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처럼-190화 (190/287)

< [46화-2] 우리들의 미끄러진 영웅 >

조지 휴스턴은 수화기를 들어서 0번을 꾹 눌렀다.

한 번도 쓴 적 없지만, 미국에 존속의 위기가 닥치면 망설이지 않고 쓰려고 준비해둔 직통회선이다.

누구에게?

(안녕하십니까, 엘퍼러.)

정말 오랜만에 장시간 동안 아쿠버스와 대화 중이던 무일은 미국 대통령이란 사람에게 온 전화를 받았다.

설마, 또 결혼 문제는 아니겠지?

프로사냥꾼의 [예측]으로 보아선 ‘유라 솔리넬 인펠리아’에 관한 사안이다. 외계인을 임신시킬 수 있는지 실험해보고 싶다는 얘기만 아니면 좋겠다.

(초면이군요. 반갑습니다, 각하.)

(갑자기 연락한 사람을 환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초면이긴 하지만, 세계를 위하는 엘퍼러의 활약은 익히 보아왔습니다.)

가볍게 호칭 정리가 됐다.

둘의 화법은 차이가 뚜렷했다. 한무일은 간결한 편인 것에 반해, 조지 휴스턴은 미사여구를 자연스럽게 붙일 줄 아는 위인이었다.

하지만 불쾌하거나 스스로 낮추는 모양새는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당당하게.

겸손한 태도로 대화를 이끌어가는 중국 국가주석 ‘첸지 죠’의 방식하고는 사뭇 달랐다.

소개는 서로 생략하고 본론으로 넘어갔다.

물론, 생략했음에도 국제정세에 관한 짧은 토론이 섞이면서 상당한 시간이 지난 후였다.

(각하. 이계의 문제에 대한 제 입장은 확고합니다.)

(내부정리 말씀이군요.)

(네. 그리고 보복조치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물론, 이대로 당하고만 있진 않을 겁니다. 하지만 그 방식은 달라야 합니다.)

(그 뜻을 잘 알겠습니다.)

과거의 미국이었다면 우방국이 싫다고 해도 독자적으로 밀어붙였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우방국 같은 단체가 아닌 개인.

전투력으로 따지면 국가보다도 압도적으로 강한 개인이었다. 그리고 그 강함이란, 세계의 모든 국가가 연합해도 이길 수 없다.

10종.

그 상상의 영역을 개척한 괴수의 황제.

게다가 미국 국민들도 불확실한 전쟁보다는 안전한 평화를 원한다. 그 여론을 뒤집으려면 인기 절정인 엘퍼러의 도움이 절실하다.

‘그가 싫다고 하면 어쩔 수 없지.’

조지 휴스턴은 깔끔하게 단념했다.

원치 않는 전장에 나간 군대가 얼마나 오합지졸인지는 역사가 말해주는 까닭이다. 하물며 상대는 영토가 120배의 이계.

보유한 군대와 자원도 120배라고 봐야 한다.

아니, 그 이상!

지구인은 지구의 지배권을 상실했다. 대륙의 90%가 버려졌다.

만약, 이계의 원주민들이 과거의 지구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모든 토지와 해양을 100% 활용하고 있다면?

전투력 차이는 1,200배!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수치(數値)다.

(국내 문제가 마무리되는 즉시, 국외를 돌아볼 계획입니다.)

무일은 유라의 지식을 한세리와 한유나가 익히도록 할 계획이다.

늘 공개만 해왔으나….

미국의 반응으로 보아선 일부 감춰야 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만약, 그 이계가 예상보다 약하다면 ‘침략’을 논하게 될 것이다.

강대국들이 무수한 생체실험을 자행했던 것처럼.

‘레이디 가브리엘….’

‘보고 싶다!’

한유일이 짙은 관심을 보였다.

여성 뱀페스트?

미소녀에 포함하진 않지만, 그래도 호기심이 동하는 모양이다. 현재까지 한유일의 정식 백성으로 있는 여성은 딱 셋.

