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화-1] 우리들의 미끄러진 영웅 >
[46화] 우리들의 미끄러진 영웅
학명: 사요나락(헤어질 때는 지옥행)
서식지: 일본
특징: 완전한 부활의 정령
위험도: 8종 특수
비고: 멸종위기종
***
한때, 세계의 경찰이라고 불렸던 미국.
그 위상은 괴수대응연맹의 출범으로 많이 퇴색됐고, 엘퍼러의 등장 이후에는 완전히 자취를 감춘 위명(偉名)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강대국이란 점은 부정할 수 없다. 만약, 용신이 미국에 있었다면 오랫동안 세계 1위를 이집트에 넘겨주지 않았으리라.
워싱턴, 필라델피아, 뉴욕, 보스턴을 이은 거대한 도시.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 규모는 미국의 건재함을 상징한다.
“백설공주라….”
한유일은 ‘무조건 비밀!’이라고 했지만, 이미 손목시계로 미국에 알려진 후였다.
엘퍼러의 부주의?
그것도 부정할 수 없지만, 처음부터 비밀로 할 생각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지구가 이렇게 된 원인이 ‘수정 속 여인’에게 있으리라고는 예상도 못 했었고.
그만큼 아쿠버스의 설명은 충격적이었다.
“각하는 어떻게 보십니까?”
미국 대통령 ‘조지 휴스턴’은 기술반장의 물음에 잠시 사색에 잠겼다.
외계인의 도주극으로 비극이 시작된 거?
분명, 분노하는 사람도 나오겠지만, 벌써 100년도 더 된 얘기다. 하물며 그 외계인 ‘유라 솔리넬 인펠리아’가 직접 침공을 명한 것도 아니다.
판단은 괴수가 했다.
더 엄밀히 따지면 모든 원죄는 그 차원이동문이란 것을 빠르게 닫지 않은 마법사(?)에게 있으리라.
“이계가 더 흥미롭군.”
그랬다!
지구의 120배에 달하는 광대한 영토의 외계인 행성.
미국 서부개척시대하고는 비교조차 안 되는 터무니없는 스케일이다.
시공간을 넘나드는 차원이동은 MID 기술로도 불가능하지만, 이미 괴수라는 생명체의 등장으로 그러려니 하고 있다.
차원이동만 할 수 있다면….
굳이 영토를 지구로 한정하란 법은 없다.
달과 화성에 건설한 우주기지가 괴수의 공격으로 초토화되지 않았다면 인류는 지금도 끊임없이 확장을 시도했으리라.
“받은 만큼 되돌려줘야 합니다.”
기술반장 ‘로빈 윌리엄’은 눈에 힘을 줬다.
미국이 자랑하던 ‘NASA(미국항공우주국)’의 후신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 괴수대응본부 기술반’은 수많은 엘리트가 모인 인류의 자존심이다.
지혜의 결정체인 용신 없이도 인간이 이만큼 진보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하겠다는 사명의식이 투철하다고 할까.
그래서 그 기술반 반장인 ‘로빈 윌리엄’의 성향도 ‘인류만능주의자’.
인간은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 심지어 마법마저도!
그 산증인이라고 할 수 있는 ‘엘퍼러’의 열렬한 광신도이기도 했다.
“어떻게 가느냐는 둘째치고 전면전이 되면 이길 수 있다고 보는가?”
“가능합니다.”
대통령의 우려에 확신에 찬 어조로 답한 반장.
믿는 구석이 있었다.
아쿠버스가 언급한 ‘회귀본능’이 바로 그 자신감의 원천!
잘린 팔을 복구한 아담이 그 증거다.
이계로 넘어간 지구인에게 괴수 같은 재생력과 면역력, 회복력이 생기고 원주민은 약하다면 승산은 충분하다.
물론, 여기에는 치밀한 사전준비가 필수다.
과학기술이 지구보다 압도적으로 뛰어나다면 정복보다는 화평을 생각해봐야 하잖은가?
‘그렇진 않겠지.’
