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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수처럼-185화 (185/287)

< [45화-1] 세상의 중심 >

파르나르 장편소설

괴수처럼 23

[45화] 세상의 중심

학명: 싸우잔드(천 가지의 통수)

서식지: 공중

특징: 공기 같은 해파리

위험도: 9종 보통

비고: 전쟁의 대가

***

2,222년 이후로 완전히 죽었던 종교가 찔끔찔끔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노블레스 때문에 신이 노했다!』

인간과 괴수의 결합!

그건, 인간이 인간이길 포기한 최악의 수단으로서, 인간을 창조한 신에 대한 모독이란 내용이 주요 골자다.

그 주장을 하는 종교계 인사들 대부분이 ‘계약자의 친가족’만 아니었다면 순수한 신앙으로 받아들여졌을 텐데….

하여간 세상이 2,222년 때처럼 혼란스럽다는 건, 종교의 재등장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도시의 명운을 좌지우지하는 7종과 8종이 심심찮게 침공해온다.

빈도로 따지면 작년의 18배쯤 할 것이다.

“시간이 없군. 안도할 틈도 없고.”

괴수대응연맹 맹주 ‘아몬 헤이젤’은 짙은 피로를 느꼈다.

건강보조식품이 아니었다면 흰머리와 주름이 생겼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업무가 폭주하는 건 물론이고 하나같이 안 좋은 소식뿐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세계의 인구가 또 한 번 대폭 감소할 거란 의견이 지배적이다.

그 시범사례가 아프리카.

이집트 파라오와 수호자 이즈헬에 극단적으로 의존해온 아프리카 대륙은 이미 괴멸 직전에, 아니. 이미 인류는 패배했다.

그 넓은 대륙에 ‘대도시 카이로’ 하나만 남았다고 하면 이해가 쉬울까?

‘문제는 그게 시간문제란 점이지.’

전범국(戰犯國)으로서 국제사회에서 고립된 이집트처럼 단숨에 무너지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같은 ‘소모전’ 양상이 계속된다면 결국은 ‘신하를 전부 잃은 왕’ 이즈헬 꼴이 날 것이다.

수호자가 없는 도시.

그 결말은 일방적인 학살과 파괴뿐이다.

“맹주. 여유를 가져보는 게 어떠세요?”

“...미츠코 사스키 양. 지금은 업무 시간인 걸로 압니다만.”

연맹에서 가장 능력 좋은 연구원 겸 4종 계약자.

남자들의 성역처럼 꽉 막힌 연구소를 뚫은 여성이기도 했다.

그녀의 수호자 위치봉이 눈동자를 빠끔 거리며 맹주를 졸린 눈으로 쳐다봤다. 어째선지 남자로 취급하지 않는 태도다.

다행이지만, 이게 은근히 자존심 상한다.

“어머! 스트레스는 여자에게 독이라고요.”

남자에게도 독이다!

...라고 마음속으로 소리친 맹주의 표정은 담담했다.

표정관리가 뛰어난 것도 사실이지만, 계약자의 이마에 주름이 생기고, 피부가 푸석푸석해지는 건 치명적인 독인 까닭이다.

남자의 스트레스는 혼자 고생하고 끝.

하지만 계약자의 스트레스는 여럿 죽어난다!

“당신이 기분전환을 위해 여기 있다는 건 이해했습니다.”

“이해해주셔서 감사해요.”

“하지만 같이 쉬자는 의견에는 찬동할 수 없습니다.”

아직은 수호자의 피해에서 머무는 수준이다. 하지만 그 수호자가 다 떨어지는 순간, 인류는 무차별적인 학살을 당할 것이다.

그때는 걷잡을 수 없다.

그러니 지금, 아직 희망이 보이는 동안에 무슨 일이든 해야 했다. 가장 기대하는 부분은 역시 노블레스의 진화.

엘퍼러는….

정말 최후의 보루다.

인류의 멸종만 모면하게 해줄 수 있는 방파제라고 할까!

‘그가 죽을 경우도 상정해야 한다.’

의존하려는 버릇은 대단히 좋지 않다.

물론, 일반시민이 국가를 신뢰하고 기대는 건 나쁘지 않다. 하지만 그 국가가 단체도 아닌 개인(個人)에게 의존하는 건 대단히 문제가 있다.

개인이란?

대단히 변칙적인 존재다.

오늘 기분에 따라 얼마든지 예상과 계획을 뒤엎는다. 그리고 단체처럼 서서히 무너지는 게 아니라 뜬금없이 사라질 수 있다.

엘퍼러라고 예외가 아니다.

정말 답도 없이 강하다는 건 부정할 수 없지만, 그도 죽거나 폭주할 수 있다는 사실을 늘 염두에 둬야 한다.

수천만 목숨을 책임진 국가경영자라면 무조건!

“왕의 계약자가 어느새 다섯이네요.”

미츠코 사스키의 말대로다.

