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처럼-182화 (182/287)

< [44화-2] 친위대 >

‘세상은 그대로고 말이지.’

한유일이 재미있다는 어투로 답했다.

그건 확실히 문제였다.

노블레스는 완전무장을 하고도 간신히 5종 턱걸이였고, 에쏘스트도 6종을 상대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어디까지나 평균이 그렇다는 얘기다. 당연히 출중한 인물도 있고 역으로 못난 경우도 있다.

하지만 ‘엘퍼러’ 수준으로 월등히 뛰어나지 않는다면 대세를 바꾸지 못한다.

인류는 노블레스 등장으로 강해졌다.

그런데 ‘새로운 종’은 그 이상으로 강했다!

(고위계약자의 실직률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번 정기보고는 중국 정보과였다.

부하에게 맡겨도 되지만, 정보과장 ‘위진 창’이 직접 하고 있다.

하찮아 보여도 대단히 중요한 일!

중국의 정기보고는 엘퍼러의 명령으로 하는 게 아니다. 중국 측에서 자진한 일이다. 미국에서 ‘행운의 시계’란 접점을 만들어둔 것처럼.

엘퍼러의 다음 행보를 예측, 유도할 수 있다면 그건 곧바로 국익(國益)으로 직결된다. 꼭 국가의 이득이 아니더라도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

이건 요즘처럼 정세가 불완전한 시기에는 대단한 강점이다.

(그 정도입니까?)

아무리 약해도 7종이란 강력한 신종(新種)이 등장했다고 해도, 일상생활에 변화가 없는 무일에게는 별나라 얘기처럼 들렸다.

머리로는 이해하는데 와 닿지 않는다고 할까.

영역을 두지 않고 끊임없이 이동하는 고위괴수는 재앙이나 다름없다. 특히나 전투력 측정이 가능한 7종을 넘어 8종쯤 되면….

국운(國運)을 걸어야 할 정도로 심각해진다.

(이미 영국이 당했습니다. 슈퍼-메두사에게.)

메두사!

전설에는 그 마녀의 눈동자와 마주치면 돌로 변한다고 전해진다.

대단히 끔찍한 미모를 하고 있으며, 보는 이로 하여금 공포심에 사로잡혀 ‘돌’처럼 몸을 움직이지 못한다는 게 정설이다.

하지만 정보과장이 보여준 영상에 나온 ‘슈퍼-메두사’는 공포심을 자극할 정도의 ‘여성형 괴수’가 아니었다.

도도한 양갓집 규수라고 할까?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창백한 피부와 비밀스러운 부위를 둘둘 감고 있는 긴 머리카락이 살아있는 ‘뱀처럼’ 움직인다.

그 절삭력과 움직임은 가히 사기적!

방어에 특화된 쉬임프하고는 완전히 반대되는 성향이었다.

(어째서 메두사입니까?)

(머리카락에 강력한 신경마비독이 발라져 있습니다. 닿는 정도면 괜찮지만, 스쳐서 생체기라도 생기면 ‘돌처럼’ 몸이 굳어버립니다.)

(해독까지 얼마나 걸립니까?)

(아예 안 됩니다. MID 의술로도 현재 난향을 겪고 있습니다.)

(......)

공격받은 런던은 무사했지만, 수호자 타격이 대단히 컸다.

특히, 영국은 ‘왕녀’를 잃고 말았다.

육안(肉眼)으로 파악할 수 없는 머리카락 한 올이 화살처럼 쏘아져 ‘실바니아 하이로드’의 가슴에 찔렸다.

그녀의 8종 수호자 ‘듀크마’가 걸어둔 마법 보호막도 부질없었다.

실바니아 하이로드는 쓰러졌고, 격분한 듀크마는 ‘슈퍼-메두사’에게 정면으로 무모하게 달려들었다가 갈기갈기 찢겨 죽었다.

(식물인간입니다. 왕녀뿐 아니라 많은 계약자가 당했습니다.)

수호자를 앞에 두고 계약자를 공격하는 비겁한 야생괴수는 여태 없었다.

아리따운 처녀는 ‘보석’이니까.

힘으로 빼앗을지언정 파괴하진 않는다.

