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처럼-183화 (183/287)

< [44화-3] 친위대 >

계약자를 찾는다고 떠들썩하게 했던 ‘도깨비 왕’의 죽음.

도쿄 방어선에 큰 구멍이 생겼다.

아니,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그 누가 일본 괴수대응본부에 머물던 9종 오니오프를 살해할 수 있단 말인가?

천왕은 ‘엘퍼러가 암살한 게 분명하다!’라고 온종일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다닌다는 모양이지만, 사람들은 그냥 정신병으로 취급했다.

암살?

암살이란, 기본적으로 정체를 숨기고 은밀히 접근해야 한다.

하지만 엘퍼러는 사생활이란 게 없다.

추적장치가 내장된 손목시계 ‘아메리카 드림워치’는 물론이고, 벌레 감시카메라 ‘모짜리나 바글버글’과 첩보위성 등이 항상 그의 위치를 확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놀랍군요. 왕이 암살당하다니.)

약해빠진 ‘인간 왕’이라면 이렇게 놀라지 않았으리라.

9종 오니오프는 타고난 왕.

추종자 없이도 충분히 8종이라고 불릴 수 있는 괴수다. 그런데 반항 한 번 못해보고 목과 허리가 절단됐다는 건….

(현재, 새로운 괴수를 의심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괴수라고 하시면?)

(뱀페스트처럼 인간의 틈에 숨어들 수 있는 괴수. 하지만 괴수마저 속일 수 있는 괴수. 그러면서도 능력은 8종 이상.)

(뭔가…. 대단히 사기적인 냄새가 나는군요.)

그런 괴수를 무슨 수로 잡는단 말인가?

암살자란 족속들이 원래 그렇지만, 그게 괴수라고 생각하니 섬뜩했다.

지금까지 세상에 알려진 괴수는 야행성은 있어도 암살만을 전문으로 했던 종은 하나도 없었던 까닭이다.

전부 아니면 전무.

이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암살 같은 번거로운 짓을 할 바에 ‘도시’를 통째로 날려버린다는 사고방식!

그것이 괴수다.

(그래서 반신반의하고 있지만, 오니오프의 죽음은 사실입니다. 그 때문에 추종자들도 혼란에 빠졌습니다.)

(왕위….)

(네. 현재, 어딘가에서 튀어나온 오니오프 넷이 권좌를 놓고 다투는 중입니다. 다행히 도시 밖에서 싸우지만, 일본열도가 가라앉을 거란 얘기가 나돌 정도로 치열합니다.)

위진 창은 영상을 보여줬다.

통통한 오니오프, 잘생긴 오니오프, 근육질 오니오프, 예쁜 오니오프. 이렇게 삼남일녀(三男一女)가 추종자들을 끌어모은 채, 죽기 살기로 ‘전쟁’을 치르는 중이었다.

산이 폭발하고 강이 증발한다.

저런 힘을 갖고 있으면서도 여태 숨어서 얌전히 지냈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강력하기 짝이 없는 신위를 보여주고 있었다.

‘여전히 괴수에 대해서는 모르는 게 많군.’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왕이 죽었던 예가 여태까지 단 한 건도 없었던 탓이다.

그렇다고 9종 괴수들이 평화주의자인 건 아니다. 그저 도시를 공격할 여력이 없어서 잠자코 있던 냉전(冷戰)에 가까웠다.

『국지전(局地戰)』

인류는 모르는 괴수들만의 땅따먹기가 꾸준히 있었다.

하지만 한쪽이 일방적으로 밀렸던 적은 없었다. 우세하다 싶으면 이웃하는 다른 왕이 뒤통수쳤기 때문이다!

물론….

영토가 없는 떠돌이 왕도 있다.

약하디약한 ‘서민적인 왕’ 대부분이 여기에 속하고, 대한민국에서는 구미호가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딱 봐도 승패가 갈린 것 같군요.)

(그렇습니다. 통통한 오니오프가 다수의 강력한 추종자를 이끌고 압도하는 중입니다.)

상인 혹은 정치인처럼 생긴 녀석이었다.

수완이 뛰어난 걸까?

