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화-4] 친위대 >
꼭 탐정놀이 같구먼?
용의자는 전혀 좁혀지지 않았지만 말이다.
무턱대고 덤빈 걸 제외하면 예의 바르게 꼬박꼬박 대답한 ‘통통한 오니오프’는 도쿄로 휙 날아갔다.
날개도 없이 훨훨.
목포까지 엘퍼러를 쫓아올 것 같았던 ‘여성형 요괴’들도 왕이 정해지자, 갈등하듯 머뭇거린 끝에 도쿄로 향했다.
만약, 이때 무일이 ‘따라와.’라고 한마디 했다면 크게 달라졌으리라.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안 그래도 들러붙은 처자가 많았던 탓이다.
“폐하를 따르게 해주세요.”
“갈 곳을 잃은 저희를 이끌어줄 왕은 당신뿐.”
“저는 사유리의 친구입니다.”
전부 고위급 요괴였다.
8종 셋에 7종 넷. 6종 이하 생략!
만용으로 덤볐다가 추종자 대부분을 잃고 ‘허수아비 왕’이 된 오니오프의 지배력으로는 품을 수 없는 도도한 여인네들이 대거 합류했다.
그래도 역시, 대표라면 8종일 것이다.
【오니오프 / 8종 소형】
비좁은 집구석에 무시무시한 아가씨들을 욱여넣는 기분이지만, 길가에 버려둬 봐야 야생괴수로 돌아갈 뿐이다.
사유리는 일단 ‘왕’이 아니니 ‘8종’으로 쳤다.
적포도주처럼 붉은 머릿결이 매력적인 20대 중반의 성숙미(成熟美)가 돋보였다. 특징이라면 역시 가르마 위로 튀어나온 앙증맞은 뿔.
그것만 빼면 계약자라고 해도 믿을 만큼 인간적인 몸매다. 음?
얼마나 고분고분 따르느냐?
알몸을 가릴 옷을 줬더니 싫은 기색 없이 얌전히 입는다.
기적이다!
【사요나락 / 8종 특수】
헤어질 때는 지옥으로 보낸다는 괴수!
다미호가 한국을 대표하는 괴수인 것처럼 ‘사요나락’은 일본에만 서식한다.
그녀는 ‘생명을 관장하는 정령’이라고도 불린다.
데빙걸이 시체를 조종하고, 프린스트가 치료해서 설득한다면?
사요나락은 되살려내서 복종시킨다!
외모는 흑발이 잘 어울리는 19세 전후의 미소녀. 하지만 성향은 극악(極惡)이다. 되살린 노예가 말을 듣지 않으면 물고문하듯 죽이고 살리길 반복한다.
그것 외에는 능력이 없다.
하지만 그 하나뿐인 능력이 사기적이고 잔인무도하다.
【도끼토끼 / 8종 소형】
일본열도를 가장 많이 파괴한 주범!
솜털이 남아있는 뽀얀 피부와 밝은 은발(銀髮)의 귀여운 외모에 속으면…. 그대로 몸이 두 동강 날 것이다.
토끼처럼 커다란 붉은 눈.
그 눈동자에서 쏘아진 ‘붉은 광선’은 무엇이든 관통하고 쪼갠다!
그렇다고 에쏘드의 ‘마기나로크’와 비교될 정도는 아니다. 쉬임프나 문팽이, 배틀씹처럼 단단한 괴수에게는 대단히 취약하기 때문이다.
약자에게 대단히 강한 괴수라고 할까….
좌에서 우로, 우에서 좌로 시선을 한 번 쓱 훑는 것만으로도 웬만한 전력은 단숨에 전멸한다고 보면 된다.
어디 그뿐이랴?
연사속도와 사정거리도 터무니없다!
막말로, 고개를 도리도리 흔드는 것만으로도 수백km 반경이 지형째 갈기갈기 찢긴다.
‘얘네들만 있으면 우주방어도 되겠네.’
‘발끈하거나 실수하면 방금까지 멀쩡했던 도시가 순식간에 사라질걸?’
‘......’
안면근육을 씰룩인 무일은 한유일의 지적을 부정 못 했다.