물론, 고위괴수는 심미안이 높아서 ‘적당히 예쁜 처녀’는 그냥 죽여버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정말 드물다.

그런데 이번 신종들은 전혀 아니었다.

일본의 ‘슈퍼-검’이 저지른 만행처럼 계약자를 공격하는 걸 주저하지 않는다.

(그 메두사는 어떻게 됐습니까?)

(왕자의 에쏘드에 머리카락을 뭉텅이로 잃은 직후에 종적을 감췄습니다.)

(놓쳤다는 겁니까?)

무일은 눈살을 찌푸렸다.

시간만 주어지면 완벽하게 회복할 수 있는 괴수를 살려두다니!

후환을 생각해서라도 반드시 토벌했어야 했다.

(카이서스 하이로드는 에쏘스트가 아니기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전투를 보조해줄 수호자와 계약자를 너무나 많이 잃었기에 추적은 무리였습니다.)

(...평범한 용사라는 거군요.)

에쏘드 덕분에 지치지 않는다고 해도, 에쏘드 계약자가 8종 괴수처럼 빠르게 달릴 수 있는 건 아니다.

그건 에쏘스트라도 불가능하다.

끽해야 5종이니까.

엘퍼러처럼 가더발트라는 ‘증폭’이라도 없는 한, 8종을 단신으로 추적하는 건 헛걸음,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당장 영국을 지원할까?

평양에서의 만남, 생일파티 때의 만남….

꼭 실바니아 하이로드 왕녀의 안타까운 사연 때문이 아니더라도 엘퍼러의 상징처럼 돼버린 외투가 영국제품이었다.

완전히 남남으로 치부할 수 없다는 얘기.

문제라면….

이런 비극이 영국에 국한된 사건이 아니란 점이었다.

(영국은 하나의 예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프리카 전역을 지배하고 있던 이집트는 수도 카이로에서 농성 중입니다.)

(이즈헬을 보유하고도 말입니까?)

최초는 아니지만, 100년 동안 세계의 정점으로 군림해온 모래의 정령, 이즈헬. 사막에서는 쉬임프처럼 불사신이라고 한다.

그런 괴수의 왕이….

이집트를 초강대국 반열로 끌어올린 9종 수호자가 농성 중이라고?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아프리카 곳곳에 출몰한 7종과 8종의 향연에 추종자 대부분을 잃고 수도(首都) 카이로 앞까지 밀려났다고 한다.

‘사태가 생각보다 심각한 건가.’

새롭게 등장한 괴수들이 그만큼 강하다는 뜻도 되겠지만, 그보다는 아직 미확인 정보가 많다는 게 크게 적용했을 것이다.

위진 창이 들려주는 세계정세를 끝까지 경청한 무일은 무언가 대책이 필요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중국의 의도든 아니든….

인명(人命)이 걸린 문제로 이해득실을 따질 순 없다.

‘서두르지 마라, 무일. 부산의 방비가 끝나려면 아직 시간이 필요하다.’

한유일의 지적 또한 맞는 얘기다.

아직은 불완전하다.

뱀페스트 귀족으로 구성된 방어시스템은 딱히 나무랄 구석이 없다. 하지만 왕에 대한 충성은 절대적이지 않다.

게다가 ‘흡혈본능’을 억제하면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다.

뱀페스트는 수많은 여자를 노예로, 가축으로 거느리려는 본능이 있다. 그걸 제약하는 건 왕의 명령으로도 쉽지 않다.

숙주의 질도 문제다.

『범죄자』

애초부터 인간성에 하자가 있던 자들이다.

괴수의 폭력성을 억제해줘야 할 숙주가 똑같은 수준이니 근본적인 성격장애가 제대로 통제될 리 없다.

그걸 힘으로 억누르는 건 임시방편이다.

적절한 보상과 귀족 간의 상호경쟁과 견제를 부추겨야 한다. 그런 분위기를 형성하려면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하다.

전통.

그래서 역사가 깊은 왕조가 강한 것이다.

아무리 막장으로 치달아도 마지막 선을 넘지 않는다.

‘전통은 없어도 규칙을 만들 순 있지.’

‘무일. 마찬가지다. 규칙에 익숙해질 시간이 필요해.’

