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화-3] 세상의 중심 >
‘오차란 없다.’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믿음’이 살짝 흔들렸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건 어쩔 수 없다.
저 수정의 ‘굴절률’에 따라서 안의 여성 위치가 얼마든지 바뀔 수 있으니까. 맨눈으로 파악한 위치보다 더 멀 수도 있고 가까울 수도 있다.
하지만 망설임은 없다.
그 불확정 요소를 제거해주는 것이 [예감]이니까. 위기가 아니긴 하지만, 이까짓 ‘여자 옷 벗기기’ 난이도는 애들(?) 장난이다.
우우웅-!
카르세리안 레이소 형태를 한 에쏘드로 빛이 모여든다.
평범한 에쏘드로 조각 깎듯 작업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엘퍼러는 눈앞에 수정을 정말 순식간에 해체할 생각이다. 혹시라도 수정이 깨지면서 가녀린 여성의 몸도 함께 깨져나갈 것을 염려한 것이다.
거울을 자르듯이.
선지혜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외쳤다.
“마기나로크!”
순백의 광선이 수정을 꿰뚫는다. 그리고 섬세하게 칼끝을 움직이며 잘라간다. 하지만 그 속도는 아주 대충하는 것처럼 신속하고 거침없었다.
그렇게 해서 수정은 완벽히 해체됐다.
‘유일, 뒷일을 맡긴다….’
‘나만 믿어라!’
정신력의 고갈로 무일은 깊은 수면에 빠졌다.
자연히 육체를 넘겨받은 ‘하렘의 왕’은 수정에서 해방된 ‘이브’의 가벼운 육신을 잽싸게 안아 들었다.
그 뒤는 자연스러웠다.
누군가 말릴 새도 없이 송곳니를 목덜미에 꽂았다!
한무일은 일단 여성이 깨어나면 차근차근 설명하며 협조를 받아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한유일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잘했어, 하렘 씨. 쉽게 가자고.”
선지혜는 처음부터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말투로 싱긋 웃었다.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다니….
웬만한 ‘미소녀’였다면 넘어갔겠지만, 이브의 외모는 선지혜처럼 독보적이었다. 각자 개성이 뚜렷해서 비교할 순 없지만, 대단한 강적!
그러니 일찌감치 숙청(!)해버리는 것이다.
한유일은 안고 있는 이브를 내려다보며 눈썹을 찡그렸다.
“잠깐만. 이 아가씨 이상해.”
“왜?”
“몸에 이상한 마법이 덕지덕지 붙어있다. 자력(自力)으로는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하도록 정신이 봉인되어있다.”
“흐응~. 선배의 보호본능을 자극하려는 속셈이려나?”
처음부터 이 상태였던 이브가 그런 생각을 했을 리 없다.
하지만 선지혜는 나쁜 방향으로 추리했다.
한유일은 골몰히 생각하더니 여태까지 한 번도 쓰지 않았던 권능을 사용했다. 만나는 미소녀마다 전부 친절하기도 했지만, 쓸 마음도 없었던 기술!
“눈을 떠라.”
각인을 심은 여인에게 움직이도록 명령했다.
자기 힘으로 못 움직인다면 강제로 시키면 장땡!
봉인이 너무 두터워서 풀 순 없지만, 외부에서 행동을 지시하는 식으로 회피할 순 있다. 하물며 한유일은 뱀페스트 왕!
강력한 저주와 훼방도 왕의 권능을 막진 못했다.
스르륵….
이브의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조심스럽게 떠졌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마치 다음 지시를 기다리는 휴머노이드처럼 한유일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이래서는 마리오네트하고 다를 바 없었다.
당연히 이런 결과를 원치 않았다.
스스로 ‘미소녀의 편’이라고 생각하는 ‘하렘의 왕’은 다음 명령을 내렸다.
“자유롭게 행동하라.”
“아응….”
하지만 이브는 심한 두통을 느끼듯 얼굴을 찡그리더니 그대로 혼절해버렸다!
권능을 웃도는 봉인이라니…?
바로 ‘깨어나라.’라는 명령에 복종하긴 했지만, 자유의지로 무언가를 하기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 과정을 끝까지 본 선지혜는 대단히 성가시게 됐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래서는 살아있는 인형인걸.’
이슬만 먹고 사는 여자일 리 없다. 아니, 이슬만 먹더라도 언젠가 소변은 봐야 한다.
그걸 일일이 지시해야 한다면?
먹고 싸는 일상생활부터 잠자는 마무리까지 전부 명령해야만 생명유지가 가능하다면 대단히 손이 많이 갈 게 뻔하다.
선지혜는 한유일에게 물었다.
“명령권자를 바꿀 수 있어?”
“가능하다. 하지만 말귀를 못 알아듣기 때문에 소용없다.”
“아하~.”
아담처럼 ‘용언’을 쓴다면, 지구의 언어로 말하는 명령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한유일이야 입으로 말하긴 해도 그녀의 영혼에 직접 지시하는 거나 다름없기에 괜찮지만, 외부에서 하는 주문은 그렇지 않다.
정확한 의사소통이 가능해야 한다.