한국에 둘, 일본에 둘, 이집트에 하나.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여성 1위로 선정된 선지혜는 말할 것도 없고, 한무일은 하나의 몸으로 3인분…. 뱀페스트 왕, 하렘의 왕, 요정의 왕이다.

이집트는 늘 한결같으니 생략.

변화는 일본이었다.

몰락하는가 싶었던 일본은 ‘오니오프’와 ‘싸우잔드’라는 두 왕을 끌어들이며 단숨에 국력 2위로 뻥튀기했다.

“하지만 일본이 2위라는 건 공감할 수 없군.”

“삿포로가 독립할 조짐을 보인다는 건 들었지만…. 정말로 할까요?”

싸우잔드의 군세에 밀려 삿포로로 쫓겨난 오니오프는 계약자를 구했다.

그 추운 대지에서 태어난 러시아 혼혈 소녀와.

이제 겨우 15살이라고 하니, 오니오프의 취향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계약했다는 사실 그 자체.

맹주는 확신에 찬 어조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다. 분명히.”

오니오프가 일본 북단으로 모든 요괴를 끌고 간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왕끼리는 협력하지 않는다.

한국은 문팽이가 엘퍼러에게 굴복하면서 동맹 비슷하게 됐지만, 그건 상식이라고 볼 수 없는 정말 특수한 경우다.

엘퍼러는 이미 왕을 넘어 ‘황제’의 영역에 접어들었으니까.

같은 선상에서 보면 곤란하다.

‘정말로 혼자서 쓸어버릴 줄이야….’

일본에 서식하던 요괴의 양이나 질은 대단히 높았다.

괜히 일본열도가 세계에서 가장 괴수 밀도 높은 위험지역으로 지정된 게 아니다. 그만큼 오니오프의 추종자는 많고 강했다.

하지만!

한 남자 앞에서는 부질없었다.

요술 같은 잔재주는 일절 통하지 않고, 정면승부로도 고깃덩어리 투척 수준이다. 싸움 내내 무표정했던 엘퍼러가 처음으로 난감해 했던 때는….

시체가 너무 많아서 발 디딜 곳이 없던 순간뿐이었다.

“그런 극단적인 선택은 안 할 거예요.”

“일본 천왕이 또 이상한 짓을 하지 않는다면…. 삿포로는 자치권만 행사할 겁니다. 이상한 짓만 하지 않는다면….”

“천왕을 대단히 안 좋게 보시네요.”

“실례했습니다, 사스키 양. 당신이 일본인이란 걸 깜빡했습니다.”

과거의 천왕은 용맹하고 현명한 남자였다.

하지만 세월이란 이리도 잔인하다.

그 많은 왕비와 첩에게서 태어난 자식 중에서 사내만 유독 사냥꾼으로 활동하다가 일찍 요절한 게 우연일까.

딸과 손녀는 성인식 치르기 무섭게 일찌감치 시집 보냈다.

누가 봐도 명백하다.

왕위를 내려놓지 않으려는 수작이다.

“아무렇지도 않아요. 연맹에 가입한 순간부터 조국하고는 인연을 끊었거든요.”

“...연맹에 당신 같은 사람이 많았으면 좋으련만.”

늘 중립을 지켜야 하는 괴수대응연맹이지만, 그렇지 않다.

가재는 게 편이라지 않던가?

이 중립을 올곧게 지켜서 피 본 사람이 맹주다.

영국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여왕의 남편이었던 적도 있던 아몬 헤이젤은 영국 땅에 그림자도 비칠 수 없는 처지다.

이유는?

조국을 배신했다는 것이다.

이 남자는 영국을 편애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 ‘세계인’이었기 때문에 괴수대응연맹 맹주의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던 거지만.

“꿈도 야무지시네요.”

“...하고 싶은 말을 다 했으면 업무로 복귀해줬으면 합니다만.”

“어머! 화나셨어요?”

“화를 낼 기운조차 아껴 쓰는 몸입니다.”

대답을 회피하는 맹주에게 혀를 쏙 내밀어 보인 미츠코 사스키.

그녀는 원래 목적이었던 보고서를 맹주에게 보여줬다.

이걸 만든 건 수호자 위치봉이지만, 생각은 그녀의 머릿속에서 나왔다. 이걸 조사한다고 여간 고생한 게 아니다.

자유시간마저 헌납했을 정도니까!

“이건…!”

“영국에서 비밀리에 추진 중인 혼담이에요.”

“...이건 아무리 봐도 사스키 양의 업무가 아닙니다. 국가 간의 정략혼을 꼬치꼬치 캐고 다니는 건 학자의 소임….”

“당신 손녀의 인생이 걸린 문제를 알려줬는데도 이렇기에요?”

“......”

아몬 헤이젤의 입술이 꾹 다물어졌다.

영국을 끔찍이 사랑하던 손녀가, 8종 계약자였던 왕녀가 전투 중에 괴수의 기습을 받고 식물인간이 됐다.

