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처럼-186화 (186/287)

< [45화-2] 세상의 중심 >

무일은 웬 전화인가 싶었다.

엘퍼러의 중요성을 생각하면 언제 ‘친한 척’해도 이상하지 않지만, 영국을 응징해야 한다고 난리법석인 선지혜를 말리느라 정신없는 현재는 영 상대해주고 싶지 않다.

갑자기 웬 결혼?

게다가 조건 비슷한 잡설도 덕지덕지 붙였다.

애가 태어나면 국적과 계승권은 어쩌고저쩌고 뭔 내용이 그리 많은지….

(결혼 얘기 빼고 말씀해보십시오.)

(...죄송합니다.)

(맹주도 딸이 있습니까?)

(영국 하이로드 왕가의 여식이 제 손녀 됩니다.)

아몬 헤이젤의 음성에는, 이런 일로 연락하고 싶지 않았다는 말투가 절절하게 묻어나 있었다.

무일은 뭐라고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부모가 자식을…. 흠. 손녀를 걱정하는 건 당연한 행동이다. 하지만 단순한 걱정인지는 두고 볼 문제였다.

솔직히 잘 이해가 안 됐다.

‘왕족이란 게 그렇게 대단한 건가?’

영국의 행동은 ‘선지혜’를 만만하게 본 만용하고는 좀 달랐다.

가치관의 차이라고 할까.

왕실은 ‘실바니아 하이로드’을 ‘대단한 미인’ 이상으로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그 사고방식이 이것저것 갖다 붙인 정략혼 조건에서 느껴졌다.

당연히 거절할 생각이다.

수호자가 죽었다고 해서 앞으로 영영 계약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선지혜가 그랬던 것처럼 새로운 수호자를 찾으면 그만.

‘넌 바보냐? 마비됐다잖아.’

‘...깜빡했네. 계속 언급을 피하는 바람에 잊고 있었어.’

영국 왕실은 영악했다.

왕녀의 값어치를 최대한 높게 올리려고 애썼다. 그 화술에 무일은 그녀가 처한 상황을 잠시 망각하고 말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정략혼은 처음부터 생각 없었지만.

맹주에게는 뭐라고 하는 게 좋을까?

(정확히 무엇을 바라십니까?)

(그 아이의 행복입니다.)

아몬 헤이젤이 거기까지 얘기했을 때였다.

갑자기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단아하고 아름답지만 듣는 것만으로도 심장마비를 걱정하게 하는 여인의 미성. 너무 황홀해서가 아니라 순수한 공포 때문이다.

(맹주, 오랜만.)

(...선지혜 시장.)

(공사다망한 선배가 답하기 귀찮아해서 내가 대신하려고. 정말이야. 집에 요녀들이 많아서 정말 정신없거든.)

(그렇습니까….)

선지혜의 말투는 생기발랄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하지만 괴수대응연맹 맹주는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식은땀을 손등으로 닦으며 어느 때보다도 대화에 집중했다.

말 한마디 잘못하면 도시 여러 개가 증발할 수 있다는 중압감!

전화 상대는 수천만 목숨쯤 아무렇지 않게 죽이며 웃을 위험인물이다. 흉악한 테러리스트와 사이코패스가 귀엽게 느껴질 정도.

여성형 괴수에 가깝다고 할까.

(길게 얘기 안 할게.)

(흠. 예.)

(왕녀를 목포로 보내. 당연히 정략혼 같은 게 아니야. 치료되든 아니든 보호해줄게. 여기에는 별의별 능력의 요녀들이 많으니 어떻게든 될걸?)

(아…….)

(싫으면 관둬.)

(아닙니다!)

그걸로 통화는 종료됐다.

맹주가 아닌 선지혜가 먼저 끊은 탓이다.

그녀는 딱히 ‘정의’ 같은 미확인 심성에 눈을 뜬 게 아니었다. 그저 ‘내 남자’가 좋아할 법한 상황을 연출한 것뿐.

선지혜에게 살짝 여유가 생긴 덕분이었다.

남자는 죽어도 모르는 여자들만의 서열경쟁.

그 옛날, 황제의 여자들이 치정(癡情) 싸움을 했던 것처럼, 목포 시청사에서는 도시를 수백 번쯤 증발시킬 뻔한 전국시대가 있었다.

여기서 선지혜는 난세를 평정한 승자(勝者).

‘깍두기가 신경 쓰이지만.’

여자아이라는 사기적인 보호막을 가진 최은비만 여기서 빗겨갔다.

나머지는 괴수든 인간이든 선지혜보다 ‘밑’이었다.

즉, 엘퍼러가 ‘앞으로 너만 내 여자!’ 같은 특정한 발언을 하지 않는 한, 선지혜가 본처 위치란 뜻이다.

“선배. 나, 잘했어?”

“흠. 나무랄 곳 없이…. 어디 아픈 건 아니지?”

“아닌걸! 멀쩡해.”

“그럼 다행이고.”

무일은 그녀가 괜찮다고 하니 걱정하지 않기로 했다.

최근, 그의 관심사는 부산과 서울을 넘나들며 정신없었다. 사람 사는 일이 다 그렇지만, 한 가지만 하면서 살 순 없다.