남성형 요괴 대다수가 ‘통통한 오니오프’를 따르고 있었다. 그리고 ‘잘생긴 오니오프’와 ‘예쁜 오니오프’가 여성형 요괴를 반반씩 이끄는 중이었다.

마지막 남은 ‘근육질 오니오프’는?

딱 봐도 가장 강력했지만, 따르는 추종자가 거의 없었다.

혼자서 악전고투하지만, 오니오프 간의 역량은 엇비슷하기에 대세를 바꿀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도 저 정도면 제법이란 생각….

가장 먼저 죽었다.

(...형제자매인지는 모르겠지만, 가차 없군요.)

(왕위가 걸린 문제는 인간의 역사하고 다를 게 없는 것 같습니다. 이젠 셋 남았군요. 처음에는 다섯이었습니다.)

처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죽은 건 아니었다. 추종자 세력이 안 모인다는 걸 깨닫자마자 기권하고 모습을 감췄다고 한다.

권력도 전부 아니면 전무!

참으로 깔끔하고 극단적인 태도다.

(저 셋은 하나가 남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겠군요.)

(이미 결판이 난 것 같지만, 그럴 겁니다.)

잘생긴 오니오프와 예쁜 오니오프가 힘을 합쳐도 통통한 오니오프를 당해낼 수 없었다. 그만큼 전력차이가 뚜렷했다.

하지만 쉽게 끝날 ‘전쟁’도 아니었다.

근육질 오니오프는 추종자가 거의 없어서 쉽게 무너졌지만, 나머지 둘은 대단히 많았다. 그리고 자신들이 정한 ‘새로운 왕’이 죽기 전까지 절대로 항복하지 않으리라.

‘어쩔까나?’

왕위쟁탈전은 대단히 치열했다.

이미 일본열도는 지도를 새로 그려야 할 정도로 지형이 변해있었다. 화산이 아직 폭발하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다.

게다가 이 여파로 깜짝 놀란 야생괴수가 서식지를 뛰쳐나와서 무방비상태에 놓인 일본 도쿄를 공격하는 바람에 피해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었다.

도쿄의 요정 ‘유키나 미나미’가 한국에 있으니 당연했다.

만약, 이 상황에 ‘8종’이라도 등장하는 날에는 그녀가 도쿄에 있더라도 못 막으리라!

...엘퍼러의 [예측]이었다.

안 좋은 방향으로 적중률이 대단히 높은….

(가봐야 하나….)

(엘퍼러! 도쿄만으로 진격하는 9종 괴수가 포착됐습니다! 허! 전쟁왕 ‘싸우잔드’라니?! 여기에 숲의 수호신 ‘나무무’까지!)

상황은 그의 예상보다 훨씬 안 좋게 흘러갔다.

왕위쟁탈전으로 약해진 왕국의 영토를, 이웃해있는 나라의 왕들이 노리는 건 당연했다.

무일은 망설이지 않고 움직였다.

일본 정치인과 오니오프가 마음에 안 든다고 해서, 그 나라의 국민이 죽도록 방관할 만큼 그의 속은 좁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촉박했다.

(놈들의 도착까지 얼마나 걸립니까?)

(앞으로 길어야 2분입니다.)

(겨우?!)

(일본에서 뒤늦게 연맹에 구조요청을 보낸 까닭입니다. 허! 늦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타국의 원조는 필요 없다고 천왕이 버텼습니다.)

(미친…!)

절로 입에서 욕이 튀어나온 무일은 통신을 종료했다.

그리고 곧바로 선지혜에게 연락했다.

한창, 웨일풍 실내장식 삼매경 중이던 시장님은, 자초지종도 설명해주지 않고 부탁하는 선배의 요청을 흔쾌히 수락했다.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다.

(전쟁한다는 거네?)

(도쿄로 진격하는 왕들의 속도만 늦춰주면 돼.)

(그러니까, 전쟁.)

(......)

(까쓰가 직접 움직인데. 싸우잔드, 그 왕에게 대단히 유감 많았었나 봐. 나무무 쪽은…. 녀석의 숲을 폭격하면 간단한 일이고.)

태평했다.