“일단은 정보부터 듣는 쪽으로 하겠다.”
“제법인데? 맞아. 그게 우선이야.”
장소를 옮겼다.
물론, 도중에 깨어난 한무일이 돌아오면서 계획이 살짝 변경됐다. 자신의 몸을 움직일 수 있든 없든 이브의 안정이 최우선이라고 판단한 까닭이다.
하지만 모든 행동에 지시가 필요하다는 건 대단히 번거로운 일이었다. 특히, 어엿한 숙녀에게 ‘꽃을 꺾고 오세요.’ 같은 말을 해야 할 때가 최대 난관이다.
그것도 한두 번이지….
사람이 하루에 화장실을 얼마나 자주 들락날락하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다.
‘어떻게든 수를 써야겠군!’
이브의 본명은 ‘유라 솔리넬 인펠리아’로, 역시나 용언이었다.
이름인 ‘유라’는 별 뜻이 없고, 성 혹은 칭호라고 할 수 있는 ‘솔리넬 인펠리아’는 ‘성스럽고 고귀한’쯤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무일의 감상은 그저 그랬다.
사람의 기준으로는 ‘아주 많이 예쁜 처자’가 되겠지만, 괴수까지 포함해서 객관적인 시선으로 보면 평균이다.
그 평균이란 심미안이 ‘최대치’라는 게 함정이지만.
“빠끔, 그대는 성가신 문제가 있을 때만 나를 찾도다.”
“...매일 본다고 생각하는데, 라미아.”
용언을 쓸 수 있고, 같은 여자에 해당하는 적당한 인물이 있다.
산드라미아 레미.
수많은 남성 추종자(?)를 거느린 용신, 아쿠버스는 단아한 자태를 뽐내는 ‘유라’를 위아래로 쓱 훑어봤다.
이미 명령권은 넘어간 상태.
유라에게 ‘이 여성의 지시를 따라라.’라고 한마디 해준 걸로 끝났다. 하지만 지속성이 짧아서 이틀에 한 번씩 재명령해줘야 한다.
그래도 온종일 돌보는 것보다야….
“빠끔, 스트우비 아크포무다 체이드리.”
“...뭐라고 지시한 거야?”
“빠끔, 대단히 거슬리니 당장 몸을 가린 것들을 벗으라고 지시했도다.”
“뭣이라?!”
괴수의 눈에 비친 인간의 옷은 거추장스러움을 넘어 거슬리는 모양이다.
유라는 스스럼없이 옷을 벗었다!
하지만 완전히는 아니었다. 몇 가지 단어의 조합으로 세세한 표현이나 묘사가 가능한 용언답게 장신구 같은 것들은 남겨뒀다.
알몸이 된 유라는 ‘이게 사람이야, 괴수야?’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분간 안 되는 굴곡을 과시했다.
선지혜와 극명하게 다른 점이군….
인간적인 그녀와 달리, 유라는 완벽한 괴수 몸매였다.
“빠끔, 거창한 이름이랑 달리 별거 없도다.”
“뭘 기대한 거냐….”
“빠끔, 벗겨보니 우리와 다를 게 없다는 걸 새삼 알 수 있었노라.”
“우리?”
“빠끔, 그대가 이끄는 암컷들.”
“...처음부터 모든 걸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들리네. 이 여자도, 이 상황도.”
“빠끔, 조급해하지 말았으면 좋겠노라.”
유라가 아는 정보를 금방 정리해준다고 약속한 라미아.
웬만하면 저 음성보조장치부터 어떻게 손써주고 싶은데, 용신인 그녀는 대단히 바쁘다. 그녀가 업무에서 손을 떼면 목포가 삐걱거릴 만큼.
엘퍼러가 장시간 목포를 비워둘 수 없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왕이 보고 있지 않으면 추종자인 그녀들은 ‘귀찮은 일’을 일절 하지 않는다.
선지혜의 폭주도 대단히 걱정되고….
‘갑자기 누군가 쳐들어오진 않겠지? 유라를 납치하거나 암살하려고.’
‘무일. 네가 걱정하면 꼭 현실이 된다.’
‘...그렇다면 걱정만 하지 말고 거기에 맞춰서 대비하는 게 맞겠지. 너도 당분간은 자유시간에 유라를 돌봐라.’
‘내 검은?’
세계 최강의 절단기가 절단됐다.
엔타리얼 치프트.
장인정신으로 유명한 일본에서 자랑하던 ‘스콜레옹 포르소 차기작’은 얼마 써보지도 못하고 고철로 전락했다.
현재, 친위대에 보급된 무기가 바로 이 ‘엔타리얼 치프트’다. 사들인다고 돈이 억수로 깨졌지만, 목포시가 벌어들이는 돈에 비하면 푼돈이나 다름없다.
여긴 그냥 땅 한 뼘이 다이아몬드다.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땅』
이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
재앙이라고 일컬어지는 ‘8종’이 무려 열 마리나 살면서 지키고 있으니까. 9종이 쳐들어와도 안전하다.
심지어 ‘일방적인 공격’으로 유명한 ‘우주형 괴수’조차 상대 안 된다. 가장 성가시고 절망적인 괴수지만….