차원이동기술이 있음에도 여태 사용하지 않았다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도주할 때 쓰기에는 너무 거창한 기술 아닌가?
즉, 지구를 침공할 수 없는 근본적인 문제를 껴안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우리(지구인)는 그 약점이라고 할 부분을 찌르고 들어가야 한다.
조지 휴스턴은 턱을 쓰다듬었다.
“흐음…. 이계의 원숭이가 지구로 넘어와서 쑨우쿵이 됐다는 건가?”
“저희가 아는 평범한 원숭이 정도는 아닐 겁니다.”
이계에서 물리법칙이 적용된다는 전제하에.
지구의 1,300배 질량의 행성이면 생명체에게 가해지는 중력도 어마어마하다.
괴수와 외계인 외형이 심해어(深海魚)처럼 괴상망측하지 않은 걸로 보아선 별 차이 없을 것 같기도 하지만.
중력이 ‘1.1배’만 되어도 완전히 달라진다.
그 환경에 적응한 ‘이계의 소녀’가 ‘지구의 사냥꾼’을 팔씨름으로 이길 수 있을 만큼!
“하긴…. 일부 괴수는 고유능력이 있으니.”
용신의 MID는 역공을 부추기는 것 아닐까?
음모론까지 떠올린 조지 휴스턴은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용신이나 괴수들의 태도로 보아선 ‘지구인’을 그리 높이 평가하는 것 같지 않다.
3차 세계대전 당시에 일방적으로 당한 것만 봐도 미덥지 않은 게 사실이고.
“각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뭘 말인가.”
“외계인의 처우는 엘퍼러에게 맡긴다고 하더라도, 현재 지구를 공격하는 괴수들은 명백히 지시를 받고 온 침략행위입니다.”
“...그렇게 말하니 SF 같군.”
언어란 참 재미있다.
흉흉한 괴수를 ‘외계 생명체’로 정의하는 순간, 모든 게 달리 보였다.
막연했던 적의 실체를 알게 된 것 같다고 할까!
이러다가 괴수대응본부가 ‘외계대책본부’로 그 명칭을 바꾸는 게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생각마저 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역공을 하고 싶은데….’
차원이동기술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쓸 수 있는 괴수가 어딘가에 있을 것 같기도 하지만, 아직은 발견된 사례가 없다.
그래도 어쩌면…?
요술을 부리는 여우나 도깨비는 가능할지도 모른다. 대마법사라고 불리는 8종 괴수 ‘듀크마’도 수상하긴 매한가지.
이계 진출은 우주개척만큼이나 유혹이 강렬했다.
아니, 우주정거장의 천문학적인 유지비를 떠올리면 이쪽이 훨씬 매력적이다.
“엘퍼러는 어떻게 할 것 같은가?”
“지구의 문제부터 해결해야 한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흐음…. 무려 120배에 달하는 영토를 상대로 방어전을 하면 고사할 게 뻔한데…. 지금처럼 막기만 해선 승산이 없어.”
물론, 그렇게 비관적인 것만은 아니다.
대표적인 예가 중국.
엘퍼러의 도움으로 강력한 수호자 다수를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만이 아니다. 다양한 대회를 개최해서 사냥꾼의 실력을 끌어올리는 중이다.
거기에 교육프로그램.
인위적으로 용사가 만들어지는지는 아직 검증되지 않았지만, 이 또한 엘퍼러가 조언했었던 만큼 실패로 끝날 것 같지 않다.
“그렇다고 공격만이 능사는 아닙니다, 각하.”
“자네의 지적에 반박할 수 없다는 사실이 답답하군.”
인류는 내부에서부터 무너지고 있었다.
겉으로는 ‘새로운 종’의 출현으로 우왕좌왕 중이라고 변명했지만, 실질적인 피해는 테러리스트로 전향한 ‘배덕자’가 주고 있다.
가상현실을 현실로 속인 용사양산프로젝트.