남의 나라 문제라서 그런 게 아니었다.

안중에 없다!

이건 절대로 오만이나 만용이 아니다. 그만큼 선지혜를 따르는 수호자(추종자) 전력이 막강하다는 뜻이다.

세상에서 두 번째로 강한 계약자!

엘퍼러를 ‘에쏘드 계약자’가 아닌 ‘9종 괴수’로 취급한다면 첫 번째가 된다.

(부탁할게.)

(응.)

대답 직후였다.

문팽이는 남의 땅인 도쿄로 향하는 대신 싸우잔드의 영토로 진격했다. 방어보다는 돌격을 좋아하는 성향이 그대로 묻어난 판단이었다.

동시에, 배틀씹이 도쿄로 남하하는 나무무 군단에 무차별 폭격을 가했다. 정밀사격할 필요가 없기에 알의 숫자도 어마어마했다.

그걸로 끝.

영토확장을 위해 도쿄로 진격하던 9종 둘은 주춤하는 정도를 넘어 후퇴했다!

왕이라고 다 똑같은 왕이 아니란 증거.

배틀씹은 ‘단체’보다 강한 ‘혼자’임을 입증했다.

그 뒤에는?

“도깨비들. 싸움은 좋지 않아.”

도쿄를 간단히 지켜낸 선지혜!

무일은 그녀 덕분에 마음 편히 오니오프 왕위쟁탈전에 참견할 수 있었다.

어서 빨리 왕이 뽑히지 않으면 또 나무무와 싸우잔드가 도쿄로 진격할 것이다. 그리고 그때는 쉽게 물러서지 않으리라.

이번에는 문팽이와 배틀씹의 뜬금없는 간섭에 놀라서 빠진 것뿐이다.

다음은 사전준비를 철저하게 해서 침공할 게 분명하다.

괴수의 ‘학습’이란 그만큼 무섭다.

“맞아요. 싸움은 나빠요.”

“당신의 뜻이라면….”

“저는 처음부터 싫었어요!”

여성형 요괴들이 엘퍼러의 한마디에 우르르 이탈했다!

깜짝 놀란 ‘잘생긴 오니오프’가 대들었다가 한 방에 나가떨어졌다. 오니오프의 ‘꺼지지 않는 불꽃’만 믿고 덤볐으니 엘퍼러의 상대가 될 리 만무했다.

추종자를 전부 잃은 ‘예쁜 오니오프’는?

“아…….”

입만 벌린 채 아무 말도 못 했다.

신하들이 몽땅 배신에서 충격이 심했나?

예쁜 오니오프는 철퍼덕 주저앉더니 큰절을 올렸다.

“...뭐니?”

“소녀는 패전국(敗戰國)의 공주. 위대하신 왕께 공물로 바치오니 부디 거절하지 말아 주세요. 예뻐해 주시면 더 좋고….”

말끝을 흐리며 수줍게 뺨을 어루만진다.

사랑에 빠진 공주님이랄까?

잠자코 있던 한유일이 머릿속으로 ‘또 길에서 추종자를 주웠다!’라며 야유를 보냈지만, 엘퍼러는 가볍게 무시해줬다.

“이름은?”

“왕이 아니기에 이름이 허락되지 않아요. 하지만 지금은 왕의 소유물. 왕께서 지어주신다면 소첩(小妾)은 죽을 때까지 소중히 간직하겠습니다.”

“...원하는 이름을 말해봐.”

“감히 어찌. 왕께서 하사하신 이름이라면 무엇이든 소녀는 좋아요.”

예쁜 오니오프는 대단히 저자세였다.

큰절을 올리며 공물을 자처할 때부터 알아봤지만.

하지만 무일은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괜찮은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건, 이미 이름이 있다는 뜻이다.

그저 말하지 않고 있을 뿐.

“내가 허락할게. 네가 원하는 이름을.”

“그,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사유리.”

“사유리?”

“암컷이란 걸 자각했을 때부터 주위에서 그렇게 불렸어요.”

“일본어인가? 무슨 의미인데?”

“제가 태어나고 자란 이 나라의 언어로 ‘백합’이란 뜻입니다. 어째서 그렇게 부르는지는 여전히 모르겠지만요.”

