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화-3] 우리들의 미끄러진 영웅 >
자신감 없는 말투에서 맹주의 고충이 절절히 느껴졌다.
그 비서라는 직책이 전부가 아니었다.
바닷길이 막혔으니 엘퍼러가 직접 그녀를 데려가라는 얘기도 들어있었다. 비행형 수호자를 이용하면 될 문제인 것을….
영국은 그의 방문을 바라는 모양이었다.
잉글랜드 괴수밀집지역이 한 번 뒤집혀봐야 정신 차리지.
(흠…. 목적이 뻔히 보이는군요.)
(무언가 또 요구할 거란 말씀입니까? 제가 편을 드는 건 아니지만, 그 정도로 염치없는 자들은 아닙니다.)
(그보다는 유도하겠지요. 슈퍼-메두사.)
(아!)
손녀 일로 판단력이 흐트러진 걸까.
아몬 헤이젤은 여태 잊고 있던 영국 문제를 떠올리며 반성했다.
영국은 현재, 이제 하나 남은 ‘8종 수호자’ 겸 용신인 와이츠가 전면에 나서서 방어전을 펼쳐야 할 정도로 다급한 상황이다.
그래도 어찌어찌 버텨왔지만, 그 ‘슈퍼-메두사’는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다시 공격해온다면?
이때는 런던의 존망이 위태로워질 것이다.
‘현명하네.’
왕가의 자존심을 굽힐 수 없다. 그렇다고 멸망도 원치 않는다.
그러니 네가 와서 알아서 해결하라는 뜻.
영국의 용신 와이츠의 계획인지는 알 수 없지만, 처리해주기로 했다. 이계의 정세에 대해서는 무일도 궁금한 점이 많았던 까닭이다.
이계의 황녀?
무려 100년이나 지구에서 썩고(?) 있었다! 그 정도면 세상이 몇 번씩 완전히 달라지고도 남을 시간이다.
그러니 최근에 이계에서 넘어온 따끈따끈(!)한 아가씨에게 물어봐야 하지 않겠는가.
(별 탈 없다면 당장 다녀오지요.)
(당장 말씀입니까?)
(네. 영국에서 뭔가 꾸미기 전에 후딱 다녀올 생각입니다.)
왔노라, 보았노라, 데려왔노라.
딱 그렇게 움직일 생각이다.
선지혜가 직접 튜닝(tuning) 한 웨일풍의 이름은 강제로 개명되어 ‘웨딩풍’이 됐다. 무슨 의도로 붙인 이름인지는 뻔했다.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
아무튼, 그렇게 완성된 웨딩풍(!)에는 도끼토끼와 사요나락이 탑승했다. 그녀들의 역할은 전투와 치료였다.
도끼토끼의 붉은 눈에서 쏘아지는 빔을 창공의 웨일풍 위에서 쏘면….
대륙에 우주에서도 보이는 그림을 그릴 수 있다.
순식간에 배틀씹의 폭격기 버전이 완성된 셈!
‘사요나락도 사기인 건 같지만….’
완전한 부활이다.
시체에 ‘생전 형태’가 적당히 남아있으면 부활시킬 수 있다. 그리고 이걸 응용하면 ‘치료’라는 행위도 가능하다.
사요나락의 부활 시스템은 자신의 생명력으로 권속의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다. 당연히 그 과정에서 파괴된 육체도 회복된다.
즉, 애초에 죽지 않은 생명체에 자신의 생명 일부를 심었다가 회수하면 멀쩡하게 회복된다는 뜻이다.
하지만 자주 할 짓은 아니었다.
이건 시체 부활하고 달라서, 사요나락의 생명력 일부가 치료한 ‘생명체’에게 흡수되며 깎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많이.
(정말…. 놀랍군요….)
그런 감상을 내뱉은 맹주였지만 내심은 ‘터무니없잖아!’였다.
사요나락은 그러려니 할 수 있다.