최은설, 아이밍 리, 유라 솔리넬 인펠리아.

그중 최은설은 계약자이기도 하기에 제외하면 실질적으로는 둘뿐이다.

(혹시, 생각해둔 국가나 범죄자가 있습니까?)

(...전부 소탕하는 걸 목표로 하겠지만, 우선순위로 꼽자면 갱생의 여지가 남아있는 레이디 가브리엘부터 만나볼 생각입니다.)

(과연….)

조지 휴스턴도 그건 궁금했다.

레이디 가브리엘은 ‘여성형 괴수’인가? 아니면 인간인가?

그런 미국 대통령처럼, 기술반장 로빈 윌리엄도 흥미를 느꼈다. 하지만 과학자답게 조금 다른 시각으로 그 결과가 궁금했다.

‘누구의 통제를 받을 것인가?’

여성이라면 인간이든 괴수든 둘 중 한 명에게 끌리게 되어있다.

즉, 엘퍼러의 지배력을 벗어나지 못한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는 그런 것에 관심 없었다. 대통령의 질문에 담담한 어조로 ‘조만간’이라고 답해주고 통신을 마쳤다.

무일은 방금 나눴던 대화를 요목조목 곱씹어봤다.

“포르 3세가 죽다니….”

사냥꾼이라면 누구나 자기 죽음도 늘 가정해야 한다. 그래야 위기의식을 갖고 방심하지 않으며, 가장 중요한 [예감]의 발동조건도 낮아진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안 죽을 것 같은 사냥꾼’도 있는 법이다.

그 예가, 포르 3세.

같은 업을 종사하는 카르 4세로써 한때는 동경했던 남자.

당연히 자신에 버금가는 에쏘스트가 될 줄 알았던 프로사냥꾼은 8종 괴수를 쓰러트리고 작렬하게 산화했다.

허망하고 허탈했다.

‘음? 부재중 통화가 있었네?’

미국 대통령과 대화하는 사이에 괴수대응연맹에서 연락했었다.

최근에는 수송행렬에서 한가롭게 엎어져 있는 게 전부인 무일에게는 이런 전화 한 통화가 단비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좋지 않아.

놀고 있는 건 아니지만, 전력낭비라는 기분을 떨치기 어렵다.

“이럴 때가 아니긴 한데….”

세계가 공포에 떨 것을 저어하여 말하지 않았지만, 문팽이와 싸우잔드의 분위기는 일촉즉발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최악이었다.

늘 눈과 귀를 열어두고 있는 손목시계 때문에 외부로 언급한 적은 없다. 하지만 최근에 보여주는 ‘달팽이 왕’의 낌새는 전쟁을 앞둔 것 같다.

어떻게 알 수 있느냐?

자주 바다에 나가는 쉬임프가 느낌으로 알려줬다.

조만간 한 판 붙을 것 같다고.

‘미치지 않고서야 이럴 수 없는데.’

싸우잔드는 문팽이의 적수가 못 된다.

개인의 역량이나 군대의 전력이나 그 어느 것도 우세하지 않다. 역으로 조금씩 처진다고 보는 게 맞다.

그럼에도 ‘해파리 왕’은 세력확장을 멈추지 않고 있다.

이건 싸우자는 시비.

특히, 부산은 엘퍼러의 영역이다. 무일은 그걸 못 느끼지만, 한유일은 자신의 영토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 정확하게 명시하고 있었다.

이쪽도 침범받고 있었다.

부산을 포함한 약간의 육지와 해안조차 말이다.

‘싸우잔드는 원래 호전적인 왕이라며?’

‘그래도 너무 갑작스러워.’

질 게 뻔한 전쟁을 하려는 싸우잔드의 태도는 상식 밖이다.

시드니에서 크게 약화 된 ‘달팽이 왕’에게도 시비 걸지 않았던 ‘해파리 왕’이,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 중인 ‘까루나 막찌몬쓰’에게 선전포고한다는 건 이치에 어긋난다.