시체가 된 ‘근육질 오니오프’와 ‘잘생긴 오니오프’에게 생명을 줬다 뺏길 반복하며 ‘어째서 말을 안 듣는 걸까요?’라는 의문이 담긴 표정을 짓는 사요나락.
...뭔가 터무니없는 괴수를 영입한 것 같았다.
헤어지면 지옥행.
그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이승이랑 작별하면 끔찍한 운명이 펼쳐진다!
“그만 괴롭히고 포기해.”
“네. 안 그래도 짧은 부활주기로 정신이 망가져서 포기하려던 참이었어요.”
“...기존의 권속(眷屬)들은?”
“무모하게 최전장에 뛰어들어 가장 먼저 죽었어요. 부활시킬 수 없을 만큼 철저하게. 삶에 대한 애착이 없는 걸까요?”
이해할 수 없다는 사요나락.
하지만 한무일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죽고 싶었던 거겠지.’
자존심 강한 괴수라면 깔끔한 죽음을 선호하리라.
그런데 강제로 부활시켜서 복종을 강요하고, 말을 안 들으면 고문한다. 게다가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는 몸!
그야말로 ‘생지옥’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복종하던 중, 기회가 오자마자 냉큼 사지(死地)로 뛰어든 것이다. 영원한 안식을 위해.
무일은 그런 비사 대신 능력에 대해 질문했다.
“어떤 생물이든 가능한 건가?”
“네. 하지만 부활시킬 수 있는 용량(容量)이 한정되어 있어요. 너무 많아도 안 되고, 덩치가 너무 커도 힘들어요.”“흐음. 그래서?”
“인간 크기가 가장 효율적이에요.”
무일은 ‘암살당한 도깨비 왕’에 대해 생각 중이었다.
살려내서 범인을 가르쳐달라고 하면 어떨까?
“왕은 무리에요.”
“어째서?”
“그릇이 너무 커요. 제가 보유한 모든 권속을 포기해도 성공을 장담할 수 없어요.”
“아까는 권속이 없다며?”
전부 죽었다고 했다.
하지만 사요나락은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최후의 호위는 남겨뒀어요.”
아무것도 없던 공간이 일그러지더니, 연보라색 입술과 ‘마성(魔性)이 느껴지는 몸매’를 가진 농염한 미녀가 나타났다.
사내를 현혹하는 마녀(魔女)?
바로 이 여자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엘퍼러는 프로사냥꾼으로서 이 ‘괴수’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듀크마 / 8종 소형】
괴수가 사용하는 모든 종류의 마법을 다룬다는 대마법사.
여기에는 요술도 포함되어 있다. 위력이 약할 뿐.
하지만 무일이 아는 ‘영국의 듀크마’하고는 차이가 극명했다. 외모가 다를 뿐만 아니라 인형처럼 초점 없는 시선과 무표정이 섬뜩했다.
듀크마라고 확신하는 이유?
마법의 촉매제라고 불리는 이마에 박힌 투명한 보석 때문이다.
‘저 안에 미녀의 영혼을 가둬둔다고 했던가.’
그런 소름 돋는 정보야 어떻든 매우 강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8종 중에서 가장 약하다는 평가가 무색할 정도로.
그때,
사요나락의 설명이 그의 상념을 깼다.
“이 아이밖에 안 남았어요. 하지만 전투에 도움 안 되는 인간이라면 많아요. 이 세계에서 삶에 대한 집착이 가장 강한 생물.”
생명을 관장하는 정령 ‘사요나락’을 존재하게 하는 원동력.
그건 ‘살고자 하는 욕구’다.
부활시킨 권속들이 내뿜는 ‘집착’은 그녀의 양분이 된다. 그 때문에 사요나락은 ‘억울하게 죽은 미녀’들을 오랫동안 수집해왔다.
일본 각지에서 ‘평범한 인간’처럼 사는 중!
아름다운 처녀라도 계약자가 되는 건 영영 불가능하지만, 자식을 낳고 모유를 짜는 등의 생식활동에는 전혀 지장 없다.
그야말로 완전한 부활!
“헤에…. 좋은 일도 하네.”
“좋은 일?”
사요나락은 고개를 갸웃했다.