하지만 웨일풍과 도끼토끼의 만남은 ‘환상의 궁합’이었다. 고대의 인류가 인공위성에서 파괴광선을 적대국 머리 위에 쏘았을 때하고 비슷했다.
연사력, 파괴력, 기동력, 방어력….
유지비는 도끼토끼가 먹을 당근 한 박스면 한 달 내내 폭격할 수 있다. 하지만 하루면 지구가 결딴날 테니 ‘지구 정복=당근 하나’가 성립된다!
무엇 하나 나무랄 곳 없는 최강병기.
좀 더 쉽게 말해서….
비행기 탄 여고생(시력 10.0 이상)이 내려다본 풍경이 초토화된다!
(아무튼, 준비가 끝나는 대로 가볼 예정입니다.)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맹주와 통신은 그걸로 종료됐다.
아몬 헤이젤은 이런 문제로 오랫동안 엘퍼러의 시간을 뺏고 싶지 않다는 태도가 역력했다. 다음에 연락했을 때는 좀 더 세계적인 논점을 다루길 고대하리라.
‘빚 하나 지운 셈인가?’
선지혜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랬다.
그런 걸 일일이 따지고 싶지 않았지만, 무작정 퍼주기는 서로에게 득보다 실이 많다는 그녀의 논리정연한 설명에 항복하고 말았다.
아니,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너무 강해져서 한국에 갇혔다는 사실이 기가 막힐 따름이다.
이 무슨 얼토당토않은 상황이란 말인가?
“내가 움직일 수 없다는 건데….”
그렇다면 대신 움직여줄 사람이 필요하다.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는 ‘제자’ 같은 걸 키우는 거지만, 한무일은 ‘카르 4세’ 때부터 한국의 사냥꾼들에게 가진 지식을 베풀어왔다.
하지만 그 누구도 대단한 성과는 얻지 못했다.
정의감이란?
주입식교육으로 되는 게 아니다.
어떤 계기나 경험을 통해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포르 3세라면….’
시신이 아직 남아있다면 사요나락으로 부활시키고 싶다. 에쏘드와 다시 계약할 수 있을지 의문이지만, 가능하다면 금상첨화이리라.
...하지만 그럴 리 없지.
시체를 조종하는 정령, 데빙걸 때문에 사람의 시신은 무조건 불태우게 되어있다. 그러니 ‘브라헨티나의 영웅’은 이제 이 세상에 없다.
그렇게 단념했을 때였다.
전혀 예상치 못한 사건이 속보로 방송됐다.
『죽음의 기사』
죽음이 확실시된 ‘포르 3세’가 되살아났다. 그리고 에쏘드를 휘두르며 브라헨티나에서 대학살을 벌이고 있었다!
이게 무슨 괴사인가?
정답은 간단하다.
황녀 ‘유라 솔리넬 인펠리아’의 생존을 확인하자마자 추적을 계시한 괴수들은 ‘새로운 종’만이 아니었다.
사요나락처럼 이미 알려진 괴수도 있었다.
포르 3세가 ‘이계에서 넘어온 사요나락’에 의해 되살아났다!
“시신을 불태우지 않았어?!”
서둘러 목포로 돌아온 무일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시신을 화장하지 않았다니?
엘퍼러의 경악에 반응을 보인 여인이 있었다. 늘 선지혜가 그 역할이었지만, 오늘은 웨딩풍의 최종점검으로 바쁜 관계로 공석이었다.
짧게 줄인 치마가 노골적인 불량스러운 교복 차림조차 사랑스러운 소녀였다. 망연자실해 있는 무일의 등에 폴짝 매달린다.
“생명유지장치란 거야, 예요.”
“...유키 짱. 그게 정확히 무슨 장치야?”
일본에서 망명했다시피 한 ‘유키나 미나미’는 어리광부리듯 무일의 어깨에 뺨을 비볐다. 헤실헤실 웃는 입가 사이로 달콤한 향기가 흘러나왔다.
그렇게 잠시 혼자만의 꽃밭을 상상하던 소녀는….