그 햇병아리 같았던 문세웅이 결혼하네?

신부는 산후조리 중인 ‘장혜린’이었다. 그녀가 뱀페스트 남작에게 감금된 사건을 계기로 만났으며, 이후에 와이츠 정책으로 급전개가 이루어졌다.

결혼보다 출산을 먼저 했으니 신호위반을 제대로 한 셈!

‘올해는 결혼하는 해인가?’

별로 주목받지 못했지만, 특공대 부대장 ‘타로 8세’도 결혼한다.

상대는 홍영희.

남자 잘못 만나서 파란만장한 인생을 걷고 있던 전직 여기자다. 그리고 작년에는 유산(遺産)이란 아픔까지 겪은 미망인.

그 아픔을 달래줄 든든한 사내를 만났다고 할까?

아니면 이승필이 노리고 저격한….

과정이야 어떻든 홍영희에게도 좋은 일만 있기를, 무일은 진심으로 빌었다. 과거가 사라지는 건 아니지만, 과거만 보며 살 순 없기 때문이다.

어디 그뿐이랴?

평생 동정일 것 같았던 친구놈도 결혼한다.

“흐응~. 선배, 또 생각했지?”

“뭐…. 찬호 녀석이 나보다 먼저 결혼할 거라고는 [예측]조차 못 했었거든. 초식남 주제에.”

그렇다! 정비과 엄친아도 결혼한다!

올해는 정말로 뭔가 있는 게 분명하다고 무일은 생각했다.

배우자는 ‘연상의 전직 계약자’다.

이름은 송선영.

부산을 50년 동안 지켜온 6종 계약자이기도 하다. 일명 ‘황진천의 난’이라고 불리는 사건에서 수호자를 잃고 본부에서 대기하던 중….

드라마 같은 만남이 있었다고 한다.

복도 모퉁이를 돌다가 충돌했는데, 서로 ‘운명의 반쪽’이란 느낌을 받았다나 뭐라나.

연애는 건너뛰고 곧장 결혼이다.

‘이젠 말릴 수도 없고….’

정찬호는 벌써 침 바르듯 말뚝까지 박고 동정 딱지를 뗐다.

본인의 소원대로 고위계약자와 결혼하게 된 셈.

전화로 ‘나, 결혼한다!’라고 알려온 친구에게 ‘축하한다.’라는 답변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행복지수가 ‘MAX’인 녀석에게 찬물을 끼얹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생각처럼 쉽지 않다고, 이 친구야.

전직 계약자였던 아내를 둔 남편들의 삶은 평탄하지 않다.

『괴수 같은 여자』

계약이 깨지면서 많이 순해지긴 하지만, 그 영향이 전혀 사라지는 건 아니다.

대표적인 성향이 ‘전부 아니면 전무’.

그래서 전직 계약자들의 사랑도 매우 극단적인 경우가 많다.

한 번 꽂힌 남자에게 대단히 헌신적이지만, 남편이 딴 여자에게 한눈파는 조짐이 보이면 용서 없는 사생결단에 들어간다!

어디 그뿐이랴?

금전적인 문제도 생각해야 한다.

계약자로 호화롭게 살아온 그녀들의 씀씀이는 대단히 헤프다. 국가에서 지급해주는 연금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뭐…. 돈 문제는 괜찮으려나?’

애초에 돈이 궁해서 괴수대응본부에 온 녀석이 아니었다.

정찬호는 ‘가족의 복수’를 위해 정비과에 들어갔다. 아주 진부한 동기지만, 그만큼 명확한 목적의식이기도 하다.

하지만 좋다고 할 순 없다.

복수.

그 결말이 좋았던 적이 없었던 까닭이다.

부디, 결혼하고 자식이 생기면 복수를 잊고 ‘새 가족’에 충실했으면 좋겠다.

“선배. 이번에는 표정이 안 좋은걸?”

“좋은 일이 있으면 안 좋을 일도 떠오르는 법이니까.”

이번에는 결혼 문제가 아니다.

무관심하게 넘어갔던 친위대 명단을 본 이후부터다.

물론, 쿠데타 주범인 수색대장 임길석이 뱀페스트 숙주로 쓰인 건 당연했다. 하지만 여기에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름이 끼어있었다.

『유지수』

잘생긴 외모로 나름 유명했던 탄약공장 사장!

계약자 혹은 수호자의 광기에 휩쓸려서 일가족 전체를 잃은 피해자다. 그리고 카르 4세에게는 동생 혹은 아들 같던 녀석이기도 하다.

하지만 복수 때문에 자멸했다.

‘그렇게 얌전히 있으라고 주의 줬거늘…!’

지난 ‘황진천의 난’ 당시에 쿠데타 무리에 살상무기를 제공한 혐의가 뚜렷했던 유지수는, 형식적인 법정도 생략하고 곧장 이곳으로 보내졌다.

그리고 뱀페스트 숙주가 됐다.

사냥꾼은 아니지만, 종합적인 능력을 인정받아서 ‘공작’ 겸 ‘친위대 참모’란 높은 지위를 얻었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람?