그 첫 희생자라고 할 수 있는 ‘다윙 밀리언’이 폭로하고 다니는 바람에 인류의 전력은 늘긴커녕 상대해야 할 적만 많아졌다.
그냥 실패도 아니고 대실패!
“레이디 가브리엘도 문제입니다.”
“브라헨티나에서 민족통합정책 다음으로 손꼽히는 최악의 결과물….”
제주도에서 된통 당하고 한동안 잠잠했던 ‘여성 흡혈귀’는 남아메리카로 돌아왔다. 그리고 또다시 파괴 행각을 벌이고 있었다.
주로 연구소와 훈련소, 군수창고 등을 부순다.
본인은 무고한 시민에게 피해 안 준 정당한 ‘복수’라고 생각하겠지만, 브라헨티나의 국방력이 떨어지면 괴수의 위협에 노출된다.
그뿐이랴?
이미 남아메리카 대륙 전체에 계엄령이 선포되며 세금이 올랐다. 그 부담은 전부 브라헨티나 국민이 떠안아야 한다.
“저희도 조심해야 합니다.”
미국은 북아메리카의 패자. 그 위에 캐나다가 있긴 하지만, 고대부터 이어져 온 방대한 영토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도시국가, 개발도상국이다.
캐나다는 수도 ‘오타와’를 잃고 해안도시 ‘몬트리올’에서 미국의 원조로 버티며 간신히 국가의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도….
미국도 영토 80%를 괴수에게 내줬다는 점에서 캐나다와 큰 차이는 없다.
“가브리엘은 우리도 공격했었지.”
짜증 나게도 브라헨티나는 물귀신 작전을 펼쳤다.
레이디 가브리엘이 습격하리라 짐작되는 장소에 ‘거짓 정보’를 뿌렸다. 그녀를 개발하는 ‘실험’에 미국도 협조했다는 식으로.
브라헨티나에서 그랬다는 증거는 없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여성 뱀페스트’가 미국을 공격할 이유가 전혀 없다.
미친 년이긴 해도….
시민을 위하는 척하는 걸 보면 최소한의 판단력은 달고 사니까.
무분별한 테러하고는 차이가 있다.
“브라헨티나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일 겁니다.”
인디오의 후예, 포르 3세, 드래곤 슬레이어 등으로 명성이 자자했던 ‘브라헨티나의 영웅’이 장렬하게 전사한 탓이다.
근래에 구한 에쏘드로 무난하게 에쏘스트가 됐지만, 새로이 출현한 미확인 8종 괴수와 동귀어진하고 만다.
카르 4세가 주목받기 전까지 ‘최강의 사냥꾼’으로 불렸던 영웅의 허망한 죽음!
봉변은 정말 예고 없이 찾아왔다.
그래서 미국도 ‘캡틴세븐’이 그리되지 않도록 신중을 기하고 있었다.
“하아…. 망할 녀석들.”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각하. 가브리엘이 뱀페스트의 한계를 넘어선 6종이라고 해도, 캡틴세븐은 7급 프로사냥꾼. 상대가 안 됩니다.”
“방심은 금물일세.”
“물론입니다.”
브라헨티나처럼 엉망진창이 될 순 없다.
일본에 이어 이 나라도 분단의 조짐이 보였던 까닭이다.
남성의 권위를 대변하는 노블레스를 대단히 혐오하는 아마존 여왕…. 반란군 사령관인 ‘그레이트 아마존’이 그 주체다.
레이디 가브리엘을 지원해주는 흑막!
즉, 만만치 않다는 뜻이다.
‘이계를 노릴 때가 아니군.’
미확인 고위괴수의 등장으로 아프리카와 호주는 초상집 분위기고, 유럽과 아메리카도 강력한 테러리스트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그나마 숨통인 트인 대륙은 아시아.
이조차도 동아시아권의 한국과 중국, 일본으로 한정됐다.
“일본은 어떤가?”
9종 수호자를 둘이나 보유하며 겉보기에는 세계 2위의 강대국으로 급부상한 일본.