인간이 가축을 기르는 것처럼 자신도 존재하기 위해 부활시켜준 것뿐이다. 변덕에 따라서 얼마든지 죽일 수 있다.
생명공급을 끊어버리면 그걸로 끝난다.
건강이나 강함에 관계없이.
“내가 쟤보다 강한데….”
도끼토끼가 뺨을 부풀리며 불만을 토로했다.
그럴 것이다.
완전한 부활이란 사기적인 능력이 있지만, 순수한 전투력에서는 오니오프와 도끼토끼보다 한참 못 미치는 까닭이다.
권속으로 부활시킨 오니오프나 도끼토끼를 둔다고 해도 마찬가지. 공격은커녕 방어수단조차 없는 사요나락은 ‘죽이기 쉬운 표적’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엘퍼러는 한마디로 일축했다.
“얌전히 있어.”
“우우….”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생명을 관장하는 사요나락은 현재 ‘멸종위기종’이다.
정작 자신은 부활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이유는 그뿐만이 아니다.
부활의 위험성을 경계한 왕들이 ‘마녀사냥’ 하듯 집중적으로 사요나락을 박멸시킨 탓이다.
그렇게 점점 구석으로….
아시아대륙의 극동(일본)까지 몰린 사요나락은 ‘오니오프의 무관심’ 덕분에 멸종만은 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이번 ‘전쟁’으로 다 죽고 하나 남았다.
세상에 단 하나 남은 사요나락!
엘퍼러는 묘한 공감과 동정을 느꼈다.
‘괴수도 멸종할 수 있군?’
역시, 세상은 넓다!
잠깐 돌아다닌 것만으로도 새로운 사실을 배울 수 있을 정도니 말이다.
그렇게 해서….
오니오프 왕위쟁탈전이 무사히 끝난 일본은 바다 밑으로 가라앉지 않았고, 심각한 문제 대부분이 일단락된 것처럼 보였다.
엉망진창인 방어체계만 제외한다면….
통통한 오니오프가 부지런히 세력복구에 힘쓰고 있지만, 강력한 추종자가 단시간에 채워질 리 만무했다.
그런 비관적인 상황에서 ‘행운의 여신’이 일본을 도운 걸까.
혜성처럼 떠오른 계약자가 있었다.
『아이나미 산토』
변을 당하기 전까지 ‘교토의 무녀’로 불렸던 그녀의 은퇴는 기정사실이었다. 그 증거로, 사내들의 구혼(求婚)이 쇄도했었으니까.
나라가 망할 위기에 처했어도 남자의 성욕은 꺼지지 않는 모양이다.
아니, 이런 때라서 더욱 극성인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의 번식 욕구는 예상치 못한 재계약 때문에 무산됐다.
【싸우잔드 / 9종 보통】
도쿄로 진격하던 도중에 문팽이의 침공을 받고 회군한 전쟁왕!
모두가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인연’은커녕 도쿄 근처에도 못 왔던 싸우잔드가 ‘아이나미 산토’의 9종 수호자로 탈바꿈되어있는 게 아닌가!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세력이 미미한 신왕, 오니오프는 자연스럽게 외지(外地)로 밀려났다.
일본 북단의 척박한 위성도시 ‘삿포로’로.
“...나도 인연 없이 주웠으니 수상하다고 할 처지는 못 되지만.”
득의양양해진 천왕의 연설을 뉴스로 접한 무일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천왕은 폐위 직전까지 몰렸다가 ‘내가 연맹의 원조를 막은 덕분에 싸우잔드와 계약할 수 있었다!’는 식으로 바득바득 우겨서 자리를 보존할 수 있었다.
정치란 역시 어렵군?
저런 억지가 통하는 걸 보면 말이다.
정치하고는 평생 엮기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한 무일은 집구석을 쭉 훑었다.
‘...여기가 정상적인 가정집이 맞나?’
시청사를 겸하고 있으니 사유공간이라고는 할 순 없다.
하지만 공공장소로는 더욱 어울리지 않았다.
무서울 게 없는 찜질방 아줌마처럼…. 맨바닥에 벌거벗은 채로 아무렇게나 드러누워 태평하게 낮잠 자는 ‘개성적인 아가씨’들이 사방에 널렸다.
그래도 많이 나아진 편이다.