『마기나로크』
그 말도 안 되는 ‘에쏘드 필살기’가 사실임을 입증했다.
우주에서부터 빠르게 추락하던 7종 별똥별 ‘안드로다’를 정밀하게 저격해서 아무런 피해 없이, 흔적 없이 소멸시켰다.
꼭 엘퍼러가 아니더라도 된다. 태평양에 대기 중인 배틀씹, 눈에서 레이저가 나가는 도끼토끼도 우주형 괴수를 요격할 수 있다.
그런 수호자가 우글거리는 목포!
당연히 누구나 그런 도시에서 살길 바란다.
‘엔타리얼 치프트라면 여유분이 있을 텐데?’
‘싫다! 저번에 죽을 뻔했다!’
‘엄살은.’
‘더 좋은 무기가 필요하다.’
더럽고 치사하다고 할 수 있지만, 부자들이 가장 먼저 목포를 꽉꽉 채웠다. 월세가 아무리 바가지라도 자신과 가족의 목숨보다 귀하진 않으니까.
...좀 더 까놓고 말해서, 아무리 비싸 봤자 그들에게는 그리 부담스럽지 않은 가격이다. 역으로 돈 쓸 장소를 만들어 달라고 투덜댈 정도다.
세상이 불공평해?
그걸 이제 알았다는 사실이 유감스럽다.
하지만 자금시장이 굴러감으로써 부산은 빠르게 성장 중이고, 엔타리얼 치프트를 다수 팔았던 일본은 도쿄 복원에 힘쓸 수 있었다.
‘뭘 원하는지 바로 답이 나오네.’
‘슈퍼-검! 왕에게 어울리는 무기다!’
아담이 사용한 무기. 그리고 일본에서 연구 중인 또 한 자루가 여기에 해당한다.
학자란 작자들이 발견한 사실이라고는 ‘장비형 괴수’라는 것뿐.
무슨 조건을 충족해야 변신하는지에 대해서는 갈피도 못 잡는 중이고, 심지어 현미경으로 들여다본 재질마저 오리무중이다.
하지만 한유일이 말한 ‘슈퍼-검’이란 호칭은 잘못됐다.
가장 먼저 발견된 ‘새로운 종’답게 이미 정식 학명이 붙은 까닭이다.
【폴리검 / 8종 특수】
하라는 연구는 안 하고 그럴싸한 이름만 붙이는 걸까?
괴수대응연맹의 두뇌란 작자들은 전부 이쪽으로만 특화된 인간들이란 생각과 편견을 지울 수 없었다.
무일은 짧은 고민 끝에 답했다.
‘네가 제대로 사용할 수 있다면. 솔직히 말해서, 괴수가 괴수를 다룰 수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거든.’
‘흥! 두고 봐라. 그리고 괴수란 표현은 너희, 인간의 관점이다.’
‘그야 그렇지.’
하지만 명백히 다른 종인 것도 사실이다.
은색 피.
지구에는 없던 생명체란 가장 뚜렷한 증거다.
아무튼, 진전 없이 연구비만 까먹는 중인 ‘폴리검’을 변신시킬 수 있으면 허락하는 걸로 얘기는 일단락됐다.
그리고 말 나온 김에 곧바로 시도!
“앞으로 조금만 더 연구하면!”
“연구비를 좀 더 지원해주시면!”
“이제 뭔가 잡힐 것 같은데!”
아우성치는 연구자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폴리검을 쥐어봤다.
당연히 반응이 없었다.
이미 ‘에쏘드’가 있는 무일에게 다른 검이 반응한다는 것도 우스운 일이리라.
그리고 그건 ‘용사의 정령’인 한세리와 한유나가 대단히 섭섭하게 생각할 뿐만 아니라 그 ‘용사’인 한무일도 원치 않는다.
일단은 선수교체.
겉보기에는 평범한 장검(長劍)에 지나지 않는 폴리검을 몇 번 휘둘러본 한유일은 ‘호오~!’라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건 깨달음이라고 할까!
‘이건…. 미소녀를 보호하는 ‘기사의 검’ 같은데?’
한유일은 ‘하렘의 왕’이다.
세상 모든 미소녀를 보호하겠다는 마음으로 충만하다!
분명, 계약은 아니었다.
하지만 폴리검은 그의 의지에 반응을 보였다!
엄밀히 따지면, 폴리검은 ‘유라 솔리넬 인펠리아’의 수호자로서, 그녀의 보호자 겸 주인(主人)인 한유일을 인정한 것이었다.
스르륵….
얇은 칼날에서 방패가 튀어나왔다. 엘퍼러의 마기나로크 공격을 받고 소멸했던 바로 그 방패와 판박이였다.
그걸로 그치지 않고 폴리검에서 흉흉한 톱날이 돋아났다.
자신에게 죽음의 위기를 안겨줬던 무기의 재현!
한유일은 경악하는 연구자들을 뒤로하고 연구소를 빠져나오는 내내 ‘검방(劍防) 세트’를 만지작거렸다.
지금의 기분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호오라~.”
< [45화-3] 세상의 중심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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