그런데 그 보상이 정략혼?

실바니아 하이로드의 의사는 반영되긴커녕 통보조차 받지 못했다. 왕족으로서 혼사는 개인의 감정을 배제해야 한다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그녀는 ‘환자’ 아닌가!

영국 괴수대응본부 의무대에서 쥐죽은 듯이 ‘영원한 잠’에 빠져있다.

‘상호방위조약을 담보로 한 정략혼….’

결혼 상대는 엘퍼러였다.

바로 작년만 해도, 영국 왕실에서는 ‘카르발트’가 데릴사위로 자격이 있느니 없느니 옥신각신했었지만, 현재는 ‘감히’ 그럴 수 없었다.

이젠 우리나라 왕녀를 데려가 달라고 애원해야 할 상황!

심지어 조심스럽기까지 했다.

국혼(國婚)이 아님에도 한국 대통령을 중매쟁이처럼 끼워 넣었을 정도니 말 다했다.

“...어째서 이런 정보를 내게 준 겁니까?”

“싫으신가요?”

“그런 질문이 아님을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만.”

“같은 계약자로서 연민이라고 할까요?”

“아아, 이해했습니다.”

이해는 무슨!

미츠코 사스키는 이 남자의 가랑이를 확 차주고 싶었다.

자신이 조국을 버리면서까지 이 ‘냄새나는 사내들 소굴’인 괴수대응연맹에 있는 이유도 모르는 주제에!

그녀에게 숭고한 희생정신 같은 건 없다.

분명, 연맹에 처음 들어왔을 때는 젊었기에 그런 의욕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재는 눈곱만큼도 없다.

그저 한 남자에게 마음이 꽂혀서 못 떠나고 있을 뿐.

숫처녀인 자신처럼 숫총각이 아니라서 왠지 손해 보는 기분이지만.

‘으흥~, 의외로 가정적이란 말이지. 가산점 5점.’

수호자는 ‘이딴 원숭이가 뭐 좋다고.’라며 툴툴거리기 시작했다.

함께한 세월이 한두 해가 아니다.

안 그랬다면 계약자의 마음을 뒤숭숭하게 만든 원흉을 장기인 마법으로 제거했으리라.

하지만 그러지 않은 건?

『유대』

아빠랑 남편 중에서 누가 더 좋아?

...같은 민감한 질문을 받아도 고민하지 않고 대답할 수 있을 만큼의 신뢰, 그리고 순결을 넘어선 애정의 결정체다.

더 쉽게 말하자면 계약자와 수호자가 찰떡궁합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단시간에 위치봉의 ‘허락’이 떨어진 건 아니었다. 그리고 정작 그 사내놈이 자신을 여자로 안 본다는 것도 문제다.

꽃단장?

안 해본 것도 아니다.

단지, 효과가 없어서 때려치웠을 뿐!

“그래서 계획은 있으세요?”

“흠. 이 정략혼은 무산될 게 확실해서 걱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왕녀의 형편이 매우 위태롭다는 점이 마음에 걸립니다.”

엘퍼러는 모르겠고, 선지혜가 허락할 리 없다. 덤으로 화내지 않을까.

영국이 문팽이를 막을 수 있을 확률은?

...한없이 0에 수렴한다.

굳이 문팽이가 원정 갈 필요도 없다. 태평양에서 대기 중인 배틀씹이 ‘초장거리 알까기’만 해도 영국의 수도 ‘런던’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정략혼도….

국력(國力)이 엇비슷할 때나 성립하는 것이다.

이럴 때는, 첩(妾)이라도 한 자리 꿰차든 실패하든 그냥 바치는 게 맞다.

그래서 성공하면 대박! 아니면 말고.

‘아무래도 좀 불안하군.’

선지혜의 반응도 걱정이지만, 정략혼이 무산된 후에 ‘실바니아 하이로드’의 처우가 어떻게 될지가 대단히 신경 쓰였다.

그냥 돌아가는 구도만 봐도 알 수 있다.

왕권 다지기.

카이서스 하이로드의 왕위계승은 거의 확실시됐다.

8종 수호자 듀크마를 잃고, 본인은 식물인간이 된 왕녀보다는 그래도, 파티가 괴멸했어도 에쏘드와 사지(四肢) 멀쩡한 왕자의 인지도가 높은 건 당연했다.

그럼에도 여동생을?

아몬 헤이젤은 절로 치가 떨렸다.

(실례합니다.)

몇 번을 망설인 후에 수화기를 들었는지 모른다.

미츠코 사스키가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자신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지만, 아몬 헤이젤은 애써 무시했다.

기밀을 요구하는 ‘공적인 얘기’가 아닌 까닭이다.

상대방의 음성이 들렸다.

마음 놓고 의지하게 하는 목소리였다.

(맹주?)

(네. 접니다. 잘 지내셨습니까, 엘퍼러.)

< [45화-1] 세상의 중심 > 끝

ⓒ 파르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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