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화-4] 세상의 중심 >
용사가 아니어도 쓸 수 있는 괴수!
그건 대단한 강점이다. 힘들게 ‘용사! 용사! 용사!’ 이럴 필요가 전혀 없는 까닭이다.
폴리검의 조건은 특이했다.
에쏘드처럼 계약자에게 힘을 주는 게 아닌, 보호자에게 힘을 준다!
그래서 ‘기사의 검’.
현재까지 발견된 폴리검은 총 4자루다. 그중 2자루는 한국과 일본이 각각 보유 중이고, 나머지 둘은 아프리카와 유럽을 떠돌고 있다.
“특성이 다 다르단 거군?”
피로를 해소한 무일은 턱을 쓰다듬으며 정기보고를 받았다.
칼날은 각각 다른 형태로 변한다.
하지만 방패가 등장한 폴리검은 한국이 유일했다. 그 대신, 나머지 3자루의 폴리검은 공통점이 있었다.
검의 파수꾼으로 추정되는 석상!
일본은 어째선지 석상이 사라졌지만, 유럽과 아프리카를 떠돌며 공포로 몰아넣는 중인 폴리검은 그렇지 않았다.
‘석상 아니면 숙주란 건데….’
불행인지 행운인지 일본은 그 둘을 전부 겪어봤다. 그리고 유럽은 추방자 여성이 쥐며 혼란에 빠졌고, 아프리카는 석상이 난동 중이다.
여기에 한유일은 놀라운 정보를 덧붙였다.
현재, 무일은 거추장스러운 방패를 메고 있지 않다. 그건 폴리검도 마찬가지. 그렇다면 이 둘은 어디에 있을까?
해답은 뒤편에 있다.
『파수꾼』
석상이 양팔로 폴리검을 꼭 껴안은 채 졸졸 쫓아다니고 있다.
세계 최강의 절단기 ‘엔타리얼 치프트’도 단숨에 두 동강 낸 칼날은, 칼집이 없음에도 석상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다.
칼이 자신의 집 혹은 본체나 다름없으니 당연할지도?
한유일은 저 석상을 ‘방패’로 보고 있다.
그렇게 한 세트!
타국에서는 무시무시한 석상으로 통하지만, 한국의 파수꾼은 낯가림 심한 ‘기사의 종자(從者)’ 같았다.
“화장실까지 쫓아오는 건 좀 봐줘.”
“......”
석상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참으로 별난 괴수.
그 계약자인 ‘유라 솔리넬 인펠리아’도 그랬다. 수동적으로 행동하는 현재 상황이 아니라 그녀의 출신과 상황이 그랬다.
간단히 정의하면?
『백설공주』
공주보다는 황녀라고 할 수 있다.
이계에 존재한다는 거대한 제국의 딸!
상세하게 파고들면 전래동화하고는 차이가 뚜렷하지만, 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계모(繼母)의 흉계로 영원한 잠에 빠졌다는 공통점이 있다.
왕자의 키스는…. 흠….
흡혈귀의 흡혈로 대처 됐다.
“그래서?”
“빠끔, 쫓기는 몸이도다.”
아쿠버스 ‘산드라미아 레미’가 간단명료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말처럼 ‘아, 그래?’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길 문제가 아니었다. 이계의 황녀님이 지구로 도망치며 생긴 문제 탓이다.
『괴수』
유라의 뒤를 추적해온 ‘이계의 생명체’다.
적대적이냐고 묻는다면?
전래동화 백설공주에 나오는 일곱 난쟁이처럼 황녀를 보호하려는 의도가 강했다. 하지만 그 마음은 이계에 넘어오는 순간….
증발했다.
본토(本土)에서는 ‘평범한 동식물’ 취급이었던 괴수들은 이계(지구)에서 대단히 강해졌다. 이건 상대적인 문제가 아니다.
『물리법칙 무시』
그게 엄청난 시너지를 발휘했다.
대표적인 능력이 ‘재생력’과 ‘생명력’이다. 이계의 간섭을 안 받으려는 ‘회귀본능’이 무시무시한 ‘복원능력’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그 결과가 현재.
지구의 첨단무기가 통하지 않는 괴수들의 세상이 도래했다.
“라미아. 어째서 너희는 이 사실을 함구한 거지?”
“...빠끔, 부끄러운 진실은 누구나 묻어두고 싶은 법이도다.”
“허!”
“빠끔, 황녀가 진즉 죽었다고 단정했었노라.”
파고들면 대단히 복잡했다.
그래도 최대한 간단히 정리하자면?
유라 솔리넬 인펠리아를 찾기 위해 이계로 넘어온 괴수들은 난감해졌다. 그녀가 이계(지구)의 어디에 있는 줄 알 수 없을뿐더러 ‘황녀’처럼 생긴 여자들이 무척 많았다!