처음에는 다리도 쫙쫙 벌리고 잤었으니까!
선지혜가 군기반장처럼 돌아다니며 ‘숙녀의 몸가짐’에 대해 잔소리를 퍼붓지 않았다면 여전히 낯뜨거운 광경이 펼쳐졌으리라.
잠은 복도나 거실이 아닌 방에서 자라고...
“아저씨.”
“흠흠. 왜?”
선지혜의 따가운 시선은 버틸 수 있지만, 최은비는 아니었다.
이 어린 소녀가 ‘예쁜 언니들이 또 늘었네요.’라고 말할 때마다 단두대에 목이 철컹 떨어지는 기분이다.
애의 성격이 잘못되면 어떡하지?
양심적으로 요목조목 따져볼 것도 없이, 여자아이의 정서에 대단히 나쁜 영향을 끼칠 확률 110%의 풍기문란(風紀紊亂)한 환경이다.
죄지은 심정으로 최은비를 내려다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웃지 말고 들어주세요.”
“물론이지.”
“요즘요…. 간혹 이상한 소리가 들려요….”
“그래?”
“네.”
“...은비야, 이상해 할 것 없어. 주위에 이상한 여자들이 많으니까.”
난 또 뭐라고.
무일은 최은비가 사춘기라도 온 줄 알았다.
이 집에는 텔레파시 비슷한 능력을 쓸 수 있는 괴수가 사방에 널브러져 있다. 하나하나가 도시 하나를 지켜낼 수도, 파괴할 수도 있는 최강의 전력!
하지만 전부 이러고 있다.
전력낭비란 이걸 두고 하는 말이다.
‘하지만 이게 차라리 낫지.’
말똥말똥 깨어 있어봐야 골치 아플 뿐이다.
사리사욕(私利私慾) 없이 순수한 목적으로 ‘짝짓기’를 희망하는 추종자들이 많아서 여간 난감한 게 아니다.
다행이라면 시간개념이 매우 관대하다는 점!
멸족 직전에 몰린 ‘사요나락’조차 ‘겨울이 열 번 지나간 후에는 가능한가요?’라고 태평하게 물어볼 정도니 말 다했다.
아무튼,
최은비의 고민은 괜한 기우였다.
“남자 목소리 같았는데….”
“...그러니? 똑같은 목소리 내는 남자를 발견하면 바로 말해주렴.”
아주 분자단위로 갈아버릴 테니!
질풍노도(疾風怒濤)의 시기에 들어선 여자아이에게 장난친 죄는 절대 가볍지 않다.
음…. 사심은 없다.
다만, 장차 훌륭한 계약자로 성장할 최은비의 미래를 가로막으려는 불순분자는 조기에 싹을 뽑아버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조심해야겠군.’
엘퍼러의 딸이나 다름없는 최은비를 노리는 세력이 있을 법하다.
아직 어린 소녀에게 ‘사랑의 노래’를 바친다든가?
‘노래가 아닌 통곡으로 바꿔줘야 한다!’
‘나도 같은 생각이야.’
한유일과 한무일의 의견이 일치했다.
중국의 첩자 ‘하오 쟝’ 때문에 신세 망친 ‘홍영희’ 같은 꼴은 용납할 수 없다. 그렇다고 마냥 반대하는 고지식한 어른이 될 생각도 없다.
최은비와 결혼하고 싶다면 ‘8급 프로사냥꾼’쯤 돼야지!
원래는 ‘나를 쓰러트려라!’라고 할 생각이었지만, 눈높이를 낮췄다.
정말로 많이 봐준 거다.
(특공대장. 통화 가능하오?)
최은비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머리를 쓰다듬어줄 때였다.
...이름은 기억 안 나지만 대통령 같은데?
다른 나라도 아닌 ‘내 나라의 대통령’ 목소리와 판박이였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예의상 그 정도는 기억하고 있다.
음? 남자의 목소리라고 하니….
최은비가 들었다던 ‘남자의 목소리’가 떠오른 건 우연이려나?
(무슨 일입니까, 대통령 각하.)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혼담에 관해서 얘기하고 싶소.)
...정말로?
진지하게 서울 출장을 고민했다.
< [44화-4] 친위대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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