기술반장 로빈 윌리엄은 꺼림칙하다는 말투로 답했다.
“...기고만장해졌습니다.”
“또 천왕인가.”
아쿠버스는 죽이고 싶을 만큼 외계의 황녀가 개차반이라는데, 일본의 왕도 여기에 못지 않다는 것이 미국 대통령의 생각이다.
일본의 평화를 위해서라도 진짜 암살해버리고 싶다!
희소식이라면?
천왕이 ‘폴리검 사용자’가 됐다는 점이다.
한국에서 공식발표를 하기 무섭게 일본에서 공개했다. 실제 시기로 따지면 일본이 더 빨랐을 게 분명하다.
음흉하게 비밀로 했을 뿐.
“천왕이 어딜 봐서 ‘기사’인지 모르겠습니다, 각하.”
“나도 그게 의문일세.”
한유일은 폴리검을 ‘기사의 검’이라고 했다.
계약자는 따로 있고, 그 계약자를 지키는 남성에게 힘을 빌려주는 구조.
잘못된 정보가 아니다.
이계의 황녀 ‘유라 솔리넬 인펠리아’의 수호기사였던 아담처럼, 검을 변신시키고 방패도 소환하는 한유일은 신뢰할 수 있다.
그에 반해, 천왕의 폴리검은 지극히 단순하다.
일본에서는 공개를 극구 회피하고 있지만, 변신유지시간이 지극히 짧고 방패와 석상은 아예 코빼기도 안 보인다.
“에쏘드의 필살기 조건처럼 ‘기사도’가 딸리기 때문일 겁니다.”
“그럴 거야. 천왕은 아내조차 돌보지 않지.”
자기밖에 모르는 남자다.
그런 자가 ‘계약자를 지키는 기사’라고는 전혀 생각되지 않는다. 하지만 여기서 의문이 하나 생긴다.
그럼, 일본의 폴리검 계약자는 누구?
그 누군가 천왕을 선택했기 때문에 폴리검을 다룰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천왕은 폴리검을 ‘기사의 검’이 아닌 선택받은 혈통만 쓸 수 있는 ‘왕의 검’이라고 주장 중이다.
쉽게 말해서, 자신이 계약자라는 것이다.
“본인도 당황한 모양이더군요.”
“하하! 당황할 만도 해. 괜히 자랑했다가 사냥터로 떠밀렸으니.”
천왕은 국민의 여론 탓에 반강제로 왕궁이 아닌 본부에서 머물게 됐다.
본인이 8종 계약자라면?
당연히 여기에 합당한 일을 해야 한다.
위대한 왕을 찬양할 줄 알았던 여론이 이상하게 흘러가며 깜짝 놀란 천왕이 ‘내가 곧 일본인데 어찌 위험한 일을….’라고 했다가 공분을 샀다.
자기 무덤 파는 재능이라도 생긴 걸까?
젊었던 시절에 ‘일본의 영웅’으로 추앙받던 남자 같지 않다.
“그렇다고 해도…. 일본이 강해졌다는 건 변함없습니다. 수도 도쿄가 반파되긴 했지만, 그 흔한 테러리스트 하나 없습니다.”
“그건 그래. 부러운 일일세.”
얘기는 다시 ‘유라 솔리넬 인펠리아’로 돌아왔다.
그녀의 비밀을 세계에 알릴 것이냐는 문제다.
물론, 엘퍼러가 알아서 하겠지만, 슬슬 미국도 중국처럼 친분을 다질 연결점을 만들어둬야 할 때라고 판단했다.
멋진 시계 하나로 퉁 치는 건 어림없다!
“이럴 때는 정면돌파가 최곱니다, 각하.”
“...말 나온 김에 바로 연락하지.”
“각하께서 직접 하실 겁니까?”
“안 될 이유도 없지 않나. 조금 멀리 내다보며 120배 영토가, 지구인의 미래가 걸린 문제이기도 하니.”
< [46화-1] 우리들의 미끄러진 영웅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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