한참 후에야 현실로 돌아왔다.
그때까지 묵묵히 기다려준 무일도 용했다.
“생명유지장치. 정확히 말하면 식물인간이야, 예요.”
“말 편하게.”
“하잇! 사람이 죽으면 심장이 멈추고 산소공급이 끊기면서 뇌세포가 파괴돼. 그 뒤에는 인공심장을 이식해서 다시 뛰게 해도 의미가 없어.”
이미 수명의 한계마저 넘어선 인류다. 그래서 당연한지는 모르겠지만, 생명을 되살리는 장치도 용신이 없던 고대에 진즉 발명됐다.
하지만 의사들은 그걸 ‘부활’이라고 하지 않는다.
왜냐?
심장을 다시 뛰게 하고, 죽은 장기를 회복시킨다고 해도….
『뇌(腦)만은 복구할 수 없다.』
경험과 지식이 저장된 뇌를 교체하면 그건 부활이 아니라 탄생이다. 껍데기를 재활용한 ‘신생아’라고 봐도 무방하다.
한 번 파괴되거나 지워진 경험과 지식은 되살릴 수 없다.
그건 이미 과학이 아닌 마법의 영역.
뇌마저 시간을 되감듯 복구시키는 사요나락만의 고유능력이다.
“어째서 포르 3세를 그런 장치로 묶어둔 거지?”
뇌가 파괴된 그는 ‘브라헨티나의 영웅’으로 돌아갈 수 없다. 사냥꾼의 능력을 결정짓는 믿음과 정의는 ‘영혼’에서 나온다.
뇌의 지시를 받는 몸뚱이를 되살려봐야 의미가 없다.
미련일까? 집념일까?
유키나 미나미가 늘어지는, 어딘가 평안해 보이는 말투로 회답했다. 이대로 남자의 등에 어정쩡한 자세로 업힌 채 잠들 것 같은 목소리다.
“잠시만 기다려줘.”
“흠.”
“엑시온이 막 브라헨티나 본부를 해킹했어. 그러니까…. 어머! 조금 낯뜨거운 얘기인데? 포르 3세의 정자로 ‘영웅 2세’를 양산한다는 계획이야.”
이집트 신화에 보면 이런 얘기가 있다.
동생 ‘세트(Seth)’에게 살해된 ‘오시리스(Osiris)’의 아내 ‘이시스(Isis)’가 14조각으로 흩어진 남편의 시신을 모은다.
중요한 이야기는 바로 이다음부터다.
이시스는 죽은 오시리스와 성교(性交)하여 아들 ‘호루스(Horus)’를 낳는다. 그리고 호루스는 성장하여 세트를 물리치고 통일된 이집트의 지배자가 된다.
“영웅 2세….”
신화는 사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다.
당시의 이집트에 사람을 되살리는 기술이 있었다고는 보기 힘들다. 그건 피라미드에 잠든 수많은 미라만 봐도 알 수 있다.
하지만 ‘시체의 정액’을 받아서 여자가 잉태하는 건 가능하다. 굳이 신화가 아니더라도 이미 과학적으로 검증된 사실이다.
남자가 죽었다고 고환 속 정자도 같이 죽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약간 더 오래 산다.
“브라헨티나에서는 죽은 영웅의 몸을 되살려서 정자를 생산하게 할 계획이었어.”
“그는…. 그래, 독신이었군.”
카르 4세처럼 동정(童貞)은 아니고, 힘들 때는 돈을 주고 여자도 안았다. 하지만 아내는커녕 그 흔한 사생아조차 없다.
기적? 조작?
아니다. 정관수술을 했기 때문이다.
정을 준 가족이 생기면 ‘올곧은 정의’를 유지할 수 없는 약점으로 적용된다는 것이 포르 3세의 생각이었다.
아몬 헤이젤만 봐도 알 수 있잖은가?
용신만큼이나 공명정대하기로 유명한 남자가 손녀 때문에 흔들렸다.
‘영웅의 자식이라면….’