“...앞으로도 모르는 편이 나을 것 같아.”

맞다. 모르는 편이 낫다.

백합이란 꽃 자체에는 아무런 잘못도 없다.

인간의 인식이 살짝 모났을 뿐.

“뭐, 좋아. 사유리?”

“말씀하세요.”

“왕위는?”

“오늘, 소녀는 태어난 이유와 있어야 할 자리를 찾았습니다. 더는 왕위에 집착할 필요가 없어요. 왕께서 저를 어여삐 봐주신다면….”

“노력해볼게.”

애초부터 엘퍼러는 ‘예쁜 오니오프’를 입양(?)해갈 의도로 일본에 왔다. 왕이 아니더라도 오니오프는 충분히 8종에 해당하니까.

이런 귀중한 전력을 죽도록 놔두면 꿈자리가 뒤숭숭할 것이다. 그녀의 ‘꺼지지 않는 불꽃’이라면 화력발전소 대용으로도 쓸 수 있지 않을까?

...각설하고,

당연히 왕위쟁탈전을 끝낸다는 목적도 포함되어 있다.

다만, 이놈의 ‘남성형 괴수’들은 타협과 합의라는 걸 몰랐다.

“네 녀석-! 잘도 이런 만행을!”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

“저년은 내 새끼를 낳아야 한단 말이다!

격분하며 달려드는 ‘통통한 오니오프’의 추종자들.

무일은 필살기 ‘마기나로크’로 한꺼번에 쓸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이 이상 일본열도가 부서지면 정말로 가라앉을 것 같아서 자제했다.

대신에 에쏘드를 쌍수로 들었다.

자연스럽게 ‘새로운 왕’이 될 ‘통통한 오니오프’가 구제불능이라면 사유리를 ‘여왕’으로 만들어버리면 간단할 일.

하지만 그렇지 않은 건 일본 정치에 최대한 간섭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단…. 몇이나 죽어야 정신 차리는지 확인해볼까.”

전멸할 때까지 항복하지 않고 버틴다면 이 또한 운명이리라.

엘퍼러 혼자서 일본열도에 사는 ‘남성형 요괴’의 70%쯤 사살했을 때, 통통한 오니오프가 흙바닥에 머리를 박으며 항복했다.

덤볐다가 머리 대신 뿔이 잘린 녀석은 신왕(新王)의 체면도 잊은 채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그야 당연했다.

이 일대가 추종자의 시체로 진짜 산을 이루고 있었으니까.

에쏘드 덕분에 기력(氣力)이 무한대인 엘퍼러에게 숫자는 무의미했다.

“용서해주십시오!”

“알면 당장 도쿄로 들어가라.”

도쿄? 거의 폐허가 된 도시로?

통통한 오니오프는 불만스러웠지만, 입 밖으로 말하지 못했다.

여기서 반항하면 ‘여동생’에게 왕위가 넘어갈 거란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미 자신을 따르던 추종자 대부분이 죽었다.

나머지는 저 ‘존재해선 안 되는 왕’에게 굴복하거나 경애하는 무리뿐.

달리 선택지가 없었다.

“그러겠습니다.”

“...혹시, 이전 왕의 죽음이 누구 소행인지 알아? 가령…. 왕위를 탐낸 자식 중 하나가 암살했다던가.”

“암살이라면…. 몰래 접근해서 죽이는 것 말씀입니까?”

“그래. 그거.”

“하고 싶어도 불가능합니다. 아버지는 역대 왕 중에서 가장 게으르셨지만, 그건 최강자의 여유. 저희가 한꺼번에 덤벼도 상대가 안 되는 분이셨습니다.”

통통한 오니오프의 말투에는 자부심마저 느껴졌다.

그렇게 안 강해 보였는데?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무일은 말했다.

“즉, 너희는 아니란 거네.”

“...아버지가 정말로 암살당하셨다면 그건 암컷의 소행일 겁니다. 아름다운 인간 암컷. 연약해서 사랑스러운 존재라며 늘 깔보셨지요.”

< [44화-3] 친위대 > 끝

ⓒ 파르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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