문팽이의 현재 전력은?

8종 셋, 7종 열둘, 6종 서른셋, 5종 이하 생략!

만약, 이 물량으로 상하이를 공격했으면 엘퍼러가 도착하기도 전에 끝장났으리라!

“선지혜에게 끌리다니….”

타고난 왕이 있으면, 타고난 왕의 계약자도 있는 모양이다.

배틀씹처럼 8종 중에서도 최강으로 통하는 특출난 녀석은 없었지만, 그래도 하나같이 태평양을 주름잡던 놈들뿐이었다.

심지어 7종과 6종 중에는 ‘신종(新種)’도 다수 끼어있네?

당연히 비공개 상태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 세계는 일본의 9종 수호자 싸우잔드의 무력도발보다 더한 공포로 벌벌 떨 게 분명하니까!

다행이라면?

문팽이, 선지혜 콤비의 지배력은 이제 한계였다. 단단한 해양생물 군단이 더는 안 늘어난다는 뜻이다.

현재 전력만으로도 이미 대적불가지만.

(바쁘신 것 같은데 괜찮겠습니까, 엘퍼러.)

(뭐…. 위성으로 보셨다면 아시겠지만, 세상에서 가장 한가한 사냥꾼입니다.)

가만히 존재해주는 것만으로도 인류 평화에 이바지하는 셈이지만, 그 당사자는 뭔가 죄짓는 기분을 떨치기 어려웠다.

유라에 관해서는 잠시 접고 다시 일터로.

수송선 천장에 드러누워서 구름이 어떻게 생겼는지 감상 중이다.

서울이나 부산으로 보낼 물자도 슬슬 끝나가기 때문에 이 지루한 일도 곧 끝나지만, 앞으로의 행동도 제약이 계속될 전망(?)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군림』

엘퍼러는 ‘요정의 왕’이다.

인간의 군주라면 상관없겠지만, 괴수의 정점에 있는 그는 이동에도 신중해야 한다. 이전에는 신경 쓰지 않았는데, 중국과 일본을 잠깐 다녀오며 깨달았다.

괴수의 서식지 위치가 바뀐다!

엘퍼러가 그냥 스쳐 지나갔을 뿐인데도 깜짝 놀란 괴수들은 피난 간다. 그리고 돌아가는 대신 피난지(避難地)의 원주인을 몰아내는 쪽을 택한다.

쫓겨난 원주인은?

다른 땅을 또 뺏는다.

그런 식으로 도미노처럼 물리고 물리면 대륙과 해양 전역의 모든 서식지가 조금씩 혹은 엄청나게 변해버린다.

괴수밀집지역을 새롭게 조사해야 할 정도로.

‘세이랑의 도움을 받는 건 앞으로 영영 봉인이고.’

도움이 되고 싶어하는 그녀들에게는 대단히 유감스러운 결단이지만, 가장 큰 피해를 본 곳이 바다라서 어쩔 수 없다.

해로(海路).

기존의 안전한 바닷길이 더는 안전하지 않았다.

특히, 태평양은 문팽이와 싸우잔드, 배틀씹의 ‘대이동’으로 추측할 수 없게 됐다. 배로 태평양을 넘을 수 없게 됐다는 뜻이다.

그 탓에 봉변당한 화물선 숫자가 상당했다.

목포로 이주하기로 되어있던 주민들이 아직 오지 못하는 것도 그런 이유. 바닷길이 막히는 바람에 꼼짝달싹 못 하게 된 것이다.

그 외에도 수많은 이유로….

엘퍼러는 마음대로 해외출장을 갈 수 없는 처지였다.

(왕은 왕좌에 있을 때가 가장 훌륭한 법입니다, 엘퍼러.)

괴수대응연맹 맹주 ‘아몬 헤이젤’이 위로하듯 말했다.