훗날, 새로운 영웅이 될 확률이 매우 높다.
삐뚤어진 자식만 아니면 뛰어난 부모를 본받으려는 건 당연하다. 하물며 국가와 국민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위인이라면 더욱.
친부가 포르 3세?
가능성이 매우 높다.
카르 4세만 하더라도 부친이 ‘프로사냥꾼’이라는 이유만으로 햇병아리 시절부터 남들보다 우수한 성적을 냈었다.
믿음.
누군가의 유전자를 이었다는 사실은 그만큼 확실한 보험이다.
브라헨티나에서도 그 점을 노렸으리라.
“하지만 최악의 결과를 불러왔네~.”
유키나 미나미의 지적대로다.
정말 최악이었다.
되살아난 영웅은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었다.
“...유키 짱. 저건 표면적으로 드러난 이유일 거야. 브라헨티나에서 내놓은 변명거리. 사요나락은 시체를 부활시킬 순 있어도 지배하는 능력이 없어.”
그래서 물고문하듯 죽이고 살리기 반복한다.
말 잘 듣는 개가 될 때까지.
하지만 그런 사요나락조차 포기해야 할 때가 있다. 단시간에 부활을 반복하면 정신이 마모되어 망가지기 때문이다.
지적장애가 온다고 할까?
그래서 정신력이 강한 생명체는 오랜 시간 공을 들이던가 일찌감치 포기한다. 사요나락의 호위인 듀크마가 그 대표적인 예다.
‘살짝 맛이 갔다고 했지….’
구슬리다시피 해서 굴복시키기까지 무려 30년이나 걸렸다고 한다. 그럼에도 정신적으로 어딘가 망가져서 약간의 자폐증이 있다.
포르 3세는 어떨까?
절대로 죽음을 두려워할 위인이 아니다.
육체적인 고문이나 굴욕을 당했다면 의외로 쉽게 무너졌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이렇게 단시간에 사람이 바뀔 순 없다.
그렇다면 포르 3세는 자발적으로 저런 만행을 저지르고 있다고 봐야 한다.
부활한 영웅에게 어떤 심경변화가 있었던 걸까?
“자기 정자에 대한 애착?”
“...그런 이유로, 목숨까지 바쳐서 지킨 나라를 파괴하진 않아.”
무일은 직접 나서서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예측]했다.
일본의 싸우잔드도 그렇고, 괴수들의 행동들이 점점 상식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사요나락이 어째서 포르 3세를?
현재, 날뛰고 있는 그는 에쏘스트가 아니었다. 심장과 함께 뱀페스트를 잃으며 즉사! 에쏘드를 쓰고는 있지만, 파티 없이 홀몸으로는 한계가 있다.
분전(奮戰)해도 6종 수준?
사요나락의 능력 덕분에 진정한 의미로 ‘불사신’이란 점에 가산점을 줘도 7종 턱걸이다.
‘이건 사요나락의 방식이 아니야.’
그녀는 ‘인간형 괴수’를 부활시켜서 권속으로 쓴다.
인간을 부활시켜주는 자선사업은 어디까지나 ‘생명력’을 뽑아내기 위함이다. 그리고 시커먼 사내가 아닌 예쁘장한 여인만을 엄선해서 되살린다.
그런데 포르 3세?
무일처럼 여자로 착각됐더라도 있을 수 없다.
에쏘스트도 아닌 영웅은 전투력 측면에서 너무나 약해서 비효율적인 까닭이다. 포르 3세를 감춰놓은 연구소까지 사요나락이 애써 침투한 것도 이상하다.
“뭔가…. 일본과 연관성이 있을 것 같은데….”
남아메리카 대륙, 브라헨티나에 직접 가보면 이 의문점이 좀 더 명확해지리라.
웨딩풍의 시험비행으로 딱 좋았다.
덤으로, 레이디 가브리엘도….
세계에서 가장 무지막지한 폭격기가 태평양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 [46화-3] 우리들의 미끄러진 영웅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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