우와! 이런 행복한 고민이!
황녀는 잊고 자신만의 보석을 찾기 시작했다.
“이거…. 알려지면 곱게 못 죽겠는데….”
지구에 재앙을 뿌린 원흉.
엘퍼러는 그런 여인을 보며 신음을 삼켰다.
물론, 유라에게 직접적인 죄는 없다. 살고 싶어서 도망친 걸 죄라고 할 수 있을까? 잘못이라면 그녀를 뒤쫓아온 후에 온갖 악행을 저지르고 다닌 수많은 괴수에게 있다.
하지만 원인제공자.
그 타이틀이 너무나 컸다.
3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죽은 무고한 생명이 너무나 많아서 도저히 용서받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절대로 비밀이다!’
‘유일…?’
‘나는 지구에서 태어났기에 그딴 사정에는 관심 없다! 그저, 가여운 미소녀가 눈앞에 있으니 지켜줄 뿐이다!’
‘...그런가.’
무일은 격하게 주장하는 한유일을 다시 보게 됐다.
늘 미소녀만 밝히는 흡혈귀인 줄 알았는데, 책임감도 남달랐다. 어쩌면 이런 태도가 여자들을 끌어모은 게 아닐까?
권능 비슷한 페로몬 영향도 있겠지만.
“빠끔, 우리는 앞으로도 쭉 함구할 생각이노라.”
지구의 매력에 심취한 괴수들이 유라를 배신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녀에게 해가 될 정보를 발설할 정도로 의리 없진 않다.
그것이 용신을 포함한 괴수들의 입장.
애초에 자신들이 지구에서 깽판 치지 않았으면 아무런 문제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전혀 무관하다고 할 수 없다.
본인들도 밝혀지면 부끄럽다고 할까.
“그런데 내게는 말했다는 거네.”
“빠끔, 쭉 모른 척할 수 없었노라. 황녀가 살아있는 한, 언젠가 밝혀질 진실.”
“...대단한 여자였군.”
본토에서는 약했든 어쨌든, 지구에서는 실질적인 지배자로 군림한 괴수들이다.
한둘도 아니다.
3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괴수가 동시다발적으로 출몰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말만 ‘황녀’일 뿐이고 실질적으로는 ‘동물의 왕국 여왕님’쯤 하던 게 아닐까?
라미아는 쓰게 웃으며 부정했다.
“빠끔, 황녀를 찾으러 온 녀석들은 극소수다.”
“그, 그래?”
“빠끔, 대부분은 열린 차원이동문으로 넘어온 끄나풀이노라. 그 커다란 고래가 넘어올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큰 구멍이었도다.”
워낙에 컸던 탓에 도착지점도 제각각이었다.
지구의 일정 위치가 아닌 무작위로 발견된 것도 그런 연유다.
라미아가 설명한 고향행성의 크기는 지구의 약 1,300배. 태양계에서 가장 큰 행성인 목성(木星)하고 맞먹는다.
좀 더 쉽게 말해서….
사람이 살 수 있는 토지 면적이 지구의 120배에 달한다고 보면 된다.
‘...그 동네에서는 재앙도 재앙처럼 안 보이겠는데.’
대륙이 붕괴하는 위력도, 뒷산이 무너지는 정도로 보일 것 같다.
지구에서 대륙이라고 불리는 땅은 ‘섬’으로 치부되고, 지구 표면적의 5배가 넘는 ‘판게아’쯤 되야 대륙이란다.
스케일이 너무 커서 따라잡기 힘들구먼!
아무튼, 그런 세계에서 넘어온 황녀님이 위기에 빠졌다는 게 중요하다.
“최근에 등장한 괴수들은 암살자라고 봐도 돼?”
“...빠끔, 여황(女皇)의 추종자도다.”
“그 계모? 괴수인가?”
“빠끔. 아니. 인간이노라. 하지만 대단히 특별한 인간이도다. 멍청한 하등생물의 표현을 응용하자면 ‘다중계약자’라고 할 수 있노라.”
그대하고 비슷한….
산드라미아 레미는 뒷말을 삼켰다.
굳이, 어느 쪽이 더 뛰어나냐고 묻는다면 주저 없이 ‘엘퍼러’라고 답할 수 있다. 그래서 괴수들이 그를 가리켜 ‘존재해선 안 되는 왕’이라고 하는 것이다.
고향이 아닌 타지에서 태어난 ‘황족’이라니?
그 지배대상이 ‘여성형 괴수’로 대단히 편중적이지만, 그 지배력은 고향의 그 어떤 황제와 여황보다도 압도적으로 뛰어나다.