미소녀밖에 모르는 ‘하렘의 왕’이지만, 의외로 이쪽에 신경을 많이 썼다.

아무래도 왕위찬탈을 본인이 했었기에 경계하는 것이리라.

그런 한유일의 걱정이야 어떻든 ‘친위대’는 순조롭게 만들어지고 있었다. 범죄자로 양산된 흡혈귀들을 서울로 보내 쉬지 않고 흡혈시킨 것이다.

그렇게 열흘쯤 소화불량에 걸릴 때까지 ‘여성의 피’를 빨면 본인이 원하든 아니든 ‘5종 뱀페스트’가 된다.

거기까지 완료되면 이후에는 조심해야 한다.

그 한도를 넘어서면 ‘6종 백혈구울’이 되는 까닭이다!

“지혜. 계약자는 얼마나 확보….”

“선배가 이번에는 엉큼한 여우를 주워왔네?”

“...어쩔 수 없었어.”

한둘도 아니고 수풀에 쓰러져 있던 여왕을 줍자마자 한반도에 서식하는 다미호 종족이 통째로 딸려왔다!

그 숫자는 적게 잡아도 백.

적게 보여도 6종 이상의 다미호가 스무 마리(?)쯤 되니 결코 약한 전력은 아니다. 미확인 8종 괴수를 단숨에 잿더미로 만들었을 정도니까.

선지혜는 살짝 째려보며 말했다.

“세이랑처럼 적당히 해변에서 뒹굴 만큼 느긋한 종족은 아니니, 제대로 된 거주지를 마련해줘야겠는걸.”

“당신이 본처인가요?”

“마, 맞아! 본처!”

“서방님의 사랑을 많이 받아서 그런지 피부가 곱네요. 부러운걸요.”

“내 피부…? 다, 당연하지! 응, 당연해!”

갑자기 끼어든 구미호의 직설화법에 허둥대기 시작한 선지혜.

평소에는 똑똑하지만, 예상 밖의 단어가 나오면 머릿속이 백지장이 돼버리곤 하는 달팽이 여왕님은….

여우 같은 ‘여우 여왕님’의 화술에 말려들고 말았다.

다미호 거주지는 시청사 옆으로 결정됐다. 하지만 일부는 함께 지내는 걸로 ‘1차 여왕회담’이 마무리됐다. 여왕(9종)을 포함한 시녀(8종)와 호위(7종)만.

그냥 푼수인 줄 알았는데 속은 여우였다!

아니, 3차 세계대전 때부터 유명했던 여우 괴수니 당연한 걸지도?

‘이게 천적이란 건가.’

선지혜가 깨달았을 때는 이미, 시청사 건물구조를 완벽히 터득한 팔미호와 칠미호(七尾狐)가 방방곡곡을 누비고 있었다!

그래도 뻔뻔한 무전취식은 아니었다.

바로 이변을 깨달은 한세리와 한유나가 울상을 지은 채 달려왔을 정도니까.

“용사님! 갑자기 몰려온 여우들이 제 일감을 채갔어요!”

“귀동냥으로만 들었던 실직이란 걸 당해보니 무척 쓸쓸하네요….”

시청사라고 읽고 ‘하렘’으로 이해하면 간단한 중앙건물.

다른 이름은 황궁(皇宮).

거주자들의 주식(主食)이 제각각이라서 식당이 번잡할 걸 제외하면 겉보기에는 여자기숙사랑 흡사한 구조다.

하지만 문단속은커녕 출입구를 장식품으로 아는 ‘여성형 괴수’들 때문에 어느 복도로든 쭉 가면 밖으로 향하게 되어있다.

아무튼, 총면적이 커서 일거리도 대단히 많다.

그래서 부지런히 일하던 두 에쏘드였지만, 다미호가 ‘요술’이란 ‘만능열쇠’를 휘두르기 시작하면서 할 일이 사라졌다.

“용사님. 저, 쓸모없는 에쏘드가 됐어요. 훌쩍!”

명실공히 ‘최강의 에쏘드’로 불리는 한세리가 울먹였다.

이 소녀가 8종이다, 정말로.

세상 사람들이 상상하는 ‘도도한 정령 아가씨’란 이미지하고는 거리가 아주 멀었다. 소시민 근성마저 엿보일 정도니까.

