고, 사내아이의 출산을 장려하며 사냥꾼 비율을 높였다.

신기하게, 계약자보다 사냥꾼 비율과 비중이 높았던 브라헨티나.

이런 속사정이 있었다.

“그래서요?”

“이런 답답한!”

“아니, 전부 이해했습니다. 특수한 체질이 되면서 제 암기력과 이해력은 괴수 수준입니다. 용신에는 못 미치지만.

“그런데도 내가 분노하는 이유를 모르겠단 말인가!”

“알지만, 시시합니다.”

“뭐…?”

자신의 분투로 민족박해가 사라진 줄 알았는데 은밀히 계속되고 있었다. 그것도 자신의 시체를 대놓고 이용해서.

요약하면 딱 이것 아닌가?

어떻게 되살아날 수 있었는지 의심해보지 않고 무작정 ‘피의 복수’를 시작했다는 것도 충분히 이해했다.

맞다. 이게 전부다.

여전히 ‘인디오 민족’을 위한다는 정의는 있지만, 방식이 글렀다.

이런 방식은 박해를 부추길 뿐이다.

“인디오 여인들의 계약을 막고 출산을 강요받았다는 건 알았습니다. 하지만 이 문제는 보복이 아닌 세계에 호소했어야 했습니다.”

“누가 시체의 말을 믿어준단 말인가!”

“누가 구국의 영웅을 안 믿는다고 했습니까?”

“그…. 그건…….”

포르 3세의 말문이 탁 막혔다.

무일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걸로 명백해졌다. 죽은 영웅은 부활하자마자 끔찍한 광경을 보았고, 충격받은 그의 곁에서 누군가 에쏘드를 건네며 복수를 부추겼다.

“누가 그런 말을 당신께 했습니까?”

“몰라…. 나조차 거의 모르는 민족어(인디오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던 여자였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하지만 상관없다.

엔츄 베르테가 ‘생명선’을 추적해서 이계의 사요나락 위치를 찾았으니까.

그 느낌을 이어받아 [예감]과 [예측]으로 살을 붙인 엘퍼러는, 웨딩풍에 내장된 무수한 첨단장비를 동원해서 해답에 도달했다.

“생포해서 직접 물어보는 걸로…. 음…?”

찾아낸 사요나락은 유감스럽게도 ‘남성형’이었다.

그야 성별이 둘로 나뉜 사요나락이라 확률도 반반이긴 했지만, 포르 3세는 ‘두건으로 정체를 감춘 인디오 여성’이라고 했다.

그래서 당연히 ‘여성형’이라고 단정했었다.

‘그렇다면…. 포르 3세를 말로 농락한 여자는 누구지?’

브라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한참 떨어진 폐허에 숨어있는 ‘이계의 사요나락’은 아무리 봐도 남성형이었다.

여자보다 예쁜 꽃미남하고도 거리가 멀었다.

턱수염 자란 여자가 있을 리 없잖은가?

잡아서 심문한다는 계획을 불가피하게 변경할 수밖에 없었다. 엘퍼러는 ‘남성형 괴수’에게 협조를 받아본 적이 없는 까닭이다.

지상을 내려다보던 중인 소녀에게 지시를 내렸다.

“찌르.”

“네.”

“말이 안 통하는 놈이니 그냥 쏴버려.”

“헤헷….”

도끼토끼의 눈에서 발사된 레이저빔이 지면을 강타했다.

사요나락의 권속들이 서둘러 방어하긴 했지만, 하늘에서 ‘물살을 헤치는 노’처럼 대지를 휘젓는 붉은 광선(光線)에 전부 꿰뚫리고 녹아내렸다.

찌르뱅팽은 마구잡이로 쏘는 게 아니었다.

딱, 유치원생 실력의 그림이 새까맣게 남아메리카 대륙에 새겨졌다.

초대형 당근….

멀리서만 보이는 예술에 세계가 움찔했다.

< [46화-4] 우리들의 미끄러진 영웅 > 끝

ⓒ 파르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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