어느 정도냐?
『속수무책(束手無策)!』
가만히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풍성해진다.
괜히 그녀(추종자)들이 편안한 침실과 침대를 놔두고, 딱딱한 복도와 거실 등에서 온종일 퍼질러져 있는 게 아니다.
그 장소들은 모두 연관성이 있다.
『황제가 자주 다니는 공간』
다른 이유는 없다.
인간들은 자신들이 ‘괴수라서 아무 곳에서나 잘 자는군?’이라고 무례한 추측 중이지만, 감각이 발달한 그녀들은 인간보다 훨씬 환경에 예민하다.
당장, 라미아만 해도 호수에서 생활할 수 없는 현재가 대단히 꺼림칙하다. 하물며 소금기 가득한 바닷가?
정말 최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평불만 없이 잘 지내는 이유는?
황제가 함께하기 때문이다.
“흠. 그럼 유라도?”
“빠끔, 당연하도다. 하지만 그녀를 따르던 추종자들은 전부 떠났노라. 남은 거라고는 뒤에 그 쇠붙이뿐.”
폴리검을 가리키는 아쿠버스.
그녀는 어느 쪽이냐고 물었더니 호기심에 차원이동문을 넘었다고 한다. 고향에서도 인간하고는 접점 없이 호수에서 평화롭게 살았었다나?
그야말로 극소수!
황녀를 따르던 무리는 그녀의 탈출을 돕는 과정에서 전멸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그 여황은 어째서 유라를 죽이려 하는 거지?”
“빠끔, 질투 때문이노라.”
“...거울아, 거울아. 세상에서 누가 가장 아름답니, 같은 이유인가?”
“빠끔? 무슨 말인지 모르겠도다.”
계모는 애지중지하던 추종자(폴리검)를 황녀에게 빼앗겼다.
덤으로 사랑도.
현재, 중국의 흉계(?)에 빠져서 가상현실세계를 구르고 있는 아담. 그는 고향행성에서도 손꼽히는 뛰어난 기사라고 한다.
덤으로 여황이 사랑하던 상남자!
계모는 정략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황제의 여자가 됐지만, 황제가 복상사로 요절하면서 다시 사랑을 쫓으려 했다.
하지만 이미 사랑은 안녕!
아담은 자신이 아닌 다른 여자를 수호하는 기사가 되어있었다.
“즉, 사랑이 문제였다는 거네.”
“빠끔, 그건 사소한 이유에 지나지 않노라. 그 기사 나부랭이는 끽해야 에쏘스트보다 조금 강한 수준이노라.”
목성 크기의 행성에서 손꼽히는 기사라던 아담. 하지만 기사 나부랭이….
아쿠버스의 평가는 가차 없었다!
그 고향행성에서도 남자는 찬밥신세라는 걸 단편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럼 뭐가 문제인데?”
이어진 아쿠버스의 대답은 상상 이상이었다.
순정만화의 여주인공이 강간당한 심정이 이러할까!
“빠끔, 황녀가 상당히 밉상이노라. 생긴 건 얌전해 보여도 성깔이 대단하도다. 대화 내내 말투에서 그 성격이 묻어났노라.”
“하아?”
“빠끔, 오븐에 넣은 6분 통닭처럼 구워버리고 싶었도다.”
“그 정도로?!”
마음씨 착한 백설공주 따위는 없었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당연하다.
아무리 자기 배 아파서 낳은 딸이 아니라고 해도, 신데렐라와 백설공주처럼 계모에게 학대당하라는 공식은 없다.
자신보다 더 아름다워서?
못생긴 딸을 키우는 것보다야 보람 있다. 딸을 데려가겠다는 남자가 없어서 시집 못 보내는 것보다는 100배 낫지 않은가!
그러니 이건 자업자득.
괴롭히는 걸 넘어서 죽이고 싶을 만큼 밉상인 모양이다.
‘그, 그래도 지켜줘야 한다!’
당황한 한유일이 서둘러 옹호하기 시작했다.
미소녀의 영원한 아군!
어째서 폴리검이 오랫동안 동고동락해온 아담을 버리고, 대뜸 ‘하렘의 왕’을 택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무일은 쓰게 웃으며 동의했다.
“성격이 얼마나 개차반인지 모르겠지만, 여자는 사랑을 알면 변한다더라.”
그 흉악한 미녀우월주의자 ‘아이밍 리’조차 고분고분하게 만들었다.
목덜미에 송곳니가 박힌 시점부터 반항은 불가능해졌지만.
...문제없겠지?
무일은 ‘선지혜’를 또 한 명 떠안은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 [45화-4] 세상의 중심 > 끝
ⓒ 파르나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