직장상사(잘나가는 용사)나 다름없는 무일이 쓰게 웃으며 달랬다.

“걱정하지 마. 앞으로 나랑 해외출장 갈 일이 많을 테니까.”

“와아! 정말요?”

“내가 세리에게 거짓말할 이유가 없잖아.”

“기뻐요! 저, 열심히 공부할게요!”

계속 용사님에게 도움될 수 있다는 사실에 활짝 웃어 보인 한세리는 한유나의 손을 붙잡고 어디론가 떠났다.

공부라고 했으니 중앙통제실이 아닐까.

거기에 컴퓨터를 비롯한 온갖 정보가 다 모여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살짝 걱정되기도 했다.

판타이탄 ‘엑시리얼 온드미온’에게 경쟁심을 불태우느라 신경이 날카로워진 자문단을 귀찮게 안 했으면 좋으련만….

거기까지 생각한 무일은 기지개를 켰다.

딱히 피곤한 건 아니지만, 무언가 교통정리 된 기분이었던 까닭이다.

‘유일. 이렇게 추종자가 계속 늘어날 수도 있는 거야?’

‘보통은 제어할 수 있는 한계가 있지.’

왕과 신하가 동족이라면 얘기가 다르지만, 문팽이나 이즈헬처럼 종족부터 ‘타고난 왕족’은 역량이나 정책에 따라 숫자의 제한이 있다.

당연히 고위괴수일수록 자존심이 강해서 통제도 어려워진다.

그렇다면 엘퍼러는 어떨까?

9종 하나, 8종 셋, 7종 다섯, 6종 이하 생략….

아직 한계라는 걸 느껴보지 못했다.

예쁘장한 ‘여성형 괴수’를 만나는 족족 자석처럼 끌어들이는 중!

이젠 같은 ‘9종’마저 추종자로 끌어들이는 광경을 확인한 괴수대응연맹에서는 경악을 넘어 해탈의 경지에 이르렀다. 9종을 거느린 9종을 뭐라고 해야 할까?

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

『10종』

미개척영역!

막연히 상상한 무쌍의 괴수!

설마하니 이런 식으로 ‘10종’을 떠올리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말이다.

무일은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했다.

‘목포는 오니오프의 조상님이 와도 끄떡없지만, 문제는 부산인데….’

한세리에게 말했던 것처럼 해외출장을 좀 다녀야 할 것 같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소모전을 하면 인류는 필패!

끊임없이 출몰하는 야생괴수와 계약이 한정적인 수호자를 맞교환하면 오래지 않아서 사달 나고 만다.

그러니 시간을 벌어야 한다.

인류가 ‘새로운 괴수’의 정보를 수집할 수 있도록.

소위, 공략법이란 게 만들어질 때까지의 희생을 최소화해야 한다.

‘며칠만 참아라, 무일. 친위대가 곧 완성된다.’

‘그 며칠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건가!’

한무일과 한유일의 추종자에는 차이가 있다.

경애(敬愛)와 복종(服從).

근처에 한무일이 없으면 ‘여성형 괴수’들은 꼼짝하지 않는다. 주위에서 얼쩡대는 ‘혈기왕성한 수컷 원숭이’들을 안 죽인 것만으로도 할 만큼 했다는 태도!

무척 수동적인 이쪽과 반대로, 한유일이 이끄는 ‘뱀페스트 귀족’들은 능동적이다. 왕이 근처에 없더라도 ‘왕명(王命)’을 준수한다.

그것이 서민적인 왕!

타고난 왕에게 없는 명령권이다.

극단적으로 ‘반역’을 모의하기 전까지는 절대복종한다.

(엘퍼러!)

(정보과장…? 정기보고는 방금 받았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일본에서 난리가 났습니다!)

천왕이 공개적으로 자신을 비난하기라도 한 걸까?

웬만하면 그 진흙탕 싸움에 엮이고 싶지 않은 무일은 싫다는 어투로 물었다.

(또 이상한 검이라도 주웠답니까?)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오니오프가 죽었습니다! 왕이 사망했습니다!)

(...죽은 척이 아니라 정말로?)

(예! 정말로 죽었습니다!)

< [44화-2] 친위대 > 끝

ⓒ 파르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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