입바른 소리로는 안 들렸지만, 최근에 켕기는 약점이 잡힌 맹주의 모든 언행이 그냥 의심스러운 무일이었다.

실바니아 하이로드.

손녀를 위하는 할아버지는 약했다.

아무리 스스로 세계인이라고 해도 예쁜 손녀의 불행을 모른 척하진 못했다. 아니, 모른 척했다면 인간미 없어서 더욱 나쁘게 보였을지도 모른다.

(해결책은 아니지만, 대비책은 있으니 괜찮습니다.)

(그 대비책이 뭔지 알 수 있습니까?)

맹주의 말투는 정중하면서도 신중했다.

엘퍼러의 일이라면 사소한 것도 중요한 까닭이다.

(곧 웨일풍의 정비가 끝납니다.)

(아! 그렇다면…?)

(맹주의 추측이 맞으실 겁니다. 하늘도 서식지 개념이 있긴 하지만, 항공로는 안 쓰이고 있으니 매번 흐트러져도 별 탈 없을 겁니다.)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이것도 완벽하진 않다.

엘퍼러가 자신의 영지를 벗어났다는 사실이 사라지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곧바로 추종자들이 무기한휴업에 들어갈 것이다.

용신 아쿠버스가 쉬면 목포의 행정업무효율이 절반 아래로 떨어진다.

나머지는 평소에도 낮잠?

그렇지 않다.

엘퍼러의 칭찬을 듣기 위해 매일 30분씩이나 일한다!

아주 많이 일하는 경우라면, 오니오프가 자신의 장기인 ‘꺼지지 않는 불꽃’으로 무공해화력발전소를 가동 중이다.

‘다른 문제도 있지만….’

엘퍼러가 계속 하늘에 있을 순 없다.

의뢰나 목적을 위해 어딘가에 착륙할 것이고, 그러면 그 땅에 서식하는 괴수들은 피난 가게 되어있다.

이건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여전히 통역관으로 활동 중인 ‘판판 소’의 입을 빌린 문팽이의 표현대로라면, 엘퍼러의 [업보]는 밤하늘의 보름달처럼 뚜렷하게 비친다고 한다.

즉, 감출 수 없다.

돌아다니는 것만으로도 또 다른 재앙이다.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무일이 느낀 충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흠흠. 제 손녀 문제로 주책없이 또 연락하게 됐습니다.)

(얘기는 잘 됐습니까?)

(치료법 연구의 피험자를 겸하는 조건으로, 대가 없이 치료해서 영국 런던으로 돌려보낸다는 식으로 풀어봤습니다만….)

(얘기가 잘 안 됐군요.)

무일은 팔짱을 낀 채 푸른 하늘을 멍하니 올려다봤다.

평화롭게 날아가는 돼지들….

플라돈이 어린 새끼들을 기차처럼 줄줄이 달고 이동 중이었다.

‘고질적인 플라돈 트라우마도 아니고….’

생각이 파격적인 일본 천왕도 그랬지만, 왕가(王家)들은 자신하고 맞지 않는 것 같다. 사는 세계가 전혀 다르다고 할까.

당연히 본받고 싶진 않다, 눈곱만큼도.

괴수대응연맹 맹주 ‘아몬 헤이젤’은, 영국 여왕과 왕태자를 설득하느라 기진맥진해진 약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게 마지막 관문.

엘퍼러의 허가를 받아내는 일만 남았다.

(왕가의 복잡한 표현은 생략하고 간결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네.)

(비서로 항상 곁에 둬달라고 합니다. 말 그대로 ‘항상’이기 때문에 치료의 성공 여부와 관계없이 그녀의 귀국은 예정에 없습니다.)

(항상?)

(그래도 잠자리까지는 아닙니다. 영국 왕실도 그 정도 분별력은 있습니다…. 아마도.)

< [46화-2] 우리들의 미끄러진 영웅 > 끝

ⓒ 파르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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