몸뚱이만 유지수고 알맹이는 거머리인데.

“선배가 자책할 필요는 없는걸.”

“알아. 다만, 좀 더 녀석에게 신경 썼다면 삐뚤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을 떨쳐버리기 힘드네.”

“그럼 앞으로 잘해주면 되잖아.”

“앞으로라….”

“육체의 지배권을 잃더라도 정신은 살아있어. 죽을 때까지 영원히 갇혀있긴 하지만.”

무시무시한 얘기는 태연하게 하는 선지혜.

하지만 그녀의 말이 옳다.

몸뚱이에 잘해주면 ‘유지수’도 그걸 느낄 수 있다.

박민혁이 그랬다.

오랫동안 선유나를 괴롭혀온 흡혈귀 공작.

죽기 전에 해방된 숙주는 뱀페스트가 자신의 몸으로 저지른 악행을 전부 공유하고 있었다. 그래서 절망했고 참회했으며 순순히 죽음을 받아들였다.

유지수는 어떨까?

“인류를 위해서 봉사하고 싶지 않을 것 같은데….”

“그건 친위대 전부가 그럴걸?”

“하긴….”

그걸로 안 좋은 얘기는 일단락됐다.

과거의 지인이 잘못된 일로 질질 끌기에는 세상이 너무나 험난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 어딘가에서 사람이 죽어가고 있다.

가족과 도시를 지키기 위해.

그러니 지인이란 이유만으로 범죄자 따위를 애도할 의리는 어디에도 없다.

엘퍼러가 떠올려준 것만으로도 영광으로 알아야지!

“부산은 순조로운걸.”

친위대는 본격적인 활동을 계시했다.

수색대장이었던 ‘임길석 대장’은 그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옆에서 보좌하는 ‘유지수 참모’도 전투경험 빼면 못지 않았다.

여기에 마지막 공작.

친위대에서 가장 강하다고 평가받는 중이다.

『장준호』

본명은 ‘하오 쟝’으로 중국인.

바로 그 인간이다!

선유나의 피를 이은 여기자 ‘홍영희’를 유혹했던 중국의 첩자. 죄목(罪目)은 임길석과 유지수처럼 거창하지 않았다.

단순히, 단체생활에 적응 못 하는 부적응자라고 할까?

하오 쟝은 홍영희의 희생으로 ‘장준호’란 한국 이름을 새롭게 받으며, 모든 죄를 청산할 수 있었다.

즉, 한국인.

그래서 와이츠의 정책을 따를 의무도 있었다.

거기까진 괜찮았는데….

사냥꾼 훈련소로 강제징집 된 장준호는 병영생활을 잘해내지 못했다. 실력이 너무 뛰어난 탓에 사방에서 미움받은 경우라고 할까.

『화산파』

중국 무림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문파.

매화가 아름답게 피어나는 ‘도사들이 사는 산’이라고 하지만, 까놓고 보면 ‘싸움 잘하는 인간’을 길러내는 전문훈련소나 다름없다.

장준호는 그곳에서 배우며 자랐다.

무림인들이 내공이라고 부르는 [예감]을 쓸 수 없어서 화산파에서는 퇴짜를 맞았지만, 그래도 그에게 한국 괴수대응본부 훈련소의 질은 대단히 낮게 보였다.

그래서 교관에게 사사건건 시비!

끝내는 목포 수용소까지 흘러들어왔다.

‘부족한 [예감]을 뱀페스트의 [예지]로 대처했다고 했던가?’

자신(?)의 결함을 극복한 장준호의 실력은 진짜였다.

무려 ‘7급 프로사냥꾼’으로 평가받는 중!

이젠 부산은 크게 걱정할 필요 없다. 뛰어난 세 공작의 활약으로 자급자족은 물론이고 치안까지 확보됐다.

레이더로 8종 야생괴수의 접근만 경계하면 된다.

그래서 나타나면?

그때만 목포에서 도와주면 별 피해 없이 해결되리라.

굳이 엘퍼러가 안 나서도 된다. 어떤 야생괴수가 침입하든 압도적으로 밀어버릴 수 있는 전력이 항시 목포 시청사에서 꿀잠 중이다….

“이젠 봉인을 깨볼까.”

“선배. 정말로 할 거야?”

“해야지. 보험도 들어놨으니 망설일 이유가 없어.”

여태까지 이브를 가만 놔뒀던 이유는 최악의 상황을 무시 못 했기 때문이다.

수정이 깨지자마자 죽을 가능성!

하지만 시체를 ‘완전히’ 부활시킬 수 있는 8종 추종자 ‘사요나락’ 덕분에 더는 걱정할 필요가 사라졌다.

죽으면?

바로 살려내면 그만이다.

‘세계의 비밀이 풀릴까?’

기존의 상식을 깬 새로운 괴수의 등장으로 세상은 혼란에 빠졌다.

어쩌면 그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엘퍼러는 반투명한 수정 속에 든 여인에게 에쏘드를 겨눴다. 그 어느 때보다도 신중하게.

< [45화-2] 세상의 중심 > 끝

ⓒ 파르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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